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망했다.
아주 제대로 망했다. 엘로디아는 황태자석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어젯밤 자신이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되짚었다. 장작 좀 옮겨주세요. 조금 더 필요해요. 힘 빼세요. 처음부터 너무 칭찬하면 사람이 자만해져요. 그리고 마지막. 저는 최대한 빨리 탈락할 생각이에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황태자 본인에게. 그것도 황태자비 선발전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차라리 장작만 나르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물론 황태자에게 장작을 나르게 한 것도 충분히 불경죄처럼 들렸지만, 그것은 몰랐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다. 그런데 탈락하겠다는 말은 달랐다. 누가 물어봐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엘로디아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자신 말고도 스물세 명의 황태자비 후보가 있었다. 전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혼자 기절할 수는 없었다. “르메르 영애.” 라시엘이 다시 불렀다. 엘로디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예, 전하.” 그래도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장하다, 엘로디아. 적어도 아직까지는 살아 있다. 라시엘이 턱을 살짝 기울였다. 어젯밤 낡은 셔츠 차림으로 장작을 들고 있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검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황태자 제복은 그의 넓은 어깨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가슴에는 황가의 문장인 황금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고, 어깨에서 흘러내린 검은 망토에는 보석으로 만든 작은 장식이 빛났다. 그런데 엘로디아에게는 황태자의 위엄보다 다른 것이 먼저 보였다. ‘저 손으로 어제 흙을 찌그러뜨렸는데.’ 심각한 자리에서 떠올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떠올라버렸다. 라시엘이 물레 위에서 힘 조절을 못해 흙을 한쪽으로 밀어버렸던 장면. 철퍽. 엘로디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라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 황태자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엘로디아는 즉시 표정을 지웠다. ‘안 웃었어.’ 절대로 안 웃었다. 하지만 라시엘은 이미 알아챈 것 같았다.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젯밤에는 신세를 졌군.” 대전이 조용해졌다. 엘로디아의 머릿속에서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전하?’ 여기서요? 지금요? 주변 영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젯밤이라고?” “르메르 영애가 전하와?” 작은 속삭임들이 퍼졌다. 엘로디아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라시엘은 너무나 태연했다.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했다.” 그 말까지 나오자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엘로디아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그러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해?” 라시엘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 사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변의 귀들이 쫑긋 서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라시엘이 잠시 엘로디아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아주 친절하게 설명했다. “장작을 날랐다.” 정적. 이번에는 다른 의미의 정적이었다. 누군가 작게 되물었다. “장작……?” 엘로디아는 눈을 감고 싶었다. 차라리 오해를 그대로 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라시엘이 말을 이었다. “두 번이나.” “세 번입니다.” 엘로디아는 자신도 모르게 정정했다.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라시엘의 눈에 웃음이 번졌다. “그랬던가?” “첫 번째 한 묶음, 두 번째 두 묶음이었으니 세 묶음입니다.” “그건 두 번 아닌가?” “…….” 맞다. 엘로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라시엘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벌써 긴장이 풀린 모양이군. 다행이야.” 이 남자. 분명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 엘로디아는 그제야 확신했다. ⸻ 황태자비 선발전의 첫 번째 심사는 오전 열 시에 시작되었다. 심사 장소는 황궁 동쪽의 백화궁이었다. 봄과 여름이면 각국에서 들여온 꽃이 만발하는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중앙 홀의 긴 탁자가 가장 눈에 띄었다. 탁자 위에는 스물네 개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엘로디아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 뒤따라오던 영애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르메르 영애?”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로디아는 대답했지만 시선은 이미 찻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르네 지방의 백토.’ 틀림없었다. 색부터 달랐다. 평범한 백자는 희고 깨끗해 보이지만 아르네산 백토는 아주 옅은 푸른빛이 감돈다. 높은 온도에서 구울수록 그 푸른색이 투명해지는 특징이 있었다. 게다가 유약은…. ‘황실 청화유.’ 엘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귀했다. 엄청나게 귀했다. 