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018
소독차 냄새가 밴 공기는 이제 폐 깊숙한 곳까지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준우는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무심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집을 병실로 옮기는 게 아니라, 병실을 집으로 등기 이전해야 할 수준이었다. 창밖으로 저무는 노을이 병실 안쪽까지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병상 한편에는 재범과 채은, 혜진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앉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맞은편, 현수만이 유일하게 노트북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인 박자로 정적을 깼다.
“이름 하나로... 정말 좁혀질까요?”
준우의 물음에 현수가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안 돼도 밑져야 본전이죠. 전에는 그 이름 석 자조차 몰랐던 거니까.”
준우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눈을 감았다. 기억의 실타래를 역으로 감아올렸다. 분명 복도에서 스치듯 본 명찰 위에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름 위에 얹혀 있어야 할 얼굴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수채화 물감을 뿌려 뭉개버린 것처럼,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는 흐릿한 안개만 자욱했다.
‘눈매가 날카로웠나, 아니면 인상이 좋았나.’
미간을 좁히며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아 봐도 손바닥 위로 남는 건 서늘한 공기뿐이었다. 결국 준우는 짧은 한숨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억지로 끄집어내려 할수록 머릿속 통증만 심해질 뿐이었다.
그때, 현수가 가볍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노트북을 준우의 무릎 위로 밀어 넣었다.
“이것 좀 보시죠.”
화면 안에는 '이진성'이라는 이름의 인사 기록 카드가 띄워져 있었다. 사진 속 남자는 지극히 평범했다. 어디서나 볼 법한 무색무취의 인상. 관리청 소속 연구원이라는 직함 외에는 특별한 프로젝트 참여 이력도, 눈에 띄는 성과도 기록되지 않은 '연구원 A' 그 자체였다.
“관리청이 이걸 왜 안 지우고 놔뒀을까요? 흔적 지우기엔 도가 튼 인간들이.”
준우의 의문 섞인 혼잣말에 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일부러 남겨둔 건지, 아니면 지울 가치조차 없다고 판단한 건지.”
준우는 마우스 휠을 천천히 내리며 행간을 읽으려 애썼다. 텅 빈 경력 사항.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프로필이었다. 평범함이라는 가면 뒤에 무엇을 숨겼기에 그는 연기처럼 증발해버린 걸까.
준우는 노트북을 덮어 현수에게 건넸다.
“가보죠.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현수 씨, 같이 가주겠어요?”
“그러죠.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현수가 짐을 챙기자,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현수가 짧게 턱짓하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세 분은 여기서 상황 좀 봐주세요.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할 테니까.”
준우는 팔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망설임 없이 뽑아냈다. 손등 위로 맺히는 핏방울을 대충 문질러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발끝이 조금 휘청였지만 금세 중심을 잡았다.
“아, 그전에 오토바이 도난 신고부터 해야겠어요. 그게 내 유일한 다리인데, 없으면 당장 내일부터 막막하거든요.”
현수가 겉옷을 걸치며 가볍게 웃었다.
“가는 길에 들르죠. 접수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고마워요, 여러모로.”
두 사람은 병실의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문을 나섰다. 복도의 흰 조명이 준우의 눈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이제 막 시작된 추적의 예감이 등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
도난 신고를 마친 뒤 현수의 차가 멈춰 선 곳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함마저 느껴지는 평택 외곽의 어느 아파트 단지였다. 색이 바랜 외벽과 단지 내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국가의 은밀한 프로젝트를 다루던 연구원이 몸을 뉘었을 곳이라기엔 지나치게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멈춰 섰다. 한 층에 두 가구가 마주 보는 계단식 구조. 복도에는 누군가 내놓은 분리수거함과 유모차가 놓여 있었다.
"정보가 3년 전 것인데, 아직 여기 살고 있을까요?"
준우의 물음에 현수는 대답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잠시 후, 인터폰 너머로 경계심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실례합니다. 경찰입니다."
현수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짧은 숨소리와 함께 당혹감이 진동했다. 경찰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식의 서늘한 체념에 가까웠다.
"경찰이요? 우리 집에 무슨 일로…."
"이진성 씨 일로 여쭐 게 있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대화는 단절됐다. 꽤 긴 정적. 복도의 센서등이 꺼지며 두 사람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런 사람 여기 없어요. 돌아가세요."
