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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레몬과 향수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

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

“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어제 유지영은 외숙모에게 전갈을 보냈다. 오늘 수구를 던지게 된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렸기에, 한씨도 더는 그녀를 말릴 도리가 없어 우선 성년례에 맞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외숙모,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십여 명의 사내가 서 있었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배현준이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유씨 노부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배현준을 보며 뭐라 말하려다 송씨가 붙잡는 바람에 결국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교지 도착이오!”

그때 앙칼진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서 태후의 최측근인 창 내관이 황색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창 내관을 본 사람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유국공부 장녀의 성년례에 궁중의 태후까지 축사를 보낼 줄이야!

이를 지켜본 유선주의 얼굴도 질투심으로 일그러졌다.

유지영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지영 아가씨, 금일이 아가씨의 성년례인 것을 아신 태후마마께서 특별히 명을 내리셨습니다.”

창 내관이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지영은 담담히 무릎을 꿇었다.

“소녀 유지영, 명을 받들겠습니다.”

창 내관은 그제야 두루마리를 펼쳤다.

“유씨 집안의 적녀 유지영은 빼어난 학식을 갖추고 예의 바르며 단정하고 현숙하여 모든 귀녀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본 태후의 마음에 깊이 들었으니 금일 성년례를 맞아 장녕이라는 봉호와 함께 군주의 작위를 내리노라. 아울러 최상급 비단 백 필과 금 만 냥을 내리니 삼가 받들거라!”

전생에 서 태후는 그녀에게 군주의 작위를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와 배준형이 사람들 앞에서 혼약을 맺은 뒤 배준형에게 관직을 하사했을 뿐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혼약을 맺지 않았기에 하사품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소녀, 태후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유지영은 교지를 받들어 예를 올리고 황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큰절을 올렸다. 창 내관은 곧바로 그녀를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군주 전하, 태후마마께서 오늘 수구를 던져 배필을 고르신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소인에게 조금 더 기다렸다 돌아가 결과를 보고하라 분부하셨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지영의 성년례에 황궁에서 이토록 많은 하사품을 내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수구 의식에까지 이토록 관심을 두고 계시다니!

하사품만 봐도 금은보화와 최상급 비단 모두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다.

송씨의 안색이 퍼렇게 질리자 눈치 빠른 시녀가 그녀에게 귀띔해주었다.

“태후께서는 돌아가신 큰부인과 돈독한 사이였지 않습니까. 큰부인의 체면을 생각해 지영 아가씨를 가엾게 여기셨나 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송씨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훑어보다가 유선주에게 말했다.

“하사품이 많을수록 좋지. 네 사촌 오라비들 중에 혼인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으니, 앞으로 누구에게 시집을 가도 네 발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야.”

징이 울리자 유지영은 다시 수구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사이 무대 아래에는 공을 쟁취하러 온 사내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시탐탐 탐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지영은 검은 인영을 힐끗 바라본 뒤 홍주가 건넨 천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씨 노부인의 손에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해졌다.

어찌 이리도 대담할 수가!

징이 울리자 유지영은 수구를 공중 높이 치켜들었다가 힘껏 던졌다.

무대 아래에서 아우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세자, 정말 너무하십니다! 어찌 이런 자리에서 주먹질을 하십니까!”

“아니!”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유지영은 눈을 가렸던 천을 벗었는데, 그 순간 검은 인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배현준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수구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등 뒤에 있던 자들이 빼앗으려 달려들었지만, 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쾅!

“소문은 들었지만 어찌 이리 난폭할 수가!”

“이건 인정 못합니다!”

“저도 인정 못합니다!”

배현준의 주먹에 맞은 송가네 아들들이 얼굴에 피멍이 든 채 소리를 질렀다. 수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배현준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수구는 원래 능력 있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지. 빼앗긴 자들이 말이 많군.”

“그게 무슨!”

송가네 아들들의 얼굴에 이내 분노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되돌릴 수도 없었다.

“할머니, 경왕 세자께서 수구를 쟁취하셨고 저는 이 혼사에 이의가 없습니다.”

