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쿵.
분명 자신의 심장이 아니었다. 엘로디아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라시엘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박동은 자신의 것보다 조금 느렸고, 훨씬 묵직했다. 한 번 뛸 때마다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팔 안쪽으로 기묘한 울림이 번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쿵, 쿵. 이번에는 두 개였다. 하나는 자신의 것. 다른 하나는 라시엘의 것. 두 박동이 엇갈리다가 아주 잠깐 같은 순간에 겹쳤다. 우웅— 작업대 위의 잔이 낮게 울었다. 엘로디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라시엘의 손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놓으세요.” “가만히 있어.”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엘로디아가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라시엘은 아프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면서도 놓아주지는 않았다. 그 순간 또다시 이상한 감각이 밀려왔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자신의 손목을 감싼 라시엘의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과는 달랐다. 손목이 아니라 손바닥 전체가 뜨거워지는 것 같더니, 곧 그 열기가 손가락 끝까지 번졌다. 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전하.” “왜.” “혹시 지금…… 손이 뜨거우세요?” 라시엘의 눈빛이 달라졌다. “당신도 느끼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엘로디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라시엘의 체온이었다. 그가 느끼는 열이 자신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엘로디아가 중얼거렸다. “마도도자기에 감응 기능을 넣는 건 가능해요. 사용자의 마력에 반응해서 온도를 바꾸거나 빛을 내는 정도는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감각을 연결하는 건…….” 그녀는 말을 멈췄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 그 불가능한 일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엘로디아가 다시 잔을 보았다. 희고 매끈한 표면 위로 금빛 문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흐르고 있었다.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원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선이 퍼져 나갔다. 엘로디아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 라시엘이 막았다. “확인해야 해요.” “뭘?” “어디까지 연결된 건지.” “방금 위험한 물건이라고 한 사람은 나였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확인해야죠.” “도예가는 원래 목숨을 걸고 잔을 만드나?” “잘못 구운 가마가 터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비슷하긴 하네요.” 라시엘이 잠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나?” “사실인데요.” “당신은 가끔 웃는 얼굴로 무서운 말을 하는군.” “전하는 웃는 얼굴로 사람을 선발전에 붙잡아 두시잖아요.” “그건 꽤 즐거운 일이고.” “저는 아니거든요.” 엘로디아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이것부터 놓아주세요.” 그제야 라시엘의 시선도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긴 손가락이 엘로디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라시엘이 손을 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툭. 무언가 끊어진 것처럼 열기가 사라졌다. 엘로디아와 라시엘이 동시에 굳었다. “…….” “…….” 엘로디아가 천천히 자신의 손목을 쥐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하게 느껴졌던 열이 없었다. 심장 박동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것만 남아 있었다. 엘로디아가 라시엘을 바라봤다. “접촉.” 라시엘이 먼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맞았다. 이번에는 엘로디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손 주세요.” 라시엘의 눈썹이 올라갔다. “어젯밤부터 생각했는데.” “뭐가요?” “당신은 나한테 명령하는 데 거리낌이 없군.” “실험하는 중이잖아요.” “황태자에게?” “황태자도 사람 손이 두 개잖아요.” 라시엘이 웃었다. “그 논리 마음에 드는데.” 그러면서도 순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엘로디아는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엘로디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잔도 만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두 사람은 동시에 작업대 위의 잔을 바라봤다. 엘로디아가 왼손으로 잔을 잡았다. 아무 변화가 없었다. 라시엘도 잔의 반대편을 잡았다. 순간. 우웅— 금빛이 터져 나왔다. “……!” 엘로디아가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훨씬 선명했다. 