"분명 이진성 씨 댁으로 확인하고 왔는데요. 실례지만 실종 신고하셨던 가족분 아니신가요?"
"잘못 오셨다고요!"
날 선 고함이 터져 나왔다. 원망과 분노, 그리고 깊은 피로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현수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옆에서 가만히 문을 응시하던 준우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차가운 인터폰 스피커가 아니라 문 너머의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건네듯 낮은 목소리를 냈다.
"저희는 남편분이 왜 사라졌는지 찾고 있습니다. 관리청에서 아예 기록을 덮어버린 걸 저희가 억지로 들춰낸 거고요. 세상이 다 잊었어도 사모님은 아니시잖아요. 저희를 도와주시면 저희도 끝까지 확인하겠습니다."
문 너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윽고 도어락이 해제되는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퀭한 눈이 부어오른, 나이보다 훨씬 노쇠해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정말로… 밝혀주실 수 있나요?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현수는 거짓 희망을 주지 않으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확답은 못 드립니다. 하지만 적어도 먼지 쌓인 서류함 속에 남편분 이름을 영원히 가둬두지는 않겠습니다."
그제야 여자는 길을 비켜주었다. 거실은 깔끔했지만, 사람의 생기보다는 박제된 것 같은 고요함이 가득했다. 현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시작하는 동안, 준우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남편분이 집에 자주 들르시지는 않았나 보군요."
"연구소에만 박혀 지냈어요. 보안 때문이라면서 전화 한 통 마음대로 못 하게 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겼죠. 관리청 사람들은 그냥 사고였다고만 하고."
현수는 수첩에 펜촉을 굴리며 기록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준우에게 향했다. 준우는 아까부터 무슨 냄새라도 맡는 사냥개처럼 고개를 비틀며 집안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준우 씨, 왜 그래요?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현수가 조용히 물었지만 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복도 끝에 있는 닫힌 방으로 걸어갔다.
"저긴 어떤 방이죠?"
"남편이 쓰던 서재예요. 손댄 지 꽤 됐는데…."
"들어가 봐도 될까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준우가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준우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코끝을 찌르는 텁텁한 종이 냄새 사이로 아주 미세한, 하지만 지독하게 이질적인 기운이 섞여 있었다. 일반인의 코에는 잡히지 않을, 정체된 마나의 잔향이었다.
'여기다. 분명히 여기 있어.'
준우는 서재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책장 사이, 액자 뒤, 바닥 장판 밑까지. 현수와 아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준우의 손길이 멈춘 곳은 낡은 책상 밑바닥이었다.
손끝에 걸리는 작은 틈새. 준우가 힘을 주어 비틀자, 이음새가 어긋나며 이중 바닥이 '덜컥'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그 안에서 유리병 하나와 낡은 USB 메모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게 왜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우는 바닥에 떨어진 약병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 안에서 아까 느꼈던 그 이질적인 기운이 일렁였다.
"이진성 씨가… 사모님께 따로 남긴 말은 없었나요?"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잊고 있었던, 혹은 너무 현실성이 없어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기억이 되살아난 듯했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을 때 그랬어요. 언젠가 정화 능력자가 오면, 그때 이걸 보여주라고. 만약 그런 사람이 영영 오지 않는다면 그냥 가지고 있다가 버리라고요."
준우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 위에 병을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순백의 마나가 흘러나와 병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탁했던 액체가 눈부시게 맑은 빛을 내며 투명해졌다. 그제야 준우의 정체를 알아챈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USB를 챙겨 준우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사라진 연구원이 목숨과 맞바꾸어 지켜낸 유언이자, 거대한 진실로 향하는 유일한 열쇠였다.
***
카페 안쪽, 구석진 곳에 자리한 개별 회의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섯 명의 시선이 테이블 중앙에 놓인 현수의 노트북으로 모였다. 현수가 USB를 연결하고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스피커를 통해 기분 나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치직, 치지직…….]
"데이터 파일인데 왜 이렇게 노이즈가 심하죠?"
채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현수는 대답 대신 볼륨을 높였다. 의도적인 암호화인지, 아니면 급박한 상황에서 녹취된 탓인지 알 수 없는 잡음 사이로 마침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건조하면서도 깊은 피로가 묻어나는 음성, 이진성이었다.
