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용, 우리 둘 다 성이 서 씨라는 거 잊지 마!”서철용은 서민용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작 남일 뿐이었다니...“서철용, 네가 누구인지는 스스로 잘 알잖아.” 서민용도 차갑게 웃었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었다. 그저 할머니가 그를 예뻐해 집에 남겨두었을 뿐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같은 성을 가졌을 리가 없다.“그래, 이럴 땐 확실하게 선을 긋는구나.”서민용이 그토록 매정한 말을 할 줄은 정말이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너랑 이런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니야. 내가 서씨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쳐. 그래도 우리 셋은 같은 고등학교 나왔잖아. 또한 나는 배은란을 도우려 하는 거야, 네가 아니라.”서민용의 말에 서철용은 기분이 몹시 상한 듯했다.배은란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는 서민용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은란이도 네 도움 필요 없어.” 서민용이 말했다.그는 배은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그녀는 절대로 서철용의 도움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단념하는 게 좋을 것이다.“난 한번 결정한 일은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거 너도 잘 알 거야.”서철용은 그 말을 끝으로 서민용의 기숙사를 나섰다.서민용이 배은란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가 몰래 보호해주면 될 것이다.그날 밤, 서철용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다음 날 수업 시간에도 배은란의 생각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심지어 옆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말을 걸어도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드디어 마지막 수업이 끝났고, 그는 곧바로 주호걸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그 술집에 가자.”전화를 받은 주호걸은 깜짝 놀라면서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서철용이 오늘 술집에 갈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실행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오후 4시밖에 안 되는 시간에 술집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난처함이 묻어 있었다.서철용이 술집에 가자고 할 거라는
“서철용, 너 진짜 미쳤지!” 술집 문 앞에 서 있던 주호걸은 서철용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제 겨우 4시인데, 어떤 술집이 이 시간에 문을 연단 말인가!두 사람은 지방 촌뜨기처럼 멍하니 서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주호걸은 평생 이렇게 창피한 적이 없었다.“에이, 친구야, 보고 싶어서 그랬지.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서철용은 멋쩍게 말했다.주호걸이 이토록 난처한 상황에 처한 건 오로지 서철용 때문이다.“꺼져.” 주호걸이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말했다.“그럼 밥이라도 사줘. 지금까지 밥도 못 먹었어!”주호걸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그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서철용에게 불려 이곳에 왔다.“에이, 밥이야 언제든지 먹을 수 있잖아. 지금은 내 일이 더 급한 거 아니야?” 서철용은 주호걸을 쳐다보며 말했다.주호걸에게 밥을 사주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에 혹시라도 무언가를 놓치는 일이 생기면 안 된다.하여 그는 안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먹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나가서 따로 먹을 필요는 없다.“여자가 친구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지.” 주호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서철용이 왜 이렇게까지 안달복달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서민용의 여자친구다. 서민용은 가만히 있는데, 그가 혼자 조급해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닥쳐.” 서철용은 주호걸을 옆으로 끌어당겼다.그는 벽 뒤에 웅크리고 앉아 이쪽으로 걸어오는 배은란을 바라보았다.역시 일찍 도착한 건 바람직한 선택이었다.알맞은 시간에 배은란을 보지 않았는가.“쉿, 조용히 해.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자.” 지금 배은란에게 들키면 큰일이다.그녀는 술집 문 앞에 도착한 뒤 사방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그녀 역시 여대생이 술집에서 일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삶에 쫓기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지금 그녀로
배은란은 난감한 표정으로 놓아달라며 서민용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서철용과 주호걸은 못마땅한 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일하는 중이잖아. 이러지 마.” 배은란이 서민용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도 서민용과의 친밀한 스킨십이 싫지는 않았지만, 근무시간이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안전에 주의해야 해.” 서민용은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 또한 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배은란이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지금은 그에게도 다른 방법이 없다.“응, 응.”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너 먼저 가. 퇴근하면 얘기할게.”서민용도 따로 일하는 곳이 있었다. 배은란은 그가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 먼저 그를 보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일에 방해만 될 것이다.“알았어.” 서민용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떠났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그를 막아섰다.“잘생긴 오빠, 혹시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요?” 껄렁한 여자 한 명이 서민용에게 다가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거의 술집에 살다시피 하는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남자들과 어울렸었다. 하지만 서민용처럼 선비 같은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하여 서민용을 보자마자 전화번호를 따겠다며 다가온 것이다.서민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배은란밖에 없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죄송하지만, 저는 여자친구가 있어요.” 서민용은 정중하게 여자를 거절했다.하지만 여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서민용에게 매달렸다. “에이, 전화번호 알려달라는 것뿐이잖아요. 연애하자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친구 한 명 더 생긴다고 생각해요.”서민용은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문 쪽을 바라보며 핑계를 대고 떠나려고 했다.바로 그때, 배은란이 다가왔다.