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 상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띤 채 대꾸했다."오공주 전하, 이연령은 지금 중죄인입니다. 태후 마마께서 한시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 엄명을 내리셨지요. 혹여 불미스러운 일라도 생기면 소인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건방진 것! 내가 저 아이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단 말이냐?"남궁연은 방금 서 태후에게 받았던 수모와 분노를 소 상궁에게 고스란히 쏟아냈다."너는 그저 태후 곁을 지키는 개에 불과하거늘, 감히 내 앞에서 위세를 떠느냐!"오랜 세월 황궁에서 이런 모욕을 겪어본 적 없는 소 상궁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는 그 자리에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섰다.화를 참지 못한 남궁연이 다시 쏘아붙이려 하자, 이연령은 다급히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소 상궁님은 오랫동안 태후 마마를 모시며 그분의 굳건한 신임을 받는 분이야. 굳이 심기를 거스를 필요 없어."남궁연은 화를 억누르고 돌아서서 이연령과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아주 은밀한 목소리였다.소 상궁은 힐끗 바라만 볼 뿐, 두 사람이 무슨 작당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반 시진 가까이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자리를 뜨기 전, 남궁연은 황자를 설득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이연령을 화친 상대로 데려가겠다고 단단히 약조했다.예전 같았으면 끔찍하게 여겼을 화친이었지만, 이제는 제발 보내달라고 매달려야 할 처지였다.이연령에게 화친은 목숨을 건질 유일한 길이었다.자리에서 일어난 남궁연은 밖으로 향하며 소 상궁을 매섭게 흘겨보았다."주제도 모르는 천한 것 같으니!"남궁연이 자리를 뜨자 이연령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녀는 남궁연과는 달리 얌전하게 소 상궁에게 고개를 숙였다."상궁, 노여움을 푸십시오. 오공주는 어릴 적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안하무인일 뿐, 악의를 품고 상궁을 비하한 것은 아닙니다."남궁연과 대화를 나누며 이연령은 유지영이 자녕궁에 들어와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충격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하지만 지금은
소 상궁은 태후가 어찌하여 이연령을 자극하는 말들을 전하라 명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태후의 뜻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기에, 명을 따른 후 서둘러 자녕궁으로 돌아와 시중을 들었다.서 태후는 수수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한 손에는 염주를 굴리며 다른 한 손에는 경전을 쥐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소 상궁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태후 마마, 오늘따라 어쩐 일로 경전을 보고 계십니까?"서 태후는 경전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요 며칠 마음이 산란하여 불경을 몇 구절 읽었더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구나."과거의 태후라면 경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지만 오늘 그녀의 얼굴에는 제법 경건한 기색마저 감돌았다."지영이의 출산일이 며칠 남지 않았지?"최근 들어 서 태후가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는 일이었다. 태후는 연일 현왕부로 사람을 보내 유지영의 상황을 살피게 했고, 도성 최고 명의인 장 태의 등에게 도성 밖 출입을 금하며 언제든 대기하라 명했다."현왕도 곁에 없는데, 출산이라는 큰 관문을 혼자 맞이하게 되었구나."서 태후는 내친김에 유지영을 아예 자녕궁으로 불러들일 생각도 하고 있었다.생각할수록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결국 태후는 소 상궁에게 명했다."자네가 직접 현왕부에 다녀오거라. 곁에서 출산을 지켜보지 않고는 도무지 내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지영이에게 자녕궁으로 들어올 채비를 하라 일러라."여인의 출산은 생사를 넘나드는 중대사였다. 사소한 실수라도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를 수 있었다.소 상궁은 즉시 명을 받들었다.해 질 무렵, 유지영이 자녕궁에 당도하자 서 태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후는 궁인들을 시켜 편전을 안팎을 깨끗이 정리하게 했다.처음에 운청과 운민은 낯선 환경에 잔뜩 경계했으나, 유지영이 그들을 다독였다."태후 마마께서는 나를 해치시지 않아. 안심하렴."두 시녀는 그제야 경계를 풀었다.서 태후는 산만 한 유지영의 배를 보며, 하루 세 번씩 태의를
