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005
준우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사흘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증발한 뒤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천장의 백색등이 망막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러다 고요를 깨는 기이한 소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우직, 우직, 우직.]
단단한 것이 으스러지는 소리. 뼈가 나가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목재가 부러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준우는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병실 한구석,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사과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는, 무슨 종이컵을 구기듯 가볍게 으깨고 있었다. 옆에는 이미 반파된 수박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조각난 과일을 정성스럽게 쟁반에 담다가, 준우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다.
“채은아, 준우 님 깨셨다. 간호사 불러와.”
그의 굵직한 음성에 맞은편 침대에서 꾸벅꾸벅 졸던 단발머리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
“아, 응!”
여자는 제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던 또 다른 여성, 포니테일 머리의 여자를 조심스럽게 밀쳐내며 일어났다. 포니테일 여자는 이미 깨어 있었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여자가 병실 밖으로 튀어 나간 건 거의 찰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가 들이닥쳤다. 그녀는 준우의 상태를 빠르게 체크하더니 투명한 액체가 담긴 '생체에너지 수액'을 새로 교체했다. 소란이 지나간 자리, 준우의 침상 주변에는 낯선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웬일로 1인실인가 했더니.’
준우는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 내 입을 열었다.
“그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덩치 큰 남자, 재범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해야죠. 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 셋 중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 누워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옆에 앉은 두 여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준우의 눈에 그들의 기이한 외형이 들어왔다.
스포츠머리를 투박하게 깎은 재범과 달리, 단발머리 채은은 흑발과 금발이 뒤섞인 머리칼 사이로 기이한 금안(金眼)을 빛내고 있었다.
포니테일의 혜진은 더 이질적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선명한 십자(十字) 모양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세 사람은 담백하게 통성명을 마쳤다. 서재범, 손채은, 이혜진.
“앞으로 준우 님이 지원 요청하시면 저희가 최우선으로 배정될 겁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재범의 확언에 준우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여준 압도적인 연계 플레이를 떠올리면 든든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앞으로 겪을 일들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재범이 주머니에서 핸드폰 하나를 꺼내 무언가를 빠르게 타이핑하더니 준우에게 내밀었다. 준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화면을 받아 들었다가 이내 미간을 굳혔다.
[현재 관리청 내부는 '폭주제' 도입을 두고 찬반이 팽팽하게 갈려 있습니다. 저희 팀은 반대파지만, 팀장은 찬성 쪽 핵심 인물입니다. 준우 님 생각이 저희와 같다면, 사적인 협력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준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정말 그때 도망쳐야 했어.’
이미 발을 담가버린 늪이었다. 이제 와서 발을 빼기엔 너무 깊이 들어왔고, 저들의 눈빛은 이미 준우를 같은 배에 탄 동료로 정의하고 있었다. 준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범의 얼굴에도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한 미소가 어렸다.
[똑똑]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현수가 종이 쇼핑백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혜진 씨한테 연락받았어요. 이제야 좀 사람색이 돌아왔네요.”
“이번엔 좀… 심하게 긁혔나 봅니다.”
현수는 대답 대신 쇼핑백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내 침대 협탁에 놓았다. 최신형 핸드폰이었다.
“박살 난 핸드폰 대신입니다. 목숨값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받아주세요. 색상은 왠지 이게 어울릴 것 같아서 골랐는데, 별로인가요?”
상자 속에는 은은한 파스텔 벚꽃색 기기가 담겨 있었다. 512기가의 고용량. 준우에게는 과분할 정도였다.
“아뇨, 마음에 듭니다. 고마워요.”