몇 년 전 경매에서 작은 찻잔 하나가 르메르 남작가의 반년 생활비보다 비싼 값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만져보고 싶다.’ 엘로디아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오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탈락.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엘로디아는 찻잔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었다. 잠시 후 황실 예법관이 앞으로 나왔다. “첫 번째 심사는 다과 예법입니다.” 예상했던 종목이었다. 황태자비라면 각국의 사절과 귀족들을 상대해야 한다. 차를 마시는 방법부터 잔을 내려놓는 위치, 상대의 신분에 따른 대화 순서까지 평가한다고 했다. 엘로디아는 속으로 안도했다. ‘잘됐다.’ 예법은 그녀가 가장 자신 없는 분야 중 하나였다. 아니, 정확히는 할 줄 알지만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가정교사에게 배웠으니 기본은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기본을 일부러 조금씩 틀리면 된다. 찻잔 손잡이를 반대 방향으로 놓는다든지. 차를 한 번 더 젓는다든지. 대화 순서를 놓친다든지. 너무 티 나게 망치면 의심받을 테니 적당히. 완벽한 계획이었다. 황태자만 자신이 일부러 탈락하려 한다는 걸 모른다면. 엘로디아의 시선이 심사석으로 향했다. 라시엘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아주 조금 웃었다. 엘로디아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괜찮아.’ 황태자 한 명이 모든 점수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 심사석에는 황실 예법관과 황후궁의 수석 시녀장, 두 명의 대신도 함께 앉아 있었다. 엘로디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첫 번째, 셀레스트 드 아르망 영애.” 아르망 공작가의 셀레스트가 앞으로 나갔다. 엘로디아도 이름은 알고 있었다. 황태자비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인물. 은빛에 가까운 금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셀레스트는 모든 행동이 교본처럼 정확했다. 차를 따르는 각도. 손가락의 위치. 잔을 들어 올리는 방법. 대화를 시작하는 시점까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심사관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디아 역시 감탄했다. ‘저 정도면 그냥 저분이 황태자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좋은 사람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완벽했다. 엘로디아가 탈락하기에 아주 좋은 경쟁자였다. 몇 명의 심사가 더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엘로디아 르메르 영애.” 엘로디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너무 잘하지 말 것.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망치지도 말 것. 그녀는 천천히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시녀가 차를 따랐다. 은은한 꽃향기가 올라왔다. 엘로디아는 잔을 들었다. 첫 번째 실수. 손잡이를 잡는 위치를 조금 어긋나게 했다. 예법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좋아. 엘로디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두 번째. 잔을 내려놓을 때 받침 중앙에서 조금 벗어나게 했다. 수석 시녀장의 시선이 내려갔다. 아주 좋다. 세 번째는…. 엘로디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혀끝에 닿기도 전에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응?’ 차가 아니었다. 아니. 차에서도 나는 냄새였지만 그것보다 아래에서 올라왔다. 엘로디아의 시선이 잔으로 향했다. 희고 투명한 표면. 아름다운 푸른 유약. 그러나 손끝에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너무 뜨거웠다. 차의 온도 때문이 아니었다. 유약 자체에서 아주 미세한 마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 ‘왜 이래?’ 다시 잔을 살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유약 아래. 푸른색 사이로 가느다란 붉은 결이 얽혀 있었다. 마력의 흔적. 그것도 불안정하게 뒤틀린 마력. 엘로디아의 손이 멈췄다. “르메르 영애?” 예법관이 불렀다. “문제가 있습니까?” 엘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잔을 조금 돌렸다. 빛을 받는 각도가 바뀌자 아주 가느다란 선이 보였다. 금. 머리카락보다 얇았다. 일반인이 보면 단순한 표면 흠집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안쪽까지 갔어.’ 유약 아래에서 시작된 균열이 태토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틈에 차가 스며들면서…. 엘로디아가 갑자기 잔을 내려놓았다. “마시지 마세요.” 주변이 조용해졌다. 예법관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요?” 엘로디아는 옆에 앉은 후보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다. “잠깐만요.” “르메르 영애!” 이번에는 수석 시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 하지만 엘로디아는 이미 두 번째 잔을 살피고 있었다. ‘이것도.’ 세 번째. ‘이것도.’ 전부 같은 곳에 붉은 마력의 결이 있었다. 엘로디아의 심장이 빨라졌다. 단순한 제작 실수가 아니었다. 스물네 개가 동시에 같은 형태로 손상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누군가 일부러 한 것이다. “차를 마시면 안 됩니다.” 엘로디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잔들에 문제가 있습니다.” 웅성거림이 퍼졌다. “문제라니?” “황실에서 준비한 찻잔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예법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르메르 영애. 지금 이 잔들은 황실 도요원에서 직접 검수한 물품입니다.” “검수가 잘못됐습니다.” “…….”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또 했다. 