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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이서의 얼굴과 몸을 환하게 감싸고 있었다.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이 눈부셨다.
따스했다.
차갑고 축축한 시멘트 바닥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순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포근한 온기였다.
피부를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굳어 있던 감각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귓가를 스치는 잔잔한 공기,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하게 퍼지는 고급스러운 향기까지.
이서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머릿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상하다…….'
우리 집에서는 이런 햇살이 들지 않았다.
창문의 방향도, 침실의 구조도 이렇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 그녀가 사용하던 방향제와도 전혀 다른 향이었다.
마치 낯선 누군가의 방에 누워 있는 것처럼.
이서가 무심코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바꾸려던 순간이었다.
찰나였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따뜻한 감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대신, 오래전부터 잊고 싶었던 기억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축축한 시멘트 바닥.
등을 짓누르던 차가운 감촉.
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던 눅눅한 곰팡내.
그리고 어딘가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소리.
그날의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싫어…….'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발.
차갑게 식어가던 피부.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번뜩이던 칼날.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죽어줘야겠어.”
낮고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숨이 막혔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고, 온몸의 감각이 한순간에 끊어지는 것 같았다.
뜨거운 것이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피 냄새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살려줘…….'
머릿속으로 수없이 외쳤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귀를 때리던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까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여자의 웃음소리.
가볍고 맑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 웃음소리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귓가를 맴돌았다.
하하…….
마치 그녀의 죽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 소름 끼치는 잔향이 다시 귓속을 파고드는 순간
“헉!”
이서는 비명을 지르듯 눈을 번쩍 떴다.
상체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와 목덜미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하아…….”
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다.
칼날이 살을 파고들던 순간의 고통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던 피 냄새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여자의 웃음소리도.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분명 그곳에 상처가 있어야 했다.
칼이 깊숙이 박혔던 자리.
피가 흘러내리고, 살이 벌어져 있어야 할 자리.
그런데
“……?”
손바닥에 닿은 것은 매끄러운 피부뿐이었다.
이서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도.
피도.
흉터조차 없었다.
“말도 안 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부위를 더듬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힘껏 눌러보았다.
아프지 않았다.
손톱으로 피부를 세게 긁어보았다.
붉은 자국 하나만 남았을 뿐, 칼에 찔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뭐지……?”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날카로운 칼에 이곳을 관통당했었는데…….”
그 기억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죽었다.
그것도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일까.
이서는 침대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긴장했다.
혹시라도 다시 무너질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침실.
높은 천장.
커다란 창문.
고급스러운 가구.
처음 보는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낯설어야 하는데, 어딘가 익숙했다.
그 이유를 찾기도 전에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화장대.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거울.
이서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울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정말 살아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죽음의 순간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거울 앞에 선 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죽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살아 있었다.
