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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
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
Author: Jino

1화. 파혼 선언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5 09:08:23

「샹들리에 아래 잔마다 촛불이 하나씩 떠 있었다.

연주가 멎자 유리잔 부딪는 소리만 홀에 남았다.」

“노엘라 페른과의 약혼을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내겠습니다.”

클라우스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샴페인 잔을 막 쟁반에 내려놓던 참이었다.

현악기 소리가 한 줄씩 끊겼다. 마지막 첼로가 멈추자 홀이 조용해졌다.

비스 백작저의 가을 야회였다. 수도 카렌시아에서 이름 있는 집은 다 왔다. 사백 명의 눈이 홀 한가운데로 모였다. 거기 클라우스가 서 있었고, 그 앞에 내가 서 있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클라우스는 금발을 한 번 쓸어 넘겼다. 옷깃에 꽂은 꽃에서 향이 진하게 번졌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

“페른 가는 바다 냄새가 나. 우리 집과는 맞지 않아.”

누군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는 소리가 몇 군데서 새어 나왔다.

바다 냄새.

아버지는 1년 전 겨울에 돌아가셨다. 회색곶 등대의 마지막 일지를 쓰다가 쓰러지셨다. 후작이면서 등대를 직접 돌본 사람이었다. 수도 사람들은 그걸 우스갯거리로 삼았다. 나는 그 말을 오늘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약혼자의 입으로, 사백 명 앞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이 굳었다. 나는 손을 펴서 치맛자락 옆에 내려 두었다.

“알겠습니다.”

클라우스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울거나 매달릴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

나는 손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종이 두 장이 접혀 있었다. 오늘 밤 클라우스에게 보여 주려고 챙겨 온 것들이었다. 하나는 2년 전에 우리 두 집이 서명한 약혼 계약서였다.

“그럼 계약서대로 하겠습니다.”

“노엘라, 여기서 그런 걸 꺼낼 필요는…….”

“꺼낼 필요가 있습니다. 약혼은 계약이었으니까요.”

나는 계약서를 펼쳤다. 종이 접힌 자국이 촛불 아래서 하얗게 드러났다.

“제9조를 읽겠습니다.”

홀 안쪽에서 아이삭 비스 백작이 걸어 나왔다. 은발을 뒤로 넘긴 어깨 넓은 사내였다. 금 도장 반지를 낀 손이 아들의 팔꿈치를 잡았다.

“페른 영애. 여기는 야회장이오. 서류는 내일 집사들끼리 정리하면 될 일이오.”

“백작님. 파혼은 오늘 여기서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조항도 오늘 여기서 읽는 게 맞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9조. 어느 한쪽이 아래 정한 사유 없이 약혼을 깨면, 깬 쪽 가문은 상대 가문에 위약금으로 금화 300닢을 지급한다. 정한 사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 상대의 중죄. 둘, 상대 가문의 반역. 셋, 상대의 혼인 전 다른 혼약.”

나는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바다 냄새는 목록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웃음이 크게 터졌다. 아까와는 다른 쪽에서였다.

클라우스의 귀가 붉어졌다. 아이삭 백작의 반지 낀 손이 아들의 팔꿈치에서 떨어졌다.

“이 계약서는 우리 집 법률가가 쓴 것이오.”

“네. 그래서 더 정확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래에 양가 서명과 공증 도장이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나는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받지 않아도 그 서명이 자기 것이라는 건 알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내일 수도에는 페른 영애가 울면서 나갔다는 말만 남는다.’

나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아이삭 백작이 홀을 한 번 둘러봤다. 사백 명이 보고 있었다. 그중 절반은 비스 해운과 거래하는 집이었다. 그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집사. 어음 용지를 가져오게.”

집사가 은쟁반에 종이와 펜을 받쳐 왔다. 백작은 쟁반 위에서 금액을 썼다. 금화 300닢. 촛대에서 녹인 밀랍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금 도장 반지를 그 위에 눌렀다.

반지가 떨어진 자리에 비스 가의 문장이 찍혔다.

“받으시오. 이걸로 페른 가와 우리 집 사이에 남은 건 없소.”