서민용이 웬 여자와 함께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지켜.” 배은란이 웃으며 말했다. 비록 술집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심지어 술집에 있는 물에조차 입을 대고 싶지 않아 항상 물을 챙겨왔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전화하고.” 서민용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자꾸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했다.“알았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단 말인가. “아니면... 오늘은 그냥 쉬면 안 돼? 하루쯤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잖아.”서민용이 배은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는 조금 전 그 삐딱한 태도의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배은란이 돌아간 뒤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말이다. “안 돼. 쉬는 만큼 월급도 줄어들잖아. 지금 나한테 제일 필요한 건 돈이야.” 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 또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민용은 배은란의 결연한 눈빛을 보니 쉬이 결정을 바꿀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알았어. 그럼 꼭 몸조심해야 해.” 서민용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당부했다.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서민용은 길가에 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은란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이 밤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배은란은 바로 돌아와 계속하여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각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미소를 띤 채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나도 피로하고 불편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프로다운 태도를 유지하며 맡겨진 일을 최대한 잘 해내려고 노력했다. 서철용과 주호걸은 줄곧 몰래 배은란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민용의 등장부터 배은란이 그에게 보이는 태도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그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배은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술집에서 일하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그런 잘생긴 남자랑 사귀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한테 넘겨.” 여자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배은란은 화가 치밀어오름과 동시에 더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반항할 조금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여자는 우쭐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배은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서민용은 내 거야. 다시는 그 남자 앞에 나타나지 마.” 그녀가 배은란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뜨려 한 순간, 누군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자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감히 이 여자를 함부로 건드려?” 서철용은 다시 여자를 향해 발길질했다.그는 종래로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배은란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게 누구든 백 배로 갚아주려는 생각이었다.여자는 서철용의 발로 차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나뒹굴었다.“꺼져!” 서철용이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여자는 겁에 질려 간신히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그녀는 본래 강약약강의 표본인 사람이었다.“민용아...” 배은란은 서철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지금의 그녀는 의식이 흐릿한 상태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선명히 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서민용이 돌아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런 배은란의 모습에 서철용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배은란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라줬다.“그래.” 그는 배은란을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배은란을 품에 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서민용 행세를 해야만 배은란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배은란의 마음속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따뜻한 품에 꼭 안겨 있으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민용아,
“민용아, 난 네가 정말 좋아.” 배은란은 손을 뻗어 서철용의 목을 감싸 안았지만, 입으로는 서민용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손을 잡고 그녀의 팔을 내려놓으려 했다.하지만 배은란은 예상치도 못한 큰 힘으로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민용아,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 배은란의 말투에는 약간의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나랑 사귄 지가 언젠데, 왜 한 번도 날 건드리지도 않는 거야.” 그녀는 서철용의 어깨에 기대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었던지라 서철용은 화들짝 놀랐다.이미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민용이 이토록 보수적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은란아,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나중에 결혼하면 해줄게.”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배은란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챌까 봐 감히 크게 말하지는 못했다.“하지만 나 지금 너무 괴롭단 말이야.” 배은란은 연약한 몸을 서철용의 품에 기댄 채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서철용은 처음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단지 이곳에서 그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그 역시 남자인지라 사랑하는 여자의 도발을 참아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착하지. 잠들면 괜찮아질 거야.” 서철용은 애써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배은란을 눕히려 했다.하지만 배은란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도저히 그녀를 침대에 눕힐 수가 없었다.몸은 이미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는 간신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녀를 밀어냈다.하지만 배은란의 공격은 너무나 거셌다. 