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008
식어버린 커피의 씁쓸한 뒷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현수는 빈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짧은 한숨을 뱉었다. 미지근한 공기가 감도는 카페 안, 팀원들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 끝에 머물렀다.
“지난번 루트를 다시 훑어볼 생각이에요.”
준우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그 불법 클리닉 건물 말이죠?”
“네. 겉만 핥고 나온 게 영 찝찝해서요. 이번엔 아예 안쪽까지 제대로 뒤져볼 작정이에요.”
준우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침묵은 곧 동의였다.
다섯 사람은 익숙한 폐건물 앞에 섰다. 혜진과 채은은 건물의 전면을, 재범은 유일한 퇴로인 뒷문을 차단했다. 현수와 준우가 삐걱거리는 화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4층, 불법 시술이 자행되던 클리닉이었다.
현장엔 적막만이 고여 있었다. 며칠 전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내부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소독약 냄새는 여전했다. 현수는 바닥을 기듯 살피며 깨진 약병 조각이나 버려진 거즈 하나까지 뒤졌으나, 손에 잡히는 수확은 없었다.
“수사관님, 여기요. 바닥 타일 사이에 약흔이 남았습니다.”
준우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푸르스름한 얼룩이 굳어 있었다. 현수는 렌즈를 밀착해 사진을 찍었다. 성분 분석이라도 해볼 요량이었지만, 준우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거 지워두죠. 민간인이 들어왔다가 접촉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집니다.”
“부탁할게요.”
준우의 손끝에서 일어난 정화의 빛이 얼룩을 말끔히 지웠다.
소득 없는 조사를 마치고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복도 끝, 닫힌 셔터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황급히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현수의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거기!”
고함과 동시에 그녀가 복도를 박차고 나갔다. 당황한 준우가 뒤를 쫓았다. 남자는 복도 끝 비상구로 몸을 날리려 했지만, 현수의 태클이 더 빨랐다. 뒤따라온 준우가 남자의 팔을 꺾어 누르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아악! 안 도망가요! 안 도망간다고!”
현수는 대답 대신 차가운 수갑을 남자의 손목에 채웠다. 클리닉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남자를 앉혀두자, 준우의 연락을 받은 나머지 팀원들이 합류했다.
“능력자도 아닌 일반인이 여긴 왜 기웃거려?”
현수의 서늘한 질문에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원래 받던 게 있어서…. 예약 시간이라 온 것뿐이에요.”
“불법인 거 알면서도? 배짱이 좋네.”
남자가 고개를 떨구자, 현수는 주머니에서 압수했던 작은 유리병을 꺼내 보였다. 안에는 점성이 강한 반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검푸른 무언가 기생충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구하지?”
“아니, 다 아시는 분들이 왜 물어요? 이미 갖고 계시면서.”
“좋게 말할 때 불어. 내 인내심이 그렇게 안 길거든.”
현수의 말보다 더 위협적인 건 뒤에 버티고 선 재범의 그림자였다.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위압적으로 다가서자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마, ‘마나’라고… 시장에선 그렇게 불러요. 저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배달만 하는 거라 진짜 몰라요!”
“마나?”
다섯 명의 시선이 동시에 교차했다. 생소한 명칭이었다. 재범이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왜 찾는 거지? 일반인인 네가 이걸 왜 써.”
“제가 쓰는 게 아니라, 능력자들이 환장하고 찾아요. 이거 한 방이면 저출력 능력자들도 한계를 넘길 수 있다고 소문났거든요. 폭주 위험도 싹 잡아준다고….”
“폭주 억제라고?”
채은이 실소를 터뜨렸다. 최근 발생한 폭주 사고의 처참한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그녀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 약 때문에 사람들이 괴물이 돼서 죽어 나갔는데, 억제는 무슨!”
준우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합법적인 증폭제는 가격도 비싸고 하급 능력자에겐 배정량도 적죠. 절박한 사람들의 약점을 잡고 독을 판 거네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현수는 남자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며 휴대폰을 꺼냈다.
