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태후 마마의 입장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숙태비를 궁으로 불러들여 연금하셨지요. 만약 배준형이 보좌에 오르고 숙태비가 득세하게 된다면, 과연 태후 마마를 가만두겠습니까?"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최 부인은 결코 배준형을 선택할 수 없었다.최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문관이든 무관이든 배준형은 이미 모든 우위를 상실했다.최 부인은 최씨 가문이 배준형에게 얽매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그동안 우리 가문이 배준형을 뒷바라지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제 우리도 경성에 자리를 잡았고, 그 자는 제 앞가림조차 못 하는 처지 아닙니까. 차라리 다른 살길을 모색하는 편이 낫습니다."최 부인은 완강하게 부군을 설득했다.다행히 최 대인은 부인의 말을 귀담아듣는 성격이었다. 잠시 후,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아들 최호 역시 어머니의 뜻에 동의했다.최 대인이 입을 열었다."어머니는 사리 분별이 밝으신 분이니, 서씨 노부인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실 거요. 이따가 내가 직접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소."하지만 최호에게는 다른 걱정거리가 남아있었다."그럼 정안이의 화친 혼사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어머니께서는 뾰족한 수가 있으십니까?"최정안이 화친 공주 후보에 오른 후, 최씨 가문은 온갖 수를 다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최 부인 역시 반쯤 체념하고 있었으나, 며칠 전 현왕비를 찾아간 이후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그녀는 조금 전 배준형이 써준 차용증을 매만지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정안의 일은 내게 다 생각이 있다."어찌 되었든 정군왕부에게 기대할 것은 없었다.세 식구는 의논을 마친 뒤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졌다.최 부인은 시녀를 시켜 비단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그 안에 차용증을 넣고 자물쇠를 단단히 채운 뒤, 열쇠와 함께 심복 시녀에게 건넸다."현왕부로 가져가거라. 최씨 가문에서 올리는 작은 성의라고 전하고."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그 시각, 최 대인
배준형은 최씨 노부인의 당부를 가슴에 새겼다. 최 부인을 찾아가는 길에 최호를 마주쳤고, 두 사촌 형제는 깍듯하게 인사를 나누었다."준형 형님."최호가 먼저 입을 열고 인사를 건넸다.배준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우야, 오랜만에 보는데 갈수록 외삼촌의 모습을 닮아가는구나."최호 역시 빙그레 웃으며 몇 마디 인사치레의 말을 건넸다.일행이 최 부인의 처소에 당도했다. 아들이 함께 온 것을 본 최 부인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이내 환한 미소로 정군왕비 모자를 맞이했다.최 부인은 정군왕비가 최씨 가문에 재물을 요구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배준형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뜻밖에도 배준형이 품에서 손도장이 찍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곁에 있던 정군왕비는 그 종이를 확인하고 안색이 굳어졌다. 이백만 냥의 은자를 십 년 안에 갚겠다는 내용이 적힌 차용증이었다."주, 준형아."정군왕비는 평정을 잃었다. 그 많은 양의 은자를 정군왕부가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최 부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준형을 바라보았다."빚을 졌으면 갚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배준형은 차용증을 공손히 들어 올리며 최 부인에게 부디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몇 번의 실랑이 끝에 최 부인은 차용증을 받아 들었다."좋다. 이 차용증은 외숙모가 먼저 보관하마. 훗날의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최 부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최 대인이 돌아왔다. 그는 배준형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를 따로 불러냈다.두 사람은 함께 서재로 향했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이미 점심을 마친 정군왕비는 아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지체하지 않고 배준형과 함께 최씨 저택을 나섰다.모자가 떠난 후, 최 부인은 최 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부군께서는 진정 배준형을 도우실 작정이십니까?"지금의 배준형은 아무런 권력도 세력도 없이 황제와 태후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그가 재기하려면, 막강한
크게 놀란 배준형을 보며, 정군왕비는 내심 의아해했다. 그녀는 내친김에 태후가 처음에는 서명주와 최호에게 사혼을 내렸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임의설을 정실로 맞이하라는 사혼 교지를 내리고 현주 작위까지 내린 자초지종을 모조리 털어놓았다.배준형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전생에 임의설은 그의 숙비였다. 그의 슬하에 있던 이황자가 바로 임의설의 소생이었으며, 그 아이는 무척이나 총명하고 영특했다.게다가 임의설 본인도 사려 깊고 다정다감하여, 임국공부 전체가 그의 든든한 조력자였다."임씨 가문 장녀가 올해로 열여섯이다. 네가 조금만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쩌면……."정군왕비는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배준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생의 임의설은 삼 년 상을 치르느라 혼기를 놓치고 노처녀가 되었었다. 훗날 그가 황위에 올라 간택을 치를 때, 수녀 신분으로 입궁했던 것이다.시기를 따져보니 올해 연말에 임국공이 지병이 급발작하여 세상을 떠날 것이다.지금은 너무 많은 상황이 변했다. 더 이상 전생의 기억만으로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임국공의 목숨을 살린다면 반드시 임씨 가문을 온전히 그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배준형은 즉각 심복을 불러 임씨 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명했다.곁에 있던 정군왕비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어머니,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정군왕부를 굳건히 세우고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배준형은 그동안 어머니가 겪었을 설러움이 가슴 아프다는 듯, 정군왕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다짐했다.언젠가 다시 대권을 거머쥐는 날, 기필코 그들에게 뼈저린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정군왕비는 코를 훌쩍이며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 그동안 정군왕부의 일로 피해를 입었으니, 외조모님과 외숙부님께서 저희에게 불만이 많으실 겁니다. 지금은 그분들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아니니 무슨 모진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당분간 최씨 가문은 절대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그래,
