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새벽의 밤을 비추는 천사의 지배 Part 4}
2018년 8월 18일 오후 3시 5분 학교에서는 아직 기도 예배를 하고 있는중인지 안에서는 학생들이 다같이 합창하고 있었다. 경건한 찬송가 소리가 건물 사이를 메아리치며 묘한 위압감을 조성했다. “근데 창고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범준이 그녀에게 물었고 그녀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우리가 1학년때 사용했던 옛 건물 지하에 물품을 따로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범준이 그녀에 말을 듣다 문득 궁금한게 떠올랐다. “근데 그걸 너가 어떻게 알아?” “히히!” 아영은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웃음 속에는 미처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비밀들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범준을 뒤로하고 앞장 서 옛 건물로 뛰었다. 건물이 많이 허름했지만 안에는 여전히 추억들이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먼지 쌓인 복도, 빛바랜 벽보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 경치는 여전히 싱그러웠지만 이곳의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있었다. “이런 곳에 창고가 있는지도 몰랐네..” 범준은 문득 이곳이 왜 학생들의 접근이 금지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고 이내 거미줄로 뒤덮인 철문과 마주친다. 철문 중앙에는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거대한 자물쇠가 묵직하게 걸려있었다. “음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어서 그런지 자물쇠가 생각보다 거대하네.” 아영이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었다. 간단한 가위로는 어림도 없겠다는 듯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다. “이젠 어떻게 하려고.” “너 망 좀 봐야겠다.” 아영의 눈이 범준을 향해 번뜩였다. “뭐..?!” 그는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으아아아악!” 흡사 모든걸 잃은 사람처럼 간절한 범준의 비명이 옛 건물 본관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주변에서 청소하시던 인상 좋은 관리인 아저씨 한 분이 범준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저씨의 눈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학생 이곳에서 왜 소리를 지르고 있나.” “아저씨 저 중요한 필기 노트를 잃어버린거 같아요. 시험도 코 앞인데..” 범준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박한 연기를 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연기는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아영의 살기 등등한 눈빛에 이끌려 하는 수 없이 연기투혼을 펼치는 중이었다. 범준은 노트 핑계를 빌미로 건물을 관리하시던 아저씨를 붙잡았고 그 틈에 아영이가 분리수거장에서 가져온 오래된 녹슨 팬치로 자물쇠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탕!-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굵은 쇠사슬이 뚝 끊어진다.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정확하게 움직였다. 타닥하는 철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렸고 아영은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보다 더 지저분해졌네..” 콧속으로 케케묵은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거미줄과 빽빽히 놓인 서류들을 헤집고 안쪽으로 들어간 그녀가 전등 스위치를 켰다. 역시 오래되서 그런지 전등은 한번에 켜지지않았고 두번 정도 깜빡이다 침침한 불빛이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자 시작해볼까!” 아영의 표정은 진지하게 모험을 펼치는 아이 같았다. 이곳이 바로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보물창고였기에. 그녀는 미리 가져온 노트북으로 창고 안에 있던 먼지 쌓인 구식 노트북과 연결시켰다. 노트북도 오래되서 작동하는데 약간 애먹었지만 다행히 정상적으로 작동하였고 파일들이 손상없이 백업되었다. 엄청난 양의 오래된 데이터들이 아영의 노트북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속에는 학교의 역사와 함께 묻힌 비밀들이 잠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푸른십자회라..” 백업된 데이터 내용을 차례차례 넘기던 도중 푸른십자회란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무려 '신부님들만 접근 가능한 비밀 문서'라는 파일명이었다. “여기 있다!” 아영의 손가락이 화면을 격렬하게 가리킨다. “푸른십자회 비밀리에 감춰진 성스러운 구마집단..?” 푸른십자회에 대해 처음 알게된 아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방금 읽은 믿을 수 없는 문구에 대한 충격으로 커졌다. 마치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단순한 내용이 아닌걸 직감한 그녀는 짐을 챙겨 창고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하던 그때.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거야!” 창고 문 너머에서 분노로 떨리는 관리인 아저씨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범준이도 있었다. “미안.. 붙잡아둔다는게 그만 내가 잡히고 말았네..” 범준은 관리인 아저씨에게 손목이 잡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으이고 바보같은놈..” 