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렌즈를 지난 빛이 바다로 나가다 중간에서 흐려졌다.
흰빛이어야 할 끝자락이 누렇게 풀려 있었다.」
“관리인님, 불이 노래요.”
도리가 렌즈실 창에 코를 붙이고 말했다.
9월 4일 저녁이었다. 나는 일몰 시각에 맞춰 불을 켰다. 어제도 그랬다. 이틀 연속 일지에 늦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렌즈는 아침마다 닦았다. 그런데 오늘은 빛이 달랐다.
나는 창으로 다가갔다. 렌즈가 한 바퀴 돌며 긴 빛을 바다로 보냈다. 빛줄기가 곶 앞 암초 쪽으로 뻗다가 중간에서 힘이 빠졌다. 암초 위에 떠 있는 부표가 보이지 않았다. 사흘 전, 처음 불을 켠 밤에는 그 부표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심지를 봐 줄래?”
도리가 렌즈 받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금방 고개를 내밀었다.
“심지는 멀쩡해요. 끝도 어제 잘랐고요. 그런데 불꽃이 얇아요. 자꾸 파르르 떨어요.”
나는 렌즈 유리에 손등을 댔다. 그을음은 없었다. 아침에 닦은 그대로였다.
렌즈가 깨끗하고 심지가 멀쩡한데 불이 약했다. 남은 건 하나였다.
“기름이야.”
*
기름 창고는 관리실 바닥 아래에 있었다. 나무 뚜껑을 들어 올리면 돌계단이 지하로 이어졌다. 저장 탱크 하나와 기름통 여러 개가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이틀 전 비스 해운 사내가 굴려 넣은 통들이었다. 통마다 검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나는 등잔을 선반에 올리고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관리인님, 뭐 찾아요?”
“아버지가 쓰시던 시험 병.”
아버지는 새 기름이 오면 늘 시험을 하셨다. 나는 어릴 때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숫자를 함께 셌다. 병을 기울이고, 기름이 병 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세는 시험이었다. 좋은 기름은 진해서 천천히 흘렀다. 물이 섞이면 빨리 흘렀다.
선반 맨 아래 칸에 작은 유리병 두 개가 엎어져 있었다. 그 옆에 마개를 밀랍으로 봉한 병이 하나 있었다. 병에 붙은 종이에 아버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기준 기름. 은화 4닢짜리. 열지 말 것. 시험용.]
손가락으로 그 글씨를 한 번 쓸었다. 종이가 바래 있었다. 밀랍은 그대로였다.
“도리, 숫자 셀 줄 알지?”
“백까지는요.”
“그럼 충분해. 내가 기울이면 세어 줘. 소리 내서, 일정하게.”
나는 밀랍을 칼끝으로 걷어 냈다. 기준 기름을 빈 시험 병에 따랐다. 짙은 호박색이었다. 병을 손바닥 위에 눕히고 천천히 기울였다.
“하나, 둘, 셋…….”
기름이 병 목으로 느리게 밀려 나왔다. 실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도리의 목소리가 지하 창고 돌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마지막 방울이 떨어졌다.
“30셈.”
나는 쪽지에 적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병을 탱크 꼭지 아래에 댔다. 꼭지를 열자 기름이 쏟아졌다. 색이 옅었다. 등잔에 비춰 보니 바닥 쪽이 뿌옇게 흐렸다.
방금 그대로 기울였다.
“하나, 둘, 셋, 넷…….”
도리의 목소리가 빨라지지 않았다. 기름이 빨랐다. 병 목에서 졸졸 흘러내렸다.
“……열하나, 열둘.”
병이 비었다.
도리가 입을 벌린 채 나를 봤다.
“12셈이요. 반도 안 돼요.”
“응. 반도 안 돼.”
나는 그 숫자를 30 아래에 적었다.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 보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기름이 반이면 빛도 반이었다. 오늘 밤 부표가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통 하나만 더 해 보자. 탱크가 아니라 새 통에서.”
나는 비스 해운 통 하나의 마개를 비틀어 열었다.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13셈. 또 다른 통. 12셈.
“여기 기름은 어디서 와?”
내가 묻자 도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여긴 비스 해운 통만 와요. 제가 기름 나른 뒤로 다른 통은 본 적 없어요.”
“일단 오늘 밤부터 버티자. 위로 올라가.”