배준형은 정군왕비를 위로했다."가지 많은 나무가 거센 바람을 맞는 법입니다. 지금의 배현준은 과거의 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왕가에는 본디 정이 없으니, 언젠가 그놈 역시 내쳐질 날이 올 것입니다."말을 마친 그는 유지영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유지영의 이름이 나오자 정군왕비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 계집은 갈수록 기고만장하더구나. 태후를 뒷배로 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한참을 험한 욕을 퍼붓던 정군왕비는 뜻밖의 소식을 하나 전했다. 유지영이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배준형은 흠칫 놀랐다."지영이가 무사히 아들을 낳았단 말입니까?"다정한 호칭에 정군왕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준형아, 너 설마 아직도 그 계집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냐? 지금 그 계집은 우리 정군왕부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나를 협박하고 겁준 게 한두 번이 아니다."정군왕비는 당장이라도 유지영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당치도 않습니다."배준형은 황급히 말을 바꾸며 정군왕비를 달랬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자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전생에서 유지영은 그와 혼인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아이를 가졌었다.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배준형의 눈앞에서 핏물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유지영이 배현준의 아이를 낳았다니, 배준형은 속이 쓰렸다. 전생의 흐름대로라면 그녀는 지금쯤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매일 불당에 엎드려 불공을 드려야 했다.생각이 꼬리를 물자 배준형은 미간을 꾹 눌렀다. 속에서 묘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만약 이 년 전에 유지영이 자신 역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놓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굳이 유선주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두 사람은 마땅히 부부의 연을 맺었어야 했다…….그때 정군왕비의 불평이 귓가를 때렸다."태후가 그 계집을 어찌나 끔찍이 아끼는지, 출산하기도 전에 사람을 보내 자녕궁으로 데려갔단다. 직접 곁에 두고 돌보더니 산후조리를 다 마치
그날 서 태후가 만약 기분이 안 좋았더라면, 서명주 역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소 상궁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제가 주제넘게 마마의 일에 참견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이 사람아, 대단한 일도 아닌데 뭘 그리 놀라고 그러느냐. 내가 툭하면 사람이나 죽이는 살인마도 아니고."서 태후는 헛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 소 상궁을 일으켰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서 태후는 친정인 서씨 가문을 처결한 일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어느덧 일월 초가 되었다.천리마 한 필이 쏜살같이 경성 성문을 통과했다.말 위의 사내는 쉴 새 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단숨에 황궁 앞까지 내달렸다.때마침 궁문 앞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휘장이 걷히고 정군왕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말 위에 올라탄 사내의 검게 그을리고 훌쩍 야윈 얼굴을 확인하자, 그녀는 눈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준형아, 준형아!"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배준형은 어머니를 발견하고 급히 말에서 내려 마차로 다가갔다."어머니."변방에서부터 밤낮없이 말을 몰아세운 덕에 스무 날이 넘게 걸릴 거리를 보름 만에 달려왔다.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질 듯 지쳐 있었지만, 다행히 어명에 명시된 기한 내에 당도할 수 있었다."이곳은 긴 이야기를 나눌 곳이 못 됩니다. 어머니께서는 먼저 돌아가 십시오. 저는 입궁을 해야 하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궁문에서 내관 한 명이 걸어 나와 배준형을 막아섰다."정군왕 세자, 폐하께서는 이미 세자께서 경성에 당도하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입궁하여 알현할 것 없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 자숙하라 명하셨습니다."내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배준형은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안색은 순식간에 굳어졌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달려왔건만, 황제는 고작 내관 하나를 시켜 문전박대한 것이다.자존심 높은 배준형으로서는 뼈아픈 치욕이었다.하지만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사혼을 철회한다는 태후의 명은 서씨 가문에도 당도했다. 소 상궁이 말을 마치자마자 서명주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가문이 몰락한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일전에는 끔찍히 싫었던 첩실 자리를 유일한 동아줄로 간주하고 있었다.그런데 이제 그 기대마저 사라진 것이다.크나큰 충격에 휩싸인 서명주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 상궁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상궁님, 어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소 상궁은 서명주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네 아비가 죽고 장례도 번듯하게 치르지 못했거늘, 명색이 적녀인 너는 효상을 치르기는커녕 다른 집으로 시집갈 생각을 품었단 말이냐? 서씨 가문은 대역 죄인이나 태후 마마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목숨만 살려주신 것이다. 반면 최씨 가문은 공신 가문이거늘,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집안 문턱을 넘는단 말이냐!"정곡을 찌르는 질책에 서명주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였다.곁에 있던 서 부인 진씨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태후의 속내를 깨달았다.서 태후는 일찌감치 서씨 가문의 말로를 전부 계획해 두었던 것이다.애초에 서명주를 최씨 가문의 첩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모든 것은 서씨 가문이 제 발로 무덤을 파도록 유도한 덫에 불과했다.소 상궁이 오늘 서씨 가문을 찾은 것은 태후의 명을 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경전 필사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서소현, 진씨, 서씨 노부인, 서명주 네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얌전히 경전을 바쳤다. 글씨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 태가 역력했다.반면 네 사람의 태도는 제각각 달랐다.그래도 다들 군말 없이 필사를 해놓긴 했다.소 상궁은 적당히 눈감아주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서씨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부들부들 떨며 다가와 소 상궁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녀는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상궁, 수고스럽겠지만 이 서신를 태후께 전해 주시게. 과거 내가 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 억울함과 수모를 겪게 한 것을 뼈에 사무치게 후회된다고 말이오."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렇게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유지영은 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