라시엘의 손바닥이 자신의 손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지나칠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피부가 닿아 있다는 감각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까지 느껴졌다. 단단한 손바닥,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 손등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까지. 그리고 이상한 것은. ‘잠깐.’ 엘로디아의 손등은 공기에 노출되어 있지 않았다. 라시엘의 손등이었다. 그가 느끼는 감각이 자신에게 넘어온 것이다. 엘로디아는 실험 삼아 자신의 손등을 손톱 끝으로 아주 살짝 긁었다. 라시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간지럽군.” 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느끼셨어요?” “당신이 일부러 한 것도.” “생각까지 들려요?” “아니.” 다행이었다. 엘로디아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라시엘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안심하지?” “전하께서 아실 필요 없는 생각이요.” “궁금해지는군.” “평생 궁금해하세요.” “평생이라.” 라시엘이 느릿하게 반복했다. 엘로디아는 그 말이 왜 이상하게 들리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실험에 집중했다. “통증도 확인해볼게요.” “어떻게?” 엘로디아가 자신의 손등을 꼬집으려 했다. 그 순간 라시엘이 손을 잡았다. “그건 하지 마.” “왜요?” “확인한다고 자기 몸부터 꼬집는 사람이 어디 있지?” “그러면 전하를 꼬집을까요?” “……당신은 망설임이 없군.” “전하께서 먼저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라시엘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엘로디아가 웃었다. 그때였다. 라시엘의 손가락이 잔의 거친 밑부분에 스쳤다. 아주 작은 상처였다. 그러나 엘로디아는 제 손가락이 베인 것처럼 따끔한 감각을 느꼈다. “아.” 동시에 라시엘이 손을 멈췄다. 엘로디아가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베였어요?” 검지 끝에 아주 가느다란 붉은 선이 생겨 있었다. 엘로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무리를 제대로 못 했네요.” “어젯밤 누군가 굽다가 도망갔으니까.” “제가 언제 도망갔어요? 시간이 늦어서 돌아간 거지.” “비슷한 것 아닌가?” “다르죠.” 엘로디아는 작업대 옆에서 작은 숫돌을 찾았다. 그러다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상처는 없었다. 그런데 통증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통증까지 공유돼요.” 라시엘도 자신의 손을 살폈다. “체온, 심장 박동, 촉각, 통증.” “적어도 지금 확인된 건 그 정도예요.” 엘로디아는 심각해졌다. 마도도자기는 제작자의 의도를 마력 배열로 구현한다. 하지만 자신은 이런 기능을 넣은 적이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재료였다. “어제 쓴 흙.” “왜?” “평범한 백토였어요.” “확실해?” “제가 흙을 잘못 볼 것 같아요?” 라시엘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 그 대답이 너무 빨라 엘로디아가 오히려 그를 쳐다봤다. “의외로 저를 믿으시네요.” “당신이 다른 건 몰라도 흙 앞에서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엘로디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쪽에 남았다. 몰락한 르메르가의 영애. 황태자비 선발전의 변변치 않은 후보. 사람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도자기에 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겨우 이틀 본 남자가 너무 쉽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잘못 볼 리 없다. 엘로디아는 괜히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상해요.” “뭐가?” “흙도 평범했고 유약도 제가 직접 만든 게 아니었어요. 어젯밤 공방에 있던 걸 썼으니까.” “그럼 특별한 건 하나뿐이군.” “뭔데요?”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만든 사람.” 엘로디아가 눈을 깜빡였다. “저요?” “우리.” 그가 정정했다. “…….” 엘로디아는 괜히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라시엘이 잔을 놓쳤다. 엘로디아가 반사적으로 잔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다시 겹쳤다. 금빛이 한 번 크게 번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혀 다른 것이 넘어왔다. 뜨거운 열기가 목덜미를 훑었다. 엘로디아가 움찔했다. ‘뭐야?’ 손에서 시작된 감각이 아니었다. 목덜미. 귓가.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뜨거운 기운. 엘로디아의 숨이 잠시 막혔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라시엘의 것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빛도 변했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던 금빛 눈이 아주 천천히 어두워졌다. 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체온이나 통증과는 달랐다. 감정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감정이 몸에 만들어낸 반응. “전하.” 