나는 빈 양동이와 국자를 들었다. 탱크 뚜껑을 열고 등잔을 비췄다. 기름 위쪽은 맑았고 아래로 갈수록 탁했다. 물은 무거워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말이었다.
나는 국자로 위쪽 기름만 살살 떠서 양동이에 담았다. 바닥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손목에 힘을 줬다. 국자가 탱크 벽에 닿을 때마다 탁한 물이 피어올랐다. 그러면 멈추고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양동이 절반을 채우는 데 한참 걸렸다.
도리가 양동이를 받아 들고 계단을 올랐다. 142칸이었다. 아이는 두 번 쉬었다. 나는 뒤에서 양동이 바닥을 받쳤다.
렌즈실에서 기름관의 낡은 기름을 빼냈다. 걸러 낸 기름을 새로 붓고 심지를 다시 잘랐다. 불꽃이 잠깐 줄었다가 다시 올라왔다. 아까보다 굵었다. 떨림도 덜했다.
도리가 창에 달라붙었다.
“보여요! 부표 보여요. 희미하게요.”
렌즈가 돌았다. 빛이 암초 쪽으로 뻗었다. 끝자락이 아까보다 조금 멀리 나갔다. 부표가 아주 잠깐 반짝였다가 꺼졌다.
나는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땀이 흘렀다. 이 정도로는 오래 못 버틴다는 걸 알았다. 탱크 위쪽 기름은 이틀 치도 안 됐다.
*
나는 일지를 다시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남은 통 수를 세어 두기 위해서였다.
창고 바닥에 기름이 몇 방울 떨어져 있었다. 도리가 그 위를 밟고 섰다.
나는 그 발을 내려다보았다. 장화 앞코의 구멍으로 양말이 보였다. 기름이 구멍으로 스며들어 양말 끝이 검게 젖어 들고 있었다. 도리는 그걸 모르는지,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지 쪽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장화를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등잔을 들어 아이 발밑을 비추지 않게 옆으로 옮겼다.
나는 남은 통 수를 일지 뒷장에 적었다. 비스 해운 낙인이 찍힌 통이 몇 개, 그중 마개를 연 통이 몇 개. 열지 않은 통에도 그 기름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열지 않은 통은 열지 않았다고 적었다.
“관리인님, 이거 일지에 써요?”
“써야지. 오늘 불이 약했다는 것도, 기름이 12셈이었다는 것도.”
“그럼 비스 해운이 화내지 않아요?”
“화를 낼 수는 있겠지. 그래도 숫자는 안 바뀌어.”
계단 위에서 나무 뚜껑이 삐걱 열렸다. 마게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잔 불빛이 노인의 흰 수염에 걸렸다.
“밤에 지하에서 뭘 하오.”
“기름을 시험했습니다. 비스 해운 기름이 12셈입니다. 아버지가 남긴 기준 기름은 30셈이고요.”
마게의 눈이 쪽지로 갔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든 아버지의 병으로 갔다. 노인의 장갑 낀 오른손이 계단 난간을 쥐었다.
“그 시험, 후작 나리가 하던 거로군.”
“네.”
“그만두시오.”
목소리가 낮았다.
“기름이 묽다고 떠들어 봐야 소용없소. 곶에 들어오는 건 다 그 집 배로 들어오오. 그 집 눈 밖에 나면 기름은커녕 소금 한 줌도 안 올라오오.”
“그럼 지금까지 이 기름으로 불을 켜셨습니까?”
마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갑 낀 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오래 문질렀다.
“선반에 있는 마게 씨 일지를 봤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점등 시각은 빠짐없이 적으셨더군요. 그런데 기름 시험 기록은 한 줄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통이 들어올 때마다 적으셨는데요.”
“내 일지를 뒤졌소?”
“관리인이 등대 일지를 읽는 건 뒤지는 게 아닙니다.”
노인의 턱수염이 움찔했다.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마게는 화를 내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장갑의 끊긴 손가락 끝을 엄지로 눌렀다.
“나는 시키는 대로 켰소. 아가씨도 그렇게 하시오. 그게 오래 사는 길이오.”
노인은 뚜껑을 닫지 않고 돌아섰다. 발소리가 관리실 문밖으로 멀어졌다.
나는 쪽지를 접어 쥐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도리가 내 옆에서 작게 말했다.
