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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모연미
"죄송합니다."

송연화의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등만큼은 꼿꼿하게 세웠다. 무릎을 꿇고도 굽히지 않겠다는 고집이 역력했다.

서재헌은 그런 송연화를 내려다보았다.

여윈 몸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모습은 더없이 가냘프고 연약했다. 그런데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기세가 느껴졌다.

북방 변경에 있을 때 서재헌이 가장 좋아했던 모습이 바로 이런 강인함이었다. 그 모습을 다시 보자 그의 얼굴에도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기색이 번졌다.

그 순간 낮은 부름이 들려왔다.

"폐하."

서재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송유란의 붉어진 눈가를 보자 방금 일었던 감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북방 변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지금 송연화가 송유란을 괴롭힌 것은 큰 잘못이었다.

무릎을 꿇려 사과하게 한 것은 작은 훈계에 불과했다. 송연화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었다.

마음을 굳힌 서재헌은 송유란을 몇 마디 달랜 뒤 태후에게 다가가 예를 올렸다. 송연화는 아예 없는 사람처럼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본 송유란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서재헌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여전히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송연화 같은 여인이 몇 명 더 나타나도 소용없었다.

그 시각 송연화의 정신은 온통 무릎의 통증에 쏠려 있었다.

찻잔 조각에 찔린 상처는 두 번째로 무릎을 꿇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요동치는 통증이 아랫배까지 이어졌다. 쥐어짜듯 아파 오자 미간이 깊이 좁혀지고 입술은 저도 모르게 굳게 다물렸다.

그때 태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까 봄맞이 궁중 연회 이야기만 하느라 중요한 일을 하나 잊고 있었구나."

서재헌이 물었다.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황후의 인장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후에게 쏠렸다.

송유란은 입을 반쯤 가린 채 기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태후의 생각을 짐작한 것이다.

황후의 인장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돌아올 터였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태후가 말을 이었다.

"유란이가 봄맞이 궁중 연회를 주관하려면 황후의 인장을 가지고 있어야 궁인들을 부리기 수월할 게다. 황제는 어찌 생각하느냐?"

송연화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주위 상황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시야를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선명하게 느꼈다. 재고 또 속을 헤아리는 시선들이었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을 생각하자 송연화의 가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먼저 연회 일을 빌미로 자신을 짓누르더니, 이제는 황후의 인장까지 요구했다.

한 겹 한 겹 덫을 놓은 것처럼 오늘의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문득 빗속에서 들었던 말이 귓가에 떠올랐다. 팔자가 사납다는 말.

송연화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에 남은 것은 자조뿐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앞날을 마련해 주는 송유란과 비교하면 자신은 분명 박복했다.

서글픔과 분노.

온갖 감정이 뒤엉키자 송연화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서재헌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마음에 망설임이 일었다.

'황제에 오른 뒤부터 황후의 인장은 줄곧 송연화에게 맡겨 두었다. 이렇게 서둘러 빼앗는 것은 송연화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더구나 송유란은 아직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생각에 서재헌이 손을 내저었다.

"급히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어마마마께서 계시니 유란이 궁인들을 부리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후가 끊었다.

"연회가 끝나면 유란이도 입궁할 게다. 황후의 인장을 맡겨 미리 익히게 하면 되지 않느냐? 더구나 내가 늘 유란의 곁을 지킬 수도 없으니, 제 앞가림을 하려면 필요한 것은 직접 손에 쥐고 있어야 해. 그래야 또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테니까."

마지막 말과 함께 태후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송연화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황후의 인장까지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송연화가 반쯤 죽은 사람처럼 아무 일에도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자 몹시 심기가 상했다.

어차피 일개 빈에 불과했다. 송유란을 위해 이 정도 말쯤은 해 줄 수 있었다.

서재헌의 망설임은 곧 사라졌다.

"어마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황후의 인장은 유란에게 맡기겠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송연화에게 물었다.

"연빈, 불만이 있느냐?"

송연화는 입술을 달싹였다. 소용돌이치던 생각이 일시에 멎었다.

'괜찮아.'

'곧 죽음을 가장해 빠져나갈 수 있어.'

'황궁을 떠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송연화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였다. 손톱이 여린 손바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으로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개를 숙인 채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신첩은 이견이 없사옵니다."

'서재헌과 태후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뒤였다. 불만이 있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결국 고통받는 사람은 또 나일 터였다.'

송연화는 자신의 얼굴이 종이처럼 새하얗게 질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재헌의 차가운 시선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그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렸다. 가슴 한구석이 불편하게 저려 왔다.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송연화가 다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후로 세우고 싶은 사람은 송유란이었다.

'됐다. 황후의 인장을 거둔 뒤 다른 물건을 넉넉히 내려 주면 되겠지.'

생각을 마친 서재헌이 말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돌아가 쉬어라."

"알겠습니다."

송연화는 예를 올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왼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뒤쪽을 더듬었다.

"마마."

연이가 낮게 부르며 내민 손을 받쳤다. 송연화는 손에 닿는 감촉을 느끼자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이쪽입니다."

연이의 안내가 다시 들려왔다.

송연화는 부축하는 힘을 따라 몸을 돌린 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남아 있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지금 낼 수 있는 힘을 모조리 쏟았다.

그러나 그 버팀은 청안궁 밖에 도착하자마자 무너졌다.

뼈가 사라진 사람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상체가 앞으로 기우는 순간 그대로 바닥을 향해 미끄러져 내렸다.

"마마, 어찌 되셨습니까?"

연이는 다급하게 외치며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꽉 붙잡았다.

송연화의 초점 없는 두 눈은 허공을 향했다.

"내 무릎이..."

너무 오래 꿇고 있어 두 무릎은 이미 감각을 잃었다.

연이가 부축하지 않았다면 청안궁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것이다.

놀란 연이는 눈을 굴리더니 갑자기 손을 놓았다.

"소인이 어서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마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송연화는 고개를 숙인 채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표정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때 망설임이 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연화, 어찌 된 게야?"

'연란 공주의 목소리인가?'

'아직 청안궁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째서?'

송연화가 뜻밖이라 여겨 입을 열기도 전에 연란 공주가 화를 냈다.

"네 곁의 궁녀들은 어디 있느냐? 앞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곁을 지키지도 않아? 왜 대답이 없지? 눈만 멀고 입까지 벙어리가 된 게야?"

연란 공주는 말을 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앞서 송연화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비아냥을 퍼부었다.

그 뒤로 많은 일이 이어지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송연화가 청안궁 정전을 나간 뒤였다.

그래도 지난날의 정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일부러 뒤따라 나와 상태를 물으려 했는데, 송연화가 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

송연화가 계속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연란 공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한참 뒤, 연란 공주는 뒤따라온 궁녀들에게 손짓해 송연화를 부축하게 했다.

송연화가 나직이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재헌 때문에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왕래가 끊겼다. 송연화는 줄곧 남남으로 살게 되리라 여겼기에 오늘 연란 공주가 먼저 다가온 것이 뜻밖이었다.

연란 공주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착해서 도운 줄은 마라. 네 꼴이 가엾어서 그런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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