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 바다는 회색이었다.
곶 꼭대기의 꺼진 등대가 하늘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생선 수레는 회색곶 갈림길에서 나를 내려 주었다.
밤새 궤짝 위에서 흔들린 탓에 다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남은 진주 한 짝을 마부에게 건넸다. 마부는 진주를 받고 모자를 살짝 들었다.
“아가씨, 등대는 저 오르막 끝입니다. 노인네가 사나우니 조심하십쇼.”
수레가 칼메 항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치마를 걷어 쥐고 오르막을 올랐다.
곶 꼭대기에 흰 돌탑이 서 있었다. 회색곶 등대. 높이 31m.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다.
탑 아래 관리실 문 앞에 노인 하나가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흰 수염에 등이 굽은 사람이었다. 오른손에 낀 가죽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뎃손가락 자리가 반쪽에서 끊겨 있었다.
마게 올든. 아버지 편지에 몇 번 나오던 이름이었다.
“길 잃은 거면 내려가시오.”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노엘라 페른입니다. 오늘부터 이 등대 관리인입니다.”
나는 임명서를 펼쳐 보였다. 마게는 종이를 보지 않고 내 치맛자락을 봤다. 소금물에 젖어 허옇게 얼룩진 야회복이었다.
“후작 나리 딸이구먼.”
“네.”
“그 옷으로 계단 142칸을 오르겠다고?”
“옷은 갈아입겠습니다. 계단은 오르겠습니다.”
마게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관리실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
관리실에는 아버지의 작업복이 아직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잉크병은 말라 바닥에 검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앉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나무가 차가웠다.
마게가 문간에 기대 서서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아가씨는 등대 불을 몇 번이나 켜 봤소?”
“아버지 옆에서 여러 번 봤습니다.”
“본 거 말고. 켜 본 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소. 렌즈 한 번 안 닦아 본 손으로 오늘 저녁까지 불을 켜겠다니. 해운 사람이 오면 그냥 열쇠를 넘기시오. 그게 덜 창피하오.”
“창피한 건 제가 정하겠습니다.”
마게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문간에서 몸을 뗐다. 마당으로 나가며 장갑 낀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그 손을 오래 문질렀다.
나는 그 옷을 입고 소매를 3번 접었다. 밤색 머리를 끈으로 묶었다. 허리에는 아버지의 놋쇠 열쇠 꾸러미를 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늘 치마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열쇠였다. 모두 7개.
계단은 돌았다. 돌고, 또 돌았다. 142칸째에서 렌즈실 문이 나왔다. 세 번째 열쇠가 맞았다.
문을 열자 숨이 막혔다.
렌즈가 검었다. 겹렌즈 유리 면마다 그을음이 두껍게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쓸자 검은 가루가 묻어났다. 이 렌즈로는 불을 켜도 빛이 바다까지 나가지 못했다.
“요 몇 달은 내 눈이 침침해서 못 닦았소.”
마게가 계단 아래에서 말했다.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불은 꼬박꼬박 켰소. 어젯밤이 마지막이었지만.”
나는 렌즈를 한 바퀴 돌며 그을음을 살폈다. 유리 면이 수십 장이었다. 오늘 일몰은 저녁 7시 4분. 아버지 일지에 적힌 9월 초 일몰 시각이었다.
해 지기 전까지 다 닦아야 했다.
“닦을 천과 식초가 어디 있습니까?”
“창고 맨 아래 칸.”
나는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142칸. 그리고 천과 식초를 들고 또 142칸을 올랐다. 두 번째로 올라왔을 때는 허벅지가 떨렸다. 밤새 생선 궤짝 위에서 흔들린 다리였다. 나는 렌즈 받침대를 붙잡고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서 있었다. 오래 서 있을 시간도 없었다.
렌즈 받침대 아래를 닦다가 손이 멈췄다. 바닥에 놋쇠 판이 하나 박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판 가운데 열쇠 구멍이 있었다.
나는 꾸러미의 열쇠를 하나씩 꽂아 보았다. 하나. 둘. 일곱까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이 등대의 문과 창고와 서랍은 모두 7개의 열쇠로 열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구멍은 여덟 번째였다.
