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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 K-187(1)

Penulis: 최코리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5-06 17:15:59

013

현수가 노트북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듯 상체를 숙였다. 둔탁하게 울리던 트랙패드 클릭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일정하고 집요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무언가 낚아챘다는 신호였다.

준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적 속에서 현수의 호흡만 조금씩 가빠졌다.

“뭐라도 나옵니까?”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수가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데이터가 뭉텅이로 엮여 있어서…. 분류 좀 하겠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혜진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댔고, 재범은 굳은 표정으로 현수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채은만이 참지 못하고 현수의 의자 뒤를 서성거리며 노트북 화면을 훔쳐보려 애썼다.

현수가 마른세수를 한 뒤 노트북을 준우 쪽으로 밀어놓았다. 

“이름이 없어요. 전부 식별 코드로만 되어 있습니다.”

화면 가득 검은 바탕에 흰색 코드들이 비가 내리듯 나열되어 있었다. 준우는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B-412, F-389, R-502….’

앞글자는 직관적이었다. ‘B(Body)’는 신체 강화나 변이형, ‘F(Fire)’는 화염 계열, ‘R(Recovery)’은 재생이나 치유였다. 문제는 그 뒤에 붙은 숫자였다. 관리청의 분류 체계에서 세 자릿수 번호는 대개 등급 외이거나 하위권에 머무는 이들을 뜻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랭커들이 아니었다. 던전 언저리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하위 길드원들, 혹은 당장 내일의 약값을 걱정하며 몸을 던지는 생계형 능력자들. 화면을 가득 채운 코드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절박한 생존 기록처럼 보였다.

준우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사람들, 전부 사지로 밀어 넣은 거군요.”

노트북을 건네받은 혜진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옆에서 같이 화면을 보던 채은이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고등급은 단 한 명도 없어? 이건 그냥 쓰고 버릴 소모품 취급이잖아. 갈아 넣기 딱 좋은 사람들만 골라 모았네.”

재범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명단의 비정상적인 구조를 꿰뚫고 있었다. 그때, 현수가 다시 화면 한 구석을 가리키며 멈칫했다.

“어, 여기 이상한 게 하나 섞여 있는데요? 한 명만 상태값이 ‘미확인’… 아니, ‘실종’으로 떠요.”

“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K-187입니다.”

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K 계열은 흔치 않았다. 기억을 더듬던 재범이 대신 입을 열었다.

“기사(Knight) 타입일 겁니다. 무장 투영이나 방어 특화 계열이죠. 100번대면 이 명단에서는 그나마 전력이 되는 수준이었겠네요.”

현수가 지도를 띄우며 덧붙였다. 

“마지막 접속 위치가 멀지 않아요. 바로 이 근처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좀 더 파보니까 상황이 안 좋네요. 잦은 부상으로 치료비 부채가 상당했고, 장비 수리비 때문에 사채까지 손을 댄 모양이에요.”

“결국 ‘약’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구조였겠지.”

채은이 냉소적으로 뱉었다. 

“약 기운으로라도 버텨야 한 번이라도 더 현장에 나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야 빚을 갚든 밥을 먹든 했을 거 아니야.”

방 안은 다시금 침묵에 잠겼다. 거대한 시스템 아래에서 서서히 깎여나갔을 한 개인의 삶이 코드 하나에 응축되어 있었다. 저 이름 없는 숫자들이 어쩌면 자신들의 미래였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준우는 자신의 팔에 꽂혀 있던 수액 주머니를 보았다. 이미 바닥을 드러내 비어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반창고를 떼고 바늘을 뽑아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맺힌 핏방울은, 그가 가진 치유의 힘 덕분에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가시게요?”

현수가 불안한 듯 준우를 붙잡으려 했지만, 준우는 이미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쉬고 싶었는데, 이 명단을 보니까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이 사람을 찾으면 우리가 쫓는 이 미친 짓의 끝줄기라도 잡을 수 있겠죠.”

현수는 준우의 창백한 안색과 단호한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 말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직감한 듯, 현수는 결국 짧은 한숨과 함께 노트북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가시죠. 대신 무리라고 판단되면 바로 철수하는 겁니다.”

준우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걸쳤다. 닫히는 병실 문 뒤로, 이름 대신 코드로 박제된 이들의 명단이 노트북 화면 속에서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 

조 편성은 효율을 따진 결과였다. 광범위한 시야 확보가 강점인 혜진이 지난 수색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차라리 기동력이 좋은 이들끼리 묶어 수색 밀도를 높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준우와 채은이 한 팀이 되어 대로변을 따라 걸었다.

“준우 님과 둘이 걷는 건 처음이네요. 그나저나 아까 보니까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던데, 점멸 거리가 얼마나 돼요?”

정적을 깬 건 역시 채은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보조를 맞추며 물었다.

