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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좁은 침대 위의 온기, 그리고 털어놓은 과거

Author: 오필리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4 21:00:26

"너… 어디 가."

취기에 잔뜩 혀가 꼬여 웅얼거리는 목소리.

내 셔츠 끝자락을 꽉 쥔 그녀의 손길에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더듬거렸다.

"나, 나? 어… 침대가 좁으니까 난 바닥에서 자려고."

"야… 청승맞게 바닥에서 뭐 해. 좁아터졌으니까… 그냥 기어 올라와."

내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그녀는 쥐고 있던 내 옷자락을 제 쪽으로 훅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나는 얼떨결에 침대 가장자리에 엉거주춤하게 걸터앉듯 눕게 되었다.

싱글 침대는 성인 두 명이 눕기엔 터무니없이 비좁았다.

내 등 뒤로 그녀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가 만들어졌다.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천장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이내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조심스럽게 돌려 시은이 쪽을 바라보았다.

"……."

시은이는 자고 있지 않았다.

어두운 방 안, 창밖에서 스며든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내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 안 졸려?"

내가 당황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자, 시은이는 말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었다.

늘 가시를 세우고 있던 평소와 달리, 알코올 기운에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 한없이 부드럽고 무방비한 웃음이었다.

"윤태경."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나른했다.

"…너 진짜 멍청해."

"어…?"

"내가 뭐라고. 왜 자꾸 내 옆에서 알짱거리냐, 바보같이."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붉어진 눈가를 애써 한 번 깜빡이며 덧붙였다.

"……고맙게."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뱉어낸 그 짧은 투정 같은 한마디에, 내 목구멍이 턱 막혀왔다.

나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며 서둘러 대답했다.

"나도… 나도 고마워, 시은아."

내 대답에 시은이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떴다.

이내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손이 아주 천천히 빠져나오더니, 내 뺨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거친 뒷골목을 누비며 남의 멱살을 쥐어뜯던 그녀의 손끝이 내 뺨을 어루만지는 감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내 볼 위에 살포시 얹혀진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은이의 호흡이 점차 느려지더니, 뺨에 손을 얹은 채로 그녀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새근새근, 나른하고 편안한 숨소리가 좁은 침대 위를 채웠다.

나는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과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견뎌내며, 내 뺨에 닿은 그녀의 얕은 온기와 곤히 잠든 얼굴을 밤이 깊도록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

다음 날 아침.

좁은 자취방 안으로 스며든 햇살보다 먼저 방 안을 채운 건 매콤한 라면 냄새였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뒤를 돌아보자, 얇은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던 시은이가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슨 냄새야."

잠이 덜 깨 갈라진 목소리.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는 그녀의 얼굴 앞쪽에,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은 냄비를 내려놓았다.

"해장해야지. 속 쓰릴 텐데 얼른 먹어."

시은이는 멍한 눈으로 냄비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알코올 기운이 아직 덜 빠진 건지, 아니면 배가 고팠던 건지 그녀는 뜨거운 면발을 호호 불어가며 무척이나 맛있게 라면을 흡입했다.

국물까지 싹 비워낸 그녀가 찬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어젯밤 알코올에 무장 해제되었던 눈빛이 다시 평소의 서늘하고 시크한 일진 이시은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어색한 공기를 깨보려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리모컨을 주워 낡은 TV를 켰다.

마침 주말 음악 방송의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2004년을 뒤흔든 무서운 신인! 대체 불가 국민 요정, '루미너스'의 무대입니다!"

MC의 들뜬 소개와 함께, 화면 속에서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걸그룹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고 있었다.

카메라가 센터를 클로즈업하자, 칠흑 같은 긴 생머리에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은 '박유나'의 요정 같은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 옆에는 성숙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로 무대를 장악하는 맏언니 '강혜림'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화면 속 화려한 아이돌들의 모습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와… 진짜 예쁘다…."

내가 모니터에 빠져들어 무심코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불쑥 뻗어 나온 하얀 손이 내 손에서 리모컨을 거칠게 낚아챘다.

딸깍-!

화면이 재미없는 뉴스 채널로 휙 넘어가 버렸다.

"어?"

고개를 돌리자, 시은이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꽉 깨문 채 서늘한 눈으로 TV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모컨을 쥔 그녀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쥐어져 있었다.

"저게… 예쁘냐?"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 아, 아니, 그냥 연예인이니까 신기해서…."

"역겨워. 밥맛 떨어지니까 딴 거 봐."

시은이는 리모컨을 바닥에 툭 던져버렸다.

조금 전까지 라면을 먹으며 훈훈했던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시은이는 이내 턱을 괴고 굳어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야. 빵셔틀."

"어? 왜, 왜?"

"어제 내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른 거 말이야."

시은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어디 가서 입 뻥끗하기만 해. 애들한테 말하면 진짜 혀를 뽑아버릴 줄 알아."

살벌한 경고였지만, 나는 겁을 먹는 대신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젯밤 좁은 부스 안을 가득 채웠던,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뭘 실실 쪼개고 지랄이야. 내 말이 장난 같아?"

시은이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꼬집으며 쭉 잡아당겼다.

"아, 아야! 알았어, 절대 비밀로 할게! 진짜야!"

내가 과장되게 엄살을 피우자, 내 볼을 꼬집고 있던 시은이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팩 쏘아보던 그녀의 입꼬리에도 어느새 묘하고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근데 시은아."

"왜."

"방금 TV에 나온 걔네들보다… 진짜 네가 훨씬 더 노래 잘해. 넌 당장 데뷔해도 되겠더라."

내 진심 어린 감탄에, 턱을 괴고 있던 시은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젓가락 끝으로 빈 냄비의 가장자리만 툭툭 치더니, 이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덤덤하게 내뱉었다.

"당장 데뷔해도 되는 게 아니라… 데뷔할 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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