나는 판을 손톱으로 두드려 보았다.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지금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열쇠를 다시 허리에 걸고 렌즈 앞으로 돌아갔다.
*
해가 중천을 넘을 무렵, 계단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올라왔다.
마른 소년 하나가 문간에 섰다. 얼굴이 햇볕에 그을렸고, 앞머리가 눈을 덮었다. 장화 앞코에 구멍이 나 있었다.
“마게 할아버지가 올라가 보래요. 새 관리인님이 혼자 렌즈를 다 닦는다고요.”
“너는 누구니?”
“도리요. 곶 아래 살아요. 할아버지 심부름하고 기름 나르는 거 해요.”
도리는 렌즈를 한 번 보고 혀를 찼다. 그러더니 말없이 품에 손을 넣었다. 꺼낸 건 빵이었다. 반으로 찢은 빵 한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젯밤 야회장에서 샴페인 한 모금 마신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고마워.”
도리는 대답 없이 천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렌즈 아래쪽 면부터 닦기 시작했다. 손이 빨랐다. 그을음을 식초로 불리고 마른 천으로 훔치는 순서를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심부름이라면서 왜 렌즈까지 닦아?”
“오늘 불 안 켜지면 해운 사람이 켠다면서요. 그 사람들은 기름 나르는 애들한테 삯을 반만 줘요.”
도리는 그 말만 하고 다시 렌즈로 고개를 돌렸다. 구멍 난 장화 앞코로 받침대 모서리를 디디고 위쪽 면까지 팔을 뻗었다.
우리는 말없이 닦았다.
창밖의 해가 조금씩 기울었다. 바다 빛이 회색에서 푸른색으로, 다시 금색으로 바뀌었다.
오후 늦게 마당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나는 창으로 내려다봤다. 짐마차에 기름통이 실려 있었다. 통마다 비스 해운의 검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마부석에서 사내 하나가 내렸다.
나는 렌즈 천을 도리에게 맡기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사내는 관리실 문 앞에서 마게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백작님이 일몰에 맞춰 불을 켜라 하셨소. 노인장은 이제 쉬시오.”
“그 불은 제가 켭니다.”
내가 문 앞에 섰다. 사내가 나를 훑어보았다. 아버지 작업복에 그을음이 묻은 얼굴이었다.
“아, 그 영애. 정말 왔구려.”
“임명서입니다. 어젯밤 서명했습니다. 이 등대의 관리인은 저입니다. 관리인이 있는 등대에 다른 사람이 불을 켜면 그건 규정 위반입니다.”
사내는 임명서를 한참 보았다. 글자를 다 읽는 눈은 아니었다. 붉은 봉인을 보는 눈이었다.
“좋소. 그럼 나는 아래서 보겠소. 일몰이 몇 시인지는 나도 아오. 백작님께는 본 대로 전하겠소.”
“그럼 이 기름은 어쩌겠소? 이번 달 납품분이오. 회색곶 기름은 우리 해운이 대 왔소.”
나는 짐마차의 통을 봤다. 아버지 일지에도 비스 해운 납품이라는 줄이 있었다. 계약이 살아 있는 한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창고에 내려 주세요. 통 수를 세고 받았다는 표를 써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통을 굴려 창고에 넣었다. 나는 문 옆에 서서 하나씩 셌다. 수령표에 통 수를 적고 이름을 썼다. 사내가 표를 받아 들고 웃었다.
“글씨는 또박또박하시구려. 불도 그렇게 켜는지 봅시다.”
사내는 빈 마차를 마당 끝으로 빼서 세우고, 거기 걸터앉았다.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지켜보겠다는 거구나.’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
6시 반이 넘었을 때 렌즈의 마지막 면이 남았다.
도리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내 손바닥은 식초에 불어 쭈글쭈글했다. 창밖의 해는 수평선 위 한 뼘에 걸려 있었다.
“관리인님, 기름을 올려야 해요. 지금 안 올리면 늦어요.”
“네가 기름을 올려. 나는 이 면을 끝낼게.”
도리가 기름관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가 꿈쩍하지 않았다. 녹이 슬어 있었다.
“안 돌아가요!”