엘로디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라시엘이 대답하지 않았다. “전하?” “생각까지는 공유되지 않는다며.”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 내려갔다. 입술. 그리고 다시 눈. 그 짧은 움직임 하나로 충분했다. 엘로디아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 “…….” 이번에는 라시엘이 먼저 잔에서 손을 뗐다. 감각이 끊어졌다. 공방 안이 갑자기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엘로디아는 헛기침을 했다. “이건.” “그래.” “아주 큰 문제네요.” “동의해.” 라시엘은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낮아져 있었다. 엘로디아는 일부러 작업대만 바라봤다. “앞으로 둘이 동시에 만지지 않으면 됩니다.” “간단하군.” “그렇죠.” “그런데.” “왜요?” “이 잔을 완성해야 한다면?” 엘로디아가 멈췄다. 맞다.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초벌구이만 끝난 상태였다. 유약을 입히고 다시 고온에서 구워야 진짜 완성품이 된다. 엘로디아가 천천히 잔을 바라봤다. “……완성하면 연결이 더 강해질 수도 있어요.” “반대로 사라질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죠.” 도예가로서 확인하고 싶었다. 미치도록. 그러나 사람으로서는 별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방금 같은 감각이 더 선명해진다면. 엘로디아가 잔을 노려봤다. “일단 봉인해둬요.” “아쉽나?” “전혀요.” “표정은 그런데.” “전하는 사람 표정에 너무 관심이 많아요.” “특정 사람에게만.” 엘로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라시엘은 이미 잔을 보고 있었다. 방금 말이 별 의미 없는 것처럼. 하지만 엘로디아의 심장이 괜히 한 번 빨리 뛰었다. 다행히 이제 연결은 끊겨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 다음 날 오전. 황태자비 선발전 두 번째 심사는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주제는 꽃과 공간. 후보들에게 동일한 크기의 작은 응접실 하나씩이 주어졌고, 준비된 꽃과 장식품을 이용해 손님을 맞이할 공간을 꾸미는 것이 과제였다. 엘로디아는 방 한가운데 서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오늘은 정말 떨어진다.’ 어제는 사고였다. 도자기가 나왔으니 직업병이 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은 꽃이다. 꽃에 대해서라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장미는 가시가 있고. 백합은 향이 강하고. 라벤더는 말리면 공방 냄새를 잡는 데 좋다. 끝. 엘로디아는 자신 있게 가장 못생긴 꽃병부터 골랐다. 정확히는 다른 후보들이 거들떠보지 않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꽃병이었다. 짧고 둥근 몸통에 목이 지나치게 좁았다. 황실에서 준비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투박했다. 엘로디아는 만족했다. “좋아.” 여기에 색이 전혀 맞지 않는 꽃을 꽂고, 장식도 엉망으로 배치하면 된다. 이번에는 라시엘도 점수를 줄 명분이 없을 것이다. 엘로디아는 붉은 장미를 집었다. 그런데 꽃병에 넣으려던 손이 멈췄다. “…….” 병의 입구가 너무 좁았다. 이대로 줄기를 여러 개 넣으면 서로 눌린다. 물을 충분히 먹지도 못한다. 엘로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이걸 신경 쓰고 있지?’ 그냥 넣으면 된다. 오늘 목표는 탈락이다. 엘로디아가 다시 줄기를 밀어 넣었다. 하나. 둘. 세 번째에서 결국 손이 멈췄다. “아, 정말.” 못 하겠다. 꽃도 살아 있는 건데 일부러 망가뜨리는 건 기분이 나빴다. 엘로디아는 장미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꽃병을 들었다. 밑부분을 두드렸다. 톡, 톡. 소리가 묵직했다. ‘두께가 꽤 있네.’ 엘로디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잠시 후 그녀는 시녀에게 물었다. “혹시 조각칼 있어요?” 시녀가 당황했다. “조각……칼이요?” “작은 것도 괜찮아요.” “꽃꽂이에요?” “아마도요.” 그로부터 삼십 분 뒤. 다른 후보들이 우아하게 꽃을 배치하고 있을 때 엘로디아는 꽃병을 깎고 있었다. 사각. 사각. 입구를 조금 넓히고 표면에 얕은 홈을 냈다. 준비된 점토 장식제를 얇게 덧발라 굴곡을 만들었다. “르메르 영애.” 옆방에서 구경하러 온 셀레스트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꽃병을…… 개조하고 계신 건가요?” 엘로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꽃이 안 들어가서요.” “다른 꽃병을 고르면 되지 않나요?” “그건 자존심이 상해서.” “……누구의 자존심이요?” 엘로디아는 잠시 생각했다. “제 자존심?” 셀레스트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엘로디아도 따라서 웃다가 굳었다. ‘잠깐.’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탈락하려고 못생긴 꽃병을 골랐는데. 왜 그걸 고쳐서 쓰고 있지? 엘로디아는 절망적으로 꽃병을 바라봤다. 이미 늦었다. 투박했던 병은 오히려 독특한 형태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넓어진 입구 덕분에 장미가 자연스럽게 퍼졌다. ‘망했다.’ 어제와 다른 의미로. 그래도 아직 공간 장식이 남았다. 엘로디아는 꽃병 하나만 가운데 두고 나머지는 최대한 단순하게 정리했다. 적어도 화려함에서는 다른 후보들에게 질 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심사가 시작됐다. 황후궁의 시녀장과 예법관이 차례로 방을 돌았다. 라시엘도 함께였다. 엘로디아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목덜미를 훑던 열. 