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4화

Author: 레몬과 향수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

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

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유지영은 품에서 은표와 초대장을 꺼내 홍주에게 쥐여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홍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 소인은 못하겠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면 너를 일등 시녀로 올려 주고, 매달 녹봉으로 은 세 냥에다가 끼니마다 닭다리를….”

끼니마다 닭다리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홍주의 두 눈이 번쩍이며, 곧바로 은표를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후, 홍주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 아가씨, 잘 전달했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경왕 세자께서 소인에게 주신 포상이에요. 소인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은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꿈만 같아요!”

그녀는 그저 유지영의 지시에 따라 은표를 포주 어멈에게 전하고, 경왕 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낸 뒤 그에게 향낭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경왕 세자는 주변 사람들을 물리더니 홍주를 가까이 불러 말을 전하라고 했다.

“소… 소인은 지영 아가씨의 명으로 초대장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내일 성년례에서 수구로 정혼자를 간택하실 예정인데, 세자께서 꼭 와 주셔서 수구를 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일생이 달린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경왕 세자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경왕 세자이지 정왕 세자가 아니다!”

“아가씨께서 경왕 세자께 꼭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배현준은 멈칫하더니 초대장을 받았다. 익숙한 필체를 본 그는 배준형이 오늘 유씨 저택을 찾아가 유선주와 혼약을 정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홍주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서 너희 아가씨께 꼭 갈 테니 안심하라고 전하거라!”

마차에 돌아온 홍주는 지금도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유지영은 실소를 터뜨리며 홍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앗! 아픕니다!”

홍주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꿈이 아니었네요!”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서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공부의 선주 아가씨와 정왕 세자께서 혼약을 정했다더군.”

“정왕 세자라면 장녀인 지영 아가씨와 혼약이 있었던 분 아닌가? 어쩌다 약혼녀가 선주 아가씨로 바뀌었대?”

“지영 아가씨는 온화하고 성품이 부드러운 선주 아가씨와 달리 성정이 사납다더군. 듣자 하니 정왕 세자께서 직접 저택을 찾아가 혼약을 청했다더라.”

“몇 년 전부터 유씨 가문에서는 장녀의 성년례에서 혼약을 정한다고 공표했는데, 정혼자가 다른 이와 혼약을 맺었으니 그 장녀는 대체 누구와 혼약을 정한다는 거지?”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홍주는 그 말을 듣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가려 했다.

“저것들이 감히 아가씨를 험담하다니! 제가 가서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거기 서!”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홍주에게 말했다.

“한두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모두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다. 내일 다시 보자꾸나.”

불과 한 시진 만에 인주성 전체가 유지영이 정왕 세자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왕부에서 둘째인 유선주와 혼약을 정하면서, 장녀인 그녀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유지영이 성년례에서 수구를 던져 약혼자를 간택한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것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깊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침상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은은한 술향기와 함께 준수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영아, 진심으로 내가 수구를 받길 바라느냐?”

배현준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홧김에 내린 결정은 아니고?”

유지영은 정중히 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입에서 확신의 답을 듣게 되자 배현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옥패를 떼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걱정 말거라. 내일 던지기만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로챌 테니!”

만약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검으로 찔러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수구를 받아 낼 것이다.

유지영은 그의 능력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전생에 배현준과 배준형은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었다.

온화하고 글공부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배준형은 경성에서 모두에게 칭송받는 귀공자였다.

반면 배현준은 먹고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악명 높은 망나니였다.

배현준은 어머니인 선대 경왕비가 돌아가신 뒤, 경왕이 새 장가를 들면서 새 왕비를 데리고 영지를 떠나는 바람에 홀로 경왕부에 남아 지내게 되었다.

경왕은 슬하에 아들 셋을 두고 있었는데, 적장자인 배현준은 진작에 포기한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또한 틈만 나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배현준을 세자에서 폐하고 차남을 세자의 자리에 올려달라 청했다.