나는 천을 내려놓고 손잡이를 잡았다. 두 손으로 돌려도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 껍질이 쓸려 따끔했다. 나는 작업복 자락을 감아 다시 쥐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해가 수평선에 닿았다. 해의 아랫단이 바다에 잠기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고함이 올라왔다. 비스 해운 사내였다.
“7시 4분이오! 해 졌소, 영애!”
도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에 손잡이를 한 번 더 돌렸다.
계단 아래에서 느린 발소리가 올라왔다. 한 칸씩, 무릎을 짚는 소리와 함께.
마게였다.
노인은 렌즈실 문턱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말없이 다가와 장갑 낀 오른손으로 손잡이 아래 나사를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반쪽짜리 손가락이 나사 머리를 정확히 짚었다. 그러고 손잡이를 돌렸다.
기름이 관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심지가 말랐소. 끝을 이만큼 잘라야 불이 붙소.”
마게가 가위를 내밀었다. 나는 받아서 심지 끝을 잘랐다. 손이 떨려서 한 번에 잘리지 않았다. 두 번째에 잘렸다.
나는 렌즈의 마지막 면을 한 번 더 훔쳤다. 그리고 성냥을 그었다.
불이 붙었다.
렌즈가 빛을 모았다. 깨끗해진 유리 면을 따라 흰빛이 한 줄로 모여 바다로 뻗었다. 렌즈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12초에 한 바퀴. 긴 빛 한 번이 수면 위를 쓸고 지나갔다.
도리가 창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켜졌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7시 15분.
해는 이미 바다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11분이 늦었다.
창 아래 마당 끝에서 비스 해운 사내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는 등대를 한 번 올려다보고 마차에 올랐다. 바퀴 소리가 곶 아래로 멀어졌다.
나는 그을음 묻은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손바닥 쓸린 자리가 쓰라렸다.
마게는 불이 붙은 심지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마디도 없이 돌아섰다. 무릎을 짚으며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갔다. 장갑 낀 손이 난간을 쓸고 지나갔다.
도리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늦었어요. 그래도 해운 사람이 켠 건 아니에요.”
“응. 늦었어. 늦은 건 늦었다고 적어야지.”
“그런 것도 적어요?”
“아버지는 다 적으셨어.”
늦었다. 그래도 불은 내 손으로 켰다.
그때였다.
먼 바다에서 경적이 길게 울렸다. 상선의 짧은 뱃고동이 아니었다. 낮고 길게 끄는 소리. 군함이었다.
도리가 창에서 얼굴을 뗐다.
“군함이 등대 보고 신호한 거예요. 불 들어왔다고요.”
경적이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아래에서 다른 소리가 올라왔다. 마게의 느린 걸음이 아니었다. 무겁고 일정한 군화 소리였다. 한 칸도 쉬지 않고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 중간쯤에서 마게의 느린 발소리가 멎었다. 노인이 벽 쪽으로 비켜서는 소리가 났다. 군화 소리는 노인을 지나 계속 올라왔다.
도리가 내 작업복 소매를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떼지 않았다. 대신 성냥갑을 주머니에 넣고 렌즈 앞에 똑바로 섰다. 그을음 묻은 얼굴을 닦을 시간은 없었다.
군화 소리가 렌즈실 바로 아래에서 멈췄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돌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불이 켜진 건 일몰 후 11분입니다.”