"이 장군을 사살하라 명하신 분 역시 태후 마마이시다."소 상궁이 말했다.이연령에게는 조금 전 삼킨 천기인보다 이 말이 더 큰 충격이었다.그녀가 경악하여 눈을 부릅뜨자, 소 상궁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다만 당시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지 얼마 안 되어 기반이 위태로웠다. 나라 대장군의 치부가 드러나면 나라 전체에 큰 치욕이 될 터이니, 폐하와 태후 마마께서 이 장군의 사인을 묵인하셨던 것이다."이제 건양제는 굳건한 권력을 쥐었으니 더 이상 진실을 덮어둘 필요가 없었다."태, 태후 마마께서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고요?"이연령은 목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치솟았다.소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태후 마마와 폐하께서는 진작부터 다 알고 계셨다. 널 곁에 두고 살뜰히 거둔 것은, 그저 변방 장병들을 안심시키고 폐하를 위해 민심을 수습하려는 목적이었을 뿐이지."이연령은 잿빛으로 변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소 상궁을 바라보았다.'아니, 그럴 리 없어!'전생에는 분명 이런 일이 없었다."거짓말!"이연령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소 상궁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비웃었다."이 말도 모두 태후 마마께서 네게 전하라 하신 말씀이다.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다. 마마께서는 진심으로 널 화친 공주로 보내려 하셨다. 네가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말이지."말을 마친 소 상궁은 차갑게 뒤돌았다. 이연령은 그녀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태후가 날 이용한 것이라면, 나와 똑같은 무장 가문의 여식인 유지영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그 말에 걸음을 멈춘 소 상궁은 고개를 돌려 이연령을 바라보았다. 시선에는 네가 어찌 유지영과 비교하려 드느냐는 짙은 경멸이 서려 있었다."역시 황가에는 진정한 정이 없다더니! 유지영이 그토록 쉽게 증거를 손에 넣은 게 이상했었는데 결국 그년도 황실에 철저히 이용당한 것뿐이네요. 하하."이연령은 달관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언젠가 유지영도 나와 똑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겠죠!"보다 못한 소 상궁은 이연령을 쏘아보며
자녕궁 내전.해독제를 마신 서 태후는 한결 안색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영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속이 깊고 주도면밀한 아이였어.""태후 마마, 또 은근슬쩍 자기자랑을 하시는 겁니까?"소 상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마마의 성정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으니 영민하고 사려 깊은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다소곳하다가도 나서야 할 때는 범상치 않은 기개를 보여주니 말입니다!"유지영에 대한 칭찬이 이어질수록 서 태후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오늘 그 아이 덕분에 실로 거추장스러운 골칫거리들을 말끔히 치워냈지."과거 선황제가 승하하고 건양제가 갓 황위에 올랐을 무렵, 민심은 흉흉하고 외적이 압박해오던 위기의 순간에, 이 장군은 건양제의 어명을 밥 먹듯이 무시하며 방자하게 굴었었다."어떤 일은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터뜨릴 때를 기다릴 뿐이지."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서 태후의 시야에 다급히 걸어오는 건양제의 모습이 들어왔다.태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건양제는 그제야 굳었던 어깨에 힘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 태후가 가볍게 손짓하자 곁에 있던 나인들이 모두 물러났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막 대인 일가가 하옥되었다 들었습니다.""그자는 과거 연이은 패전으로 진작 목이 달아났어야 할 죄인입니다. 다만 처형할 시기가 아니어 살려두었으나, 십여 년간 그자 역시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살아왔을 터. 살려둔 것 자체가 상이자 벌이었지요."건양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어마마마, 어찌하여 옥체를 담보로 이토록 무모한 도박을 벌이셨습니까."서 태후는 조금도 괘념치 않는다는 듯 덤덤히 대답했다."이 장군의 부장들은 충성심이 대단한 자들입니다.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이 폐하의 처분에 진심으로 굴복하게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잠시 후, 건양제는 자리를 털고
