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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6 08:41:08

잰걸음으로 취홍루의 인적 드문 뒷문을 빠져나오자, 아직 가시지 안흔 새벽안개 속에 허름한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혁.”

하륜의 부름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사혁이 고개를 숙였다. 하륜은 보따리를 꽉 쥔 채 불안하게 서 있는 초희를 건조하게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 계집을 남원(南原)으로 데려가거라. 그곳에 낙화루(落花樓)라는 기방이 있을 것이다. 행수에게는 이미 전갈을 넣어두었으니, 당분간 그곳에서 몸을 낮추고 기회를 엿보게 해.”

남원? 낙화루?

초희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나으리, 낙화루라니요! 기껏 도성 기방을 빠져나와 나으리만 믿고 따라왔는데, 이제 와서 더 시골구석의 기방으로 가라 하십니까? 차라리 도성 기방이 낫지요. 거긴 귀한 분들이라도 자주 드나드는데, 그런 촌구석에서……”

“초희야.”

하륜의 나직한 부름에 초희가 말을 멈추고 움찔했다.

“서두르면 체하는 법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거기 가만히 앉아 내가 일러주는 대로만 해. 그러면 네가 원하는 그 자리는 머지않아 절로 네 것이 될 테니.”

하륜의 은밀하고도 위압적인 숨결이 닿자 초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은 거짓을 말하는 이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시골 기방으로 쫓겨가는 처지였으나, 하륜의 계획 안에만 있다면 정말로 안방마님의 가마를 탈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나으리만 믿고 가겠습니다.”

초희는 사혁이 이끄는 낡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 잠시 고개를 돌려 도성의 거리를 눈에 담았다.

‘내가 있든 없든 이곳은 여전하겠지.’

태어난 순간부터 제 목을 조르던 지긋지긋한 밑바닥 삶.

‘하지만 나는 변할 거야.’

다시 이 도성의 문을 밟을 때는 반드시 비단옷을 휘감은 채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걸어가리라 다짐했다.

삐걱거리는 마차의 조악한 흔들림조차 지금의 초희에게는 그저 안방마님의 화려한 가마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마차가 덜덜거리며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하륜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천기곡으로 향했다.

**

천기곡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하륜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언제나처럼 해 질 녘의 노을이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천기곡을 감싸고 있는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바람 끝에 묻어오는 냄새가 이질적이었다

하륜은 평소보다 천천히 마당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시선이 마당 흙 위를 날카롭게 훑었다.

미옥의 가벼운 발걸음과는 확연히 다른, 묵직하고 거친 발자국. 장화를 신은 무관의 발자취였다.

‘……강진인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조만간 강진이 이 깊은 산속까지 냄새를 맡고 찾아오리라고.

하지만 하필이면 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오늘이란 말인가.

하륜의 가슴 안쪽에서 불안과 불쾌감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강진, 그자가 무엇을 묻고, 무엇을 말하고 갔단 말인가.’

통제해 오던 하륜의 이성에 틈이 벌어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이 미옥에게 품은 마음을 강진이 눈치챘을까 봐 속이 탔다.

혹여 폐하께서 다시 찾으신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도 지껄인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말을 했다면, 거절도, 원망도 할 줄 모르는 이 미련한 여인은 대체 무어라 답했을까.

설마 다시 폐하의 곁으로 돌아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것은…….

“나으리, 오셨습니까?”

머릿속이 엉망으로 얽혀가던 찰나, 방문이 열리며 미옥이 얼굴을 내밀었다.

하륜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았다.

그는 굳은 얼굴을 애써 갈무리하며 성큼 다가갔다.

“……사내가 다녀간 흔적이 있더구나.”

“예. 강진 나으리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갔지?”

하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당장이라도 강진의 목을 쳐버릴 듯한 치열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미옥은 하륜의 기색을 살피며 조용히 답했다.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저 나으리께서 돌아오시면, 사냥개가 다녀갔다는 말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사냥개가 다녀갔다?”

하륜의 좁아졌던 미간이 그제야 미세하게 풀렸다.

황제의 안부를 묻거나 미옥의 의중을 떠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자신을 향한 경고였다.

‘내가 무얼 하고 다니는지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군.’

하륜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분명 자신이 기방을 드나드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그냥 이리 돌아갔을 리는 없으니까.

‘사냥개의 코는 피 냄새에만 예민할 뿐이지.’

하지만 그의 신경을 긁는 것은 따로 있었따.

치부책을 손에 쥔 연호가 병권을 통제하고 옥좌를 안정시키고 나면, 필연적으로 제 아픈 손가락인 이 여인을 다시 찾으려 들 것이다.

하륜의 시선이 미옥의 가녀린 어깨에 닿았다.

‘그렇다면 네가 이 아이를 돌아볼 틈조차 없게 만들면 될 일.’

애초에 내 삶을 피로 물들인 이 제국을 온전히 내버려 둘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언젠가 내가 저 옥좌의 목줄을 쥐고 흔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으니.

여인에 대한 미련 따위는 사치로 느껴질 만큼, 궐 안에 숨 막히는 피바람을 일으켜 너를 그 거대한 진흙탕 한가운데 옴짝달싹 못 하게 처박아 두리라.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벼려온 나의 핏빛 복수와, 미옥을 지키기 위한 길이 이토록 완벽하게 맞닿아 있으니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주인님?”

생각에 잠긴 하륜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자, 미옥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주인 타령을 할 것이냐.”

“예? 아……. 그럼, 하륜 나으리라 부르오리까?”

미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하륜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나으리라는 호칭도 딱딱하여 싫구나. 이 깊은 산중에 너와 나 단둘뿐인데, 언제까지 그리 남처럼 선을 그을 셈이냐.”

“그럼 어찌…….”

“서방님.”

“……!”

“그리 부르는 것이 듣기 좋겠구나.”

하륜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은밀하고도 나직한 그 한마디에, 미옥의 하얀 뺨이 순식간에 복숭아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제게 있어서는 황제보다 더 높았던 그에게 차마 올릴 수 없는 호칭이기도 했거니와, 그 단어가 주는 생경한 무게감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미옥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붉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는 사이, 하륜은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이끌어 방 안으로 향했다.

“들어오거라. 오늘은 네 서방이 밥을 지어주마.”

그의 겉모습은 더없이 다정한 지아비 같았다.

수줍어하는 그녀를 부드럽게 이끄는 손길엔 애틋한 온기가 배어 있었으나, 닫히는 방문 너머로 드리워진 그의 짙은 그림자는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옥이 머무는 이 좁고 평화로운 세상을 영원히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세상 밖의 지옥을 다스리는 악귀가 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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