도자기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먼저 움직이는 버릇. 그러나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었다. 엘로디아는 잔 하나를 들어 올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유약 아래에 균열이 있습니다.” 예법관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 정도 균열 때문에 황태자비 선발전을 중단하자는 겁니까?” “단순한 균열이면 저도 그러지 않습니다.” “그럼?” 엘로디아가 잔을 빛에 비췄다. “마력 균열입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심사석에서도 움직임이 생겼다. 엘로디아는 설명했다. “이 잔은 마도도자기입니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유약에 미량의 화염석 가루가 들어갔어요. 그런데 제작 과정에서 마력 배열이 틀어졌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뜨거운 액체가 들어가면 화염석의 마력이 균열을 따라 빠져나옵니다.” 엘로디아가 잠시 차를 바라봤다. “그리고 차에 섞입니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독입니까?” “독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력을 가진 사람이 여러 잔 마시면 속이 타는 듯한 통증이나 고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기절할 수도 있고요.” 심사관들의 얼굴이 달라졌다. 황실 마도사가 즉시 호출되었다. 엘로디아는 그제야 주변을 의식했다. 스물세 명의 영애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법관도. 수석 시녀장도. 대신들도. 그리고 라시엘도. ‘……잠깐.’ 뭔가 잘못됐다. 오늘 자신은 무엇을 하러 왔지? 탈락하러 왔다. 그런데 지금 뭘 했지? 황실에서 준비한 찻잔의 결함을 발견했다. ‘아니야.’ 아직 괜찮다. 예법 심사는 망쳤다. 잔도 멋대로 빼앗았고, 황실 물품 검수에 문제가 있다고 대놓고 말했다. 태도 점수는 분명 바닥일 것이다. 엘로디아는 애써 희망을 붙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도사가 도착했다. 그가 잔을 받아 주문을 사용했다. 푸른빛이 표면을 훑었다. 잠시 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입니다.” 대전이 술렁였다. “유약 아래에서 화염석의 마력 누출이 확인됩니다.” 예법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전부?” 마도사가 잔을 몇 개 더 검사했다. “적어도 지금 확인한 잔은 모두 같습니다.” 라시엘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엘로디아를 놀리던 남자는 사라졌다. 황태자였다. “차를 전부 회수해라.” 낮고 차분한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 사용된 찻잎과 물, 잔의 제작 경로까지 조사한다. 도요원의 책임자도 불러.” “예, 전하.” 시종들이 움직였다. 후보들은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첫 심사는 당연히 중단됐다. 엘로디아 역시 다른 영애들을 따라가려고 했다. “르메르 영애.” 발이 멈췄다. 뒤돌아보니 라시엘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남아.” ‘왜.’ 엘로디아는 속으로 울었다. ⸻ 사람들이 빠져나간 백화궁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곳처럼 조용했다. 엘로디아는 탁자 앞에 서 있었다. 라시엘은 그녀의 맞은편에 있었다. 옆에는 황실 마도사와 비서관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만 남아 있었다. 비서관은 짙은 갈색 머리와 피곤해 보이는 회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테오란 벨하임입니다.” 그가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황태자의 최측근. 엘로디아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 테오란은 문제의 찻잔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르메르 영애께서는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냄새가 조금 달랐습니다.” “냄새?” “화염석이 유약 밖으로 새면 아주 약한 쇠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잔을 잡았을 때 차의 온도보다 표면이 조금 더 뜨거웠어요.” “그것만으로?” 엘로디아는 잠시 망설였다. 마력의 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 능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을 많이 겪었다. 자신에게는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도자기를 만들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테오란이 그녀를 조금 더 유심히 바라봤다. 그때 라시엘이 물었다. “어젯밤 잔에서도 뭔가 봤나?” 엘로디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둘이 함께 만든 잔. 금빛. “전하께서도 보셨잖아요.” “확인하고 싶었다.” “……저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렇군.” 라시엘이 생각에 잠겼다. 테오란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어젯밤 잔이라니요?” “별것 아니다.” 라시엘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별것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대개 별것이 있었습니다만.” “기분 탓이야.” “지난 8년간 그 기분이 자주 맞았습니다.” 엘로디아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참았다. 라시엘의 시선이 바로 돌아왔다. 엘로디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테오란은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눈썹을 아주 미세하게 찌푸렸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라도 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라시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돌렸다. “첫 심사는 무효로 하지.” 