그때 소 상궁이 내전에서 걸어 나왔다."폐하, 방금 태후 마마께서 이 장군의 만행을 전해 들으셨습니다. 폐하께 당장 연령 공주의 작위를 거두고 화친 명을 취하하라 하셨습니다. 화친 공주는 추후 다시 간택하자고 하셨습니다."건양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안 됩니다!"이연령은 포박을 뿌리치고 발버둥 치며 애원했다."폐하, 이 모든 것이 사실일 리 없습니다! 저는 기꺼이 화친을 가겠습니다. 부디 지난날의 정을 참작하시어 저를 남이국으로 보내주십시오!"건양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이연령을 걷어찼다. 그러고든 벌레를 보듯 역겨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끌어내 가두라 명했다."태후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다들 이만 물러가거라."신하들은 건양제의 뒤를 따라 조용히 자리를 떴다.자녕궁 내전.서 태후는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유지영을 본 그녀는 안쓰러운 얼굴로 물었다."몸도 무거운데 어찌 네가 직접 왔느냐?""태후 마마께서 걱정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태후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서야 유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낮 유영 군주와 담소를 나누던 중 돌연 안색이 변한 유영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그제야 서 태후가 중독되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어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유영 군주가 입궁한 뒤, 유지영은 이 장군의 체면을 봐서 이연령이 또다시 처벌을 피할까 염려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장웅을 데리고 입궁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이 장군의 일에 수상한 내막이 있다는 건 어찌 알았느냐?"서 태후가 물었다.유지영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아버님께서 과거 이 장군의 병력 배치도와 전황 보고서를 검토하시다가, 승전은 부풀리고 불리한 전황은 은폐한 흔적을 발견하셨습니다. 하여 은밀히 뒷조사를 시작하셨지요. 하오나 뚜렷한 단서가 없어 고심하시던 차에, 불쑥 남궁연이 화친을 명분 삼아 현왕부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이연령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그때 참으로 이상하다 여겼습니다. 한 명은 경
장웅의 말의 말에 머리가 뗑해진 이연령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아닙니다……."그녀가 막 반박하려던 찰나, 상 내관이 재빠르게 다가가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건양제는 음산한 얼굴로 호통쳤다."계속 말해보거라!"장웅은 바닥에 머리를 찧고는 다시 품속에서 이름이 빼곡히 적힌 자백서 한 장을 꺼냈다. 각 이름 위에는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이것은 당시 이 장군을 사살한 자들의 명단입니다."수십 개의 이름이 눈앞에 드러났다.건양제는 명단을 훑어보더니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어찌하여 이제서야 이 명단을 내놓는 것이냐?""폐하, 소장은 본래 성급하게 적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두 달 전, 그 짐승 같은 놈의 딸이 공주로 책봉되어 남이국으로 화친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성으로 향했고, 수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천만다행으로 현왕비 마마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습니다."장웅은 자초지종을 차분히 설명했다. 명백한 물증 앞에 더 이상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폐하! 그 도둑놈의 딸이 어찌 남이국과 화친을 맺을 수 있단 말입니까!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장웅은 건양제를 향해 쉼 없이 이마를 찧었다. 쿵, 쿵.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전각을 울렸고, 그의 이마는 금세 피멍으로 붉게 물들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연령을 위해 자비를 청하던 부장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그들이 이 장군에게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배신하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수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내몰고 군자금을 빼돌린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였다.그들은 더 이상 이연령을 위해 나설 면목이 없었다.이연령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발버둥 쳤지만, 입이 틀어막힌 탓에 앓는 소리만 낼 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폐하, 그 짐승을 위해 두 아들을 낳아준 여인은 남이국 황실의 핏줄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이국 오공주가 그 여인을 고모라 불러야 합니다!"장웅이 덧붙였다.그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