아영은 혀를 쯧쯧 차며 범준을 나무랐지만 그의 어색한 웃음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사과가 담겨 있었다. 둘은 그렇게 관리인 아저씨에게 붙잡혀 학교로 끌려갔고 교수님과 신부님에게 구박과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 “아 귀 떨어져나갈거같아..” 범준이 오른쪽 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의 귀는 신부님의 잔소리에 정말로 떨어져나갈 것처럼 벌개져 있었다. “그래도 필요한 정보는 찾아서 다행이다..” 아영은 푸른십자회와 관련된 자료만 모아 폰으로 다시 옮겼다. 아직도 그녀의 손은 자료를 넘길 때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오긴 했나 보네 없을 줄 알았는데.” “나도 생각보다 놀랐어 이렇게 베일에 쌓여 있을정도이니..” 기숙사로 돌아와 아까 다 보지 못했던 내용들을 같이 확인한다. “푸른십자회 일원들이 소개되어 있는거 같은데 저거 한번 클릭해봐.” 범준의 말에 따라 아영은 푸른십자회 일원 소개창을 클릭했고 그들은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구범주 사제..?” “이 분 세주 아버님아니야..?” 아영이 놀란 얼굴로 범준이에게 말했다. “에이 설마.. 왜 세주 아버님이 푸른십자회 일원이야..” 범준은 현실을 부정하려고 두 손으로 작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뇌는 이 믿을 수 없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버거워할 정도였다. “아니 잘 생각해봐 세주가 푸른십자회에 대해 찾아보라고 한것도 어쩌면 자신과 연관되어 있을 수 도있다는 말이잖아.” “듣고보니 그렇네. 예전에도 한번 찾아봐 달라고 하긴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나와서 그냥 장난치는줄 알았거든.” 범준의 얼굴에는 그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지며 깊은 깨달음과 함께 심상치 않은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진짜 만약에 여기에 적힌 내용이 맞다면 세주에게 말하는게 맞겠지?” 그녀가 혼자 결정을 못하겠는지 그에게 재차 물었다. 아영의 목소리에는 책임감과 묵직한 부담감이 담겨 있었다. “나도 말해주는게 맞다고 봐.” 범준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오랜 친구의 가족사가 심상치 않은 비밀과 엮여 있다는 사실이 그를 심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2018년 8월 18일 오후 7시 37분, <이탈리아 -바티칸시티> “이사벨양 화면 좀 확대해주겠나.” “넵 아가토 신부님.” 아가토 사제의 부탁으로 시지크 사건현장의 모습을 젊고 유능한 여수도사 이사벨이 확대해 대형스크린에 비췄다. “영혼이 남아있어..” 아가토 사제의 말에 그곳에 있던 모든 수도자들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수도자들의 눈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지 경외감과 함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저희한테는 보이지 않는것같습니다..” 한 수도자가 입을 떼며 말했다. 아가토 사제가 본 영혼은 시신들 사이에서 아직 머물러있었다. “저 영혼의 본체가 숙주로 삼을 인간을 정하고 있었던것같군요.” “영혼이 두 시신 안에서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는것을 보면요..” 아가토 사제의 목소리에는 그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이성적인 면모가 엿보였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나머지 자료도 찾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아가토 사제가 책상을 탁 치자 수도자들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회의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고 수도자들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영혼이 아직까지 머물러 있다는 말은 저건 보통 잡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시신의 몸에서 번개에 맞은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제 카이로의 날씨를 봐서는 도저히 말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사벨 옆에 있던 날렵한 인상의 수도사 메르틱이 아가토 사제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이 보고한 사실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보통 잡령이라면 사물에 깃든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도 번개는 더욱 더..” 아가토 사제의 뇌리는 봉인된 악마에 대한 오래된 기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왠지모를 압박감과 불안함에 몸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미친듯이 쿵쿵거렸고 귓가에는 불길한 예감이 속삭였다. “괜찮으십니까..!?” 이사벨이 아가토 사제에게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역력했다. 아가토 사제가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머리가 잠깐 어지러워서 휴식을 취하고 올테니 이사벨양은 메인으로 나머지 수도자들을 보조해주십시오..” 아가토 사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책임감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비장함이 섞여 있었다. “어서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십시오..” 아가토 사제는 잠시 성당 본관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아가토 사제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내면의 고통은 고스란히 몸을 받친다. “아버지.. 저 자꾸 그 날의 기억들이 떠올라요..” 