물론 황제는 매번 거절했지만 경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지영은 전생에 그가 복면을 쓰고 창을 휘두르며, 단지 그녀가 떨어뜨린 향낭을 찾기 위해 홀로 산적 소굴을 소탕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가 취미로 지은 시가 세상에 알려져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궁금증에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나쁜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다니나요?”

배현준은 그런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뜨더니, 괜한 간섭은 하지 말라며 자리를 떴더랬다.

문무와 용모 모두 배현준이 배준형보다 훨씬 뛰어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실종된 삼일 동안, 그가 꼬박 사흘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맸다는 점이었다.

그에 비해 부군인 배준형은 그녀가 살아 돌아온 것조차 수치스럽다며, 태비의 손에 그녀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모두가 배준형을 올곧은 귀공자라고 칭송하지만 유지영은 그의 가식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랑 대화 중인가요?”

소리를 들은 주향이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유지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인, 분명 사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주향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방 안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유지영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았다.

낮에는 배준형과의 혼약을 물리느라 바빴고, 이제는 종령원의 사람들을 정리할 차례였다. 그녀는 주향이 이곳저곳 뒤지고 다니는데도 가만히 지켜볼 뿐, 제지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주향은 무심코 중얼거리다 유지영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아가씨, 소인 정말 방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입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유지영은 곧바로 명을 내렸다.

“쳐라!”

홍주가 달려와 주향의 귀뺨을 날렸다.

“어디서 감히 그런 허튼소리를 지껄여? 아가씨께서 낮에 외출하실 때 널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고 이런 식으로 아가씨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거야?”

주향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홍주를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날 쳐?”

유지영은 음침한 얼굴로 주향을 노려보았다. 살기등등한 그 눈빛에 주향은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들은 운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서 고씨 어멈을 불러오거라.”

유지영이 지시를 내렸다.

운교는 주향과 홍주를 번갈아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 시간도 늦었는데 어멈까지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주향도 아가씨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시 결례를 범한 것 같은데, 이만 화를 푸시고 편히 쉬세요.”

운교를 필두로 유지영의 신변에는 네 명의 측근 시녀가 있었는데, 마침 오늘은 운교와 주향, 두 사람이 당직이었다.

과거에도 일만 생기면 운교는 조용히 덮고 넘어가라고 그녀에게 권고했었다.

“내일이 성년례인데 일이 커지면 아가씨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쉬러 가세요.”

운교는 재빨리 주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주향이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쾅!

유지영은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 집어던졌다.

자기 조각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

“내가 언제 일어나도 된다고 했느냐? 이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는 것이냐!”

주향이 화들짝 놀라 다시 주저앉았다.

운교마저 안색이 창백해졌다.

“홍주, 가서 장 부관을 불러오너라. 지금 당장!”

명을 들은 홍주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예, 아가씨!”

관리 어멈에서 저택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부관까지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유지영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또 다른 시녀, 운성과 운단 자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애교 많은 운성이 앞으로 나서며 유지영을 달랬다.

“아가씨, 부디 노여움 푸세요. 이러다 몸 상하시면 아가씨만 손해입니다. 화가 안 풀리면 차라리 저희에게 매질이라도 하세요.”

옆에 있던 운단도 정신을 차리고 거들었다.

“그래요, 아가씨. 고작 세자가 무슨 대수인가요? 노부인께서 아가씨를 총애하시니 그보다 더 좋은 짝을 찾아주실 거예요.”

한자리에 모인 네 시녀를 보자 유지영은 지난날이 떠올랐다. 삼 년을 빌고 또 빌어 겨우 아이가 생기자, 기쁜 마음에 감사 불경을 드리러 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이 넷에게 이끌려 산에서 길을 잃었고, 이들은 흩어져 사람을 찾아보겠다며 자리를 뜨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진작부터 유선주에게 매수된 자들이었다.

‘내가 눈이 멀었지!’

잠시 후, 부름을 듣고 도착한 장 부관이 유지영에게 예를 올렸다.

“찾으셨습니까, 아가씨.”

“이들을 내 처소에서 내보낼 것이니, 넷 모두 중매시장에 팔아 버리세요!”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며 눈앞의 네 시녀를 가리켰고, 그 넷은 온몸이 굳은 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 저희를 팔아 버리신다고요?”