(2화 끝)
「저녁빛이 렌즈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창틀을 스친 바람에 유리가 낮게 울렸다.」3월 5일 목요일, 해가 수평선 위로 한 뼘쯤 남아 있었다.나는 관리실 책상에서 일지를 펼쳤다. 사흘 전 장이 먼저 펼쳐졌다. 3월 2일. 안개종 아래에서 일지에 오늘 날짜를 가장 크게 적겠다고 했다. 그 칸의 날짜는 정말로 다른 날보다 두 배는 컸다. 도리가 그걸 보고 한참 웃었다.나는 장을 넘겨 오늘 날짜를 먼저 썼다. 그 아래는 비워 두었다. 불이 켜진 뒤에 쓸 칸이었다.도리가 책상 모서리에 턱을 괴고 있었다. 칼메 학교 교복 소매에 잉크 자국이 번져 있었다. 학교에서 곧장 비탈을 뛰어 올라온 얼굴이었다.“누나, 나 오늘 증인 서명하는 거 맞지?”“맞아.”“그럼 지금 연습해도 돼?”“연습은 종이에 해. 일지에 하지 말고.”도리가 공책 뒷장을 찢어 제 이름을 썼다. 9월에 오두막 탁자에서 처음 쓴 이름이었다. 그때는 첫 획에 종이가 찢어질 뻔했다. 지금은 반에서 둘째 가는 글씨였다. 도리는 그 이름 아래에 증인이라고 덧붙여 쓰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한 번 더 썼다.관리실 문이 열렸다. 마게가 들어왔다. 등대 안내인 완장이 팔에 매여 있었다. 오늘 오후에도 칼메에서 올라온 손님들에게 렌즈실 계단을 안내했다고 했다.“아가씨. 손님은 다 내려보냈소. 오늘 저녁 렌즈실은 비었소.”“고맙습니다, 마게 씨.”“고마울 거 없소. 오늘은 남이 올라가 있으면 안 되지.”노인은 그 말만 하고 우물가로 나갔다. 장갑 낀 왼손으로 두레박 줄을 잡았다. 오른손 장갑은 2월부터 내 서랍에 있었다. 노인은 이제 오른손을 맨손으로 내놓고 다녔다.마당에서 군화 소리가 났다.*유리안이 문간에 섰다.항로 확인관 제복 위에 겨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왼쪽 어깨를 움직일 때 옷감이 조금 당겨졌다. 프레야호의 흉터가 있는 자리였다. 그는 문턱을 넘기 전에 시계를 꺼냈다.“17시 51분입니다. 일몰까지 아직 남았습니다.”“그럼 지금 올라가면 되겠네요.”유리안은 대답 대신 시
「안개종 줄이 낮게 떨렸다.탑 아래에 모인 등불은 안개 속에서 하나씩 빛났다.」나는 유리안 앞에 섰다. 안개가 부두 끝을 덮고 있어 등대도 항구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에서는 젖은 나무판이 조금씩 삐걱거렸다.유리안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외투 끝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손은 주머니에 넣지 않고 옆으로 내린 채였다.“일찍 오셨네요.”“노엘라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그는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발밑의 나무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저도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요.”“다행입니다.”그는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평소처럼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뒤에 말을 잇지 않았다.나는 유리안의 손을 살폈다. 손가락이 조금 굽어 있었다. 시계를 만질 때처럼 주머니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어젯밤에 하시려던 말씀이 있잖아요.”“그렇습니다.”“아침에 말씀하겠다고 하셨고요.”“기억하고 있습니다.”나는 그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유리안은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그럼 들을게요.”유리안은 안개종 탑의 기둥을 한 번 바라봤다. 낡은 줄에 물이 배어 어둡게 보였다. 새 줄을 달았을 때처럼 팽팽하게 매여 있었지만, 바람이 스치자 줄 끝이 작게 흔들렸다.“여기서 말씀하실 건가요?”“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왜 안개종 아래죠?”“노엘라가 이곳을 좋아합니다.”“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안개가 낀 날, 종소리가 부두 끝에서 멀어지는 걸 오래 들으셨습니다.”나는 그 말을 기억해 내려 했다. 안개종 줄을 달던 날이었는지, 그보다 앞이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그걸 기억하셨어요?”“네.”유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도 곧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췄다.“유리안.”“네.”“말을 고르는 중인가요?”“그렇습니다.”“천천히 하셔도 돼요.”“천천히 하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잠깐 제복 옆선을 스쳤다.“그럼 짧게 말씀하세요.”“그렇게 하겠습니다.