그의 뇌리에는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끔찍한 사건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간다. 봉인이라 믿었던 악마의 마지막 발악, 그리고 아버지가 마주했던 절망적인 전투. 그때 보았던 불꽃의 색은 아직도 그의 망막에 선명했다. “분명 이 사건도 쉽지 않을거같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확신과 함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아가토 사제의 내면이 비춰졌다. 그는 늘 강인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홀로 남은 방 안에서만큼은 인간적인 나약함이 드러났다. “아들아..” 희미하면서도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가토 사제에 귓가에 멤돈다. 마치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따뜻하고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너가 남은 이들의 기둥으로서 푸른십자회와 나머지 수도사들의 버팀목이 되어야만 한단다.” 그의 아버지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제였지만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졌고 결국 홀로 그 짐을 견뎌냈었다. 따뜻한 손길이 그의 어깨에 느껴진다. 환상 속의 손길이었지만 그 온기는 아가토에게 위로와 동시에 강력한 의무감을 주었다. “넌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니···” 그 말은 아가토에게 힘을 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았다. 그도 사건을 뒤쫒으며 보통 잡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작 알고있었다. 푸른십자회 일원들과 모여 회의를 하던 도중에 자료로 확인한 오라 또한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넌 알고있단다 그것의 정체를..” 환영 속의 아버지는 아가토 사제의 생각을 정리시킨다. 숨겨왔던 진실을 마주하라는 듯 그의 내면을 흔들었다. 마지막 말이 메아리치며 그의 귓가에 들렸고 아가토 사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에서 아버지가 정리한 노트를 꺼내 펼친다. 노트의 낡은 표지에는 기이한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손때 묻은 종이에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솔로몬의 72악마..” 그 제목을 읽는 아가토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 노트는 생전 아가토 사제의 아버지가 직접 푸른십자회에서 활동하며 마주친 악마들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적혀있는 역사적인 보물이었다. 그 기록들 속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마들의 힘과 그것들을 봉인하려 애썼던 인간들의 절망적인 전투가 생생하게 적혀져 있었다. 아가토는 어린 시절부터 이 노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결코 읽어보라 권하지 않았다. 아가토 사제는 노트를 차례대로 넘겼고 그 놈과 마주하게 된다.. “솔로몬의 72악마 중 34위 푸르푸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자 찢어지고 바랜 악마의 형상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그는 눈앞의 현실과 과거의 기록이 불길하게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수천 년 전, 신이 지상에 강림한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악마들에게 가장 불경한 날이었겠지만. 신은 천계의 법을 더럽힌 사악한 이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악마로부터 보호하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루치페르는 지옥의 백작 푸르푸르를 지상에 보내 신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푸르푸르는 인간 세계로 내려와 무자비한 학살을 시작한다. 그의 손짓 한 번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푸르푸르를 신은 질서를 더럽힌 그에게 천벌을 내렸고 그는 가까스로 소멸될 위기는 막았지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신의 보조를 맡던 대천사들은 그가 약해진 틈에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버렸고 그의 영혼은 신성한 힘이 깃든 푸른 영대 속에 봉인되었다. 완벽한 힘을 쓸 수 없게 된 푸르푸르는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푸른 영대 속에서 울부짖었고 그 때문인지 오래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대의 색이 더욱 진해졌다는 소문도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지만 기록에 따르면 푸르푸르의 영혼이 봉인된 푸른 영대가 불태워질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가토 사제의 아버지 세대 전부터 직접 작성해오신 사제들의 내용으로 마음이 어리석은 한 사제의 몸을 숙주로 삼아 푸른 영대 속에서 탈출한 푸르푸르가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갇혔었던 영대를 불로 태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신의 지배와 천사의 은총을 받은 지혜로운 사제의 의해 저지당하며 다시 봉인당하고 만다. 그 사제가 직접 싸우면서 얻은 정보로는 푸르푸르는 힘을 완전히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물리적인 공격 위주보다는 말로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홀리는 데 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만약 그가 완전한 힘을 가지게 된다면... 이 세상은 하루아침에 멸망할 것이다. 아가토 사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거에 기록된 위기가 지금 눈앞에 재현되고 있었다. 