“할아버지, 원래는 안 저랬대요. 엄마가 그랬어요. 예전엔 곶 아래 애들한테 매듭도 가르쳐 주고 그랬대요.”
“언제부터 저러셨는데?”
“몰라요. 제가 기억할 때부터 저랬어요.”
도리는 기름에 젖은 양말 끝을 그제야 내려다봤다. 장화를 벗어 거꾸로 들고 탁탁 털었다. 기름 몇 방울이 돌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신었다.
‘시키는 대로. 누가 시켰다는 걸까.’
*
관리실로 올라오자 창밖에 사람이 서 있었다.
관리실 앞마당, 우물가였다. 등대 빛이 지나갈 때마다 군복 어깨가 드러났다가 어둠에 묻혔다. 하그 제독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오늘은 계단을 오르지 않으셨네요.”
“21시 3분에 곶 아래 길에서 불을 봤습니다. 빛이 암초 부표에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가 아니라 창고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짐작하고 온 사람이었다.
“칼메로 들어온 어선 한 척이 부두에서 말했습니다. 회색곶 불이 오늘 밤 반쪽이라고.”
“반쪽이 맞습니다.”
나는 쪽지를 펼쳐 보였다. 30, 12, 13, 12. 제독은 쪽지를 받아 들지 않고 내 손에 든 채로 읽었다.
“병을 기울여 흐르는 시간을 셌습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기준 기름이 30셈. 비스 해운이 이틀 전 넣은 기름이 12셈입니다. 납품서에는 한 통에 은화 2닢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제값 기름은 4닢이고요. 싼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물입니까.”
“등잔에 비추면 바닥이 뿌옇습니다. 물이 섞였습니다.”
제독은 창고 뚜껑 쪽을 보았다. 뚜껑 틈으로 기름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함대 창고에 기름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 08시에 한 통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받지 않겠습니다.”
내 대답이 너무 빨랐는지, 제독이 나를 다시 보았다.
“군이 기름을 대면, 이 등대는 군 기름으로 켜진 등대가 됩니다. 30일에 감독청이 그걸 물으면 저는 답할 말이 없습니다. 페른 가는 혼자 불을 켜지 못해서 해군에 기댔다고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직접 사겠습니다. 제 돈으로요.”
제독은 더 권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손을 뒤로 모았다.
“오늘 밤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1시 40분에 다시 보니 빛이 조금 돌아와 있었습니다.”
“탱크 위쪽 기름만 떠서 심지에 댔습니다. 물은 바닥으로 가라앉으니까요. 하지만 이틀도 못 갑니다.”
“그다음은.”
나는 대답하기 전에 일지를 펼쳤다. 오늘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제독이 보는 앞이었다.
[9월 4일. 불빛 약함. 암초 부표 보이지 않음. 기름 시험, 기준 기름 30셈, 비스 해운 납품 기름 12셈. 탱크 위쪽 기름을 걸러 씀.]
펜을 내려놓았다. 제독은 그 줄을 읽었다. 이번에는 아래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펜에 손도 대지 않았다. 첫날 밤에는 자기가 본 것을 적었다. 오늘 줄은 내가 찾아낸 숫자였다. 그는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쪽지를 다시 접었다. 아버지 병을 선반 위, 일지 옆에 세워 두었다. 밀랍을 걷어 낸 마개가 등잔 불빛에 반들거렸다.
마게의 말이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곶에 들어오는 건 다 그 집 배로 들어온다. 시키는 대로 하라.
나는 제독을 똑바로 봤다. 목소리가 저절로 또박또박해졌다.
“……이 기름을 누가 섞었는지는 몰라도, 누가 파는지는 압니다.”
