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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22 08:14:26
황제 연호가 내린 명의 저의를 하륜이 모를 리 없었다. 미옥이 머물 처소의 기물 하나까지 제 손으로 고르고 배치하라니. 그것은 제 손으로 깎아 바친 인형이 밤새 타인의 품에서 어찌 허물어지고 젖어 들었는지, 그 눅진한 흔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라는 지독한 조롱이었다.

허나, 마당에 홀로 선 하륜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비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묘한 희열과 서늘한 호기심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나의 수를 뻔히 읽고도 그 아이를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 들여놓으셨단 말이지. 훌륭하구나, 미옥아.’

차가운 손끝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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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346 화

    같은 시각, 깊은 밤이 내려앉은 연화당.미옥은 거울 앞에 앉아 제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거울 속 여인의 입술은 붉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조금 전, 하륜이 집요하게 짓이기고 삼켜낸 지독한 흔적이었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혀끝이 아릿할 정도로 통증이 선명했다.미옥은 화장대 한구석에 놓인 작은 백자 합을 집어 들었다. 얼마 전, 하륜이 직접 옥안(玉顔)을 가꿀 때 쓰라며 쥐여주었던 연고였다.손가락 끝에 덜어낸 투명한 연고를 부르튼 입술 위에 얇게 펴 발랐다."……!"그 순간, 미옥의 두 눈이 기이함에 커졌다.상

  • 환관의 비   345 화

    물건이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싼값에 사들일 권리를 확보하고, 값이 오르자 그 권리 자체를 팔아 막대한 이문을 남겼다. 하륜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기민하고 계산적인 수완이었다.“대단한데……. 값이 오를 거라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알았지?”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사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도박이었을 뿐입니다. 틀려도 본전은 하겠지 싶은.” “그렇다면 더욱 대단하군. 내가 없었으면 큰 상단의 주인이 되고도 남았겠어.”‘여기서 더 말리면 결국 말이 막힐 터.’사혁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덕분에 사병들과

  • 환관의 비   34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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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34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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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342 화

    “폐하께서 옥체를 수고롭게 하시며 매일같이 연화당으로 행차하시니, 저들이 저리 귀비 마마를 물고 늘어지는 것 아닙니까!”조운선은 편전이 떠나가라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그러니 아예 정무를 보시는 편전을 귀비 마마께서 계신 연화당으로 옮기십시오! 마침 저 무능한 자들에게서 거둬들일 막대한 재물이 있지 않습니까! 그 재물로 연화당을 황국에서 가장 화려하게 보수하시어, 귀비 마마를 향한 폐하의 애정을 만천하에 과시하십시오!"조운선의 피를 토하는 듯한 뻔뻔한 주청이 끝나자, 편전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기괴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 환관의 비   341 화

    높은 단상 위, 화려한 황좌에 깊숙이 몸을 기댄 연호가 말없이 단상 아래를 훑어내렸다. 고조되는 언성 속에서도,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는 희미한 비웃음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오늘 아침, 연호가 던진 한 장의 조서(詔書)가 편전을 발칵 뒤집어 놓은 참이었다.[실무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고관대작들의 명예직 녹봉을 전면 삭감하고, 면세 혜택을 받던 세습 영지를 국고로 환수한다.]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는 자는 가문을 불문하고 밥줄을 끊어버리겠다는, 황국의 오랜 악습을 도려내는 날 선 칼날이었다."폐하! 재고(再考)해 주십시오!

  • 환관의 비   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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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6 화

    “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 환관의 비   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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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관의 비   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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