그는 노트를 덮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테이레시아스의 계백 Part 4}발생했던 일들을 정리한 이사에르 부제는 라이덴 사제와 미로 속으로 발을 들인다.“이렇게 된 이상 무작정 헤매는 것보단 방법을 찾아야겠어요.”이사에르 부제가 말했다.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맞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라이덴 사제가 앞장서며 벽면에 오른손을 짚었다.손가락으로 벽의 재질을 확인하며 조금씩 쓸어내리는 그의 표정에는 낯익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기색이었다.“예전에 일본 여행 중에 들렀던 미로 터널이 이곳과 구조가 비슷하네요.”“그런 곳까지 다녀보셨어요?”이사에르 부제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그때는 그냥 관광이었는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요.”라이덴 사제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한쪽 벽면만 손으로 짚고 이어진 길을 걸으면 결국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원리였다.단순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다.“이 방법이면 언젠가는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그의 말에 이사에르 부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한다.이사에르 부제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려다 멈칫하였다.“시간이..!”시계의 초침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라이덴 사제님 이것 좀 보세요.. 시간이 멈춰있습니다.”그가 손목을 내밀었다.라이덴 사제는 그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멘탈이 나간다.자신의 시계도 꺼내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초침이 정지해 있었다.“정상적인 공간은 아니군요…”그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멤돈다.스르륵
{테이레시아스의 계백 Part 3}박쥐 떼가 지나간 자리에는 차갑고 축축한 침묵만이 남았다.“다들 괜찮으신가요..?”아가토 사제가 흐트러진 램프 불빛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손등에는 박쥐 날개에 스친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네.. 놀라긴 했지만 괜찮습니다.”이사에르 부제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답했다.네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계단 끝에 도달하자 눈앞으로 더욱 깊은 어둠이 펼쳐진다.램프 하나의 빛으로는 도저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이었다.“여기가.. 지하실 전부인가요?”라이덴 사제가 물었다.목소리를 낮췄음에도 그 울림이 벽을 타고 이상하리만치 길게 퍼져나갔다.“기록에는 이 아래 예배당 하나가 더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자베르안 수도사가 답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어둠 속 어딘가에 있었다.발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한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온다.벽에 걸린 낡은 촛대들은 오래전에 불이 꺼진 채 방치되어 있었고 그 위로 거미줄이 두껍게 엉겨 있었다.이사에르 부제는 자신도 모르게 라이덴 사제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았다.그 손길에 라이덴 사제는 그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그렇게 얼마나 또 걸었을까, 하나로 이어졌던 통로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넓은 공간으로 변해있었다.“이상하네요.. 지도에는 이런 갈림길이 없었는데..”자베르안 수도사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그 순간이었다.콰앙-!!발밑에서부터 시작된 굉음이 지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천장에서 돌가루가 쏟아지고 벽
{테이레시아스의 계백 Part 2}2019년 10월 4일 오전 5시 44분(동일시), 아영은 책상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하고 있던 수업 노트를 손으로 덮고 긴 한숨을 내쉰다.책상 위 스탠드 불빛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고 창밖은 태양이 떠오르기 전이었다..그녀에게도 최근 들어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가슴 한편에 묻어 세주와 범준이는 알지 못한다.처음으로 일어난 기이한 일은 그녀가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던 도중이었다.밤공기가 유독 축축했고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그림자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가로등이 비추는 길을 따라 걷다 옆에 있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기분 나쁜 발소리가 들려온다.아영은 깜짝 놀라 품에 안고 있던 책과 노트북을 놓칠 뻔하였다.“범준아 좋은 말로 할때 나와라..!”그의 장난으로 생각한 아영은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리가 난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을뻔하였다.바스락 바스락여러 명의 발소리가 동시에 들리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확 끼친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숙사까지 내달렸다.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야생 동물이나 친구들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체는 확인하지 못해 이 일은 미궁 속으로 사라진다.두 번째 일은 그녀가 기숙사에서 양치하던 도중 욕실 위 작은 창문에서 누군가의 노크 소리를 들은 일이다.그날 밤도 유독 조용했다.물소리와 칫솔질 하는 소리만이 좁은 욕실 안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 정적을