입술에 잠깐 머물렀던 시선. 엘로디아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생각하지 마.’ 지금은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그런데 라시엘이 자신의 방에 들어오자 심장이 괜히 빨라졌다. 라시엘이 꽃병을 발견했다. “이건 원래 있던 것과 다른데.” 예법관이 말했다. “르메르 영애가 직접 손봤다고 합니다.” 라시엘의 시선이 엘로디아에게 향했다. “꽃꽂이 심사에서?” “꽃이 안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꽃병을 고쳤다?” “예.” “다른 걸 고를 생각은?” “있었는데 자존심이 상해서요.” 옆에 있던 셀레스트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웃고 있었다. 라시엘 역시 입가를 누르는 듯했다. “르메르 영애.” “예.” “당신은 탈락할 생각이 있긴 한가?” 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였다. “전하!” “왜.”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시면 어떡해요?” “비밀이었나?” “당연하죠!” 엘로디아가 대답하고 나서 입을 막았다. 늦었다. 예법관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셀레스트도 이번에는 웃음을 멈췄다. 엘로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됐다.’ 이제야 됐다. 황태자비 선발전에서 공개적으로 탈락하려고 했다고 인정했다. 이보다 완벽한 감점 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라시엘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매번 가장 눈에 띄는군.” “그건 사고입니다.” “오늘도?” “이것도 사고예요.” “꽃병을 한 시간 동안 깎는 사고도 있나?” “……긴 사고였어요.” 결국 셀레스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녀장도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무표정하던 예법관의 입꼬리까지 움직였다. 엘로디아는 억울했다. “어쨌든 화려하지도 않고 황태자비의 응접실답지도 않잖아요.” 라시엘이 방을 둘러봤다. 다른 후보들의 방은 값비싼 장식과 꽃으로 가득했다. 엘로디아의 방은 달랐다. 낮은 탁자 하나. 창가의 의자 두 개. 그리고 직접 손본 꽃병과 붉은 장미. 단순했다. 하지만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에 의자를 놓아 방문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편안함을 느끼도록 되어 있었다. 라시엘이 창가에 앉았다. “나는 이쪽이 편한데.” “전하 취향을 심사 기준으로 쓰시면 안 되죠.” “황태자비가 사용할 방인데 황태자 취향은 전혀 중요하지 않나?” “황태자비 방이면 황태자비 취향이 중요하죠.” 정적이 흘렀다. 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녀장은 이번에는 대놓고 웃었다. “저는 르메르 영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엘로디아는 불길했다. 매우 불길했다. 라시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병은?” “제가 가져가도 됩니까?” “왜?” “다시 구워보고 싶어서요.” “그럼 가져가.” “감사합니다.” 엘로디아가 꽃병을 소중하게 안았다. 라시엘이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나보다 꽃병을 볼 때 더 좋아하는군.” 엘로디아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당연해?” “전하는 제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라시엘도 말을 잃었다. 엘로디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꽃병을 들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뒤 라시엘이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는 듯 어깨가 조금 움직였다. “그래.” 낮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건 인정하지.” ⸻ 두 번째 심사 결과는 오후에 발표됐다. 엘로디아는 게시판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1위. 셀레스트 드 아르망. 좋다. 그리고. 2위. 엘로디아 르메르. “……왜.” 엘로디아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1위. 오늘 2위. 종합 점수. 1위 엘로디아 르메르. 로제가 옆에서 손뼉을 쳤다. “아가씨! 또 1위예요!” “조용히 해.” “이러다 진짜 황태자비 되시겠어요!” “그 말 하지 마.” 엘로디아는 이마를 짚었다. 탈락하려고 할수록 순위가 올라간다. 이쯤 되면 선발전 자체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르메르 영애.” 셀레스트였다. 엘로디아가 돌아봤다. “아르망 영애.” 셀레스트는 잠시 주변을 확인하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은 사람이 적은 회랑으로 이동했다. 셀레스트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진지했다. “어제 찻잔 말이에요.” 엘로디아의 표정도 달라졌다. “왜요?” “저도 이상한 일을 겪었어요.” “무슨 일이요?” 셀레스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 누군가 제 방에 들어왔어요.” 엘로디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둑입니까?”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럼.” 셀레스트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천을 펼쳤다. 안에는 깨진 도자기 조각 하나가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백자. 