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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레몬과 향수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

“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

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

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

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

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저택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갔다.

유지영이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홍주가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노부인 곁의 고씨 어멈께서 오셨는데, 아가씨께서 일어나시는 즉시 노부인 처소로 오라 하셨답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어제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할머니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씻어 단장한 뒤 유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그러다 문 앞에서 송씨와 유선주를 마주쳤다.

유선주는 은은한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송씨는 푸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딸과, 아직 젊은 시절의 미모가 남아 있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양어머니인 담혜정이 죽은 뒤 큰댁에는 안주인이 없었기에, 유국공부의 집안 살림은 거의 송씨가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송씨는 그녀를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영아, 숙모가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만, 세자에게 파혼당했다고 시녀들에게 화풀이하고 그것도 모자라 팔아버리겠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유지영은 문지방을 넘어서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숙모님께서는 제게 편견이 많으신가 보군요. 어찌하여 이유도 묻지 않고 제 잘못이라 단정하시는 겁니까?”

송씨는 말문이 막혔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공손히 유씨 노부인께 예를 올렸다.

“제가 어제 방 안에서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주향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제가 방에 사내를 숨겼다며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습니다. 화가 나 훈계를 좀 하려 했더니 나머지 셋은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더군요. 그런 사람들을 어찌 계속 곁에 둘 수 있겠어요? 제가 그리 잘못한 건가요?”

“허나 주향이 어제 네 방에서 분명 사람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구나.”

송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그래서 주향이 사람을 잡기라도 했습니까?”

송씨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 저는 이미 선주에게 세자비 자리를 양보했는데도 어찌하여 숙모님께서는 이리도 사람을 몰아붙이며 제 명예를 더럽히려 하시는지요. 오늘 성년례에는 귀한 손님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유지영의 얼굴에 냉기와 분노가 서렸다.

유씨 노부인은 담씨 가문의 세력을 생각해 눈살을 찌푸리며 송씨에게 말했다.

“고작 시녀 아니더냐. 꼴 보기 싫으면 내치고 새로 들이면 되지. 그게 뭐라고 아침부터 이리 소란을 피워 기분을 잡치게 하느냐!”

노부인의 호통에 송씨는 가슴이 답답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머니, 저는 억울합니다. 집안 살림은 제 담당이 아닙니까. 갑자기 시녀를 넷이나 바꾸겠다 하니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만하거라!”

유씨 노부인은 송씨를 노려보며 차갑게 호통쳤다.

“어쨌거나 영광이든 치욕이든 함께 나누는 가족이다. 지영이의 평판이 나빠지면 선주에게도 영향이 간다는 걸 왜 모르느냐?”

송씨는 오늘 있을 성년례를 생각해 일단 참고 넘기기로 했다.

노부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 넷은 어떻게든 입막음을 해서 멀리 보내 버리거라. 절대 이 일로 우리 유씨 집안의 평판에 흠이 가서는 안 된다. 황실의 일원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친정의 평판이다.”

경고 섞인 노부인의 말에 송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이때 문지기가 들어와 손님들이 도착했다고 전했다.

노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유지영의 손을 다독였다.

“오늘은 네 성년례이니 나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하러 가자.”

앞뜰에는 손님들을 모실 연회상과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원 중앙의 호수에는 작은 나룻배가 떠 있었고, 호숫가에는 수영에 능한 시녀들과 어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연회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남녀 귀빈들의 쉼터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한 데다 많은 시종까지 배치해 두었다.

국공부 대문 앞에는 벌써 수많은 마차가 당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한 손님들로 정원이 꽉 차게 되자, 유씨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송씨를 불러 물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많았느냐?”

송씨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유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마도 지영이가 수구를 던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듯합니다.”

노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유지영을 봤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지영 아가씨, 듣자 하니 오늘 수구를 던지신다면서요? 누가 받든 그분과 혼인하실 생각인가요?”

인파 속에서 한 소녀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유지영에게로 쏠렸다.