“감사합니다.”

나는 어음을 접어 계약서 사이에 끼웠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종이가 떨리는 건 보이지 않게 가방 안에서 접었다.

*

“한 가지만 더 말해 두지.”

내가 돌아서기 전에 아이삭 백작이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영애가 집으로 돌아가면 알게 될 일이니 미리 알려 주는 거요. 회색곶 등대 말이오. 마게 노인이 이번 주로 그만둔다고 했소. 내일부터는 우리 해운 사람이 올라가 불을 켜기로 했지.”

홀이 다시 웅성거렸다.

“감독청에도 서류를 넣어 두었소. 이달 30일까지 페른 직계가 관리인으로 취임하지 않으면 관리권은 비스 해운이 맡는다. 등대국 규정 그대로요. 후작이 돌아가신 지 1년이나 비어 있었으니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지.”

그는 나를 내려다봤다.

“수도의 영애가 곶 끝 돌탑에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살 수는 없지 않소. 이게 영애를 위한 일이기도 하오.”

나는 가방 안에서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왕립 등대국의 붉은 봉인이 찍힌 종이였다. 접힌 자리를 펴자 맨 위 글자가 보였다.

[회색곶 등대 관리 임명서. 페른 후작가 직계 노엘라 페른.]

“이것도 오늘 클라우스 님께 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결혼한 뒤에 등대를 어떻게 할지 함께 정하고 싶었거든요.”

클라우스가 그 종이를 보았다. 처음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봤다.

“그게 왜 네 손에 있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겠다고 지난달에 신청했습니다. 등대국은 사흘 전에 내 주었습니다. 서명만 하면 됩니다.”

나는 집사의 쟁반에 놓인 펜을 집었다. 아이삭 백작이 어음을 쓰던 그 펜이었다. 임명서 아래 빈칸에 이름을 적었다. 노엘라 페른. 마지막 획을 길게 긋지 않았다.

“취임 마감은 이달 30일입니다. 오늘이 1일이니 넉넉합니다.”

“서명 한 줄로 등대지기가 되는 줄 아시오?”

아이삭 백작이 웃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부드럽지 않았다.

“회색곶은 불이 자주 늦는다는 민원이 해운에 쌓여 있소. 영애가 곶에 닿기도 전에 우리 사람이 불을 켜면, 감독청은 누가 등대를 지켰다고 적겠소?”

그 말에 홀이 조용해졌다.

나는 대답 대신 홀 구석을 봤다.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사람이 있었다.

창가 기둥 옆에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깎았고 키가 컸다. 모두가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데 그 사람만 빈손이었다. 아니, 손에 든 게 있었다. 황동 주머니 시계였다.

그는 뚜껑을 열었다. 안을 보았다. 닫았다. 잠시 뒤 다시 열었다.

이 소동을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시계 안을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내가 임명서를 펼쳤을 때, 그 손이 한 번 멈췄다. 뚜껑을 열어 둔 채로.

‘몇 시를 보는 걸까.’

나는 시선을 거두고 아이삭 백작을 다시 봤다.

“백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불을 먼저 켜는 사람이 등대를 지킨 사람입니다.”

“그럼 알아들었구려.”

“네. 그래서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임명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장갑을 벗어 쟁반 위에 올려 두었다. 춤출 일은 이제 없었다.

“노엘라.”

클라우스가 불렀다. 나는 돌아보았다.

“지금 곶으로 간다고? 이 밤에? 마차로 밤새 달려야 하는 길이야.”

“네. 그래서 지금 가야 합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렌즈는 그을음투성이고 노인 하나가 투덜거리는 돌탑이야. 너는 사흘도 못 버텨.”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마감은 30일이니까요.”

클라우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이삭 백작이 아들의 어깨를 짚었다. 반지가 촛불을 받아 번쩍였다.

“해운 사람에게는 내일 일몰에 맞춰 올라가라고 일러 두었소. 영애가 그보다 늦으면, 그 불은 우리 불이오.”