엘로디아는 보는 순간 알아봤다. 어제 심사에서 사용했던 찻잔이었다. “이게 왜…….” “제 베개 위에 놓여 있었어요.” 엘로디아의 표정이 굳었다. 조각 안쪽에는 검붉은색으로 글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 물러나라. 셀레스트가 조용히 말했다. “누군가 선발전을 망치려는 것 같아요.” 엘로디아는 도자기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손끝이 닿는 순간. 붉은 마력의 결이 보였다. 어제의 잔과 같았다. 아니. 조금 달랐다. 균열 속에서 아주 희미한 검은 선 하나가 움직였다. 엘로디아가 숨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잠깐만요.” 그녀는 조각을 빛에 비췄다. 검은 선. 문양.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기억났다. 어젯밤 라시엘과 함께 만든 잔. 금빛 문양의 가장 바깥쪽. 형태가 같았다. 색만 정반대였다. ‘설마.’ 엘로디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었다. ⸻ 그날 밤. 엘로디아는 제3도요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몰래가 아니었다. 라시엘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다. 공방 문을 열자 그가 먼저 와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린 게 맞군.”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엘로디아가 천을 펼쳤다. 깨진 조각을 본 순간 라시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디서 났지?” “아르망 영애의 침실에 누가 두고 갔대요.” 라시엘이 조각을 집으려 했다. “잠깐.” 엘로디아가 그의 손을 막았다. “왜?” “혹시 모르니까 장갑 끼세요.” “당신은 맨손으로 만졌으면서?” “저는 도예가잖아요.” “도예가는 저주에 면역인가?” “……그건 아니지만.” 라시엘이 한숨을 쉬더니 장갑을 꼈다. 그는 조각을 자세히 살폈다. “같은 잔이군.” “예. 그리고 이것 좀 보세요.” 엘로디아가 검은 문양을 가리켰다. 라시엘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있지?” 엘로디아가 멈칫했다. 역시.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마력의 결이 있어요.” “당신은 보이나?” 침묵. 엘로디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지금은 안 해도 돼.” 엘로디아가 그를 쳐다봤다. “……안 물어보세요?” “물으면 말할 건가?” “아니요.” “그럼 나중에 물어보지.”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이었다. 엘로디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라시엘은 다시 조각을 바라봤다. “어젯밤 잔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나?” “문양의 형태가 비슷해요.” “확인해보지.” 라시엘이 봉인함을 열었다. 안에 금빛 문양의 잔이 있었다. 엘로디아는 잠시 망설였다. “같이 만져야 할까요?” “그게 가장 빠르겠지.”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엘로디아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라시엘이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겁나나?” “아뇨.” “그럼?” “전하가 이상한 생각만 안 하시면 됩니다.” 라시엘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인가?” “해야죠.” “어려운 요구군.” “……그냥 하지 마세요.” 라시엘이 낮게 웃었다. “노력하지.”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엘로디아가 잔 한쪽을 잡았다. 라시엘이 반대편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끝이 닿았다. 우웅— 금빛 문양이 깨어났다. 동시에. 쿵. 엘로디아의 가슴에 라시엘의 심장 박동이 들어왔다. 그 역시 느낀 듯 눈빛이 달라졌다. 엘로디아는 애써 집중했다. “조각을 가까이 가져와 보세요.” 라시엘이 깨진 조각을 잔 가까이에 놓았다. 그 순간. 쨍—!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금빛 문양과 검은 문양이 동시에 빛났다. 엘로디아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가 뒤집혔다. “……!” 공방이 사라졌다. 대신 보인 것은 불길이었다. 거대한 가마. 깨진 도자기 수백 개.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그리고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깨진 잔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황후 폐하!” 엘로디아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피 묻은 입술이 움직였다. “혼인잔을 깨뜨려.” 그리고. “두 번째 잔이 완성되기 전에.” 콰앙! 가마가 폭발했다. 엘로디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엘로디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허리가 단단한 팔에 감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엘로디아는 라시엘의 품 안에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심장인지 라시엘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괜찮아?” 