2023년 1월 18일 23시 02분. 서울 능력자 연구소 제3구역.
배경음으로 멀리서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리와 짐승의 것과 유사한 비명세가 섞여 들었다. 진성은 짧게 마른세수를 하는 듯한 마찰음을 내더니 말을 이었다.
현재 ‘폭주제’에 대한 임상 데이터를 정리 중이다. 아니, 사실상 살상 병기를 검수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피해 규모는 이미 예측 범위를 넘어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녹음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가쁜 호흡이 회의실 안의 정적과 맞물렸다.
본래 이 약물의 목적은 폭주 억제제였다. 과부하가 걸린 생명에너지 회로를 강제로 냉각해 헌터들의 뇌사 사고를 막으려 했던 건데…. 특정 성분을 극미량 첨가하자 결과가 뒤집혔다. 억제제가 아닌,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증폭시켜 이성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폭주제가 되어버렸다.
진성의 목소리에 자조적인 웃음기가 섞였다.
하지만 이 치명적인 결함이 알려지자 윗선과 결탁한 대형 길드, 민간 연구소들의 눈빛이 변했다. 치료라는 명분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능력 출력 증가의 표준화, 그리고 병기화다. 대중은 오히려 환호하겠지. 헌터라는 통제 불능의 힘을 규격화하고 부릴 수 있게 되었다고 믿을 테니까. 일반인들에게 헌터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니, 이 독약이 질서의 상징으로 포장되는 건 시간문제다.
“크아아악! 죽여줘! 제발!”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무언가 육중한 것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성이 흠칫 놀라 숨을 멈추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전달됐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이걸 되돌릴 수 있는 건 오직 정화형 능력자뿐이다. 혈관에 주입된 약물을 마나 단위에서 분해하고 정화할 수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고출력 정화를 견딜 수 있는 자는 극소수다. 내가 확보한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가능성이 보이는 인물은…… 단 5명. 예컨대 ‘최준우’ 같은 이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순간, 준우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동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지만 준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고양감은커녕, 뒷덜미를 타고 서늘한 불쾌감이 스쳤다. 진실을 파헤칠수록 자신이 향하는 곳이 구원자가 아닌, 권력자들의 뒤처리를 담당할 ‘생체 필터’의 자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성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졌다.
37.419490, 128.167505.
그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위도와 경도로 보이는 숫자를 두 번 반복했다.
37.419490, 128.167505. 잊지 마라, 여기가 시작점이다.
툭, 소리와 함께 녹음이 끊겼다.
116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거 성심 통제망의 잔여 오염이었다.준우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나서려 하자, 재범이 그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아까 브리핑한 거 벌써 잊었어?”“아, 맞다. 몸이 먼저 나갔네.”준우는 숨을 가다듬고 차례를 기다렸다.팀은 브리핑대로 민간인 대피부터 시작해 제압과 정화를 순서대로 수행했다.덕분에 폭주자는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멀쩡히 의료진에게 들려갔다.이전과 완전히 다르고 명확해진 제압 절차에 준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안 했다고? 미치겠군.’준우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불에 타서 뼈와 근육만 남아 있었다.