(4화 끝)
「저녁빛이 렌즈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다.창틀을 스친 바람에 유리가 낮게 울렸다.」3월 5일 목요일, 해가 수평선 위로 한 뼘쯤 남아 있었다.나는 관리실 책상에서 일지를 펼쳤다. 사흘 전 장이 먼저 펼쳐졌다. 3월 2일. 안개종 아래에서 일지에 오늘 날짜를 가장 크게 적겠다고 했다. 그 칸의 날짜는 정말로 다른 날보다 두 배는 컸다. 도리가 그걸 보고 한참 웃었다.나는 장을 넘겨 오늘 날짜를 먼저 썼다. 그 아래는 비워 두었다. 불이 켜진 뒤에 쓸 칸이었다.도리가 책상 모서리에 턱을 괴고 있었다. 칼메 학교 교복 소매에 잉크 자국이 번져 있었다. 학교에서 곧장 비탈을 뛰어 올라온 얼굴이었다.“누나, 나 오늘 증인 서명하는 거 맞지?”“맞아.”“그럼 지금 연습해도 돼?”“연습은 종이에 해. 일지에 하지 말고.”도리가 공책 뒷장을 찢어 제 이름을 썼다. 9월에 오두막 탁자에서 처음 쓴 이름이었다. 그때는 첫 획에 종이가 찢어질 뻔했다. 지금은 반에서 둘째 가는 글씨였다. 도리는 그 이름 아래에 증인이라고 덧붙여 쓰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한 번 더 썼다.관리실 문이 열렸다. 마게가 들어왔다. 등대 안내인 완장이 팔에 매여 있었다. 오늘 오후에도 칼메에서 올라온 손님들에게 렌즈실 계단을 안내했다고 했다.“아가씨. 손님은 다 내려보냈소. 오늘 저녁 렌즈실은 비었소.”“고맙습니다, 마게 씨.”“고마울 거 없소. 오늘은 남이 올라가 있으면 안 되지.”노인은 그 말만 하고 우물가로 나갔다. 장갑 낀 왼손으로 두레박 줄을 잡았다. 오른손 장갑은 2월부터 내 서랍에 있었다. 노인은 이제 오른손을 맨손으로 내놓고 다녔다.마당에서 군화 소리가 났다.*유리안이 문간에 섰다.항로 확인관 제복 위에 겨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왼쪽 어깨를 움직일 때 옷감이 조금 당겨졌다. 프레야호의 흉터가 있는 자리였다. 그는 문턱을 넘기 전에 시계를 꺼냈다.“17시 51분입니다. 일몰까지 아직 남았습니다.”“그럼 지금 올라가면 되겠네요.”유리안은 대답 대신 시
「안개종 줄이 낮게 떨렸다.탑 아래에 모인 등불은 안개 속에서 하나씩 빛났다.」나는 유리안 앞에 섰다. 안개가 부두 끝을 덮고 있어 등대도 항구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에서는 젖은 나무판이 조금씩 삐걱거렸다.유리안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외투 끝에는 물기가 맺혀 있었다. 손은 주머니에 넣지 않고 옆으로 내린 채였다.“일찍 오셨네요.”“노엘라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그는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발밑의 나무판에서 시선을 거두었다.“저도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어요.”“다행입니다.”그는 말을 마치고 나를 보았다. 평소처럼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뒤에 말을 잇지 않았다.나는 유리안의 손을 살폈다. 손가락이 조금 굽어 있었다. 시계를 만질 때처럼 주머니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어젯밤에 하시려던 말씀이 있잖아요.”“그렇습니다.”“아침에 말씀하겠다고 하셨고요.”“기억하고 있습니다.”나는 그가 말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유리안은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그럼 들을게요.”유리안은 안개종 탑의 기둥을 한 번 바라봤다. 낡은 줄에 물이 배어 어둡게 보였다. 새 줄을 달았을 때처럼 팽팽하게 매여 있었지만, 바람이 스치자 줄 끝이 작게 흔들렸다.“여기서 말씀하실 건가요?”“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왜 안개종 아래죠?”“노엘라가 이곳을 좋아합니다.”“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안개가 낀 날, 종소리가 부두 끝에서 멀어지는 걸 오래 들으셨습니다.”나는 그 말을 기억해 내려 했다. 안개종 줄을 달던 날이었는지, 그보다 앞이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그걸 기억하셨어요?”“네.”유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도 곧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가 멈췄다.“유리안.”“네.”“말을 고르는 중인가요?”“그렇습니다.”“천천히 하셔도 돼요.”“천천히 하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나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잠깐 제복 옆선을 스쳤다.“그럼 짧게 말씀하세요.”“그렇게 하겠습니다.
