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강태준과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그날 이후, 내 인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평생을 꿈꿔왔던 갤러리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이제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대원그룹의 서슬 퍼런 입김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내 이름이 업계에 오르내리는 순간부터, 그동안 쌓아왔던 경력과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력서를 들고 수없이 많은 갤러리의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같았다.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채용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도 그랬다.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대원그룹이 나를 업계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발이 부르트도록 부동산을 전전한 끝에, 겨우 작은 반지하 원룸 하나를 구했다.
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차디찬 방.
창문을 열어도 바깥 풍경 대신 축축한 콘크리트 벽만 보이는 곳이었다.
곰팡내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방 한 칸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 나는 생계를 위해 작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서툴고 낯설었다.
커피 머신을 다루는 것도, 주문을 받는 것도, 잔돈을 세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뜨거운 스팀에 손을 데여 살갗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일은 이제 일상이었다.
처음에는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상처조차 아무렇지 않게 넘기게 됐다.
더 아픈 곳이 따로 있었으니까.
깊은 밤,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카운터에 홀로 남아 그날 번 돈을 하나씩 세어보던 순간이면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이번 달 월세를 낼 수 있을까.
다음 달에는 또 어떻게 버텨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대원그룹의 화려한 연회장에서 크리스털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웃고 있었고, 누구도 감히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남이 마시고 남긴 커피잔이었다.
한때는 너무나 당연했던 삶이, 이제는 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운명은 참으로 무심하고 잔인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를 높은 곳에서 끌어내려, 그대로 더러운 진흙탕에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옥은 좁고 어두운 반지하 방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낯선 길거리를 걸을 때면,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그 대원 며느리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남편한테 버림받았다던데……."
그들의 목소리는 애써 무시하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 시선과 속삭임은 언제나 내 뒤를 따라왔다.
'대원의 버림받은 며느리.'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내 이름을 대신했다.
나는 그 추악한 오명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 비참한 순간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강태준.
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삼킬 때마다 가슴 한가운데가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지는 것처럼 아팠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처음 만났던 날의 눈빛.
나를 향해 웃어주던 얼굴.
뜨겁게 사랑을 속삭이며 프러포즈하던 순간.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눈빛까지.
그 모든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낡아 해진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한참 동안 빈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었다.
몇 번이고 쓰다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한 줄을 적어 내려갔다.
'사랑은 원래 식어버리는 건가 봐.'
펜 끝이 멈췄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그 뒤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니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나?'
운전 중이던 태준 차량에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아닌 한성진이었다.통화 버튼이 눌리고 한성진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태준의 귓가를 울렸다."전에 주의 깊게 보라고 하신 그 여자 분, 왔습니다." "골프채도 들고 와서 한바탕 했습니다. 다치진 않았고요. 말씀하신 대로,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또 온다고 하던가?""명확히는 안 했습니다. 하지만 올 것 같습니다.""상관없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네가 쥐고 있는 것, 그녀는 못 찾아.""알겠습니다."태준은 전화를 끊고 그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 시동을 끄고 잠시 앉아 있었다.그날 아침이 떠올랐다. 그녀가 검은 긴 치마를 입고 내려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 동작을 할 때 머리카락이 귀에서 흘러내렸고, 그녀는 손으로 그것을 귀 뒤로 넘겼다.그 동작. 태준은 그때 즉시 뭔가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서재에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 동작이 떠올랐다.그것은 한이서의 동작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항상 왼쪽 귀 뒤로 넘어갔다. 