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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 복잡한 생각

Author: 최코리타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5-02 18:05:28

006

준우는 병원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짐 가방을 현관 구석에 던져두었다. 돌아온 집은 낯설 만큼 고요했다. 준우는 등기로 도착한 새 유심 칩을 끼워 넣었다. 작은 칩 하나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실 누군가 이 회선을 가로채거나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발끝을 간질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일개 공무원 신분의 능력자가 국가 단위의 정보망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설마 아니겠지'라며 눈을 감는 것뿐이다.

화면이 밝아지며 통신사 로고가 떴다. 진동은 없었다. 당연히 쏟아질 줄 알았던 팀장의 호출도, 밀린 업무 메시지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터질 타이밍인데.'

준우는 단말기를 식탁 위에 엎어두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만큼 살가운 성격도, 넘치는 사명감을 가진 이도 아니었다. 뜻밖의 정적은 달콤하기보다 오히려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등받이 없는 고요함 속에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얼룩진 천장 모서리로 향했다. 눈을 감으면 과거의 잔상이 망막 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어머니는 늘 무언가에 쫓겼다. 어린 준우에게 그것은 실존하는 '거대 조직'의 감시였다. 모자는 커튼을 굳게 치고 숨소리조차 죽인 채 어둠 속에서 서로를 확인했다. 창밖을 지나는 구두소리 하나에도 어머니의 눈동자는 비정상적으로 커졌고, 준우는 그 공포를 유전처럼 물려받았다.

그 지옥 같은 숨바꼭질은 어머니의 자살로 끝이 났다.

대학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날, 준우를 맞이한 건 싸늘해진 집안의 공기였다. 입관 전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얼굴은 기묘했다. 평생을 짓누르던 감시망에서 마침내 벗어났다는 듯, 그녀는 생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야 준우는 깨달았다. 자신들을 옥죄던 조직도, 도청 장치도, 검은 양복의 사내들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망상이 남긴 상처는 깊었다. 이미 아버지는 이혼 후 세상을 떠난 뒤였고, 준우는 텅 빈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가 되어 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가 뭘 바꿀 수 있었을까.'

준우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해진 비극 앞에서 무력하게 손을 놓고 있어야 했던 기억은, 현재의 준우를 지독한 허무주의자로 만들었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예전엔 병증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위협은 실재하는 날붙이 같았다.

"진짜일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

준우는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생각을 털어내듯 침대 깊숙이 몸을 묻었다.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튕기자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음이 방 안을 채웠다. 준우는 그 소음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무력한 하루 속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차가운 카페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현수는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맞은편, 준우는 줄어들지 않는 연유라떼의 빨대만 입에 문 채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현수의 모습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둥근 안경 테두리, 한 올의 잔머리도 허용하지 않고 말아 올린 머리칼, 그리고 구김 하나 없는 하늘색 와이셔츠까지. 그녀를 감싼 공기는 도시적이고 예리했다. 반면, 준우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보풀 일어난 후드 티셔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어울리지 않는 조각들이 한 테이블에 놓여 있다는 이질감이 목구멍을 타고 씁쓸하게 넘어왔다.

준우는 왜 불렀느냐고 묻는 대신,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물어볼 타이밍을 놓친 질문들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정적을 깨뜨린 건 준우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이었다. 화면에 뜬 '팀장'이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현수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카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동문이 열리자 후텁지근한 바깥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네, 팀장님."

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어, 그래. 잘 쉬고 있지?"

평소답지 않게 나긋나긋한 어조. 준우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도살장을 향하는 짐승의 심정으로 그는 벽에 등을 기댔다.

"다른 건 아니고, 요즘 자네가 워낙 끔찍한 현장에만 투입됐었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피 비린내와 살점 타는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듯해 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부터는 강도가 좀 낮은 곳 위주로 배정해주려 하네. 현장 대응 수준으로만 움직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화 작업은 제가 맡아야…."

"아, 괜찮아. 다른 인원들도 보충될 거고. 자네는 그냥 지시받은 대로만 알고 있어. 알겠지? 푹 쉬고."

일방적으로 끊긴 통화음이 귓가를 때렸다. 준우는 검게 변한 액정 화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배려'라는 껍데기를 쓴 '배제'였다.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현수의 테이블 위에는 이미 태블릿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먼저 묻기도 전에 준우가 무거운 입술을 뗐다.

"팀장이 그러네요. 이제 폭주제 업무에서는 빠지라고요."

현수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에서 크게 흔들렸다. 

"정말요? 갑자기요?"

"네. 현장 대응만 하라는데, 사실상 이번 건에서 손 떼라는 소리 같아요."

현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불안하게 두드렸다.

"경찰 쪽에는 별다른 지시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너무 깊게 발을 들여서 저까지 빼기는 힘들었나 보네요."

준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데 준우 씨.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준우 씨가 더는 그 지옥 같은 곳에 안 가셨으면 했거든요."

"제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준우가 짐짓 가볍게 대꾸하며 웃어 보이려 했지만, 현수의 표정은 차갑도록 진지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 능력자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준우 씨가 겪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제가 본 그 모습은…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어요. 다리가 으깨지고 뼈가 튀어 나오는데도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이…."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는 정강이에 공만 맞아도 주저앉아요. 그런데 준우 씨는 혼자서 그 고통을 다 짊어지고 있잖아요. 매번 그런 참혹함 속으로 등을 떠미는 기분이라, 제가 더는 못 버티겠더라고요."

현수의 말은 화살이 되어 준우의 가슴에 박혔다. 진심이었다. 가식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염려. 하지만 그 따뜻함이 닿는 순간, 준우의 내면 깊은 곳에서 거대한 둑이 무너져 내렸다.

이유 없는 우울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웅웅거렸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거부할 수 없는 침전이었다. 찌푸린 미간 사이로 기억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괴성을 지르며 죽어가던 폭주자의 모습, 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는 어머니의 수척한 얼굴.

"…준우 씨, 괜찮으세요?"

현수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준우는 강박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빼기엔 이미 늦었어요. 정화 능력자로선 제가 가장 앞서있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해야죠.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준우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그 안에는 부서지지 않는 고집이 서려 있었다. 현수는 안타까운 듯 그를 바라보다가, 울리는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요청했던 자료가 반려됐네요. 아무래도 지금 바로 복귀해야 할 것 같아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현수가 서둘러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에는 온기 없는 커피 향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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