엘로디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요?” 두 남자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엘로디아는 당황해서 말을 고쳤다. “아니,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실이 준비한 물품에 문제가 있었으니 공정한 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 예법 자체는 충분히 평가하셨잖아요.” 라시엘이 눈썹을 올렸다. “평가받고 싶나?” “예.” 탈락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평가해주지.” 엘로디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시엘이 테오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록지.” 테오란이 서류를 건넸다. 라시엘은 내용을 잠시 살펴봤다. “찻잔 손잡이를 잡는 위치 부정확.” 엘로디아가 속으로 환호했다. “받침 중앙에서 잔이 벗어남.” 좋아. “심사 중 허가 없이 자리 이탈.” 아주 좋아. “다른 후보의 찻잔을 허락 없이 빼앗음.” 완벽하다. 라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맞나?” 엘로디아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 “그런데.” 라시엘이 기록지를 넘겼다. “황실 물품의 결함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스물세 명의 후보와 심사위원들의 안전을 확보했다.” 엘로디아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건.” “마도도자기에 대한 전문 지식도 증명했고.” “전하.” “위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행동했지.” “잠시만요.” “황태자비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위기 대처 능력이다.” 엘로디아는 불안해졌다. 라시엘이 기록지에 무언가 적었다. “최고점.” “……예?” “첫 심사 최고점.” 엘로디아의 입이 벌어졌다. “왜요?” 이번에는 존칭을 붙이는 것도 잊었다. 테오란이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라시엘은 태연했다. “설명했는데.” “하지만 예법 시험이었잖아요.” “황태자비가 독이 든 잔을 예법에 맞게 우아하게 마시는 것보다 문제를 발견하고 던져버리는 편이 낫겠지.” “던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랬지.” “그리고 독도 아니었고요.” “그것도 맞아.” “그러니까 점수를…….” “내릴 이유가 없군.” 엘로디아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반칙이다. 자신이 탈락하려 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엘로디아가 라시엘을 노려봤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익숙한 웃음이 떠올랐다. 맞다. 일부러다. ‘이 남자가.’ 엘로디아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라시엘이 물었다. “불만이 있나?” “없습니다.” “표정은 있는 것 같은데.”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독특합니다.” 테오란이 결국 헛기침을 했다. 라시엘은 웃었다. “그럼 기뻐하도록.” “……감사합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라시엘이 기록지를 테오란에게 돌려주었다. “현재 1위로 기록해.” “예, 전하.” 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1위요?” “최고점이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엘로디아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 그날 오후. 황태자비 후보들의 숙소에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다. 르메르 남작가의 영애가 첫 심사에서 황태자의 특별 점수를 받아 1위가 되었다. 특별 점수. 그 단어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니!” 문이 벌컥 열렸다. 엘로디아는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마리엘이 아니었다. 여동생은 수도의 친척집에 머물고 있었으니 여기 있을 리 없었다. 들어온 것은 그녀를 담당하는 시녀 로제였다. “들었어요!” “나는 안 듣고 싶어.” “첫 심사 1위라면서요!” 엘로디아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 오늘 저녁 디저트 안 먹을 거야.” “아가씨가 디저트를 포기하신다고요?” “그만큼 심각한 일이야.” 로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 거잖아요.” “뭐가 좋아.”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잖아요.” 엘로디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안 되지.” “왜요?” “나는 도예가야.” “황태자비도 도자기 만들 수 있잖아요.” “언제?” 엘로디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침에는 황실 회의, 낮에는 사절 접견, 오후에는 사교 행사, 저녁에는 연회. 그 사이에 물레를 언제 돌려?” “……새벽?” “나는 잠도 자야 해.” “그럼 황태자 전하께 부탁해서 시간을—” “그 사람한테 뭘 부탁해?” 엘로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탈락하고 싶다는 걸 알면서 최고점을 줬어.” 로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하께 그 말씀을 하셨어요?” 엘로디아가 굳었다. “……실수로.” “언제요?” “어젯밤.” “어젯밤?” 아차. 엘로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늦었다. 로제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젯밤에 전하를 만나셨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디서요?” “도요원.” “둘이서요?” “…….” “둘이서 뭘 하셨는데요?” “장작 날랐어.” 로제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게 무슨 은어예요?” “진짜 장작!” 엘로디아가 베개를 집어 던졌다. 로제가 웃으며 피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나는 아주 심각해.” 엘로디아는 다시 침대 끝에 앉았다. 첫 번째 계획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심사에서 확실하게 떨어져야 했다. “다음 심사가 뭐였지?” 