오른쪽 귀가 조금 드러났다. 민채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날 이후 그는 계속 그 일을 생각했다. 여러 번 생각했다. 매번 스스로에게 말했다. 불가능하다고.하지만 그 동작. 머리카락을 넘기는 그 동작. 그리고 그녀가 말할 때 쓰는 몇몇 문장까지."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나는 다른 사람이 내 결정을 대신해주는 게 필요 없어"이 말들은 한이서가 했던 말이었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다 기억하고 있었다.그는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했다. 민채린의 과거 모든 일정 기록을 조사했다. 그녀가 귀국한 후의 모든 외출, 접촉한 모든 사람을 조사했다. 아무런 이상도 찾지 못했다.하지만 이상을 찾지 못한 것이, 오히려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왜냐하면 그녀가 민채린이라면, 그녀의 최근 모든 변화에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민채린이 아니라면…
저택 거실을 채운 것은 서늘한 정적과 알코올의 알싸한 향이었다.외투를 벗으며 현관을 들어선 이서의 시선 끝에, 소파에 깊숙이 기댄 태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낮게 가라앉은 양주잔이 들려 있었다.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해진 주황빛 액체. 이미 몇 반을 연속으로 비워낸 듯, 그를 감싼 공기에는 보기 드문 열기와 피로함이 엉켜 있었다."어디 갔었어.""갤러리.""하- 갤러리라고?"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 기운 탓인지,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그 갤러리 주인, 몇 번이나 만난 거야."이서는 걸음을 멈추어 태준을 바라봤다."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야?""아니야.""그럼 내가 몇 번 갔는지 어떻게 알아?""................"태준은 몸을 일으켜 이서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큰 키에 순간 위압감이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너는 도대체 그 갤러리에 뭐 하러 가는 거야?""그림 보러.""그림 보러....그림 보러 라고?" 피식-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너는 예전에 그림 같은 거 쳐다보지도 않았어.""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니야."그 말에 태준이 잠시 멈췄다."그럼 너는 대체 누구야."이서는 그를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이 질문이 나올 거라고, 그가 계속 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몰라."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누군지 몰라. 왜 그 여자가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입는지 몰라. 왜 갑자기 그런 자리에서 말을 할 줄 아는지 몰라. 왜 그 그림들을 보며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몰라."연속적으로 말을 뱉은 태준은 이내 괴롭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신음했다."어떤 표정?""그 그림들을 아는 사람의 표정, 그림들이 너를 아는 것 같은 그 표정."이서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태준이 그녀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 눌러둔 것이, 오늘은 술기운 탓인지 제자리를 찾지
며칠후, 이서는 다시 갤러리를 찾았다. 손에 오래된 구 화첩 한 권을 들고서였다."찾고 싶은 그림이 있어서요."그녀의 덤덤한 말에 권제하는군말 없이 갤러리 뒤편의 작은 사무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은은한 원목 향과 묵은 종이 냄새가 감도는 나지막한 공간. 두 사람은 작은 찻상 겸 서류함 앞에 나란히 앉아 옛 화첩의 서류와 자료들을 넘기기 시작했다.저택에서의 숨 막히는감시와 침묵과는 전혀 다른, 평화롭고 정갈한 적막.“왜 이 그림을 찾으시는 거예요?”“추억이 많은 그림이었어요.” 이서가말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어요.”권제하는화첩위의그림사진을내려다보았다. 한참 보았다."이 그림, 예전에 제 선배가 굉장히 좋아했던 작품이에요.""어떤 선배요?""큐레이터였던 분이에요.""제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잠시 저를 가르쳐주셨던 분이에요. 성함이 한이서씨."이서는 잠시 허공을 응시한 채 말을 하지 않았다."그분이 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어요.""그분은 그림을 볼 때, 보는 사람이 감춘 걸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보는사람이보여주고싶어하는게아니라.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야조금알것같았고요."이서는 허공에서 시선을 화첩으로 옮겨냈다."아세요?""몰라요."그녀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화첩을 접어 넣었다."이 그림들, 그 수집가가 괜찮다면, 원작을 한번 보고싶어요. 사려는 게 아니고, 그냥 한번."권제하는잠시생각했다."한번 여쭤볼게요. 근데 장담은 못 해요. 그 수집가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네."갤러리를 나설 때, 제하는 현관문 밖까지 따라 나와 그녀를 배웅했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잠시 이야기를 이어갔다.타인의 시선이 미치지않는 평범한 거리였지만, 모르는 사이치고는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가까웠다. 민채린의 몸을 덮고 있던 가시 돋친 방어기제가 권제하라는 사람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무장 해제되고 있었다.그리고 길 건너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도