운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장 부관마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네 사람이 유지영의 심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가씨, 밤도 깊었는데….”

유지영은 장 부관의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비웃음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장 부관도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요?”

장 부관은 크게 노한 유지영을 보고는 곧바로 태도를 고쳐 사죄했다.

“소인, 곧 알아보겠습니다.”

털썩!

운교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따져 물었다.

“소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셨습니까! 수년간 곁을 지킨 저희입니다. 어찌 이런 식으로 내치려 하십니까!”

유지영은 더 이상 이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냉혹하고 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이 주인을 무시하다니. 갈수록 분수를 모르는구나. 특히 주향, 저 아이는 어서 천한 노비로 팔아 넘기세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피안을 거슬러   제100화

    송씨는 기가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시어머니까지 유지영의 편을 들고 있으니 더는 반박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잠시 후 의원이 도착했고, 유정남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홍주가 조용히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때 병풍 안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서옥혜가 얼굴을 감싸고 뛰쳐나왔다.그리고 유지영이 예상했던 것처럼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유정남을 올려다보았다.“국공 나으리, 저는 그저 기댈 곳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그런데 군주님께 이런 오해까지 받게 되었으니, 제가 나가겠습니다.”유정남이 그녀를 말리려던 순간, 유씨 노부인이 먼저 눈빛으로 그를 제지했다.“정남아, 지영이가 잘못한 건 없다. 내가 서 낭자 모자에게 따로 머물 곳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는데, 서 낭자가 싫다고 한 것이야.”“어머니…….”“나도 서 낭자의 명성을 생각해서 한 말이다. 과부가 아들을 데리고 남의 집에 얹혀 살면 뒤에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 더구나 서 낭자는 남편을 잃은 지 오래되지도 않았지 않느냐. 너도 나중에 동이가 자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걸 바라지는 않을 게다.”유씨 노부인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서옥혜를 내보낼 생각이었다.이처럼 속내가 빤히 보이는 여인을 집안에 두었다가는, 다른 처자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역시 오래 산 사람의 눈은 쉽게 속일 수 없었다.전생에는 서옥혜가 동이의 진짜 신분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그 바람에 노부인은 동이를 제 손자로 오해했고, 서옥혜가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주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동이가 유정남의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노부인이 서옥혜를 감싸줄 이유는 없었다.“경성은 치안도 엄하고, 서 낭자는 우리 국공부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다. 누가 감히 저 모자를 함부로 대하겠느냐?”유씨 노부인이 차근차근 말하자, 유정남도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게다가 남편을

  • 피안을 거슬러   제99화

    말을 마친 서옥혜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덧붙였다.“노부인께서 이렇게까지 저희 모자를 못마땅해 하시니, 저희가 떠나겠습니다.”그 한마디로 유씨 노부인은 순식간에 속 좁은 노인네가 되어버렸다.결국 노부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를 쾅 내려치며 소리쳤다.“무엄하다!”분노에 찬 목소리에 서옥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어머니, 진정하세요. 이런 시국에 저 모자를 내쫓으면 사람들이 우리 국공부를 어떻게 보겠어요? 게다가 아주버님께서 이미 두 사람을 보살펴 주겠다고 하셨는데, 중간에 내보내는 건 신의를 저버리는 일 아니겠습니까?”송씨는 노부인의 등을 쓸어주며 말을 이었다.“아마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처음 저택에 왔으니 적응하지 못한 것도 이해해 줘야지요.”그러고는 유지영을 돌아보았다.“지영아, 네가 서 낭자를 오해한 것 같으니 어서 사과드리거라.”그 말을 듣고 유지영은 확신했다.서옥혜는 분명 송씨 쪽 사람이었다.쾅!유씨 노부인이 다시 한번 탁자를 내려치며 분노한 얼굴로 송씨를 노려보았다.“보살피는 것도 방법이 여러 가지다. 꼭 저택 안에 둬야만 보살피는 것이더냐? 송씨,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게냐!”계속 선을 넘는 송씨의 태도에 유씨 노부인의 분노도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도 집안의 안주인이고, 정혁이 곁에도 첩실을 둔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도 저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 정말 몰라서 감싸는 것이냐?”이번에는 유씨 노부인도 송씨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옥혜의 속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집안 사람이라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을, 송씨는 오히려 계속해서 서옥혜를 저택에 붙잡아두려 하고 있었다.큰댁 일에 간섭하려는 속셈이 뻔했다.송씨는 서러운 듯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오해세요, 어머니. 저도 그저 국공부의 명성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어제 모자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하루 만에 내쫓으면 사람들이 우리 국공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서옥혜가 담담하게 답했다.“제 처지를 헤아려 주셔