분홍빛 치마폭에 상아색 저고리를 입고 연지만 살짝 바른 맑은 얼굴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빼어난 절색이었다. 게다가 최상급 비단으로 지은 의복에 목에는 양지옥 목걸이, 머리에는 금빛 찬란한 비녀를 꽂아 올린 모습은 참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워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비 모양의 저 비녀는 태후께서 담씨 가문에 하사하신 것을 담 부인이 유지영에게 준 것으로, 인주에서는 단 하나뿐인 귀한 물건이었다.

귀티라는 말이 유지영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유씨 노부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태연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쨌거나 집안의 적장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손녀였다.

유지영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은 곧 유씨 가문의 체면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 유씨 가문은 삼대공에 속한 국공 가문이거늘, 어찌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하겠는가?”

송씨가 여유만만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송씨의 뒤에는 유선주가 서 있었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는 훤칠한 키에 귀공자의 풍모를 자랑하는 배준형이 서 있었다.

태후께서 여러 왕부의 세자들 가운데 정왕 세자 배준형을 가장 아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황제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줄곧 후사를 보지 못하셨으니, 장차 여러 친왕 세자 가운데 후계를 골라 황위를 물려주실 터였다.

그리고 그들 중 배준형의 승산이 가장 컸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소녀들의 볼이 붉어졌다.

배준형은 유지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공부의 적녀인 네가 고작 나와의 자존심 다툼 때문에 이렇게 격을 낮추는 일을 하다니.”

“세자,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국공부에서는 일찍이 지영이의 성년례 날에 혼사를 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법이지요.”

송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유지영은 오히려 웃음이 났다.

‘이 자식은 아직도 내가 자신에게 목을 맨다고 생각하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세요. 수구를 받은 분이 아직 혼약이 정해지지 않았고 첩실을 두지 않았으며 나이도 제게 걸맞다면, 신분을 막론하고 혼인할 것입니다.”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고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배준형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인파가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분은, 겨… 경왕 세자 아닙니까?”

“설마 경왕 세자께서도 수구를 받으러 오셨단 말이오?”

“오늘따라 멋지게 차려입으셨네요. 막 이홍루에서 나오는 길이겠지요.”

경왕 세자 배현준이 등장하자 비웃음이 쏟아졌다.

배현준은 검은 비단옷에 금색 허리띠를 두른 채 늠름한 자태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사람들은 그가 오늘 유난히 성대하게 차려입고 왔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머리에는 옥관을 쓰고 비단 도포를 걸쳤으며, 허리춤에는 신분을 상징하는 현색 옥패가 달려 있었다.

이처럼 정중한 차림의 배현준은 모두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설마 내 혼사를 방해하러 온 거야?”

배준형은 배현준을 보자마자 안색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평판으로 무슨 면목이 있어 이런 자리에 온 것이냐?”

배현준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준수한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이 자식이!”

배준형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배현준은 피식 코웃음 치더니 그의 곁으로 가 우뚝 섰다. 그는 배준형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정교한 이목구비에서 묘한 매력도 흘러 넘치고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비교해 보니 외모로는 오히려 배준형이 많이 밀리는 듯했다.

배현준은 고개를 돌려 공손히 유씨 노부인께 인사를 올렸다.

“노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유씨 노부인은 평판도 좋지 않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배현준을 힐끗 흘겨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저 그가 수구를 받으러 온 것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유씨 저택에 몰려든 수많은 이목은 모두 유지영에게 쏠려 있었다.

길시가 되어 성년례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찬자는 담씨 가문의 큰부인으로, 즉 유지영의 외숙모를 초대했다. 큰부인 한씨가 예물을 가지런히 정리하자, 유지영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 뒤 손님들에게 곱게 인사를 올렸다.

이어 한씨는 유지영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 주며 말했다.

“좋은 날 좋은 시각에 성년례를 올리노니, 어린 시절의 철없음을 버리고 덕목을 갖추어 참된 어른이 되거라.”

유지영은 감사를 표한 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갔다.