무거운 두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을 때, 이서의 시선에 가장 먼저 닿은 것은 낯선 하얀 천장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하고 서늘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정체모를 기계음. 이서는 지체 없이 손등에 꽂힌 바늘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의 만류나 보호자의 동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 몸의 주도권을 되찾자마자 서둘러 퇴원 수속을 밟은 그녀는 고요하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던 강태준과 시선이 마주했다. 하지만 이서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심히 지나쳐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때도, 거실 복도를 지나치며 옷깃이 스쳐 지나갈 때도,단 한 번도 서로의 눈을 맞추지 않았다. 서로를 외면하는 침묵은 가시처럼 돋아나 저택의 공기를 팽팽하게 죄어왔다. 방 안에 홀로 앉은 이서는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너무 눈에 띄어.' 민채린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움직이는 순간, 모든 행벅은 대원가와 성운그룹 양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강무성의 사냥개들과 강태준, 그리고 성운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자신을 옥죄고 있었다. 이 판을 뒤흔들려면,양쪽 가문 그 누구와도 접점이 없는 '완벽하게 깨끗한 제3자'가 필요했다. 대원에서도, 성운에서도 감시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할 투명한 사람. 이서는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몇 달 전, 그녀가 '민채린'의 신분으로 처음 만찬장을 걸었을 때, 한 그림 앞에 멈춘 적이 있었다. 그 그림은 . 액자 오른쪽 아래에 흐릿한 글씨가 있었다. 유리 너머라 그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글씨가 그녀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 그림이 예전에 자신이 일했던 거리 근처에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해 보니 원래 갤러리는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새 갤러리가 들어서 있었다. 이름도 달랐고, 분
완벽한 패배였다. 거대한 장벽에 사정없이 부딪힌 절망감이 온몸의 피를 식혀버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멍한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어두운 거실으르 들어선 순간, 이서의 발걸음이 딱 멈추어 섰다. 소파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태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한 적막 속에서, 태준은 이서를 향해 아무런 말도 없이 몇 초간 그 짙은 눈동자로 빤히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옷자락에 묻어온 주차장의 흙먼지와 실패의 냄새를 한눈에 읽어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 어디 갔었어?" 메마르게 던져진 태준의 한마디. 그 나직한 음성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동안 민채린의 가면 뒤에서 차갑게 평정심을 유지하던 이서의 가슴 깊은 곳에서,무언가 뜨거운 덩어리가 목울대를 콱 치고 올라왔다. 통제할 수 없는 울컥함이 목구멍을 막아서며 눈시울이 시려왔다. "법무법인에 갔어." 이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태준은 단번에 그 미세한 균열을 알아채고는, 울컥함에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리고는 피곤함이 짙게 깔린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느 법무법인." "한성진." 거실이 2초 동안 조용해졌다. 그러고 나서 태준이 일어섰다. "그 사람한테 왜 갔어?" "당신과 상관없어." "상관없어." 그가 되뇌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사람이 누구 사람인지 알고는 있어?" "알아." 이서가 말했다. "대원 사람이지. 그 말을 하는 거라면." "알면서 갔어." 그의 취조하는 듯한 말투가 이서의 남은 이성을 완전히 꺼트렸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이서의 언성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 그래. 갔어. 그리고 또 갈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걸 전부 알 때까지 계속 갈 거야." 태준은 그녀의 음성에 거슬림이 묻어나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눈썹 뼈 부근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심기가 매우 불편할 때 나오는 그이 오랜 습관이었다. "못 찾아."
쾅! 고요함을 유지하던 법무법인 대표 집무실의 문이 거친 충격음을 발산했다. 안내 직원의 경악한 비명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서늘한 마찰음을 내며 단단한 골프공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날아갔다.콰창! 변호사 책상 바로 뒤편, 벽면에 걸려 있던 거대한 원목 액자가 산산조각이 나며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고급 원목 책상 위와 대리석 바닥으로 비처럼 흩뿌려졌다. 민채린 특유의 오만하고 거침없는 기세를 덧씌운 이서가, 한 손에 묵직한 아이언 골프채를 쥐어잡은 채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의 악녀다운 당당함의 서려 있었다.책상 주인의 이름은 한성진."민채린 씨."그의 말투는 평평했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이서는 골프채 끝을 바닥에 대고 그를 바라보았다."제가 왜 왔는지 아시죠.""모릅니다.""그럼 더 분명하게 말하죠."이서가 말했다. "3년 전 대원그룹의 해외 인수합병 건. 변호사님이 맡았던 그 건. 중간에 자금 하나의 행방이 불분명합니다. 지금 그 서류를 제게 주시면, 이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한성진은 그녀를 몇 초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주 옅은 표정을 지었다. 냉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피로에 가까웠다."서류는 제게 없습니다.""그럼 어디에 있죠?""모릅니다." 그가 말했다. "3년 전 그 사건을 넘겨받은 사람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름만 올렸을 뿐입니다. 실제로 처리한 사람이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 모든 걸 가져갔습니다. 제가 받은 건 깨끗한 종결 보고서 한 장뿐입니다."이서는 그를 응시했다."누가 가져갔죠?"한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말할 수 없는 건가요, 모르는 건가요?""……"이번에 이서에게 대답한 것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내뱉지 않는 한 변호사의 평평한 입매뿐이었다.이서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서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고, 그녀의 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