로제가 책자를 펼쳤다. “내일 오전에 꽃꽂이와 실내 장식이래요.” 엘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꽃꽂이?” “네.” 이번에는 정말 자신 있었다. 도자기와 달리 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좋아.” 엘로디아가 결연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탈락한다.” 로제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 말이 하나도 믿음직스럽지 않죠?” ⸻ 같은 시각. 황태자궁 집무실. 테오란은 서류 한 장을 라시엘 앞에 내려놓았다.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라시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말해.” “찻잔은 세 달 전 황실 제1도요원에서 제작됐습니다. 제작 당시 검사 기록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손댄 사람이 있다는 뜻이군.”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 “아직 확인 중입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테오란이 다른 기록을 내밀었다. “화염석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린 흔적이 있습니다.”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수가 아니군.” “예.” “목적은?” “후보들을 해치기 위한 것인지, 선발전 자체를 중단시키기 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라시엘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가 물었다. “르메르 가문은?” 테오란이 기다렸다는 듯 다른 서류를 펼쳤다. “현재는 영지 규모가 작은 남작가입니다. 재정 상황도 좋지 않습니다. 최근 몇 년간 도자기 사업으로 간신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도자기.” “예.” “그 영애가 만든 건?” 테오란의 손이 멈췄다. “그 부분이 이상합니다.” “뭐가?” “르메르 영애 이름으로 판매된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라시엘이 시선을 들었다. “그 실력인데?” “그래서 더 조사해봤습니다.” 테오란이 작은 장부를 꺼냈다. “최근 몇 년간 수도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 무명의 마도도자기 몇 점이 있습니다. 제작자가 공개되지 않았는데 유통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 르메르 영지와 연결됩니다.” 라시엘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한 번 두드렸다. “계속해.” “그리고 하나 더.” 테오란의 표정이 묘해졌다. “르메르라는 이름이 오래된 황실 기록에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라시엘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언제?” “약 이백 년 전입니다.” “내용은?” “그게 문제입니다.” 테오란이 낡은 문서의 사본을 펼쳤다. 중간 부분이 잘려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먹칠되어 있었다. “앞뒤 기록을 보면 황실 도요원과 관련된 가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핵심 부분이 전부 삭제됐습니다.” 라시엘의 금빛 눈이 서늘해졌다. “누가 삭제했지?” “기록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원본은?” “황실 지하 기록고에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라시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이 떠올랐다. 낡은 도요원. 물레. 엘로디아와 함께 만든 작은 잔.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닿았을 때 흙 속에서 번졌던 금빛.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다. “전하.” 테오란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라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왜.” “설마 르메르 영애를 계속 선발전에 남겨두실 생각입니까?”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그 영애는 탈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만.” 라시엘의 입가에 아주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알아.” “그런데 최고점을 주셨고요.” “받을 만했으니까.” “정말 그것뿐입니까?” 라시엘이 대답하지 않았다. 테오란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는 벌써 피곤해지는군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래서 더 불안합니다.” 라시엘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어젯밤 엘로디아의 손이 겹쳐졌던 자리. 아무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직도 손끝 어딘가에 흙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축축한 흙.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작은 손. 힘 빼세요. 라시엘의 눈이 잠시 낮아졌다. “테오란.” “예.” “어젯밤 만든 잔은?” “제3도요원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해.” 테오란이 라시엘을 바라봤다. “그 정도로 중요합니까?” “아직 모르지.” 라시엘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확인해야 해.” ⸻ 해가 완전히 진 뒤. 엘로디아는 다시 잠옷 위에 망토를 걸쳤다. 로제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문을 열었다. ‘딱 한 번만.’ 오늘은 정말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니다. 어젯밤 만든 잔을 확인해야 했다. 금빛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 전에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황태자비 선발전이고 탈락이고 뭐고. 도예가로서 참을 수 없었다. 