사백 명이 숨을 죽였다. 누군가의 잔에서 거품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쥐고 돌아섰다.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창가 기둥 옆을 지날 때 군복 남자는 시계를 손바닥에 올려 둔 채 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백작저 앞 계단은 마차 등불로 환했다.

내가 타고 온 마차는 줄 맨 끝에 서 있었다. 마부가 나를 보더니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곤란했다.

“아가씨, 칼메 쪽으로는 못 갑니다.”

“삯은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삯 문제가 아닙니다. 방금 백작저 집사가 나와서 말을 돌렸습니다. 오늘 밤 칼메로 가는 마차는 비스 해운 일을 다시는 못 받는다고요.”

나는 계단 아래 마차 줄을 훑어보았다. 마부들이 하나같이 내 눈을 피했다. 수도의 마차 절반이 비스 해운 짐을 날랐다. 아이삭 백작은 홀을 나서기도 전에 이것까지 해 두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클라우스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거봐. 오늘은 그냥 집에 가.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 줄게. 우리 해운 사람이 불을 켜도 등대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없어지는 건 아니지요. 남의 것이 될 뿐이에요.”

나는 대답하고 길 건너를 봤다.

백작저 담장 끝, 가로등 아래에 짐수레 하나가 서 있었다. 비린내가 여기까지 났다. 칼메 항에서 새벽 생선을 싣고 올라와 빈 궤짝을 싣고 내려가는 수레였다. 마부는 궤짝에 기대 빵을 씹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길을 건넜다. 클라우스가 따라오다가 수레 앞에서 멈췄다. 비린내 때문이었다.

“칼메로 내려가십니까?”

수레 마부가 빵을 삼키고 나를 위아래로 봤다. 야회복에 진주 귀걸이를 한 여자가 생선 수레 앞에 서 있었다.

“내려가긴 하는데요. 아가씨가 탈 자리는 없습니다. 궤짝 위뿐이에요.”

“궤짝 위면 됩니다. 회색곶 갈림길까지만 태워 주세요. 해 뜨기 전에 닿아야 합니다.”

“삯은요?”

가방에는 은화 몇 닢이 전부였다. 어음은 은행이 열려야 돈이 된다. 나는 귀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가 남긴 진주 귀걸이였다. 열두 살 때부터 이 귀걸이만큼은 팔지 않았다.

나는 한 짝을 빼서 마부 손바닥에 놓았다.

“나머지 한 짝은 갈림길에 닿으면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진주를 가로등에 비춰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는 궤짝 하나를 끌어 내려 자리를 만들었다.

“노엘라. 너 정말 생선 수레를 타고 가겠다고?”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계단 위 손님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궤짝을 딛고 수레에 올랐다. 치맛자락에 젖은 소금기가 배어들었다. 차가웠다.

“네. 바다 냄새 나는 가문이라서요.”

클라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계단 위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부채 몇 개가 한꺼번에 펼쳐졌다.

그때 계단 꼭대기에 군복 남자가 나와 섰다. 홀에서 본 그 사람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다. 손에 든 시계 뚜껑을 열어 두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수레의 등불이 그 시계 유리에 비쳤다.

클라우스가 수레 바퀴를 손으로 짚었다.

“후회할 거야. 회색곶은 네가 생각하는 곳이 아니야.”

“생각한 곳인지 아닌지는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마부가 고삐를 쥐었다. 말이 콧김을 뿜었다.

나는 궤짝 위에서 몸을 돌려 백작저를 보았다. 클라우스, 계단 위의 손님들, 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삭 백작의 넓은 어깨. 그리고 계단 꼭대기의 군복 남자.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일 해 지기 전에, 그 등대에 불을 켜겠습니다.”