“우선 연행해서 본격적으로 털어보죠. 이놈 입에서 나올 게 더 많을….”
[콰득!]
생경한 파열음이었다. 수박이 으깨지는 듯한 불쾌한 소음 뒤에 이어진 것은 기괴한 정적이었다.
현수는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붉게 변해 있었다. 온몸에 전해지는 눅눅하고 뜨거운 감각. 방금까지 말을 내뱉던 남자의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목덜미 위로 남은 것은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핏덩이뿐이었다.
“재범, 방패! 채은, 후방!”
혜진의 벼락같은 외침이 팀원들을 깨웠다. 재범은 본능적으로 거대한 방패를 전개했고, 채은은 화기를 소환해 등 뒤를 수호했다. 혜진은 이미 바닥에 몸을 밀착한 채 저격총의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멍하니 제 몸에 튄 혈흔을 내려다보던 현수의 눈앞이 가려졌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준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핏자국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셔츠의 깃부터 안경에 묻은 비릿한 얼룩까지, 정화의 힘이 그녀를 다시 깨끗하게 되돌려놓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안경을 고쳐 씌워주자 현수가 그제야 짧은 숨을 들이켰다.
“고, 고마워요. 근데 방금 그건….”
“입막음이죠. 저희가 너무 깊게 찔렀나 봅니다. 수사관님, 일단 지원 요청부터 하세요.”
준우의 말에 현수는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붙잡았다. 혜진이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은 포복으로 다가왔다.
“흔적도 없어요. 목표물만 제거하고 바로 철수한 것 같네요. 이 정도 거리에서 이 소음도 없이… 미등록된 A급 이상의 저격수일 가능성이 높아요.”
채은도 총구를 내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
“뒤쪽도 깨끗해요. 우리를 노린 게 아니라, 저놈의 입을 노린 거네요.”
재범이 세워둔 방패 뒤에서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시신을 내려다봤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살려달라 빌던 생명의 흔적은 이제 복도를 더럽히는 쓰레기처럼 변해 있었다.
혜진이 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수사관님, 겁먹을 거 없어요. 놈들이 대담하게 우릴 직접 건드리진 못할 거예요. 이건 경고니까.”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의 소매 끝에 남아 있는 것 같은 혈향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일단 현장 보존하고 지원 오면 카페로 가죠. 여기서 더는 얻을 게 없겠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텅 빈 복도엔 여전히 소독약과 피 냄새가 뒤섞인 채 부유하고 있었다.
***
현수를 대신해 인수인계 절차를 밟는 준우의 움직임은 기계적일 만큼 침착했다. 수사대가 폴리스라인을 치고 현장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준우는 복도에 남은 참혹한 흔적들을 정화의 빛으로 지워나갔다. 바닥에 스며들었던 비릿한 점액질이 증발하며 공기가 맑아졌지만, 그곳에 감돌던 죽음의 무게까지 덜어내지는 못했다.
근처 카페는 평일 오후 특유의 나른함이 고여 있었다. 방금 전 겪은 참극과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평화였다.
팀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충격을 견디고 있었다. 혜진은 창가 자리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밖을 지나는 행인들의 손 위치를 확인했고, 재범은 식어버린 커피잔을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채은은 무의미하게 스마트폰 화면을 위아래로 훑으며 불안을 달랬다.
가장 위태로운 건 현수였다. 그녀는 김이 다 빠진 머그잔 속 검은 액체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기색이었다.
준우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무거운 침묵을 깼다.
“정리는 끝났습니다.”
“...아, 네. 고생하셨어요.”
현수의 대답은 젖은 솜처럼 힘없이 뭉개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두 손이 멎지 않는 경련처럼 파르르 떨렸다. 준우는 잠시 망설이다 그 떨리는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따뜻함보다는 단단한 지지대를 자처하는 손길이었다.
“당신 잘못 아닙니다. 그리고 수사관님.”
