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회색 외투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확인할 게 조금 있었습니다.”“그래서?”“다과회는 예정대로 진행됐습니다.”세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엘로라는?”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세드릭의 표정이 굳었다.회색 외투의 사내가 대답했다.“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확인하셨습니다.”“반응은 있었나?”“아직 모릅니다.”“아직?”“펜던트를 건넸다는 것까지만 확인했습니다. 이후에는 이사벨라가 자리를 비웠습니다.”가운데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그 아이는 믿을 만한가?”“겁이 많습니다.”“겁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다루기 쉽지.”“동생을 붙잡아 두고 있으니 문제없습니다.”세드릭엘로라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지만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문이 닫힌 뒤에도 황태후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네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할 거란다.그 말이 단순한 충고처럼 들리지 않았다.오히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말처럼 느껴졌다.엘로라는 창가에 앉아 소매 안쪽을 뒤졌다.손끝에 은빛 펜던트가 닿았다.꺼내 보니 창밖의 달빛을 받아 푸른 돌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아까 온실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달랐다.“왜…….”엘로라는 펜던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따뜻했다.처음 받았을 때보다 확실히 뜨거워져 있었다.마치 안쪽에서 아주 느린 맥박이 뛰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렸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엘로라는 급히 펜던트를 감췄다.“누구세요?”“나야.”칼리안이었다.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평소보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세드릭이 돌아왔어.”엘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수로에서 누군가를 추적했다고 하더군.”칼리안은 문을 닫고 그녀에게 다가왔다.“태후궁과 관련된 사람들이었어.”엘로라의 표정이 굳었다.“이사벨라와 만났던 사람인가요?”“그래.”칼리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세드릭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무슨 이야기였는데요?”“너에 대한 이야기였다.”
회색 외투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확인할 게 조금 있었습니다.”“그래서?”“다과회는 예정대로 진행됐습니다.”세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엘로라는?”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세드릭의 표정이 굳었다.회색 외투의 사내가 대답했다.“황태후 폐하께서 직접 확인하셨습니다.”“반응은 있었나?”“아직 모릅니다.”“아직?”“펜던트를 건넸다는 것까지만 확인했습니다. 이후에는 이사벨라가 자리를 비웠습니다.”가운데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그 아이는 믿을 만한가?”“겁이 많습니다.”“겁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다루기 쉽지.”“동생을 붙잡아 두고 있으니 문제없습니다.”세드릭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이사벨라.그녀가 협박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그는 손을 허리춤의 단검 위에 올렸다.당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더 들어야 했다.“황태후 폐하께서는 확신하고 계십니까?”누군가 물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회색 외투의 사내가 낮게 대답했다.“폐하께서는 처음부터 확신하고 계셨습니다.”“그렇다면 이제 시작할 수 있겠군.”“예.”“자그마치 20년을 기다렸으니까.”세드릭의 눈빛이 변했다.그 숫자가 머릿속에 박혔다.“정말 그 아이가 맞다면?”“그렇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입니다.”“만약 아니라면?”회
손바닥 위로 작은 펜던트 하나가 굴러 나왔다.은으로 만든 물방울 모양의 장식.그 안에는 푸른 돌이 박혀 있었다.“…허억!”엘로라의 숨이 멎었다.푸른 돌의 표면에 가느다란 선들이 얽혀 있었다.지하 서고의 수정에서 보았던 문양과 같은 계통이었다.“예쁘지?”황태후가 물었다.엘로라는 대답하지 못했다.“이 문양을 어디서 보았는지는 묻지 않으마.”황태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대신 이것만 기억하렴.”엘로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무엇을 말입니까?”황태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그건 네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란다.”순간, 온실의 모든 소리가 멎은 것 같았다.꽃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엘로라는 손바닥 위의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차갑던 은이 어느새 체온처럼 따뜻해져 있었다.“제 어머니를...”목소리가 갈라졌다.“…아십니까?”“…”황태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부채 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가렸다.“아주 오래전 일이란다.”“얼마나 오래전인데요?”“엘로라, 네가 태어나기 전 일이지.”그 말에 엘로라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어머니께서 황태후 폐하를 찾아오셨습니까?”“아니.”황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내가 그분을 찾아갔지.”엘로라의 손가락이 펜던트를 세게 움켜쥐었다.“왜요?”황태후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태후궁은 궁정의 서쪽 끝, 오래된 보리수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한낮인데도 울창한 가지가 햇빛을 가리고 있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보다 공기가 한층 서늘하게 느껴졌다. 복도에는 오래 묵은 향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고, 벽을 따라 늘어선 역대 황후들의 초상화가 지나가는 사람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엘로라는 그 눈길을 애써 외면했다.