엘로디아는 익숙해진 길을 따라 제3도요원으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젯밤에는 잠겨 있지도 않았던 문에 새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뭐야.” 엘로디아가 자물쇠를 잡았다. 철컥.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하필 오늘?”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창문 하나가 조금 열려 있었다. 높이는…. 엘로디아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올라갈 수 있겠는데.’ 근처에 빈 나무 상자가 있었다. 하나. 둘. 겹쳐 놓으면 충분했다. 엘로디아가 첫 번째 상자를 옮기려던 순간. “오늘은 장작을 안 나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엘로디아가 그대로 굳었다. 천천히 돌아봤다. 달빛 아래 라시엘이 서 있었다. 오늘은 황태자 제복이 아니었다. 어젯밤과 비슷한 검은 셔츠와 바지. 혼자였다. 엘로디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왜.” “설마 기다리셨어요?” “내 공방인데 기다린다는 표현은 이상하지 않나?” 엘로디아가 눈을 깜빡였다. “전하의 공방이요?” “황궁에 있으니까.” “황궁의 것은 전부 전하 겁니까?”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 것이지.” “그럼 전하 것도 아니잖아요.” 라시엘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웃었다. “역시 재미있군.” “저는 안 재미있습니다.” 엘로디아가 자물쇠를 가리켰다. “이건 왜 잠갔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밤마다 몰래 들어오니까.” “…….” 반박할 수 없었다. 라시엘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철컥. 문이 열렸다. 엘로디아는 눈을 반짝였다. “들어가도 돼요?” “그렇게 좋아하면서 허락은 왜 묻지?” “이제 신분을 알았으니까요.” “어제는 몰랐고?” “관리인 줄 알았죠.” “관리.” 라시엘이 낮게 중얼거렸다. “황궁 관리라고 했더니 비슷하다고 하셨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야.” “많이 틀린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나란히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젯밤과 달리 몇 개의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중앙 작업대 위. 작은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엘로디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대로네요.” “아무도 못 만지게 했다.” 엘로디아가 잔을 집으려 했다. 그런데 라시엘의 손도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았다. 순간. 찌릿. 엘로디아가 숨을 들이켰다. 어젯밤보다 강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열기가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라시엘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우웅— 낮은 진동이 공방 안을 울렸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잔에서 금빛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희미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금빛 문양이 잔의 표면을 따라 천천히 번졌다. 하나의 선. 두 번째 선. 서로 얽히고 이어지며 둥근 문양을 만들었다. 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이건…….”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어릴 때. 할머니의 공방에서. 엘로디아가 기억을 더듬으려던 순간이었다. 라시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 위로 조금 움직였다. 그 순간 엘로디아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쿵.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라시엘의 표정이 달라졌다. 엘로디아가 그를 바라봤다. “전하?” 라시엘은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방금.” 낮은 목소리였다. “당신 심장이 뛴 건가?” “……예?” 엘로디아가 눈을 깜빡였다. 라시엘의 금빛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이상하군.” 그의 손은 아직 엘로디아의 손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에는 엘로디아가 느꼈다. 쿵. 자신의 것이 아닌 박동.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무거운 심장 소리. 손끝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엘로디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잔으로 향했다. 금빛 문양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라시엘이 낮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엘로디아를 바라봤다. “우리가 어젯밤 꽤 위험한 걸 만든 모양인데.” 엘로디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것이 아닌 황태자의 심장이 뛰었다. 쿵. 그리고 잔의 가장 아래쪽에서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작은 문양 하나가 완성되었다.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원. 엘로디아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아르젠 황실에서 이백 년 동안 사라졌던 문양이라는 것을. 혼인잔의 표식이었다.저녁 무렵 라시엘이 찾아왔을 때, 엘로디아는 수첩을 두 권 펼쳐놓고 있었다. 하나는 황실 기록. 다른 하나는 앞으로 확인할 민간 거래 기록. 라시엘은 작업대 앞에 서서 두 권을 번갈아 봤다. “오늘은 장부가 둘이네.” “네.” “내일은 셋이 되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어요.” 라시엘이 웃었다. 엘로디아는 그에게 오늘 확인한 내용을 설명했다. 계약 종료 당시 반환된 도구. 황실에 남은 시설. 정산된 재료. 그리고 별도 관리 대상으로 분류된 제17호 갑발. “제17호가 있었어?” 