「렌즈를 돈 빛이 바다에 닿았다.멀리 안개종 탑 아래에서 등불 하나가 켜졌다.」나는 일지를 펼쳐 둔 채 연필을 굴렸다.[2월 26일 목요일. 일몰 뒤 점등 확인. 바람은 약하고 안개는 없음.]마지막 글자에 점을 찍고도 손을 멈추지 못했다. 오늘 적을 일은 끝났다. 그런데 일지를 덮으면 손이 남았다.나는 등대 꼭대기 창가에 서서 안개종 탑을 바라봤다. 먼 곳에 켜진 등불이 하나 더 늘었다. 그 아래로 작은 그림자들이 오갔다.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왔다. 꽃 냄새가 날 리는 없었다. 그래도 창밖의 소란을 듣자 입가가 먼저 풀렸다.가벼운 금속음이 들렸다. 잠시 뒤 웃음소리가 아주 작게 번졌다.나는 일지 위에 연필을 내려놓았다.“도리겠지.”누가 대답할 리 없었다. 나는 창가에 가까이 섰다.안개종 탑의 난간에 누군가 등을 걸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는 다른 사람이 몸을 숙여 무언가를 들었다. 키 작은 그림자가 그 둘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도리였다.그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향했다. 멀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리가 한 손을 입에 대는 건 보였다. 검지를 입술 앞에 세우고, 손바닥을 작게 흔들었다.쉿.소리는 닿지 않았어도 뜻은 분명했다.나는 두 손을 들고 창문에서 물러났다. 그다음에야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림자 하나가 도리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도리는 급히 몸을 움츠리고 다시 입에 손을 댔다. 이번에는 더 크게 입술을 움직였다.쉿, 누나.“알았어.”나는 창문을 닫았다.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일지로 돌아와 연필을 들었다. 오늘 기록 아래에 빈칸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연필 끝을 대고 있다가, 짧게 적었다.[창밖에서 등불을 확인함.]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누가 등불을 달았는지는 쓰지 않았다.*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올라왔다.나는 일지 표지를 덮지 않았다. 발소리는 일정했다. 한 칸씩 올라오다 잠깐 멈추고, 다시 이어졌다.유리안은 꼭대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복 소매에 바깥의 찬 공기가 묻어 있었다. 그는
「왕립 등대국 지부 창에 푸른 불이 비쳤다.복도 끝에서 종이 울리고, 안쪽 방에서 잉크 냄새가 났다.」나는 낡은 일지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모서리가 닳은 표지 위로 손가락이 닿았다. 몇 번이나 펼쳤던 자리가 얇아져 있었다. 일지 안쪽에는 아버지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표지를 덮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켈러 감사관이 내 앞에 섰다. 회색 잉크 만년필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준비되셨습니까, 감독관 지명자?”“네.”“임명 절차가 시작되면 제안서의 조건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답을 바꾸셔도 됩니다.”“이미 답을 드렸어요.”“본부를 회색곶에 두겠다는 조건 말입니까?”“네. 등대와 현장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켈러는 내 손에 든 일지를 바라봤다.“이 일지를 임명식에 가지고 들어가실 겁니까?”“네.”“공식 문서로 제출하는 것은 아닙니다.”“알고 있어요. 제출할 기록은 따로 준비했어요.”나는 팔 안쪽에 끼워 둔 서류를 확인했다. 임명 제안에 대한 답변과 관리 업무의 정리 문서였다. 접힌 자리가 생기지 않도록 종이 끝을 맞췄다.켈러가 서류를 받으려다 손을 멈췄다.“직접 들고 들어가시겠습니까?”“네. 제가 답한 문서니까요.”“좋습니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방 안쪽의 서기가 문을 열었다. 긴 탁자와 의자가 보였다. 탁자 위에는 임명장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소라 껍데기 문양이 새겨진 인장이 놓여 있었다.나는 문턱 앞에서 잠시 멈췄다.켈러가 낮게 물었다.“괜찮으십니까?”“네.”“손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나는 일지를 조금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이 표지를 누르고 있었다. 힘을 풀었지만 일지는 놓지 않았다.“이걸 들고 있어야 말이 잘 나와요.”“그렇다면 그대로 가지고 계십시오.”“감사관님은 어디에 앉으세요?”“보증인석입니다.”“감사관님이 제 보증인이 되시는군요.”“저는 지부에 제출된 기록과 조사 결과를 보증합니다.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그렇게 해 주시면 돼요.”켈러는 만년필을 손에 고쳐 쥐