라시엘의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엘로디아는 대답하려 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두 손이 그의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라시엘의 팔은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거의 틈이 없었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것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잔이 아직 두 사람의 손 사이에 있었다. 연결이 끊기지 않았다. 라시엘이 느끼는 감각이 그대로 넘어왔다. 자신의 몸이 그의 가슴에 닿아 있다는 감각. 허리를 감싼 팔 안쪽에 전해지는 체온. 목 가까이에 닿은 자신의 머리카락. 엘로디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라시엘의 몸도 굳었다. 둘 다 동시에 알아차린 것이다. “……전하.” “그래.” “잔부터.”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누구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오히려 서로의 몸이 더 스칠 것 같았다. 엘로디아가 조심스럽게 몸을 빼려 했다. 그 순간 발뒤꿈치가 작업대 다리에 걸렸다. “앗.” 라시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엘로디아의 몸이 다시 그의 품으로 당겨졌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둘 중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라시엘이 아주 낮게 욕설 비슷한 숨을 삼켰다. 엘로디아가 눈을 들었다. 금빛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장난기도 여유도 없었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로디아는 그 순간 자신의 것이 아닌 열기가 다시 목덜미를 타고 번지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보다 훨씬 선명했다. “전하.” “말하지 마.” “왜요?” “지금은.” 라시엘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당신이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까.” 이미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엘로디아가 황급히 잔을 놓았다. 라시엘도 동시에 손을 뗐다. 툭. 연결이 끊겼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 걸음씩 떨어졌다. 엘로디아는 괜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라시엘은 셔츠의 단추 하나를 느슨하게 풀었다. 공방 안이 갑자기 더운 것 같았다. 한참 뒤 엘로디아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방금 본 것.” 라시엘의 표정도 다시 진지해졌다. “당신도 봤나?” “예.” “불타는 가마.” “깨진 잔.” “황후.” 엘로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같은 것을 보았다. 환상이 아니었다. 라시엘은 작업대 위의 잔을 바라봤다. “두 번째 잔이 완성되기 전에.” 엘로디아의 입술이 굳었다. “깨뜨리라고 했어요.” “그래.” “우리 잔을 말하는 걸까요?” 라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똑. 작은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향했다. 깨진 찻잔 조각에서 검은 액체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엘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액체는 작업대 위를 기어가듯 움직였다. 금빛 잔을 향해서. “전하, 물러나세요.” 엘로디아가 잔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검은 액체가 먼저 닿았다. 치익— 연기가 피어올랐다. 금빛 문양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잔 표면에 글자가 나타났다. 한 글자. 두 글자. 금빛과 검은빛이 뒤엉키며 오래된 제국어를 만들어냈다. 라시엘이 먼저 읽었다. “……르메르.” 엘로디아가 굳었다. 자신의 가문 이름이었다. 하지만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은 선이 한 줄 더 이어졌다. 르메르의 피로 빚은 잔은 황실의 주인을 바꾼다. 공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로디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피라니.”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저는 피를 넣은 적 없어요.” 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엘로디아도 따라 내려다봤다. 어젯밤 물레를 돌리다가 생긴 작은 상처. 이미 거의 아물어 있었다. 하지만 기억났다. 흙을 반죽하던 중 손가락 끝이 갈라졌었다. 아주 작은 상처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엘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그때 공방 문이 세차게 열렸다. 테오란이었다. 평소라면 반드시 노크했을 남자가 숨까지 거칠게 몰아쉬며 들어왔다. “전하.” 라시엘이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지하 기록고에서 찾았습니다.” 테오란이 낡은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이백 년 전 르메르 가문의 기록입니다.” 엘로디아와 라시엘이 동시에 문서를 바라봤다. 테오란의 얼굴이 창백했다. “르메르 가문은 단순한 황실 도예가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테오란이 숨을 골랐다. “황제와 황후의 혼인잔을 만드는 유일한 가문이었습니다.” 