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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레몬과 향수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

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

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유지영은 품에서 은표와 초대장을 꺼내 홍주에게 쥐여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홍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 소인은 못하겠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면 너를 일등 시녀로 올려 주고, 매달 녹봉으로 은 세 냥에다가 끼니마다 닭다리를….”

끼니마다 닭다리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홍주의 두 눈이 번쩍이며, 곧바로 은표를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후, 홍주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 아가씨, 잘 전달했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경왕 세자께서 소인에게 주신 포상이에요. 소인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은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꿈만 같아요!”

그녀는 그저 유지영의 지시에 따라 은표를 포주 어멈에게 전하고, 경왕 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낸 뒤 그에게 향낭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경왕 세자는 주변 사람들을 물리더니 홍주를 가까이 불러 말을 전하라고 했다.

“소… 소인은 지영 아가씨의 명으로 초대장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내일 성년례에서 수구로 정혼자를 간택하실 예정인데, 세자께서 꼭 와 주셔서 수구를 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일생이 달린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경왕 세자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경왕 세자이지 정왕 세자가 아니다!”

“아가씨께서 경왕 세자께 꼭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배현준은 멈칫하더니 초대장을 받았다. 익숙한 필체를 본 그는 배준형이 오늘 유씨 저택을 찾아가 유선주와 혼약을 정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홍주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서 너희 아가씨께 꼭 갈 테니 안심하라고 전하거라!”

마차에 돌아온 홍주는 지금도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유지영은 실소를 터뜨리며 홍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앗! 아픕니다!”

홍주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꿈이 아니었네요!”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서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공부의 선주 아가씨와 정왕 세자께서 혼약을 정했다더군.”

“정왕 세자라면 장녀인 지영 아가씨와 혼약이 있었던 분 아닌가? 어쩌다 약혼녀가 선주 아가씨로 바뀌었대?”

“지영 아가씨는 온화하고 성품이 부드러운 선주 아가씨와 달리 성정이 사납다더군. 듣자 하니 정왕 세자께서 직접 저택을 찾아가 혼약을 청했다더라.”

“몇 년 전부터 유씨 가문에서는 장녀의 성년례에서 혼약을 정한다고 공표했는데, 정혼자가 다른 이와 혼약을 맺었으니 그 장녀는 대체 누구와 혼약을 정한다는 거지?”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홍주는 그 말을 듣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가려 했다.

“저것들이 감히 아가씨를 험담하다니! 제가 가서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거기 서!”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홍주에게 말했다.

“한두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모두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다. 내일 다시 보자꾸나.”

불과 한 시진 만에 인주성 전체가 유지영이 정왕 세자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왕부에서 둘째인 유선주와 혼약을 정하면서, 장녀인 그녀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유지영이 성년례에서 수구를 던져 약혼자를 간택한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것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깊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침상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은은한 술향기와 함께 준수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영아, 진심으로 내가 수구를 받길 바라느냐?”

배현준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홧김에 내린 결정은 아니고?”

유지영은 정중히 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입에서 확신의 답을 듣게 되자 배현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옥패를 떼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걱정 말거라. 내일 던지기만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로챌 테니!”

만약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검으로 찔러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수구를 받아 낼 것이다.

유지영은 그의 능력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전생에 배현준과 배준형은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었다.

온화하고 글공부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배준형은 경성에서 모두에게 칭송받는 귀공자였다.

반면 배현준은 먹고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악명 높은 망나니였다.

배현준은 어머니인 선대 경왕비가 돌아가신 뒤, 경왕이 새 장가를 들면서 새 왕비를 데리고 영지를 떠나는 바람에 홀로 경왕부에 남아 지내게 되었다.

경왕은 슬하에 아들 셋을 두고 있었는데, 적장자인 배현준은 진작에 포기한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또한 틈만 나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배현준을 세자에서 폐하고 차남을 세자의 자리에 올려달라 청했다.

물론 황제는 매번 거절했지만 경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지영은 전생에 그가 복면을 쓰고 창을 휘두르며, 단지 그녀가 떨어뜨린 향낭을 찾기 위해 홀로 산적 소굴을 소탕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가 취미로 지은 시가 세상에 알려져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궁금증에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나쁜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다니나요?”