현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준우 님 누워 계시는 동안 고민을 좀 해봤는데, 이번 프로젝트에서 준우 님을 제외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준우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화 작업에 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한데,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가혹해요. 이현승 건도 그렇고, 이번 괴물 곰 때도… 사실상 자살행위였잖아요.”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재범 일행이 움찔하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준우가 현장에서 어떤 식으로 몸을 던지는지, 능력자들 사이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준우는 순간 현수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다. '이제 와서 왜 딴소리냐'는 고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준우는 이내 힘을 뺐다. 이미 늦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관리청 내부의 암투에 휘말렸고, 새로운 협력자들까지 생겼다. 여기서 빠지는 건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 아무런 보호막 없이 표적이 되는 길이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어차피 이미 발 뺄 타이밍은 놓친 것 같으니까요.”
둘은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응시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현수는 품 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알겠습니다. 고집 꺾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주사 성분에 대해 추가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준우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폭주제는 시작일 뿐입니다. 정밀 분석 결과, 성분을 알 수 없는 고농축 증폭제가 다량 검출됐어요. 문제는 이 약물이 단순히 힘을 키우는 게 아니라, 복용자의 각인된 능력 자체를 기괴하게 뒤틀어버린다는 점이죠.”
현수의 보고에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미간이 일제히 좁혀졌다. 공기 자체가 한 겹 무거워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능력 증폭제. 하위권 능력자들에게 그것은 때로 지독한 가난을 버티게 하는 비상구이자, 목숨을 담보로 한 생존줄이었다. 시장에 음성적으로 도는 약물의 위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사람을 괴물로 변이시킬 정도의 농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투약이 아니라 투여, 혹은 실험에 가까웠다.
준우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그 검푸른 무늬는요? 변이된 개체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던데, 정체가 밝혀졌습니까?”
현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가엔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그게 이번 사건의 가장 지독한 부분이에요. 단순한 색소 침착인지, 아니면 에너지의 역류로 인한 괴사인지조차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분석 장비가 원인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준우는 대답 대신 짧은 숨을 뱉어냈다. 무늬가 파고든 자리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기분 나쁘게 일렁이던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직관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무늬는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라, 무언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현수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전 다시 서에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방금 들어온 감식 결과 중에 대조해 볼 게 있어서요. 준우 님은 당분간 다른 생각 말고 몸 추스르는 데만 집중하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현수가 나간 뒤에도 닫힌 문 너머에서는 한동안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겨진 이들의 시선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을 표류했다.
준우는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 규모의 약물을 제조하고 유통할 정도라면 개인의 일탈일 리 없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제물로 삼아 이 미친 짓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116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거 성심 통제망의 잔여 오염이었다.준우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나서려 하자, 재범이 그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아까 브리핑한 거 벌써 잊었어?”“아, 맞다. 몸이 먼저 나갔네.”준우는 숨을 가다듬고 차례를 기다렸다.팀은 브리핑대로 민간인 대피부터 시작해 제압과 정화를 순서대로 수행했다.덕분에 폭주자는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멀쩡히 의료진에게 들려갔다.이전과 완전히 다르고 명확해진 제압 절차에 준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안 했다고? 미치겠군.’준우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불에 타서 뼈와 근육만 남아 있었다.