현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초점이 채 돌아오지 않은 눈동자가 준우를 향했다.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람이 죽는 건 적응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니까요. 울고 싶으면 여기서 쏟아내도 됩니다. 우리가 팀이 된 건, 이런 순간을 혼자 견디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현수의 눈동자가 떨렸다. 억눌러왔던 호흡이 한순간 무너지며 끅끅거리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무너지듯 준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아무도 그녀를 달래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재범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고, 혜진은 그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슬픔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겪어내도록 내버려 두는 그들만의 배려였다.
그 정적을 깬 건 채은의 낮은 욕설이었다.
“...이거 뭐야? 말도 안 돼.”
채은의 미간이 깊게 패어 있었다. 화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현승 사건, 이거 분명 보안 등급 걸려 있지 않았어요?”
현수가 젖은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네, 아직 수사 중이라 대외비일 텐데... 왜요?”
“지금 트리위키 실시간 검색어 1위예요. 인별이랑 너튜브 쇼츠에도 영상이 미친 듯이 올라오고 있다고요.”
준우와 현수가 동시에 채은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던졌다. 화면 속에는 생생한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마가 집어삼킨 건물, 절규하는 소방대원들, 그리고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비명을 지르던 준우와 현승의 목소리까지. 누군가 작정하고 지근거리에서 촬영한 듯한 앵글이었다.
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관리청 내부 인물인가? 아니면 현장에 있던 소방대원 중 누군가가?’
의문이 꼬리를 물기도 전, 재생되던 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게시물’이라는 문구와 함께 멈춰 섰다.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수천 개에 달하던 기사와 영상들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어...?”
채은이 당황하며 다시 검색어를 입력했지만, 결과는 ‘검색 결과 없음’이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정보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현수가 텅 빈 화면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격 사건을 덮으려는 거네요.”
준우 역시 동의했다. 방금 전 클리닉에서 발생한 ‘공공기관 수사관 동행 하의 살인 사건’은 체제에 치명적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자극적인 과거의 비극을 던져주고, 목적이 달성되자마자 판을 치워버린 것이다.
그 정교한 통제력에 소름이 돋을 무렵, 준우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번호 표시제한]
화면을 갈무리한 짧은 문장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 ‘마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ㅇㅇ다리 밑으로 혼자 오도록.
116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과거 성심 통제망의 잔여 오염이었다.준우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나서려 하자, 재범이 그의 어깨를 잡고 멈춰 세웠다.“아까 브리핑한 거 벌써 잊었어?”“아, 맞다. 몸이 먼저 나갔네.”준우는 숨을 가다듬고 차례를 기다렸다.팀은 브리핑대로 민간인 대피부터 시작해 제압과 정화를 순서대로 수행했다.덕분에 폭주자는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멀쩡히 의료진에게 들려갔다.이전과 완전히 다르고 명확해진 제압 절차에 준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여태까지 안 했다고? 미치겠군.’준우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그때 그는 불에 타서 뼈와 근육만 남아 있었다.
115몇 달간은 서로 떨어진 채 바쁜 시간을 보냈다.광고 모델로 일하거나 막노동, 알바로 번 돈을 차근차근 모았다. 그렇게 넷이 모은 자금으로 겨우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마침내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 정리를 시작했다.우선 준우가 박스를 정화하고 재범이 박스를 모았다. 혜진이 박스 내부 벽을 잘라 큰 공간을 확보했고, 전기와 수도는 기사를 불러서 마련했다.채은은 재빠르게 방들을 꾸몄으며, 각각 장비와 자신들의 물건을 올려둘 곳 역시 마련했다.준우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카페 쿠폰과 생체에너지 보충제를 넣었다.책장 위에는 책 몇 권과 피규어 몇 개를 대충 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각자의 책상을 둘러보니 고스란히 취향이 드러났다.재범의 자리는 칼같이 각이 잡혀 있었고, 혜진은 카메라나 렌즈가 많았으며, 채은은 아기자기하고 분홍빛이 돌았다.현수는 경찰 형사 같은 책상이었고, 승아는 이전에 봤던 책상 모습과