「렌즈를 돈 빛이 바다에 닿았다.멀리 안개종 탑 아래에서 등불 하나가 켜졌다.」나는 일지를 펼쳐 둔 채 연필을 굴렸다.[2월 26일 목요일. 일몰 뒤 점등 확인. 바람은 약하고 안개는 없음.]마지막 글자에 점을 찍고도 손을 멈추지 못했다. 오늘 적을 일은 끝났다. 그런데 일지를 덮으면 손이 남았다.나는 등대 꼭대기 창가에 서서 안개종 탑을 바라봤다. 먼 곳에 켜진 등불이 하나 더 늘었다. 그 아래로 작은 그림자들이 오갔다.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왔다. 꽃 냄새가 날 리는 없었다. 그래도 창밖의 소란을 듣자 입가가 먼저 풀렸다.가벼운 금속음이 들렸다. 잠시 뒤 웃음소리가 아주 작게 번졌다.나는 일지 위에 연필을 내려놓았다.“도리겠지.”누가 대답할 리 없었다. 나는 창가에 가까이 섰다.안개종 탑의 난간에 누군가 등을 걸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는 다른 사람이 몸을 숙여 무언가를 들었다. 키 작은 그림자가 그 둘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도리였다.그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향했다. 멀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리가 한 손을 입에 대는 건 보였다. 검지를 입술 앞에 세우고, 손바닥을 작게 흔들었다.쉿.소리는 닿지 않았어도 뜻은 분명했다.나는 두 손을 들고 창문에서 물러났다. 그다음에야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림자 하나가 도리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도리는 급히 몸을 움츠리고 다시 입에 손을 댔다. 이번에는 더 크게 입술을 움직였다.쉿, 누나.“알았어.”나는 창문을 닫았다.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일지로 돌아와 연필을 들었다. 오늘 기록 아래에 빈칸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연필 끝을 대고 있다가, 짧게 적었다.[창밖에서 등불을 확인함.]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누가 등불을 달았는지는 쓰지 않았다.*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올라왔다.나는 일지 표지를 덮지 않았다. 발소리는 일정했다. 한 칸씩 올라오다 잠깐 멈추고, 다시 이어졌다.유리안은 꼭대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복 소매에 바깥의 찬 공기가 묻어 있었다. 그는
「왕립 등대국 지부 창에 푸른 불이 비쳤다.복도 끝에서 종이 울리고, 안쪽 방에서 잉크 냄새가 났다.」나는 낡은 일지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모서리가 닳은 표지 위로 손가락이 닿았다. 몇 번이나 펼쳤던 자리가 얇아져 있었다. 일지 안쪽에는 아버지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표지를 덮은 채 손을 떼지 않았다.켈러 감사관이 내 앞에 섰다. 회색 잉크 만년필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준비되셨습니까, 감독관 지명자?”“네.”“임명 절차가 시작되면 제안서의 조건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답을 바꾸셔도 됩니다.”“이미 답을 드렸어요.”“본부를 회색곶에 두겠다는 조건 말입니까?”“네. 등대와 현장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켈러는 내 손에 든 일지를 바라봤다.“이 일지를 임명식에 가지고 들어가실 겁니까?”“네.”“공식 문서로 제출하는 것은 아닙니다.”“알고 있어요. 제출할 기록은 따로 준비했어요.”나는 팔 안쪽에 끼워 둔 서류를 확인했다. 임명 제안에 대한 답변과 관리 업무의 정리 문서였다. 접힌 자리가 생기지 않도록 종이 끝을 맞췄다.켈러가 서류를 받으려다 손을 멈췄다.“직접 들고 들어가시겠습니까?”“네. 제가 답한 문서니까요.”“좋습니다.”그가 고개를 돌리자 방 안쪽의 서기가 문을 열었다. 긴 탁자와 의자가 보였다. 탁자 위에는 임명장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소라 껍데기 문양이 새겨진 인장이 놓여 있었다.나는 문턱 앞에서 잠시 멈췄다.켈러가 낮게 물었다.“괜찮으십니까?”“네.”“손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나는 일지를 조금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이 표지를 누르고 있었다. 힘을 풀었지만 일지는 놓지 않았다.“이걸 들고 있어야 말이 잘 나와요.”“그렇다면 그대로 가지고 계십시오.”“감사관님은 어디에 앉으세요?”“보증인석입니다.”“감사관님이 제 보증인이 되시는군요.”“저는 지부에 제출된 기록과 조사 결과를 보증합니다.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그렇게 해 주시면 돼요.”켈러는 만년필을 손에 고쳐 쥐