엘로디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테오란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백 년 전 마지막 혼인잔이 깨진 날.” 그의 시선이 엘로디아에게 향했다. “당시 황후가 죽었습니다.” 엘로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 황제는 르메르 가문을 반역죄로 처벌했습니다. 가문의 기록은 지워졌고 살아남은 방계만 작위를 낮춰 수도에서 추방됐습니다.” 라시엘의 얼굴에서 마지막 웃음기까지 사라졌다. “반역의 내용은?” “혼인잔을 이용해 황실의 계승을 조작하려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테오란이 문서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오래되어 흐릿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혼인잔은 두 사람의 감각과 생명을 연결한다. 엘로디아의 시선이 그 문장에 박혔다. 감각. 생명. “생명……?” 그녀가 중얼거렸다. 라시엘의 표정도 굳었다. 테오란이 천천히 다음 줄을 읽었다. 잔이 완성되면 연결은 되돌릴 수 없다. 엘로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작업대 위에서 소리가 났다. 쩍. 세 사람의 시선이 잔으로 향했다. 초벌 상태였던 잔의 표면이 스스로 변하고 있었다. 유약을 입히지도 않았는데 금빛이 액체처럼 퍼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불 속에서 다시 구워지는 것처럼. 엘로디아가 새하얗게 질렸다. “안 돼.” 그녀가 잔으로 달려갔다. “완성되면 안 돼요.” 그러나 손을 뻗기 직전. 화르륵! 금빛 불꽃이 잔을 감쌌다. 라시엘이 엘로디아의 허리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엘로디아!” “놔요! 저걸 꺼야 해요!” “맨손으로 불을 잡겠다고?” “제가 만든 거예요!” “그래서 당신까지 타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금빛 불꽃이 공방 천장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주변에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오직 잔만 타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 한가운데에서. 마지막 문양이 완성되었다. 서로 맞물린 두 개의 원. 그 아래. 황실의 독수리. 그리고 르메르 가문의 오래된 인장. 두 문장이 하나로 이어졌다. 엘로디아의 눈이 흔들렸다. 금빛 불꽃이 사라졌다. 작업대 위에는 완전히 달라진 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희고 투명한 표면. 금빛 테두리. 두 개의 문양. 완성품이었다. 누구도 손대지 않았는데. 혼인잔이 스스로 완성되어 버렸다. 그 순간. 쿵. 엘로디아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리고. 쿵. 바로 뒤에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라시엘의 심장도 뛰었다. 이번에는 잔을 만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느껴졌다. 엘로디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라시엘 역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느껴진다.” 그의 대답이 낮게 떨어졌다. 엘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접촉을 끊으면 사라졌던 연결이. 이번에는 끊어지지 않았다. 라시엘이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두 사람이 한 걸음 떨어졌다. 그래도. 쿵. 느껴졌다. 두 걸음. 쿵. 여전히. 엘로디아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 아래에서 두 개의 박동이 겹쳐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 그리고 하나는. 황태자 라시엘. 테오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서의 마지막 부분을 내려다봤다. “전하.” “말해.” “기록에…… 한 줄이 더 있습니다.” 라시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테오란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엘로디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뭔데요?” 한참 뒤. 테오란이 읽었다. “완성된 혼인잔으로 이어진 두 사람은…….”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정적. 엘로디아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아주 천천히 라시엘을 돌아봤다. 라시엘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심장이 다시 한번 동시에 뛰었다. 쿵. 엘로디아의 입술이 벌어졌다. “……저 탈락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테오란이 눈을 감았다. 라시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러게.” “왜 웃으세요?” “어젯밤 누가 그랬거든.” “뭐라고요?”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 탈락할 거라고.” “…….” “그런데 아무래도.” 그의 금빛 눈이 완성된 혼인잔을 한 번 스쳤다가 다시 엘로디아에게 돌아왔다. “내 신부 후보에서 빠지는 것부터 상당히 어려워진 것 같군.” 엘로디아는 그 순간 확신했다. 자신이 황궁에 들어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황태자에게 장작을 나르게 한 것도, 선발전에서 1등을 해버린 것도 아니었다. 저 남자와 함께 그릇을 빚은 것이었다.황실 기록관리국을 나온 뒤에도 엘로디아는 곧장 제3도요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건물 앞 긴 회랑에 서서 수첩을 다시 펼쳤다.