{테이레시아스의 계백 Part 1}2019년 10월 4일 오전 5시 23분, “자베르안 수도사님 반갑습니다.”경호원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 한명이 차에서 내린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네 반갑습니다.”“근데 옆에 분들은 누구시죠?”수도사 옆에 같이 타있던 나머지 사람들의 정체를 묻는 그였다.“저는 아시리스 사제의 아들 아가토 입니다.”아가토 사제가 흐트러진 복장을 말끔히 정돈하고 인사를 올린다.“아..! 아시리스 사제님이라면 전설적인..”놀란 경호원의 눈치를 본 아가토 사제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일을 키우지 않았다.어찌저찌 성당 안으로 들어온 네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속죄의 구슬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뜬것 치고는 사람들이 없네요.”라이덴 사제가 궁금증을 입 밖으로 뱉었다.성당 안은 고요했다.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새벽빛이 스며들었지만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내부는 촛불 몇 개만이 흔들리며 벽면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오래된 향냄새와 눅눅한 돌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아무래도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거 같네요.”아가토 사제가 말했다.“사실 속죄의 구슬을 처음 발견했다는 수도사는 지금 행방불명되어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자베르안 수도사가 입을 열었다.“네!? 그러면 그 구슬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이사에르 부제가 당황한 말투로 그에게 답한다.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성호를 그었다.“저희도 모릅니다.. 단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밖에는…”자베르안 수도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그의 시선이 잠시 제단 쪽으로 이동하였다가 바닥으
{행운의 손길은 동쪽에서 Part 7}밤이 되어 세주와 이사벨은 한적한 호텔로 들어간다.서로의 발걸음은 미묘하게 달랐다.이사벨의 걸음은 가볍고 여유로웠지만 세주의 걸음에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아가씨가 엄청 아리땁고 예쁘네요. 남자친구분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호텔 카운터에서 일하던 중년의 아주머니께서 이사벨에게 키를 건네주며 반겼다.“그러게요ㅎㅎ”이사벨이 미소를 띠자 세주는 벙찐 채 숙연해졌다.귓불이 조금씩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애써 표정을 굳힌다.“사장님 저희 그런 사이 아닙니다.”선을 그으며 즐거워 보이는 그녀를 데리고 첫 계단을 밟고 올라서는 그였다.뒷목이 뻐근해지는 것 같아 손으로 슬쩍 문지른다.“아직 남자친구라는 단어는 좀 싫은가 봐??”이사벨이 세주를 떠보며 물었다.장난기 어린 눈빛이 그의 얼굴에 도달한다.“그게 사실이잖아..”세주는 시선을 회피하며 계단 손잡이만 바라보았다.“때로는 거짓이 사실보다 더욱 가치 있을 수 있거든?!”4층까지 힘겹게 올라간 두 사람은 키를 403호 방 도어락에 입력하며 문을 열었다.띠링문이 열리고 눈 앞에는 거대한 침대 하나가 보였다.“침대가 하나뿐이네.. 어쩔 수 없지.”이사벨이 심각한 고민을 하는 척 인상을 찡그렸다.“내가 밑에서 잘게 누나가 침대에서 자.”입구 근처에 위치한 화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세주가 입을 열었다.등 뒤로 문을 닫는 손길이 다급했다.“흐음..”“내가 왜 따라서 호텔로 들어온거지..도대체 이유가 뭐야..?진짜 누나가 걱정돼
{행운의 손길은 동쪽에서 Part 6}2019년 10월 3일 오후 1시 19분, “어때요.. 제법 그럴싸하죠?”최아랑은 개인 수영장에서 비서인 임다미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물결이 잔잔히 흐르는 수영장 위로 그의 여유로운 미소가 비쳤다.“네 기이한 느낌이 들어요.”비서는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춘다.목소리는 굵고 단결하였다.“근데 다미씨 제가 편한 옷으로 입으라고 말하지 않았나요??”아랑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지적하며 질문을 건넸다.나른한 말투와 달리 눈빛에는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최대한 얇은 옷으로 입고 왔습니다.”그녀는 민소매 하나를 걸친 채 그의 옆에 누워있었다.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절 자극하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아직 깨우치지 못하였나요?”아랑은 그녀가 입고 있는 나시를 손으로 찢으며 몰아붙인다.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다미는 고개를 숙였다.“됐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세요.”그는 그녀의 찢긴 옷 내부의 속살을 훑어보다 질렸는지 임다미를 밖으로 내쫓았다.벌레를 치우는 무심한 인간처럼.“하아.. 버러지 같은 인간 주제에.”아랑은 머리를 물에 처박으며 생각에 잠긴다.물속에 잠긴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은 냉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그래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구나..’그는 손을 물에다 휘저으며 오라를 내뿜었다.스르륵수면 위로 서늘한 기운이 번져 나갔다.“군주님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