붉은 비단치마를 입은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또다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지영 아가씨는 참으로 절세미인이로군요.”

“그러게요. 몸에 밴 기품을 보세요. 역시 노부인 곁에서 자라서 그런지 기품과 분위기가 남다르군요.”

송씨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영아, 이제 수구를 던질 차례지 않니?”

수구야말로 오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행사였다.

송씨 가문에서도 오늘 여러 사람이 와 있었기에 송씨는 자신만만했다. 유지영이 아무리 아니꼬워도 다른 집안에 주기에는 아쉬운 아이였기에, 송씨 가문은 어떻게든 그녀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정실이 될지 첩실이 될지는 나중에 정해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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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무슨 소리인가?"경왕비는 불쾌한 기색으로 받아쳤다."이들은 피가 섞인 가족이거늘….""지영이와 유리 아가씨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입니까?"조원금은 턱을 치켜들며 조롱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애먼 짓만 하다가 체면을 다 구겨놓고는, 이제 와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군요. 정 억울하거든 아까 궁에서는 왜 따져 묻지 못했습니까?"말문이 막힌 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남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본인 딸부터 똑바로 가르치십시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조원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섭게 호통쳤다.배유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내 딸을 어찌 가르치든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경왕비는 손을 뻗어 배유리를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조원금을 쏘아보았다.조원금은 유지영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이모가 네게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몇 개 골라두었단다. 이따가 한번 보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시녀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어머니."배유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경왕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배유리를 밀어내고는 아무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채찍 서른 대를 맞은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곱씹어 볼수록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배유리의 어리석음이었다."어머니."붉어진 눈시울로 뒤따라온 배유리는 경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녀가 못난 탓에 어머니까지 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허나, 저는 정말 당학 공자와 혼인하기 싫습니다."경왕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정 싫다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천으로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깔끔하겠지."싸늘한 말에 배유리는 겁에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왕비 마마, 고정하십시오. 유리 아가씨도 한순간 판단이 흐려진 것뿐입니다."눈치를 보던 시녀가 조심스레 거들었다."한순간 판단이 흐려져?"경왕비는 돌연 언성을 높였다."유지영은 저 아이보다 고작 몇 달 먼저 태어났을

  • 피안을 거슬러   제375화

    경왕비는 애지중지 키운 적녀가 서장자와의 혼인을 반강제로 맺게 된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청란이는 제가 아우의 손에서 빼내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따가 경왕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아까는 사태가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니, 부디 마마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당학은 머리를 숙이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사죄했다.그제야 경왕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조령 장공주까지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하니, 경왕비는 억울함을 꾹 삼키고 억지로 이 혼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연못가.몇몇 부인들은 아까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는 은밀히 코웃음을 쳤다."저 서장자란 놈, 참으로 대단한 위인이로군.""당 대인이 하도 감싸고 도니, 태후 마마 앞에서도 저리 간 큰 수작을 부리는 게지."아까는 굳이 나서서 들춰내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이제 저 서장자의 맹랑한 야심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적모를 압박하여 사람들 앞에서 기어코 적자로 인정받았으니, 그 속내가 여간 검은 것이 아니었다.한편, 유지영과 곽운연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를 감상했다. 단단히 화가 난 곽운연이 유지영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했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재작년에 제 곁에 손버릇이 나쁜 시녀가 한 명 있어 물건을 제법 잃어버렸었지. 그 향낭도 그중 하나였다. 헌데 그 향낭이 당학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찌 그리 추악한 속셈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곽운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진저리를 쳤다.옥패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옥패는 절에 갔을 때 잃어버린 것다. 은밀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는데, 그걸 당윤 공자가 주웠을 줄이야.""그게 아닙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 옥패는 의용후가 저잣거리에서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곽 낭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길에 사둔 것이지요."곽운연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똑같이 그녀의 물건이건만, 한

  • 피안을 거슬러   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전생의 배준형도 성년

  • 피안을 거슬러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털썩!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읍….”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

  • 피안을 거슬러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방으로

  • 피안을 거슬러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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