그녀는 곧바로 서철용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은란아, 이러지 마.” 서철용은 그녀의 키스에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민용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지금을 즐기면 안 될까?” 배은란은 애틋한 눈빛으로 서철용을 바라보았다.약물의 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그녀의 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어젯밤은 너무나도 뜨겁고 격렬했다.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다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워서 입 밖에 내뱉기가 어려울 뿐이었다.“은란아, 깼어?” 서민용은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배은란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여 이런 상황에서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응.” 배은란은 행복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다면, 언제 서민용과 그런 일을 하겠는가.“너 주려고 아침밥 사 왔는데, 다 식었네.” 서민용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쳐다보며 말했다.“지금 먹을게.” 배은란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서민용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녀를 위해 사 온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어젯밤 그가 이곳에 없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은란아, 술집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서민용이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어젯밤 내내 술집에서 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어제 어떤 여자가 그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던가. 배은란의 안전은 더더욱 장담할 수가 없다.그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제 더는 술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만약 서민용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다행히 서민용이 적시에 와주었기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사장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전에는 사장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여 술집에서 일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못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어제 사장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그녀의 물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할까
한편, 서철용은 곧장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배은란이 일하는 바로 향했다.그는 어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배은란이 잘못한 것도 없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만약 그가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배은란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서민용도 다시 배은란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서철용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아직 낮시간이라 바는 문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다른 곳에 가고 싶지 않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주호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여보세요.” 서철용은 냉담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지금의 그는 누구에게도 좋은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주호걸을 포함해서 말이다.하지만 만약 배은란이 말을 걸어온다면, 아마 다른 모습일 것이다.“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서철용을 찾으려 수없이 반복해 전화를 걸었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서철용의 학교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서철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줄곧 서철용 곁에 있었으니 말이다.서철용이 배은란을 데리고 떠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그는 단지 지금 서철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기 때문이었다.“바에 있어.”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어차피 그에게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어제 바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주호걸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계속 주호걸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바로 찾아올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또한 그와 주호걸 사이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무엇을
배가 고픈 데다 아기들이 발길질까지 하니 더욱 아팠다. “아가들아, 제발 차지 마. 규영 언니랑 미진 언니가 곧 맛있는 거 가져다줄 거야.”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뱃속 두 녀석들이 워낙 시끄럽게 움직이고 있으니 더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알았어요, 아가씨. 간단히 드실 걸 가져다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거듭 당부했다. 소현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여기 이렇게 많은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잖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절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게요.” 규영과 미진은 사람들에게 다시 신신당부한 뒤에야 먹을 것을 가지러 자리를 떴다. 지난번 일 이후로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게 되어 소현아의 음식은 반드시 그들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소현아는 혼자 소파에 앉아서 작게 아기들과 이야기했다. “아가들아, 소월 이모가 전연우 그 나쁜 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전화를 왜 안 받은 거지?” “나 소월이가 너무 걱정돼. 근데 너희가 너무 무거워서 몰래 도망갈 수도 없어.”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점점 잦아드는 태동뿐이었다. 소현아는 아기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누군가 문을 열었는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얇은 연노랑 잠옷만 입고 있던 소현아는 추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곧이어 도우미들의 공손한 인사 소리가 들렸다. “효연 아가씨.” 천효연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 보고는 곧장 위층으로 향했다. “여기 뒀던 내 꽃병은 어디 갔어?” 계단 모퉁이에 있던 꽃병이 사라진 걸 발견한 천효연이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현아 아가씨가 다치실까 봐 잠시 장식품들을 다 치웠습니다.” 소현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천효연의 눈동자에 냉기가 스쳤다. “그 바보는 지훈 씨가 방에 가둬놨잖아?” 도우미