  • 피안을 거슬러   제98화

    유지영은 송씨를 보지도 않고 바로 노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할머니, 제가 어제 춘아와 운심을 서 낭자에게 보내드렸는데, 글쎄 밤중에 춘아가 유수각 문을 두드리지 뭐예요. 의원을 불러야겠다고 하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물어보니 동이가 잠자리가 바뀌어서 자지러지게 운다길래 걱정이 돼서 의원을 부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어요.”말을 마친 유지영은 다시 하품을 했다.“서 낭자도 참 이해하기 어렵네요. 아버지는 술기운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시던데, 그런 분께 아이를 봐달라고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그제야 유씨 노부인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네 살이나 된 아이가 그렇게 밤중에 소란을 피웠다고? 어미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지. 하필 국공이 돌아온 때에 맞춰 울었다는 것도 이상하구나.”송씨는 얼른 노부인을 달래려 했지만, 유지영이 비웃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처음부터 어머니께 이 얘기를 꺼내려고 했구나!’“가서 서 낭자를 불러오너라!”이미 서옥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긴 유씨 노부인은 싸늘한 얼굴로 명했다.잠시 후, 불려온 서옥혜가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유씨 노부인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내 자네가 지낼 곳을 따로 마련해 줄 테니, 아이를 데리고 이만 나가게.”서옥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노부인, 저는 경성에 처음 와서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이까지 데리고 대체 어디에서 혼자 살라는 말씀이십니까.”송씨가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이가 어리면 잠자리가 바뀌어 칭얼댈 수도 있는 일이다.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연약한 여인이 혼자 동이를 돌보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네 아버지도 저 모자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그 말을 들은 서옥혜는 노부인이 왜 자신을 내보내려 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유지영을 향해 몸을 숙였다.“군주님, 어제는 제가 너무

  • 피안을 거슬러   제97화

    그래서 유씨 노부인도 서옥혜 모자를 좋게 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저는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라, 이런 일로 손님을 내보내는 것은 난감한 일입니다.”유지영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자, 노부인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그건 할미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쓰지 말거라.”유국공부의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유씨 노부인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유정남은 궁중 연회에 참석하러 갔고, 유국공부의 다른 사람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유지영은 침소에서 의서를 읽고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임씨 어멈이 안으로 들어왔다.“군주님, 소인이 춘아와 운심을 서 낭자에게 보냈습니다. 국공 나으리의 처소에도 사람을 세워두었고요.”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밤이 깊어지자, 그녀는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다가 홍주에게 말했다.“대문 앞에 사람을 보내 지키고 있다가, 아버지께서 동정원으로 들어가시면 바로 돌아와 보고하라 해.”홍주가 나가자, 옆에 있던 동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군주님, 서 낭자라는 사람, 정말 무슨 일을 꾸밀까요?”“아버지만 빤히 바라보던 사람이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지.”유지영은 절대 서옥혜에게 틈을 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는 한 번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을 사람이었다.그러다가 유지영은 순간, ‘계속 막기만 할 게 아니라, 차라리 먼저 손을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봐도 송씨네와는 어떤 식으로든 엮여 있어, 자신과 아버지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정연은 요즘 일을 잘 배우고 있느냐?”유지영이 물었다.“예. 나이는 어리지만 눈치도 빠르고 똑똑한 아이라, 한 번만 가르쳐도 바로 알아듣습니다.”“그럼 그 아이를 시켜 삼촌네를 잘 살피게 하거라.”“예.”책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그때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홍주가 아직 잠들지 않은 유지영을 보고 곧장 아뢰었다.“군주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국공 나으리께서