“반경 150미터 정도요. 채은 님은 더 빠르지 않나요?”

“저는 전력으로 뛰면 250미터 정도? 속도를 좀 죽이면 500미터까지도 끊어서 갈 수 있어요. 대신 누군가를 붙잡고 이동하는 건 무리예요. 준우 님처럼 힘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준우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엔 그저 날렵해 보이기만 했던 그녀의 기동성이 생각보다 구체적인 제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대화가 이어지려던 찰나, 길 건너 공사 현장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 쓰러졌다! 어이, 119! 빨리!”

둘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전신주 아래,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바닥을 긁으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단순한 발작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사지가 꺾였고, 무엇보다 목줄기를 따라 타고 올라오는 굵직한 검푸른 핏줄이 눈에 띄었다. 

“약 복용자네요. 잠시만요.”

준우가 인파를 헤치고 달려갔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인부들 사이로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남자의 헬멧을 벗겨냈다. 

“능력자입니다. 제가 진정시킬 수 있으니 잠시 물러나 주세요.”

준우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백색광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이마에 손을 얹자, 공기 중에 흩어지던 빛이 응축되며 남자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눈부심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의 광량이었다.

나직한 기계음 같은 이명이 고막을 울렸다. 다행히 복용량이 많지 않았는지, 남자의 피부 아래를 꿈틀거리던 검은 혈관들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격렬하던 경련이 잦아들고 거친 숨소리만 남았을 때, 준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릿속이 핑 돌며 세상이 뒤집혔다. 채은이 다가와 휘청이는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완전히 치료된 건 아닙니다. 구급차 오면 바로 넘기세요.”

얼떨떨한 표정의 인부들을 뒤로하고 준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관자놀이를 누르는 손길이 무거웠다.

“정말 괜찮아요? 안색이 아까보다 더 안 좋은데.”

“뿌리는 못 뽑았으니까요.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채은은 한숨을 내쉬며 준우의 옆모습을 살폈다. 쉴 틈 없이 자신을 갈아 넣어 남을 돕는 이 남자의 고집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이 상황의 끝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로변을 따라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비슷한 증상으로 쓰러진 사람들을 대여섯 명이나 더 마주쳤다. 준우는 그때마다 멈춰 서서 빛을 뿜어냈다. 

결국, 네 번째 환자를 정화하고 난 뒤 준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여자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런 걸 먹은 겁니까? 부작용이 올 거라는 걸 몰랐을 리 없잖아요.”

여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준우를 올려다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를 뱉었다.

“이… 게 없으면… 이번 달… 못 버티니까요….”

여자의 눈이 다시 감겼다. 숨은 안정됐지만 준우의 표정은 더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베푸는 정화가 그저 그들에게 '다음 약을 맞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무력감이 가슴을 찔렀다. 

“대로변이라 더 눈에 띄는 걸까요, 아니면 이미 도시 전체가 이 모양인 걸까요.”

채은의 물음에 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두통은 이제 바늘로 뇌를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변해 있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도시 외곽의 폐공장지대였다. 붉게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창이 즐비한 풍경은 마치 거대한 고철 숲 같았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빈 공터에 메아리치며 고막을 때렸고, 어디선가 금속이 마찰하는 불쾌한 소음이 들려왔다.

채은은 이미 소음기가 달린 SMG를 움켜쥐고 주위를 경계했다. 

“여긴 정말 생명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네요.”

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건 단순한 황량함이 아니었다. 일전에 컨테이너에서 느꼈던, 무언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기분 나쁜 파동이 전신을 훑었다. 

시선이 닿은 곳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계단 아래가 마치 입을 벌린 괴물의 식도처럼 보였다. 

‘저 밑인데…. 하아, 정말이지.’

준우가 리볼버를 꺼내 들며 지하 입구를 가리키자, 채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설마요. 진짜 저 밑으로 가야 한다고요?”

“안타깝게도 제 감이 맞다면요.”

둘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준우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해 어둠을 갈랐다. 축축한 공기 사이로 자신들의 발소리만이 기괴하게 증폭되어 울려 퍼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뼈와 금속이 한데 뒤섞여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까드득, 우드득— 우직!]

“이거… 기계 소리 맞죠?”

“아니요, 메아리 때문에 섞여 들리는 겁니다. 이쪽이에요.”

준우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빛을 비췄다. 그곳엔 기이하게 몸을 비튼 형체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인체의 가동 범위를 한참 벗어난 각도로 팔다리가 꺾여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십니까?”

준우의 목소리에 형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뼈가 돌아가는 소리가 지하 전체를 울렸다. 얼굴이 완전히 뒤로 돌아가 준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준우는 본능적으로 채은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혜진 님한테 연락해요! 빨리! 우리 둘로는 감당 안 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폭주자의 등 뒤로 거대한 외골격이 솟구치며 지하 천장을 박살 냈다. 콘크리트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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