배현준은 그런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뜨더니, 괜한 간섭은 하지 말라며 자리를 떴더랬다.

문무와 용모 모두 배현준이 배준형보다 훨씬 뛰어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실종된 삼일 동안, 그가 꼬박 사흘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맸다는 점이었다.

그에 비해 부군인 배준형은 그녀가 살아 돌아온 것조차 수치스럽다며, 태비의 손에 그녀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모두가 배준형을 올곧은 귀공자라고 칭송하지만 유지영은 그의 가식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랑 대화 중인가요?”

소리를 들은 주향이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유지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인, 분명 사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주향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방 안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유지영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았다.

낮에는 배준형과의 혼약을 물리느라 바빴고, 이제는 종령원의 사람들을 정리할 차례였다. 그녀는 주향이 이곳저곳 뒤지고 다니는데도 가만히 지켜볼 뿐, 제지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주향은 무심코 중얼거리다 유지영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아가씨, 소인 정말 방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입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유지영은 곧바로 명을 내렸다.

“쳐라!”

홍주가 달려와 주향의 귀뺨을 날렸다.

“어디서 감히 그런 허튼소리를 지껄여? 아가씨께서 낮에 외출하실 때 널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고 이런 식으로 아가씨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거야?”

주향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홍주를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날 쳐?”

유지영은 음침한 얼굴로 주향을 노려보았다. 살기등등한 그 눈빛에 주향은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들은 운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서 고씨 어멈을 불러오거라.”

유지영이 지시를 내렸다.

운교는 주향과 홍주를 번갈아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 시간도 늦었는데 어멈까지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주향도 아가씨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시 결례를 범한 것 같은데, 이만 화를 푸시고 편히 쉬세요.”

운교를 필두로 유지영의 신변에는 네 명의 측근 시녀가 있었는데, 마침 오늘은 운교와 주향, 두 사람이 당직이었다.

과거에도 일만 생기면 운교는 조용히 덮고 넘어가라고 그녀에게 권고했었다.

“내일이 성년례인데 일이 커지면 아가씨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쉬러 가세요.”

운교는 재빨리 주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주향이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쾅!

유지영은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 집어던졌다.

자기 조각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

“내가 언제 일어나도 된다고 했느냐? 이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는 것이냐!”

주향이 화들짝 놀라 다시 주저앉았다.

운교마저 안색이 창백해졌다.

“홍주, 가서 장 부관을 불러오너라. 지금 당장!”

명을 들은 홍주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예, 아가씨!”

관리 어멈에서 저택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부관까지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유지영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또 다른 시녀, 운성과 운단 자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애교 많은 운성이 앞으로 나서며 유지영을 달랬다.

“아가씨, 부디 노여움 푸세요. 이러다 몸 상하시면 아가씨만 손해입니다. 화가 안 풀리면 차라리 저희에게 매질이라도 하세요.”

옆에 있던 운단도 정신을 차리고 거들었다.

“그래요, 아가씨. 고작 세자가 무슨 대수인가요? 노부인께서 아가씨를 총애하시니 그보다 더 좋은 짝을 찾아주실 거예요.”

한자리에 모인 네 시녀를 보자 유지영은 지난날이 떠올랐다. 삼 년을 빌고 또 빌어 겨우 아이가 생기자, 기쁜 마음에 감사 불경을 드리러 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이 넷에게 이끌려 산에서 길을 잃었고, 이들은 흩어져 사람을 찾아보겠다며 자리를 뜨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진작부터 유선주에게 매수된 자들이었다.

‘내가 눈이 멀었지!’

잠시 후, 부름을 듣고 도착한 장 부관이 유지영에게 예를 올렸다.

“찾으셨습니까, 아가씨.”

“이들을 내 처소에서 내보낼 것이니, 넷 모두 중매시장에 팔아 버리세요!”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며 눈앞의 네 시녀를 가리켰고, 그 넷은 온몸이 굳은 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 저희를 팔아 버리신다고요?”

운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장 부관마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네 사람이 유지영의 심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가씨, 밤도 깊었는데….”

유지영은 장 부관의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비웃음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장 부관도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요?”

장 부관은 크게 노한 유지영을 보고는 곧바로 태도를 고쳐 사죄했다.