115몇 달간은 서로 떨어진 채 바쁜 시간을 보냈다.광고 모델로 일하거나 막노동, 알바로 번 돈을 차근차근 모았다. 그렇게 넷이 모은 자금으로 겨우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마침내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 정리를 시작했다.우선 준우가 박스를 정화하고 재범이 박스를 모았다. 혜진이 박스 내부 벽을 잘라 큰 공간을 확보했고, 전기와 수도는 기사를 불러서 마련했다.채은은 재빠르게 방들을 꾸몄으며, 각각 장비와 자신들의 물건을 올려둘 곳 역시 마련했다.준우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카페 쿠폰과 생체에너지 보충제를 넣었다.책장 위에는 책 몇 권과 피규어 몇 개를 대충 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각자의 책상을 둘러보니 고스란히 취향이 드러났다.재범의 자리는 칼같이 각이 잡혀 있었고, 혜진은 카메라나 렌즈가 많았으며, 채은은 아기자기하고 분홍빛이 돌았다.현수는 경찰 형사 같은 책상이었고, 승아는 이전에 봤던 책상 모습과
1140팀은 카페에서 길드의 조건을 정하기로 했다.다만 이들은 예약실을 따로 잡아야 했다.이전에 일반 테이블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인과 사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어딘가 비공식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안 되겠다. 다음번에는 예약실을 잡자.”그렇게 해서 들어온 예약실이었다.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화하고 토론한 끝에, 이들은 다음 조건들을 정리해 냈다.- 비영리 운영- 폭주자 구금 권한 없음- 정화와 구조만 담당- 출동 기록과 회계 공개- 피해자 신병은 의료/복지기관에 인계- 관리청의 부당
113추가적으로 새로운 폭주 대응 체계가 발표되었다.- 관리청과 경찰청의 상층부 교체- 경찰, 소방, 의료진, 능력자 합동 출동 강제- 현장 지휘관에게 긴급 판단 권한 부여- 약물 및 원격 조종 여부 우선 검사- 폭주자를 우선 구조 대상으로 분류- 정화 가능성 확인 전 사살 금지- 대응 기록 외부 감사- 피해자 가족과 의료진의 이의제기 절차 마련현수는 신설된 폭주대응본부의 현장지휘관 자리를 제안받았다.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 정도 변화면 나름 개선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진서
112며칠 뒤, 국회의사당.성심과 경찰청, 능력자관리청의 결착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현수와 승아, 의료진, 성심 현장대장, 구조된 능력자들이 나와 차례로 증언했다.현수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현장 보고를 꾸준히 올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성심의 자료만 받아들이고 제 보고는 무시했습니다.”승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절대로 성심 전체가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층부,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구조된 능력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는 전부 폭주해서 괴물이 되거나 버려져 죽었을 겁니다.”마지막 순서로 준우가 증언대에 섰다.준우는 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직접
111김진서의 체포가 확정되자, 정부는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자신들은 다르다는 외침이었다.어찌 보면 손바닥 뒤집기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상징성을 지우기 위함이었다.경찰 특수본은 성심 길드는 물론 능력자관리청과 경찰청을 압수수색했다.특수본에 들어간 현수와 경찰 실무자들 역시 제0관제센터를 공식 압수수색하고 모든 기록을 확보했다.체포된 일부를 제외한 성심 현장대원들은 피해자 구조에 참여했다.그 수가 워낙 많아 성심 전체가 달라붙어도 힘에 부쳤다.준우는 정화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지만, 곁으로 다가온 혜진의 어깨를 빌려 겨우 걸음을 옮겼다.관제센터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수많은 카메라와 생존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준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기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밀어 넣으며 급하게 물었다.
015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감도는 병실 안,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는 생각보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손에 들어왔다. 누군가 치밀하게 숨겨놓은 기밀이라기엔, 사본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뿌려질 만큼 관리가 허술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 조항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했다.준우와 채은은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색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현수는 종이 더미를 넘기며 한 글자씩 곱씹듯 읽어
014지하 주차장의 무거운 공기가 SMG의 총성에 찢겨 나갔다. 채은은 바닥을 구르듯 달렸다. 연신 방아쇠를 당겼으나, 금속음만 요란할 뿐 갑옷의 표면에는 긁힌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채은이 리볼버를 쥐고 기회를 엿보던 준우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013현수가 노트북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 상체를 숙였다. 둔탁하게 울리던 트랙패드 클릭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일정하고 집요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무언가 낚아챘다는 신호였다.준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적 속에서 현수
012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정신을 깨웠다. 감겼던 눈꺼풀 사이로 하얀 천장이 쏟아졌다. 익숙한 천장이었다. 준우는 습관적으로 옆을 살폈다. 역시나 재범과 채은, 그리고 혜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복되는 입원, 되풀이되는 풍경. 준우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누군가에게는 지긋지긋한 응급실의 연장이겠지만, 사선을 넘나든 뒤 마주하는 이들의 얼굴은 매번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다들... 괜찮아요?"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던 채은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고, 무릎 위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