상처는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예상하지 못하는 여자가 서 있었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쾅! 고요함을 유지하던 법무법인 대표 집무실의 문이 거친 충격음을 발산했다. 안내 직원의 경악한 비명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서늘한 마찰음을 내며 단단한 골프공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날아갔다.콰창! 변호사 책상 바로 뒤편, 벽면에 걸려 있던 거대한 원목 액자가 산산조각이 나며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고급 원목 책상 위와 대리석 바닥으로 비처럼 흩뿌려졌다. 민채린 특유의 오만하고 거침없는 기세를 덧씌운 이서가, 한 손에 묵직한 아이언 골프채를 쥐어잡은 채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악녀다운 당당함의 서려 있었다.책상 주인의 이름은 한성진."민채린 씨."그의 말투는 평평했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이서는 골프채 끝을 바닥에 대고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왜 왔는지 아시죠.""모릅니다.""그럼 더 분명하게 말하죠."이서가 말했다. "3년 전 대원그룹의 해외 인수합병 건. 변호사님이 맡았던 그 건. 중간에 자금 하나의 행방이 불분명합니다. 지금 그 서류를 제게 주시면,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한성진은 그녀를 몇 초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주 옅은 표정을 지었다. 냉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피로에 가까웠다."서류는 제게 없습니다.""그럼 어디에 있죠?""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3년 전 그 사건을 넘겨받은 사람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름만 올렸을 뿐입니다. 실제로 처리한 사람이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 모든 걸 가져갔습니다. 제가 받은 건 깨끗한 종결 보고서 한 장뿐입니다."이서는 그를 응시했다."누가 가져갔죠?"한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말할 수 없는 건가요, 모르는 건가요?""……"이번에 이서에게 대답한 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내뱉지 않는 한 변호사의 평평한 입매뿐이었다.이서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서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고, 그녀의 구두
이서는 민채린의 비밀 폰 속 오래된 파일을 뒤지다 그 이름을 발견했다.한성진. 3년 전 대원그룹의 한 해외 인수합병 건을 담당했던 변호사. 그 인수합병은 결국 '상대방 자진 철수'로 종결됐지만, 비밀 폰 안에는 암호화되지 않은 메모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한 줄뿐이었다."한성진, 해외 계좌, 사할."사할. 무엇의 사할인지 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원의 인수합병 건을 맡았던 변호사가 메모에서 '해외 계좌'와 나란히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찾아갈 이유는 충분했다.다음 날 오전 열 시, 이서는 법무법인에 도착했다. 프런트에는 젊은 여직원이 있었다. 훈련된 예의 바른 미소를 띠고 있었다."죄송합니다. 한 변호사님께서 갑작스러운 외부 미팅이 생기셔서 방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일정을……"이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프런트를 지나 복도 끝의 유리문 너머로 향했다. 유리문 뒤, 의자 등받이에 걸린 짙은 회색 정장 재킷과 탁자 위에 놓인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보였다."언제 돌아오시나요?""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이서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주차장 버튼을 눌렀다.차에 앉아 잠시 조용히 있었다. 오래전, 자신이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너는 너무 물러. 네가 옳게 하기만 하면 남들도 너에게 잘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러면 그러할수록 남들이 너를 더 밟아."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대원에서 쫓겨나고 나서야 그 말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이서는 시동을 걸고 차를 주차장 밖으로 내보냈다. 스포츠용품점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골프채 한 자루를 샀다. 나올 때는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세졌다.만약 세상이 '민채린'이라는 이름을 악녀라 부르며 멸시한다면, 굳이 그 이름을 정화하려 애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모든 악명과 오명은 '민채린'이라는 껍데기가 전부 뒤집어쓸 터였다. 진짜 영혼은 그 악
조용한 갤러리 안쪽, 낯익은 캔버스 앞에 이서가 멈춰 섰다.화폭 위에 내려앉은 붓 터치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캔버스 귀퉁이에 적힌 희미한 서명을 내려다보던 이서는 곁으로 다가온 갤러리 큐레이터에게 무심한 듯 질문을 건넸다."이 그림, 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소장자분은 계속 같은 분이신가요?"질문을 들은 직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손님. 한 분께서 수년째 갤러리에 위탁 대여를 유지하고 계십니다. 개인 소장자분의 신원이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철저히 비공개로 부쳐져 있어서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완벽한 보안. 이서는 더이상 캐묻지 않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갤러리 문을 나서는 이서의 구두 굽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자신이 버려지고 잊힌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과거를 이 공간에 영원히 박제해 두고 있었다. 그 익명의 소장자가 누구인지 지금 당장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 손의 주인도.'저택으로 돌아와 고요한 거실을 지나치려돈 찰나였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태블릿을 넘기던 강태준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할아버지의 개인 만찬이 있어."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어조. 그는 시선을 태블릿에 고정한 채 말을 덧붙였다."너도 참석하라고 하셨어."이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을 툭 던졌다."알았어."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이서가 거실을 지나 2층 계단을 밟고 올라서려던 바로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자, 방금 전 거실을 스쳐 지나온 강태준의 이름으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내일은 화려한 건 빼고 입어. 할아버지는 눈에 띄는 걸 아주 싫어하시니까.]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더니, 뒤돌아서자마자 날아든 무심한 경고.이서는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을 몇 초 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차가운 껍데기 속에 숨겨진 것이 가문의 며느리를 향한