「렌즈를 돈 빛이 유리 벽에 푸르게 번졌다.아래에서 타는 심지 소리가 낮게 올라왔다.」마게는 렌즈 아래에 놓인 청소포를 펴고 있었다.한쪽 끝이 접혀 있었다. 마게는 손끝으로 천을 밀어 접힌 자리를 바로잡았다. 모서리를 맞춘 뒤 손바닥으로 눌렀다.나는 렌즈를 살피다 그를 돌아봤다.“그건 제가 할게요.”“됐소, 관리인님. 손이 아직 움직일 때 해 두면 되오.”“천을 개키는 일은 손가락이 불편하잖아요.”“불편하다고 못 하는 건 아니오.”마게는 청소포를 한 번 더 가지런히 접었다. 오른손 장갑의 손가락 끝에서 반쪽만 남은 가운뎃손가락이 보였다.“렌즈는 괜찮습니까?”“괜찮아요. 닦인 자리도 깨끗하고요.”“그러면 됐소.”마게는 천을 들어 빛에 비춰 봤다. 가느다란 먼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천을 다시 펼쳐 먼지를 털었다. 손목에 힘을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만 잡았다.“마게 씨.”“말씀하시오.”“아까 하신 말, 정말로 등대국에 직접 알리실 생각이에요?”그는 청소포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가지런히 접어 선반 위에 올렸다. 천의 모서리가 선반 끝과 나란했다.“그렇소.”“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실 수 있어요.”“바꾸지 않겠소.”“청문에서 이미 말씀하셨잖아요.”“내가 한 일과, 내가 숨긴 일은 따로 적어야 하오.”나는 렌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유리 벽을 지나갔다. 마게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제가 켈러 감사관님께 말씀드릴게요.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달라고요.”“그럴 필요 없소.”“마게 씨가 혼자 가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등대국에 알릴 내용은 정확해야 해요.”“그래서 관리인님께 말하는 거요.”마게는 장갑 낀 손을 내려다봤다.“그날 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왜 입을 다물었는지. 빠뜨리지 않고 말하겠소.”“마게 씨가 받은 지시도요?”“그것도 말하겠소.”“그리고 그 지시를 따랐다는 것도요.”“그것도.”마게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접은 청소포 위에
「눈발이 해안 돌담에 붙었다가 바람에 떨어졌다.등대의 불은 낮빛에 가려졌고, 곶 아래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그 말은 일지에 적어도 되겠네요.”내가 대답하자 유리안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어떤 말입니까?”“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는 말이요.”“적으셔도 됩니다.”“오늘은 밤이 아닌데요.”“오늘 밤에도 켜질 겁니다.”유리안은 그렇게 말한 뒤 눈밭을 내려다봤다. 그 앞에 쌓인 눈은 아직 눈사람 모양이 아니었다. 도리가 바닥에 굴린 눈덩이가 두 팔 사이에 들어갈 만큼 커져 있었다.“유리안, 불을 확인하러 오신 거예요?”“오늘은 눈사람을 만들러 왔습니다.”“제독님이 눈사람을요?”도리가 눈덩이를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그렇습니다.”“눈사람 만들어 본 적 있어요?”“없습니다.”“그럼 제가 알려 드릴게요. 여기서 더 굴리면 돼요.”도리는 손바닥으로 눈덩이 옆을 밀었다. 눈이 뭉친 면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도리의 구멍 난 장화가 눈 속으로 들어갔다가 빠졌다. 발자국마다 눈이 부서졌다.“손이 시리지 않습니까?”유리안이 물었다.“조금요. 그래도 이건 거의 다 됐어요.”“장갑을 쓰십시오.”“장갑 끼면 잘 안 굴러가요.”“손이 얼면 멈춰야 합니다.”“그럴게요.”도리는 대답은 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게가 그 모습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관리인님, 저 아이는 손이 시린 줄도 잊었소.”“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했어요.”“조금만 더가 길어지는 법이지.”마게는 장갑을 낀 손으로 눈덩이의 기울어진 곳을 눌렀다. 반쪽인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장갑 끝에서 드러나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눈을 다져 둥근 면을 고쳤다.“이쪽은 낮춰야겠소. 위에 얹을 눈덩이가 기울겠구려.”“제가 밀다가 한쪽을 많이 눌렀어요.”“다시 굴리면 됩니다.”도리가 눈덩이 뒤로 돌아가려 하자 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잠깐. 아래쪽은 바위에 걸렸어. 그쪽 말고 이쪽으로 굴리자.”“여기요?”“응. 셋이 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