「렌즈를 돈 빛이 유리 벽에 푸르게 번졌다.아래에서 타는 심지 소리가 낮게 올라왔다.」마게는 렌즈 아래에 놓인 청소포를 펴고 있었다.한쪽 끝이 접혀 있었다. 마게는 손끝으로 천을 밀어 접힌 자리를 바로잡았다. 모서리를 맞춘 뒤 손바닥으로 눌렀다.나는 렌즈를 살피다 그를 돌아봤다.“그건 제가 할게요.”“됐소, 관리인님. 손이 아직 움직일 때 해 두면 되오.”“천을 개키는 일은 손가락이 불편하잖아요.”“불편하다고 못 하는 건 아니오.”마게는 청소포를 한 번 더 가지런히 접었다. 오른손 장갑의 손가락 끝에서 반쪽만 남은 가운뎃손가락이 보였다.“렌즈는 괜찮습니까?”“괜찮아요. 닦인 자리도 깨끗하고요.”“그러면 됐소.”마게는 천을 들어 빛에 비춰 봤다. 가느다란 먼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천을 다시 펼쳐 먼지를 털었다. 손목에 힘을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만 잡았다.“마게 씨.”“말씀하시오.”“아까 하신 말, 정말로 등대국에 직접 알리실 생각이에요?”그는 청소포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가지런히 접어 선반 위에 올렸다. 천의 모서리가 선반 끝과 나란했다.“그렇소.”“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실 수 있어요.”“바꾸지 않겠소.”“청문에서 이미 말씀하셨잖아요.”“내가 한 일과, 내가 숨긴 일은 따로 적어야 하오.”나는 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유리 벽을 지나갔다. 마게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제가 켈러 감사관님께 말씀드릴게요.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달라고요.”“그럴 필요 없소.”“마게 씨가 혼자 가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등대국에 알릴 내용은 정확해야 해요.”“그래서 관리인님께 말하는 거요.”마게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봤다.“그날 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왜 입을 다물었는지. 빠뜨리지 않고 말하겠소.”“마게 씨가 받은 지시도요?”“그것도 말하겠소.”“그리고 그 지시를 따랐다는 것도요.”“그것도.”마게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접은 청소포 위에
「눈발이 해안 돌담에 붙었다가 바람에 떨어졌다.등대의 불은 낮빛에 가려졌고, 곶 아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그 말은 일지에 적어도 되겠네요.”내가 대답하자 유리안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어떤 말입니까?”“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는 말이요.”“적으셔도 됩니다.”“오늘은 밤이 아닌데요.”“오늘 밤에도 켜질 겁니다.”유리안은 그렇게 말한 뒤 눈밭을 내려다봤다. 그 앞에 쌓인 눈은 아직 눈사람 모양이 아니었다. 도리가 바닥에 굴린 눈덩이가 두 팔 사이에 들어갈 만큼 커져 있었다.“유리안, 불을 확인하러 오신 거예요?”“오늘은 눈사람을 만들러 왔습니다.”“제독님이 눈사람을요?”도리가 눈덩이를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그렇습니다.”“눈사람 만들어 본 적 있어요?”“없습니다.”“그럼 제가 알려 드릴게요. 여기서 더 굴리면 돼요.”도리는 손바닥으로 눈덩이 옆을 밀었다. 눈이 뭉친 면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도리의 구멍 난 장화가 눈 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졌다. 발자국마다 눈이 부서졌다.“손이 시리지 않습니까?”유리안이 물었다.“조금요. 그래도 이건 거의 다 됐어요.”“장갑을 쓰십시오.”“장갑 끼면 잘 안 굴러가요.”“손이 얼면 멈춰야 합니다.”“그럴게요.”도리는 대답은 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게가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관리인님, 저 아이는 손이 시린 줄도 잊었소.”“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했어요.”“조금만 더가 길어지는 법이지.”마게는 장갑을 낀 손으로 눈덩이의 기울어진 곳을 눌렀다. 반쪽인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장갑 끝에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다져 둥근 면을 고쳤다.“이쪽은 낮춰야겠소. 위에 얹을 눈덩이가 기울겠구려.”“제가 밀다가 한쪽을 많이 눌렀어요.”“다시 굴리면 됩니다.”도리가 눈덩이 뒤로 돌아가려 하자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잠깐. 아래쪽은 바위에 걸렸어. 그쪽 말고 이쪽으로 굴리자.”“여기요?”“응. 셋이 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