외부의 시선이 완벽히 차단된 최고급 프라이빗 골프 클럽의 VIP 라운지. 푸른 필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는 오직 스치는 바람 소리와 은은한 차 향기만이 맴돌고 있었다.테이블 맞은편에는 대원과 성운의 오랜 경쟁사인 서가그룹의 서 대표가 앉아 있었다. 사교계 만찬장에서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지 며칠 만에 성사된 비공개 회동이었다.그저 단정하고 우아한 필체로 적힌 몇 개의 회사 이름뿐이었다."성운그룹 산하에 있는 몇 개 해외 법인들이에요. 최근 회계 흐름이 묘하게 물투명해 보여서요. 서 대표님께서 한 번쯤 가볍게 들여다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가지고 나왔습니다."직접적인 고발도, 혐의에 대한 단정도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냄새만 풍겨주는 정갈한 제안.서 대표의 노련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쪽지에 적힌 사명들을 훑어본 뒤, 턱을 괴며 이서를 흥미롭다는 듯 응시했다."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주는 겁니까? 아무리 대원가의 며느리가 되었다 한들, 당신은 엄연한 성운의 민채린인데."상대의 의도를 떠보려는 날카로운 질문이었지만, 이서의 표정에는 티끌만 한 동요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리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저는 성운의 미래에 대해....제 나름의 그림을 그리고 있거든요."가문을 배신하겠다는 선언도, 그렇다고 노골적인 복수심을 드러내는 위험한 고백도 아니었다. 상류사회의 권력 싸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계 구도를 염두에 둔 은밀한 견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지극히 모호하고 완벽한 대답이었다.서 대표는 낮게 실소를 흘리더니, 쪽지를 반으로 정갈하게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흐음....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확인해보지요."작은 씨앗 하나가 경쟁사의 품 안으로 조용히 건네졌다.저택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룸 안에서 이서의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예상대로 [아버지] 였다.이서는 숨을 고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민 회장의
노트북 화면 중앙에서 모래시꼐 아이콘이 정지하고, 100% 라는 숫자와 함께 복구된 데이터 폴더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이서는 밤을 지새운 피로도 잊은 채 마우스를 쥐었다. 메모리 카드 안에는 비밀 폰에서 추출한 음성 파일 외에도 여러 개의 텍스트 문서와 암호화된 가계정 내역이 숨겨져 있었다. 그중에는 민채린이 가문 몰래 빼돌리거나 거래했던 자금의 흔적이 담긴 비밀 장부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서는 숨을 죽인 채 파을들을 하나씩 파헤쳐 나갔다.음성 파일 속에서 민채린이 언급했던 '그 사고'. 문서에 담긴 정황과 날짜를 종합해 볼 때, 그 사고는 분명 자신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대원그룹에서 쫓겨났던 '산업 스파이 사건'을 가리키고 있었다.자신의 인생을 단숨에 사지로 내몰았던 그 잔혹한 사건. 하지만 파일에 적힌 단편적인 정황만으로는 당시 그 공작의 '진짜 내막'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완벽히 파악하기 어려웠다.그러나 단 한 가지, 명백하게 입증된 사실이 있었다.녹음 속에서 강태준이 내뱉었던 짧은 한마디.'지분을 가져갔으면 그 입 다물어.'최소한 강태준과 민채린의 결합은 상류사회가 겉으로 칭송하던 다정한 재혼도, 두 사람의 정략적 욕망이 합치된 완벽한 모의도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지분과 약점을 둘러싼 차가운 '거래'에 불과했다.이서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문제의 음성 파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지분을 가져갔으면 그 입 다물어.내 인내심을 더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반복해 들을수록, 이서의 신경은 태준의 목소리 토톤과 미세하게 떨리는 음색의 디테일에 집중됐다.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자의 오만함이나 배신에 성공한 자의 비열함은 그 목소리에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거대한 덫에 걸려 외통수에 몰린 자가 내지르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서늘한 방어 기제에 가까웠다. 그는 자발적으로 판을 짜고 민채린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억눌린 협박과 강제된 선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족쇄를 차고 있었다.이서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칫했다
노트북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이 방 안의 어둠을 차갑게 가르고 있었다. 이서는 민채린의 태블릿과 휴대폰을 연동해 그녀가 남긴 메신저 기록, SNS 비밀 계정, 그리고 암호화된 일정을 하나씩 파헤쳐 나갔다. 민채린이라는 여자가 구축해 둔 인간관계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작업이었다.화면을 넘기던 이서의 손가락이 멈춰 섰다. 지난 만찬장에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접촉했던 세 사람의 이름이 민채린의 과거 연락망 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대원그룹의 최대 경쟁사 대표, 상류사회 사조직을 주도하는 귀부인, 그리고 강무성 회장의 곁을 지키는 수석비서.민채린 역시 이들에게 포셥의 손길을 내밀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부 일방적인 거절이나 차가운 무응답. 민채린은 이들을 포섭하는 데 완벽히 실패해 있었다.이서는 턱을 괴고 빽빽하게 적히 ㄴ대화 기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실패의 이유는 명확했다.민채린은 지나치게 급했고, 오만했으며, 상대를 오직 '이용해 먹을 도구'로만 취급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가문의 권력을 배경 삼아 상대를 압박하려 들었다. 정꼐와 재계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들이 그런 뻔한 탐욕에 놀아날 리 만무했다.'너는 사람 낚는 법을 모르는구나,민채린.'이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은 민채린과 달랐다.사람의 욕망을 건드리는 법, 상대를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대해 마음을 여는 인내심. 억울하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바닥까지 떨어져 본 한이서에게는 민채린이 갖지 못한 그 치밀함과 기다림의 유연함이 있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빈틈을 파고들어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스며들면 그뿐이었다.복수는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계산과 전략의 영역이었다.거실로 나온 이서는 정적 속에서 서성이는 강태준과 마주쳤다.소파 끝에 비스듬히 앉아 서류를 넘기던 태준이 나직하게 고개를 들었지만, 이서는 단 한 순간도 그와 시선을 섞지 않았다. 의도적인 외면이었다.눈길조차 주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