유지영은 무대에서 내려오며 담담히 말했다.

배현준의 능력으로 수구를 차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유씨 노부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창 내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부인, 금일 유씨 가문에 경사가 세 가지나 생겼군요. 정말 감축드립니다.”

“군주 책봉에 혼약이 정해진 것뿐인데 경사가 세 가지라니?”

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창 내관은 배현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경왕 세자께서 입궁하시어 태후께 혼인을 하사해 달라 청을 올렸습니다. 태후께서는 경왕 세자께서 수구를 쟁취한다면 혼인을 하사하겠노라 약조하셨지요.”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충격이 번지며, 배준형의 안색도 일그러졌다.

유선주와의 혼사가 정해지자마자 배현준은 입궁해 혼인을 청한 것이다.

게다가 인주와 경성은 왕복으로 적어도 네 시진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그는 꼬박 밤을 새워 궁을 다녀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창 내관이 두 번째 교지를 낭독했다.

사람들은 재차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금일 장녕 군주의 정혼 간택에서 경왕 세자가 승하였으니, 이 또한 인연이며 더없이 어울리는 천생연분이노라. 이에 혼인을 하사하노니 돌아오는 10월 8일에 혼례를 올리도록 하라.”

유지영과 배현준은 큰절을 올렸다.

창 내관은 배현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원성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세자. 귀경하시면 매일 자녕궁으로 문안드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태후마마께서 경왕부 일가를 모두 경성으로 부르신다며, 남은 반년 동안 혼례를 차질 없이 준비하라 이르셨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또 술렁이기 시작했다.

송씨도 더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창 내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닙니까? 태후께서는 평소 정왕 세자를 따로 자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어찌 경왕 세자로 갑자기 바뀐 겁니까?”

창 내관은 송씨를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답했다.

“태후께서는 경왕 세자의 진심에 감동하셨다며 이번 혼사가 참으로 기쁘다 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송씨는 말문이 막혔다.

단지 혼사 하나 때문에 태후께서 배현준에게로 마음을 돌리셨단 말인가?

그녀는 음침한 얼굴로 배준형을 힐끔 바라보았다.

배준형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딸이 배준형과 혼인하면 앞으로 탄탄대로만 걸을 거라 생각했는데, 유지영과 배현준이 영광을 가로챌 줄이야!

“창 내관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귀경하는 즉시 궁으로 가 태후마마께 문안 올리겠습니다.”

배현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다.

볼일을 마친 창 내관은 위풍당당하게 돌아갔다.

성년례의 주인공은 단연 배현준이 되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아부하려 몰려들었다.

혼사가 정해지자 유지영도 한시름 놓였다. 이번 생에 배준형에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배현준은 조금 전 사람을 보내 경성에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간다고 전했고, 유지영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손님들은 유씨 가문 족장들의 안내를 따라 앞뜰로 가고, 여자 손님들은 뒤뜰에 남게 되었다.

곧이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지영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네려고 했는데, 송씨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지영아, 경왕 세자와의 혼인은 안 된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송씨를 바라보았다.

“우리 유국공부는 정왕부와 한배를 탄 운명이다. 다른 후보와 엮여 봐야 좋을 게 없어. 경왕 세자는 어리석고 평판도 좋지 않으니, 숙모님도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지영아.”

배준형도 다가오자,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왕 세자는 이제 저를 장녕 군주라 부르며 예를 갖추세요.”

전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말투와 심드렁한 표정에 배준형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송씨 가문 자제와 혼인하는 게 너에겐 최선의 선택이다. 선주를 봐서 나도 장차 너를 홀대하진 않을 테고. 배현준과 혼인하면 나중에 고생하는 건 너다.”

유지영은 저 역겨운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주고 싶었다.

‘내가 왜 너희들 안배에 따라줘야 하지?’

“정왕 세자는 태후마마의 결정을 거역하시려는 겁니까?”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날 위해서’라는 말을 입에 담는 거죠?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요?”

유지영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싸늘하게 몰아붙였다. 이전부터 그러고 싶었지만, 오늘을 위해 참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일이 끝난 이상 더는 거리낄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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