앞장선 이사벨라는 여전히 단정했다. 갈색 머리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틀어 올렸고,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누가 보아도 얌전하고 성실한 시녀였다.하지만 엘로라는 알고 있었다.간밤, 저 여자가 정원 한구석에서 낯선 사내와 몰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여기입니다.”이사벨라가 문 앞에서 멈췄다.문이 열리자 따뜻한 꽃향기가 흘러나왔다.다과회가 마련된 곳은 황태후궁의 온실이었다. 유리 천장 아래로 늦가을의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고, 그 가운데 놓인 흰 철제 탁자에는 은빛 찻주전자와 작은 과자 접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리고 탁자 맞은편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황태후 폐하였다.쉰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얼굴에서는 세월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우아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 남빛 드레스는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 손에는 오래된 부채 하나가 들려 있었다.황태후가 엘로라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어서 오렴. 와 주어서 고맙구나.”“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후 폐하.”엘로라는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황태후는 손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다. 앉으렴.”엘로라가 자리에 앉자
아침 햇살이 접견실의 높은 창을 통과해 대리석 바닥에 길고 투명한 사각형을 눕혀 놓았다.방 안의 공기는 햇살의 온기와는 영 딴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궁정의 약도와 시녀들의 명부가 펼쳐져 있었고, 한쪽 끝에는 식어 가는 찻잔이 손도 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사각사각-창밖에서는 정원사들이 장미 덤불을 가지치기하는 가위질 소리가 한가롭게 들려왔다.그 평화로운 소리가 오히려 방 안의 긴장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듯했다.칼리안은 팔짱을 낀 채 창가에 서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사람답게 눈 밑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어깨선만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 세드릭은 간밤에 보고한 내용을 다시 한번 차분하게 정리해 읊었다.리안느는 탁자 모서리에 손끝을 얹은 채 명부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듣고 있었다. "그 시녀의 이름은 이사벨라, 태후궁에 들어온 지 2년 남짓 된 이입니다. 출신은 변경 자작가의 방계이고, 겉으로 드러난 허물은 없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일수록 이용하기가 쉬운 법이지요." 리안느가 낮게 말했다. "의심받을 이유가 없으니 어디든 드나들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이가 저쪽에서 가장 탐내는 첩자일 겁니다." 칼리안은 창에서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이사벨라를 지금 잡아들일 수는 없다. 잡는 순간 어머니께서 손을 털고 물러나실 테고, 우리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로 돌아가게 돼." "그렇다면 역으로 이용하자는 말씀이시군요." 세드릭의 말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원하는 건 완성 의식에 관한 정보와 궁정 내부의 동향이다. 그걸 줄 거야. 다만, 우리가 고른 것만." 리안느가 입꼬리를 아주 살짝 끌어올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칼날이 햇빛을 받아 한 번 번뜩이는 것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거짓 정보를 흘리되, 진실의 뼈대를 일부 섞어야 의심을 사지 않겠지요. 완성 의식의 시기를 실제보다 늦춰서 알려 주면 저쪽이 서두르다 틈을 보일 겁니다." "그 틈을 우리
고오오-새벽의 지하 서고는 숨을 죽인 채 웅크린 짐승처럼 고요했다. 벽에 박힌 등잔의 불꽃은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도 가늘게 떨렸다.켜켜이 쌓인 고서의 먼지 냄새 아래로 오래된 돌이 머금은 서늘한 습기가 천천히 깔려 있었다.천장 가까이 난 환기창으로는 아직 해가 들지 않았다.수정이 내뿜는 희미한 푸른빛.그것만이 서가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바닥 위에 물결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왜 이리 잠이 안 오지…’엘로라는 끝내 잠들지 못했다.침상에 누워 천장의 문양을 헤아리다가 눈을 감았다.그럼 수정이 맥박처럼 깜빡이던 모습이 눈꺼풀 안쪽에 되살아났다.‘잠깐 산책이나 하다 올까.‘그러는 통에 결국 외투 하나만 걸치고 방을 나서고 말았다. 호위를 부르면 칼리안의 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그가 걱정으로 얼굴을 굳히는 모습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히 다녀오자.’저벅저벅-그래서 발소리를 죽인 채 회랑을 지나 비밀 계단을 내려왔다.막상 서고의 문을 밀고 들어서자 그곳에는 이미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아르멜은 두꺼운 해독 노트를 무릎 위에 펼쳐 놓고 작업대에 앉아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눈가는 거무스름하게 꺼져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먹물이 번져 있었다.그런데도 그의 눈동자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말이다."엘로라 님. 이 시각에 어찌.""잠이 오지 않아서요. 아르멜 님이야말로 쉬시지 않으셨군요.""쉴 수가 없었습니다. 어젯밤 이후로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요."그는 노트를 돌려 그녀 쪽으로 밀어 주었다. 엘로라는 작업대 곁에 서서 그 위에 휘갈겨진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고대 문자의 형태를 따라 그린 도형들 아래로 아르멜 특유의 가늘고 빠른 필체가 번역문을 이어 놓고 있었는데, 그중 한 줄에만 밑줄이 세 겹으로 그어져 있었다."봉인하는 자는 열쇠가 아니다. 열쇠는 봉인이 된 자이다."그녀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서 한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