115몇 달간은 서로 떨어진 채 바쁜 시간을 보냈다.광고 모델로 일하거나 막노동, 알바로 번 돈을 차근차근 모았다. 그렇게 넷이 모은 자금으로 겨우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마침내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 정리를 시작했다.우선 준우가 박스를 정화하고 재범이 박스를 모았다. 혜진이 박스 내부 벽을 잘라 큰 공간을 확보했고, 전기와 수도는 기사를 불러서 마련했다.채은은 재빠르게 방들을 꾸몄으며, 각각 장비와 자신들의 물건을 올려둘 곳 역시 마련했다.준우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카페 쿠폰과 생체에너지 보충제를 넣었다.책장 위에는 책 몇 권과 피규어 몇 개를 대충 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각자의 책상을 둘러보니 고스란히 취향이 드러났다.재범의 자리는 칼같이 각이 잡혀 있었고, 혜진은 카메라나 렌즈가 많았으며, 채은은 아기자기하고 분홍빛이 돌았다.현수는 경찰 형사 같은 책상이었고, 승아는 이전에 봤던 책상 모습과
1140팀은 카페에서 길드의 조건을 정하기로 했다.다만 이들은 예약실을 따로 잡아야 했다.이전에 일반 테이블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인과 사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어딘가 비공식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안 되겠다. 다음번에는 예약실을 잡자.”그렇게 해서 들어온 예약실이었다.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화하고 토론한 끝에, 이들은 다음 조건들을 정리해 냈다.- 비영리 운영- 폭주자 구금 권한 없음- 정화와 구조만 담당- 출동 기록과 회계 공개- 피해자 신병은 의료/복지기관에 인계- 관리청의 부당
113추가적으로 새로운 폭주 대응 체계가 발표되었다.- 관리청과 경찰청의 상층부 교체- 경찰, 소방, 의료진, 능력자 합동 출동 강제- 현장 지휘관에게 긴급 판단 권한 부여- 약물 및 원격 조종 여부 우선 검사- 폭주자를 우선 구조 대상으로 분류- 정화 가능성 확인 전 사살 금지- 대응 기록 외부 감사- 피해자 가족과 의료진의 이의제기 절차 마련현수는 신설된 폭주대응본부의 현장지휘관 자리를 제안받았다.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 정도 변화면 나름 개선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진서
112며칠 뒤, 국회의사당.성심과 경찰청, 능력자관리청의 결착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현수와 승아, 의료진, 성심 현장대장, 구조된 능력자들이 나와 차례로 증언했다.현수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현장 보고를 꾸준히 올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성심의 자료만 받아들이고 제 보고는 무시했습니다.”승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절대로 성심 전체가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층부,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구조된 능력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는 전부 폭주해서 괴물이 되거나 버려져 죽었을 겁니다.”마지막 순서로 준우가 증언대에 섰다.준우는 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직접
111김진서의 체포가 확정되자, 정부는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자신들은 다르다는 외침이었다.어찌 보면 손바닥 뒤집기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상징성을 지우기 위함이었다.경찰 특수본은 성심 길드는 물론 능력자관리청과 경찰청을 압수수색했다.특수본에 들어간 현수와 경찰 실무자들 역시 제0관제센터를 공식 압수수색하고 모든 기록을 확보했다.체포된 일부를 제외한 성심 현장대원들은 피해자 구조에 참여했다.그 수가 워낙 많아 성심 전체가 달라붙어도 힘에 부쳤다.준우는 정화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지만, 곁으로 다가온 혜진의 어깨를 빌려 겨우 걸음을 옮겼다.관제센터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수많은 카메라와 생존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준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기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밀어 넣으며 급하게 물었다.
019산길을 수 차례 돌아 들어간 끝에야 차가 멈춰 섰다. 사방이 가파른 능선으로 가로막혀 지도상으론 그저 험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은밀한 은거지나 비밀 시설을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정면에는 'OOO 연구원'이라는 투박한 현판이 대놓고 걸려 있었다. 오히려 너무 당당해서 더 이질적인 광경이었다.차 문을 열고 내리던 채은이 미간을 좁혔다. 건물 외벽은 이미 세월에 깎여 나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그녀의 감각은 전혀 다른 신호를 읽어내고 있었다.“이상해. 왜 아직도 전력이 흐르고 있지?”“전력?”혜진이 되물으며
017서울의 외곽, 간판조차 없는 건물의 지하 연구소. 낮은 웅성거림이 가득한 공기 속으로 날 선 대화가 섞여 들었다. 모니터 속에서는 준우가 움직이는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결국, 저놈을 확보해야 한단 소리군.”연구원 한 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화면 속 준우의 몸짓 하나하나를 뜯어보던 다른 연구원이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저 친구의 정화 능력만 있으면 약의 결함을 억제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소거할 수 있어. 이론상으론 완벽해지겠지.”“협력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난감하군.”“그럼 협력하게 만
016집을 나선 준우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에 쓰러지면 다시는 관리청의 의료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지금 제 발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원히 괜찮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그를 움직였다.현수는 입
015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감도는 병실 안,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는 생각보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손에 들어왔다. 누군가 치밀하게 숨겨놓은 기밀이라기엔, 사본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뿌려질 만큼 관리가 허술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 조항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했다.준우와 채은은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색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현수는 종이 더미를 넘기며 한 글자씩 곱씹듯 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