1140팀은 카페에서 길드의 조건을 정하기로 했다.다만 이들은 예약실을 따로 잡아야 했다.이전에 일반 테이블에 앉았다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인과 사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어딘가 비공식 연예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안 되겠다. 다음번에는 예약실을 잡자.”그렇게 해서 들어온 예약실이었다.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화하고 토론한 끝에, 이들은 다음 조건들을 정리해 냈다.- 비영리 운영- 폭주자 구금 권한 없음- 정화와 구조만 담당- 출동 기록과 회계 공개- 피해자 신병은 의료/복지기관에 인계- 관리청의 부당
113추가적으로 새로운 폭주 대응 체계가 발표되었다.- 관리청과 경찰청의 상층부 교체- 경찰, 소방, 의료진, 능력자 합동 출동 강제- 현장 지휘관에게 긴급 판단 권한 부여- 약물 및 원격 조종 여부 우선 검사- 폭주자를 우선 구조 대상으로 분류- 정화 가능성 확인 전 사살 금지- 대응 기록 외부 감사- 피해자 가족과 의료진의 이의제기 절차 마련현수는 신설된 폭주대응본부의 현장지휘관 자리를 제안받았다.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 정도 변화면 나름 개선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김진서
112며칠 뒤, 국회의사당.성심과 경찰청, 능력자관리청의 결착에 대한 청문회가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현수와 승아, 의료진, 성심 현장대장, 구조된 능력자들이 나와 차례로 증언했다.현수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현장 보고를 꾸준히 올렸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성심의 자료만 받아들이고 제 보고는 무시했습니다.”승아는 시선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절대로 성심 전체가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상층부,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구조된 능력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준우 님 아니었으면 저희는 전부 폭주해서 괴물이 되거나 버려져 죽었을 겁니다.”마지막 순서로 준우가 증언대에 섰다.준우는 제도에 대한 비판 대신 자신이 직접
111김진서의 체포가 확정되자, 정부는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자신들은 다르다는 외침이었다.어찌 보면 손바닥 뒤집기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상징성을 지우기 위함이었다.경찰 특수본은 성심 길드는 물론 능력자관리청과 경찰청을 압수수색했다.특수본에 들어간 현수와 경찰 실무자들 역시 제0관제센터를 공식 압수수색하고 모든 기록을 확보했다.체포된 일부를 제외한 성심 현장대원들은 피해자 구조에 참여했다.그 수가 워낙 많아 성심 전체가 달라붙어도 힘에 부쳤다.준우는 정화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였지만, 곁으로 다가온 혜진의 어깨를 빌려 겨우 걸음을 옮겼다.관제센터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수많은 카메라와 생존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준우는 시선을 내리깐 채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기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밀어 넣으며 급하게 물었다.
015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감도는 병실 안, 공기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계약서는 생각보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손에 들어왔다. 누군가 치밀하게 숨겨놓은 기밀이라기엔, 사본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뿌려질 만큼 관리가 허술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 조항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듯했다.준우와 채은은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 얼굴색은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현수는 종이 더미를 넘기며 한 글자씩 곱씹듯 읽어
014지하 주차장의 무거운 공기가 SMG의 총성에 찢겨 나갔다. 채은은 바닥을 구르듯 달렸다. 연신 방아쇠를 당겼으나, 금속음만 요란할 뿐 갑옷의 표면에는 긁힌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채은이 리볼버를 쥐고 기회를 엿보던 준우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013현수가 노트북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 상체를 숙였다. 둔탁하게 울리던 트랙패드 클릭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일정하고 집요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무언가 낚아챘다는 신호였다.준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적 속에서 현수
012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정신을 깨웠다. 감겼던 눈꺼풀 사이로 하얀 천장이 쏟아졌다. 익숙한 천장이었다. 준우는 습관적으로 옆을 살폈다. 역시나 재범과 채은, 그리고 혜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반복되는 입원, 되풀이되는 풍경. 준우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누군가에게는 지긋지긋한 응급실의 연장이겠지만, 사선을 넘나든 뒤 마주하는 이들의 얼굴은 매번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다들... 괜찮아요?"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던 채은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고, 무릎 위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