라시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목록에 이름은 있었어요. 그런데 실물이 어디 있는지는 안 나와요.” “르메르로 돌아간 건 아니고?” “그것도 몰라요.” 엘로디아는 수첩을 펼쳤다. “반환·인계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것만 확인했어요. 별도 관리 상태였다고요.” 라시엘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그 관리 기록을 찾아야겠네.” “네. 문서 번호는 신청해뒀어요.” “잘했어.” 엘로디아는 그를 보다가 조금 웃었다. “전하, 오늘은 왜 안 놀려요?” “뭘?” “또 기록 찾는다고.” 라시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잖아.” “그릇 만드는 걸 더 좋아해요.” “알아.” 그는 작업대 위의 에밀 물잔을 봤다. “그건 완성됐어?” “아직요. 사용 확인을 받아야 해요.” “잘됐으면 좋겠네.” “저도요.” 엘로디아는 잠시 잔을 바라봤다. 그러다 말했다. “전하, 저 오늘 조금 기뻤어요.” “왜?” “에델리아가 자기 도구를 돌려받았더라고요.” 라시엘은 그녀를 가만히 봤다. “그게 그렇게 좋았어?” “네.” 엘로디아는 웃었다. “황실에서 더 이상 주문하지 않더라도, 자기 도구가 있으면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잖아요.” “가마는 필요하겠지만.” “맞아요. 그래서 그다음 기록도 찾아보려고요.” 라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기록?” “르메르가 황실 밖에서 그릇을 팔았는지요.” 그녀는 조금 신이 나서 말을
예외 처리 목록은 생각보다 짧았다.처음 두 항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파손되어 반환할 수 없는 측정 기구.사용 과정에서 소모된 시험편.각각 처리 사유와 정산 여부가 적혀 있었다.그리고 세 번째.엘로디아의 시선이 멈췄다.고내화 갑발 제17호.드디어.나왔다.그녀는 숨을 멈춘 채 다음 칸을 읽었다.반환·인계 대상 제외.사유.별도 관리 상태.엘로디아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별도 관리.그 말은 너무 넓었다.황실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다른 기관으로 이관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시험 결과를 검토하는 동안 실물을 따로 두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엘로디아는 다음 칸을 봤다.실물 소재 — 본 목록에서 확인 불가.“…….”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찾았다.그런데.아직 찾지 못했다.제17호 갑발이 반환·인계 목록에서 빠진 이유는 확인했다.별도 관리 상태였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별도 관리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이 문서만으로 알 수 없었다.엘로디아는 수첩에 적었다.제17호 갑발 — 계약 종료 당시 반환·인계 대상 제외.사유 — 별도 관리 상태.실물 소재 — 해당 목록에서 확인 불가.그리고 마지막에.르메르 사문서고에 실물이 있다는 증거는 아님.펜을 내려놓았다.조금 아쉬웠다.솔직히 말하면.많이.아쉬웠다.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없는 답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엘로디아는 문서를 다시 살폈다.예외 처리 목록의 오른쪽 끝.아주 작은 칸.처리 근거 문서.번호가 있었다.그녀는 그것을 옮겨 적었다.“이 번호로 별도 문서를 신청할 수 있나요?”기록관리관이 확인했다.“가능합니다. 다만 현재 어느 기록군에 보존되어 있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엘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먼저 소재부터 확인하겠습니다.”갑발의 소재가 아니라.갑발에 관한 문서의 소재.지금은 그 순서가 맞았다.그다음에 확인한 것은 시험기물과 관련된 기록류였다.엘로디아는 여기서 또 하나의 차이를 발견했다.실물과 문서는
황실에서 돌려받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과 닮아 있었다.엘로디아는 황실 기록관리국에서 도착한 열람 승인서를 세 번 읽었다.황실 혼인도공 지정 계약 종료 당시 제작시설 및 시험기물 반환·인계 목록 — 부분 열람 승인.마침내 허가가 났다.지난번 에델리아의 계약 갱신 신청 철회서를 읽은 뒤, 엘로디아가 가장 궁금해했던 문서였다. 황실과의 계약이 끝났을 때 르메르가 어떤 물건을 돌려받았는지, 어떤 물건을 남겨두었는지, 그리고 그중에 제17호 갑발과 관련된 것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엘로디아는 바로 외투를 집어 들지 않았다.작업대 위에는 에밀 하르트의 물잔이 놓여 있었다.재벌 소성을 마친 잔이었다.“기록보다 그릇이 먼저.”그녀는 혼잣말을 하고는 잔을 들어 올렸다.유약은 예상했던 대로 얇고 균일하게 녹아 있었다. 안쪽에 유약이 고여 생긴 턱도 없었고, 입구 가장자리에도 거친 부분이 없었다. 다만 바닥에 가까운 곡면 한쪽에서 아주 작은 빛의 차이가 보였다.엘로디아는 창가로 이동해 잔을 기울였다.빛이 미끄러지듯 지나갔다.표면의 두께 차이였다.눈으로만 보면 흠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손끝에 걸리지 않았고 물을 담았을 때 세척을 방해할 정도도 아니었다.그녀는 검사표에 적었다.유약 두께 편차 — 경미. 사용성 영향 여부 확인 필요.그다음 물을 부었다.잔의 절반쯤 채우고 작업대 위에 놓았다. 바닥이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한 뒤 펜촉 모형을 물에 담갔다. 입구를 조금 넓힌 덕분에 손목을 지나치게 세우지 않아도 펜촉이 안쪽에 닿았다.“좋아.”이번에는 물을 비웠다.안쪽에 남은 물방울이 어디에 맺히는지 확인하고, 부드러운 천으로 닦았다. 좁은 입구 때문에 천이 걸리거나 손가락을 억지로 밀어 넣어야 하는 문제는 없었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작자의 시험이었다.에밀이 실제로 사용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엘로디아는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교수님께 사용