  • 피안을 거슬러   제96화

    유정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경성으로 올라오는 내내 가장 많이 들은 것은 유지영이 파혼을 당했고, 정혼자가 유선주로 바뀌었으며, 부광 비단 사건에 휘말린 뒤 경성에서 외톨이처럼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그 말을 들은 순간, 그는 당장이라도 경성으로 날아오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딸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스러웠다.“아주버님, 정말 오해세요.”송씨가 서럽다는 듯 눈물을 훔쳤다.“아주버님께서 어린 지영이를 두고 떠나신 뒤로 저는 줄곧 그 아이를 친딸처럼 대해왔어요. 가끔 선주가 잘못을 하면 혼내고 다그친 적은 있어도, 지영이는 한 번도 혼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저도 너무 억울해요.”송씨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유선주도 서러운 얼굴로 송씨를 부축하며 유정남에게 말했다.“큰아버지, 밖에서 들리는 소문은 전부 헛소문이에요. 어머니를 오해하신 거예요.”유정남도 아직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것은 아니었기에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부광 비단 사건은 아직 조사 중이었고, 송씨가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도 없었다.하지만 진실은 곧 드러날 것이다.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아.”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의 심상치 않은 안색을 보고 전생을 떠올렸다.아버지는 정직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가족 간의 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기도 했다.그래서 집안 여자들 사이의 암투를 알아채지 못해 손해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는 어머니인 유씨 노부인에게도, 동생인 유정혁과 제수인 송씨에게도 경계심이 없었다. 결국 그들의 모함에 당해 평판과 권력을 모두 잃고 말았다.지금 아버지가 송씨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유씨 노부인에게는 여전히 공경심을 가지고 있었다.유지영은 웃으며 말했다.“아버지, 할머니는 제게 참 잘해주셨어요. 할머니께서 지켜주신 덕분에 저는 서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할머니도 아버지를 무

  • 피안을 거슬러   제95화

    송씨는 연달아 거절당하자 체면이 구겨진 듯 어색하게 답했다.“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유지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청운원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네요. 잠시 머무는 거라면 장미원이 더 낫겠어요.”“거긴 객원이지 않니?”송씨가 불만스럽게 말했다.장미원은 외진 곳에 있어 큰댁과는 거리가 꽤 멀었다.유씨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송씨를 바라보았다.“손님이 객원에 머물지, 그럼 어디에 머물겠느냐?”계속 큰댁 일에 끼어들려는 송씨의 태도에 유씨 노부인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눈치도 없는 것 같으니라고.’서옥혜는 기대 어린 눈으로 유정남을 바라보았다.그가 나서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유정남은 오히려 흐뭇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지영이가 다 컸구나. 이제 살림도 꾸릴 줄 알고. 네 말대로 하자.”그 한마디로 서옥혜가 장미원에 머무는 것으로 정해졌다.유지영은 홍주에게 분부했다.“이따가 부관에게 말해서 괜찮은 시녀를 골라 서 낭자 시중을 들게 하거라.”홍주는 곧바로 뜻을 알아들었다.모든 안배를 마친 일행은 대청으로 향했다. 유지영은 유정남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 서옥혜를 보고 입을 열었다.“서 낭자도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테니, 동이를 데리고 객원으로 가서 쉬세요. 아버지는 오랜만에 돌아오셨으니 할머니와 단둘이 나누실 이야기가 많으실 겁니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서옥혜와 유정남 사이를 자연스럽게 가로막고, 옅게 웃었다.“필요한 게 있으면 시녀를 시켜 저를 찾으세요.”서옥혜는 당황한 눈으로 눈앞의 어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여쁜 얼굴에는 담담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고 매서웠다.그 순간 서옥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시선을 피했다.오랜 세월 전장을 누빈 유정남보다도 더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였다.대체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지영아…….”서옥혜가 무언가 해명하려 했지만, 유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서 낭자, 저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