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레이스 대공가.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가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후계자가 황녀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앞에 서 있었다. 레이너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증거라도 있습니까?” 제 안방에라도 들어온 양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엘로라는 그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물론입니다.” 대답한 것은 칼리안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곧 뒤편의 문이 열렸다. 기사들이 오래된 문서와 봉인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회랑에서 발견된 기록들이었다. 그중 하나의 봉인을 본 순간. 레이너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은 황실의 봉인이 아니었다. 그레이스 대공가의 봉인이었다.
엘로라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황제와 황후. 왕자와 공주. 그리고 오래전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가문들. 그 끝에 이르러서야 엘로라는 걸음을 멈췄다. 가장 아래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엘로라 그레이스. 거기에 황녀라는 칭호는 없었다. 황실의 문장도 없었다. 대신 그 이름 옆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레이스 대공가의 정당한 후계자.’ 엘로라의 숨이 멎었다. 자신이 황녀라고 믿었던 모든 시간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자신은 황실에서 밀려난 아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황실과는 다른 계승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때였다. 궁전 곳곳에서 동시에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뎅—!
“맞아, 거짓말이지.” 엘로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칼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말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엘로라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 “말해.”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까요?” “네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언을 전하러 왔다.” 그 목소리가 사라진 순간. 엘로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 이자벨라 그레이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 기억 속에 제대로 남아 있는 모습조차 희미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했다. “무슨 유언이죠?” 엘로라가 물었다. 잠시 침
그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거짓말.” 칼리안의 눈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엘로라.” “이번에는 말해줘요.” 엘로라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제가 누구인지.”잠시 침묵이 흘렀다. 칼리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누구인지 아직 전부 알지는 못한다.” 엘로라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저 문양은 황실의 것이 아니다.” “…….” “그리고 이곳에서 저 문양을 깨울 수 있는 사람은…” 칼리안이 말을 멈췄다. 그 순간.
분명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창백한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한쪽 무릎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그 손끝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칼리안은 그녀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왔지.” 엘로라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찾으러 왔어요.” “돌아가.” “싫어요.”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그럼 당신은요?” 칼리안이 말을 멈췄다. 엘로라는 그의 앞에 섰다. “당신은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엘로라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칼리안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엘로라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
이번에는 달랐다.다급했지만 강요하지 않았고, 두려웠지만 그녀에게 그 두려움을 떠넘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음절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엘로라는 그 미세한 떨림을 기억하고 있었다.그것이 진짜 칼리안의 목소리였다.엘로라의 심장이 얼어붙었다.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기다려요, 칼리안.”그녀는 검은 바람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찾으러 갈게요.”자신이 누구를 잃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발끝이 검은 안개에 닿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가 그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끈질겼다.엘로라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무서웠다.당장이라도 뒤로 물러나고 싶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남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칼리안의 목소리.그리고 그 목소리가 사라진 방향이었다.“칼리안.”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엘로라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검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리고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었다.그녀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그러면서도 계속 앞으로 걸었다.한 걸음.또 한 걸음.발밑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바닥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마치 이 길의 끝에 칼리안이 있다는 것을 본능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엘로라는 문득 황태후가 했던 말을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