“소인, 곧 알아보겠습니다.”

털썩!

운교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따져 물었다.

“소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셨습니까! 수년간 곁을 지킨 저희입니다. 어찌 이런 식으로 내치려 하십니까!”

유지영은 더 이상 이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냉혹하고 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이 주인을 무시하다니. 갈수록 분수를 모르는구나. 특히 주향, 저 아이는 어서 천한 노비로 팔아 넘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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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무슨 소리인가?"경왕비는 불쾌한 기색으로 받아쳤다."이들은 피가 섞인 가족이거늘….""지영이와 유리 아가씨가 무슨 피가 섞였단 말입니까?"조원금은 턱을 치켜들며 조롱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애먼 짓만 하다가 체면을 다 구겨놓고는, 이제 와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군요. 정 억울하거든 아까 궁에서는 왜 따져 묻지 못했습니까?"말문이 막힌 경왕비는 미간을 찌푸렸다."남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본인 딸부터 똑바로 가르치십시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조원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섭게 호통쳤다.배유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내 딸을 어찌 가르치든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경왕비는 손을 뻗어 배유리를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조원금을 쏘아보았다.조원금은 유지영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였다."이모가 네게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몇 개 골라두었단다. 이따가 한번 보거라."말을 마친 그녀는 시녀들을 이끌고 여유롭게 자리를 떴다."어머니."배유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경왕비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배유리를 밀어내고는 아무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채찍 서른 대를 맞은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곱씹어 볼수록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배유리의 어리석음이었다."어머니."붉어진 눈시울로 뒤따라온 배유리는 경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소녀가 못난 탓에 어머니까지 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허나, 저는 정말 당학 공자와 혼인하기 싫습니다."경왕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정 싫다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천으로 목을 매달아 죽는 편이 깔끔하겠지."싸늘한 말에 배유리는 겁에 질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왕비 마마, 고정하십시오. 유리 아가씨도 한순간 판단이 흐려진 것뿐입니다."눈치를 보던 시녀가 조심스레 거들었다."한순간 판단이 흐려져?"경왕비는 돌연 언성을 높였다."유지영은 저 아이보다 고작 몇 달 먼저 태어났을

  • 피안을 거슬러   제375화

    경왕비는 애지중지 키운 적녀가 서장자와의 혼인을 반강제로 맺게 된 상황을 견딜 수 없어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다."청란이는 제가 아우의 손에서 빼내어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따가 경왕부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아까는 사태가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니, 부디 마마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당학은 머리를 숙이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사죄했다.그제야 경왕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조령 장공주까지 나서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 하니, 경왕비는 억울함을 꾹 삼키고 억지로 이 혼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연못가.몇몇 부인들은 아까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단박에 꿰뚫어 보고는 은밀히 코웃음을 쳤다."저 서장자란 놈, 참으로 대단한 위인이로군.""당 대인이 하도 감싸고 도니, 태후 마마 앞에서도 저리 간 큰 수작을 부리는 게지."아까는 굳이 나서서 들춰내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이제 저 서장자의 맹랑한 야심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적모를 압박하여 사람들 앞에서 기어코 적자로 인정받았으니, 그 속내가 여간 검은 것이 아니었다.한편, 유지영과 곽운연은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를 감상했다. 단단히 화가 난 곽운연이 유지영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했다."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재작년에 제 곁에 손버릇이 나쁜 시녀가 한 명 있어 물건을 제법 잃어버렸었지. 그 향낭도 그중 하나였다. 헌데 그 향낭이 당학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찌 그리 추악한 속셈을 품을 수 있단 말이냐!"곽운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듯 진저리를 쳤다.옥패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옥패는 절에 갔을 때 잃어버린 것다. 은밀히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는데, 그걸 당윤 공자가 주웠을 줄이야.""그게 아닙니다."유지영은 고개를 저었다."그 옥패는 의용후가 저잣거리에서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곽 낭자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길에 사둔 것이지요."곽운연은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똑같이 그녀의 물건이건만, 한

  • 피안을 거슬러   제7화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짝!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이내

  • 피안을 거슬러   제6화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 피안을 거슬러   제5화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그렇게

  • 피안을 거슬러   제3화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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