엄마와 통화를 마친 뒤, 소현아는 장소월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연우 그 나쁜 놈이 소월이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 소월이는 강용 소식을 알지 않을까... 소현아는 강지훈이 강용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장소월의 당부를 기억하며 감히 묻지 못했다. 통화음이 두 번 울린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소현아는 흥분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소월아! 드디어 전화 받았네! 있잖아, 강지훈 그 나쁜 놈이 나 계속 방에 가둬놓고 문밖으로 못 나오게 했어. 나 진짜 답답해 미치겠어!” “널 여기 데려와 같이 놀려고 했는데, 강지훈의 말이 전연우 그 나쁜 놈이 너 안 보낸다고 하더라고. 둘 다 진짜 짜증 나! 내가 간신히 휴대폰 구해서 전화한 거야. 소월아, 그 나쁜 놈한테 말하고 이쪽으로 놀러 와줄 수 있어?” 한참을 떠들었을 때, 저쪽에서 낮고 위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훈이 내가 소월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고? 언제 나한테 물어봤는데?” 소현아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몇 초 뒤에야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꺼냈다. “전... 전연우 씨? 왜 당신이 전화를 받아요?” 전연우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놈이 전화를 받아서 많이 실망했나?” 소현아는 겁을 먹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저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잘못 들었어요! 소월이는요? 이거 소월이 폰이잖아요. 빨리 소월이한테 돌려줘요!” 전연우가 말했다. “소월이는 전화 안 받아. 다시 전화하지 마.” “소월이한테 나라고 말해줘요. 소월이가 제 전화 안 받을 리 없어요.”소현아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소월이 찾지 마. 바빠서 너랑 소꿉놀이할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강지훈한테 전해. 내게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지 말라고.” 전연우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현아가 다시 걸어봤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현아 아가씨, 이제 일어나서 운동할 시간이에요.” 규영과 미
소현아는 얼굴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빨 자국을 달고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소월이한테 전화해도 돼요?” “그쪽에서 받기만 한다면야.” 소현아는 이제 아침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강지훈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신이 나 붕방거리던 소현아는 김빠진 공처럼 순식간에 축 처져버렸다. “하지만 방에만 계속 있는 건 너무 따분하단 말이에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아기들도 있잖아요. 그냥 아래층에서 좀 돌아다니게만 해줘요, 네?” 그녀가 지금 머무는 방은 집에 있던 침실을 완벽하게 똑같이 복원한 곳이었다. 소현아는 이곳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며칠 동안 줄곧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녀는 방안을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방은 갑자기 창고로 변해버렸고, 아무리 깨려고 해도 도저히 깨어날 수가 없었다. 강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밥을 한입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연우 그 나쁜 놈도 소월이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건 허락하던데... 강지훈 씨는 날 침실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네. 전연우보다도 더 나빠.” “...” “아래층에서만 놀아. 방을 나서면 규영과 미진이 따라갈 거야.”결국 강지훈이 한발 물러섰다. 소현아의 눈에 다시 별빛이 들어왔다. “음, 당신은 전연우 그 나쁜 놈보다 조금 나아요. 정말 아주 조금.” 아침을 먹고 난 뒤 소현아는 바로 휴대폰을 요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거의 즉시 연결되었다. “현아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명세진의 목소리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 조심스러웠다.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소현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
강지훈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돌아왔다.옆방에서 샤워를 마친 강지훈은 잠옷을 입고 소현아의 방으로 들어갔다.소현아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2.2미터나 되는 퀸사이즈 침대에서 편안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 말이다. 무슨 꿈을 꾸는지 웅얼거리며 입가에 흘린 침을 닦고 있었다.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강지훈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그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배를 덮어주고는 코를 꼬집었다.“윽...”잠시 후 소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눈을 떴다.“강지훈 씨 너무 싫어요.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빨리 놔줘요.”침대 곁에 있는 사람을 본 소현아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강지훈이 말했다. “말해 봐.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제대로 말하면 놔줄게.”소현아는 씩씩거리며 눈을 감고 어쩔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뻐끔뻐끔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마치 복어 같았다.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까지 막아버렸다.몇 초 지나지 않아 소현아는 다시 웅얼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강지훈은 그저 잠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을 뿐이지만, 한번 맛을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그는 손을 떼어 그녀의 허리에 얹고 반바지를 벗기려 했다.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바지를 붙잡고 엉덩이를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강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손 놔. 살살할게.”“저 졸려요. 자고 싶으니까 강지훈 씨도 빨리 자요.”그녀는 강지훈이 또 키스하려 할까 봐 입술을 굳게 다물고 낑낑거리며 그를 밀치고는 죽은 척 눈을 감았다.강지훈이 어떻게 하든 소현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정말로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 꼭 안겨있었다. 그녀의 코끝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닿아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어젯밤 일이 떠오른 소현아는 그의 가슴을 힘껏 깨물었다.곧이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