황실 기록관리국에서 돌아온 엘로디아는 가장 먼저 제3도요원의 가마부터 확인했다.초벌을 마친 에밀 하르트의 물잔은 작업대 위에서 조용히 식고 있었다. 흙빛이 한결 옅어졌고,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맑지는 않지만 단단한 소리가 났다. 엘로디아는 잔을 들어 바닥부터 입구까지 천천히 살폈다. 균열은 없었고, 가장자리의 두께도 계획했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갱신 보류.”입술 사이로 작은 말이 흘러나왔다.조금 전 확인한 기록 때문이었다.에델리아 르메르에게 내려졌던 임시 처분은 구십 일 만에 종료됐다. 당시 규정에 따라 두 차례 연장되었지만, 세 번째 연장은 승인되지 않았다. 절차는 끝났다.그런데 같은 날.황실 혼인도공 지정 계약의 갱신이 보류됐다.임시 처분이 끝났는데도 황실의 주문은 돌아오지 않았다.엘로디아는 물잔을 내려놓았다.“계약이 끝난 건지, 갱신을 기다리는 상태였던 건지부터 봐야겠네.”그녀는 수첩을 펼쳤다.확인된 사실 — 임시 처분 종료.확인된 사실 — 같은 날 지정 계약 갱신 보류.미확인 — 갱신 보류 사유, 보류 기간, 최종 계약 상태.그리고 마지막에 한 줄을 덧붙였다.황실 납품 지위 상실 ≠ 도공 기술자격 상실.그 문장을 쓰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르메르가 황실에서 밀려났다는 결과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모든 과정을 하나의 추방 명령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 기록에서는 서로 다른 행정 절차가 차례로 이어지고 있었다.그릇의 기술검수.신규 발주.임시 처분.지정 계약 갱신.각각의 목적도, 권한도, 판단 기준도 달랐다.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이백 년 전의 기록을 읽는 의미가 없었다.“아가씨.”로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또 기록이에요?”엘로디아는 수첩을 덮었다.“응. 그런데 지금은 그릇부터.”“다행이네요.”“뭐가?”“드디어 가마가 기록관리국을 이겼잖아요.”엘로디아는 웃음을 터뜨렸다.“가마가 지면 안 되지. 내 본업인데.”그녀는 물잔을 다시
엘로디아는 기록관리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손에는 황실 혼인도공 자격 심의 관련 문서 목록을 옮겨 적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는 문장이 있었다.재심 보류 상태에서 별도 임시 처분 시행.임시.그 말은 원래 끝이 있다는 뜻이다. 어떤 문제가 확인될 때까지, 정식 결정을 내릴 때까지, 또는 정해진 기간이 지나기 전까지 잠시 적용하는 조치.그런데 르메르 가문은 이백 년 가까이 황실의 도자 제작에서 밀려나 있었다.엘로디아는 수첩을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그렇다고 임시 처분이 이백 년 동안 이어졌다는 뜻은 아니지.”누군가 나중에 확정 처분을 내렸을 수도 있다. 계약이 만료됐을 수도 있고, 르메르가 재계약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제도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었다.지금 확인한 것은 임시 처분이 있었다는 사실뿐이다.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도 끝을 먼저 알고 있으면 중간 과정까지 그 끝에 맞춰 해석하고 싶어진다.르메르는 쫓겨났다.그러니 임시 처분도 추방을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직 읽지도 않은 문서에 이미 답을 써버리는 셈이었다.엘로디아는 붉은 잉크를 꺼냈다.임시 처분의 내용·기간·후속 결정 미확인.그리고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현재 결과로 과거의 의도를 단정하지 말 것.“또 기록이에요?”문가에서 로제의 목소리가 들렸다.엘로디아가 고개를 들자 로제는 차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응. 그런데 오늘은 여기까지.”“정말요?”“정말.”로제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엘로디아는 그 표정을 보고 웃었다.“왜?”“아가씨가 기록을 덮으실 때는 보통 다른 기록을 펼치시니까요.”“그 정도는 아니거든.”“지난번에는 가마 기록을 덮고 재료 장부를 펼치셨잖아요.”“그건 다른 일이었지.”“그 전에는 선발 평가서를 덮고 개인 주문 계약서를 펼치셨고요.”엘로디아는 찻잔을 들다가 멈췄다.“……그건 인정.”로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황실 기록관리국의 열람실은 생각보다 밝았다.높은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긴 책상 위에 내려앉았고, 벽에는 습도와 온도를 확인하는 작은 계기가 걸려 있었다. 오래된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 어둡고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종이를 읽기에 알맞은 빛과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엘로디아는 그 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기록을 보존하는 일도 결국 기술이었다.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사람만큼이나, 남겨진 것이 상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람도 중요하다.“엘로디아 르메르 영애.”담당 기록관리관이 그녀의 자격증과 열람 승인서를 차례로 확인했다.“이번 열람은 감독하에 진행됩니다. 원본에 직접 표기하거나 문서의 배열을 바꿀 수 없으며, 필사는 승인된 범위에서만 가능합니다.”“네.”“기술자격은 연구 목적을 확인하는 근거일 뿐, 제한기록 전체에 대한 열람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알고 있습니다.”엘로디아는 자기 자격증을 받아 가방 안에 넣었다.황실도요원 특별 기술자격 도공 — 엘로디아 르메르.어제까지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오늘도 기뻤지만, 기록관리관 앞에서 자격증을 내밀자 조금 다른 감정이 들었다.자격이 있다는 것은.아는 것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고, 확인한 결과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에 더 가까웠다.“먼저 열람 대상의 구성을 설명하겠습니다.”기록관리관이 목록을 펼쳤다.“황실 도자 조달대장 세 권, 품질검수대장 두 권, 정정·보충 기록의 색인 한 권입니다. 다만 이번에 승인된 기간은 르메르 혼인도공의 퇴출 전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한정됩니다.”엘로디아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정정·보충 기록도 볼 수 있나요?”“색인까지는 가능합니다. 개별 정정 명령서와 첨부 문서는 별도 승인 대상입니다.”“그렇군요.”엘로디아는 수첩을 펼쳤다.첫 장 맨 위에 이미 써놓은 문장이 있었다.확인된 사실만 기록할 것.그리고 그 아래.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남길 것.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