수레가 덜컹 움직였다. 계단 꼭대기에서 짧은 쇳소리가 났다. 군복 남자가 시계 뚜껑을 닫았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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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즈를 돈 빛이 유리 벽에 푸르게 번졌다.아래에서 타는 심지 소리가 낮게 올라왔다.」마게는 렌즈 아래에 놓인 청소포를 펴고 있었다.한쪽 끝이 접혀 있었다. 마게는 손끝으로 천을 밀어 접힌 자리를 바로잡았다. 모서리를 맞춘 뒤 손바닥으로 눌렀다.나는 렌즈를 살피다 그를 돌아봤다.“그건 제가 할게요.”“됐소, 관리인님. 손이 아직 움직일 때 해 두면 되오.”“천을 개키는 일은 손가락이 불편하잖아요.”“불편하다고 못 하는 건 아니오.”마게는 청소포를 한 번 더 가지런히 접었다. 오른손 장갑의 손가락 끝에서 반쪽만 남은 가운뎃손가락이 보였다.“렌즈는 괜찮습니까?”“괜찮아요. 닦인 자리도 깨끗하고요.”“그러면 됐소.”마게는 천을 들어 빛에 비춰 봤다. 가느다란 먼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천을 다시 펼쳐 먼지를 털었다. 손목에 힘을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만 잡았다.“마게 씨.”“말씀하시오.”“아까 하신 말, 정말로 등대국에 직접 알리실 생각이에요?”그는 청소포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가지런히 접어 선반 위에 올렸다. 천의 모서리가 선반 끝과 나란했다.“그렇소.”“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실 수 있어요.”“바꾸지 않겠소.”“청문에서 이미 말씀하셨잖아요.”“내가 한 일과, 내가 숨긴 일은 따로 적어야 하오.”나는 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유리 벽을 지나갔다. 마게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제가 켈러 감사관님께 말씀드릴게요.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달라고요.”“그럴 필요 없소.”“마게 씨가 혼자 가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등대국에 알릴 내용은 정확해야 해요.”“그래서 관리인님께 말하는 거요.”마게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봤다.“그날 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왜 입을 다물었는지. 빠뜨리지 않고 말하겠소.”“마게 씨가 받은 지시도요?”“그것도 말하겠소.”“그리고 그 지시를 따랐다는 것도요.”“그것도.”마게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접은 청소포 위에

  • 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   75화. 겨울 휴가

    「눈발이 해안 돌담에 붙었다가 바람에 떨어졌다.등대의 불은 낮빛에 가려졌고, 곶 아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그 말은 일지에 적어도 되겠네요.”내가 대답하자 유리안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어떤 말입니까?”“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는 말이요.”“적으셔도 됩니다.”“오늘은 밤이 아닌데요.”“오늘 밤에도 켜질 겁니다.”유리안은 그렇게 말한 뒤 눈밭을 내려다봤다. 그 앞에 쌓인 눈은 아직 눈사람 모양이 아니었다. 도리가 바닥에 굴린 눈덩이가 두 팔 사이에 들어갈 만큼 커져 있었다.“유리안, 불을 확인하러 오신 거예요?”“오늘은 눈사람을 만들러 왔습니다.”“제독님이 눈사람을요?”도리가 눈덩이를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그렇습니다.”“눈사람 만들어 본 적 있어요?”“없습니다.”“그럼 제가 알려 드릴게요. 여기서 더 굴리면 돼요.”도리는 손바닥으로 눈덩이 옆을 밀었다. 눈이 뭉친 면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도리의 구멍 난 장화가 눈 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졌다. 발자국마다 눈이 부서졌다.“손이 시리지 않습니까?”유리안이 물었다.“조금요. 그래도 이건 거의 다 됐어요.”“장갑을 쓰십시오.”“장갑 끼면 잘 안 굴러가요.”“손이 얼면 멈춰야 합니다.”“그럴게요.”도리는 대답은 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게가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관리인님, 저 아이는 손이 시린 줄도 잊었소.”“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했어요.”“조금만 더가 길어지는 법이지.”마게는 장갑을 낀 손으로 눈덩이의 기울어진 곳을 눌렀다. 반쪽인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장갑 끝에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다져 둥근 면을 고쳤다.“이쪽은 낮춰야겠소. 위에 얹을 눈덩이가 기울겠구려.”“제가 밀다가 한쪽을 많이 눌렀어요.”“다시 굴리면 됩니다.”도리가 눈덩이 뒤로 돌아가려 하자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잠깐. 아래쪽은 바위에 걸렸어. 그쪽 말고 이쪽으로 굴리자.”“여기요?”“응. 셋이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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