마지막에 적은 한 줄.다음 질문: 왜 르메르를 조사했는지가 아니라, 왜 그릇의 이동 경로를 조사하지 않았는가.문장은 마음에 들었다.하지만.이 질문에도 함정이 있다.조사하지 않았다.그 사실만으로 누군가 일부러 감췄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또 결론부터 정하게 된다.당시에는 황후가 죽었다.황궁 전체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담당자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품질검수보다 더 큰 조사 조직으로 사건이 넘어갔을 수도 있다. 기록이 다른 부서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무엇보다.특별조사 요청이 기각됐다는 것과.그릇의 이동 경로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다는 건.다른 말이다.엘로디아의 펜끝이 움직였다.추가 확인: 특별조사와 일상 행정기록을 구분할 것.그릇이 황실에 들어오면.누군가는 받는다.창고에 넣는다.다른 곳으로 옮긴다.황후궁으로 보낸다.검수실로 가져간다.사람이 움직이면.대개 기록이 남는다.적어도 황실이라면.“왜 그걸 이제 생각했지.”엘로디아가 중얼거렸다.특별조사 문서만 쫓고 있었다.하지만.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날부터 모든 일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오히려.아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평범한 기록이.더 오래 남기도 한다.엘로디아는 다시 기록관리국 안으로 들어갔다.⸻“추가 제한기록 신청은 이미 접수됐습니다.”아까의 기록관리관이 말했다.“알고 있어요. 그거 말고 다른 걸 여쭤보려고요.”“어떤 기록입니까?”엘로디아는 수첩을 펼쳤다.“200년 전 황실 의식용 자기의 일반적인 인계 절차를 알고 싶어요.”기록관리관이 잠깐 멈췄다.“특정 기물의 이동 기록입니까?”“아니요. 우선은 절차부터요.”“절차.”“르메르에서 납품한 자기라면 어디에서 접수하고, 누가 검수하고, 어느 창고를 거쳐 각 궁으로 보내는지요.”기록관리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건 제한기록이 아닙니다.”엘로디아의 눈
수도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엘로디아는 르메르에서 가져온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세 번 확인했다.원본 문서.없다.제17호 갑발.없다.흰 백자 파편.없다.전부 르메르에 그대로 두었다.가져온 것은 정식으로 작성한 문서 목록과 허용 범위 안에서 만든 대조용 사본, 자신이 직접 적은 조사 기록뿐이었다. 제17호 갑발 역시 발견 위치와 크기, 파손 상태, 표면 반응을 기록한 도면만 있었다.로제가 맞은편에서 물었다.“아쉬우세요?”“뭐가?”“아무것도 안 가져오셔서요.”엘로디아는 무릎 위 서류함을 내려다봤다.“조금.”솔직히 말하면 흰 파편은 황실도요원으로 가져가 당장 검사하고 싶었다. 제17호도 더 좋은 장비로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소유와 반출 권한을 확인하고.검사 방식도 정하고.필요하다면 르메르 측에서 정식으로 대여한다.궁금하다고 가져오는 건.조사가 아니다.“그리고.”엘로디아가 창밖을 봤다.“지금은 그릇보다 문서부터 봐야 해.”르메르의 원본은 말했다.황후가 죽기 열하루 전.에델리아 르메르가 먼저 의식용 자기 납품 중지를 요청했다.후대의 색인은 말했다.황후가 죽은 뒤.황실 명령으로 르메르의 납품이 중지됐다.둘 중 하나가 틀렸다.아니면.둘 다 서로 다른 종류의 중지를 기록했을 수도 있다.임시 납품 중지 요청.공식 중지 명령.같은 말처럼 보여도.행정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원본부터.”엘로디아가 작게 중얼거렸다.로제가 익숙하게 대답했다.“그리고 밥.”“……그건 이제 안 적어도 돼.”“안 적으면 안 드시잖아요.”엘로디아는 반박하려다가.말았다.⸻수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엘로디아는 르메르 저택에 들러 짐만 내려놓고 곧바로 제3도요원으로 향했다. 내일이 기록고 열람일이었지만, 사흘 동안 비운 작업실부터 확인하고 싶었다.문을 열자.익숙한 흙냄새.건조대.물레.첫 주문이 끝나 비어 있는 작업대.엘로디아는 그 앞에서 잠시 멈췄다.페르난의 찻잔이 놓여 있던 자리.
다음 날 아침, 엘로디아는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에 눈을 떴다.어젯밤 늦게까지 기록을 정리했으니 평소 같았으면 조금 더 누워 있었을 텐데,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할머니의 색인에 적혀 있던 한 문장이었다.연계 문서 — 르메르 혼인도공 황실 납품 중지 전 3개월.납품 중지.그 뒤에 황후가 죽었고, 르메르가 황실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문장만으로는 무엇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황후가 죽었기 때문에 납품이 중지된 것인지, 그보다 앞서 르메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먼저 그릇을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인지.순서가 다르면.이야기도 달라진다.엘로디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득 멈췄다. 그리고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수첩을 펼쳤다.어제 적어둔 여섯 번째 원칙.식사한다.“…….”누가 보면 도공의 연구 원칙이 아니라 로제의 잔소리 목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그래도.엘로디아는 수첩을 덮고 세수부터 했다.식당으로 내려가자 바르센이 먼저 와 있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서류를 보고 있었고, 마리엘은 식탁에 엎드린 채 하품을 하고 있었다. 로제는 엘로디아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를 따랐다.“오늘은 어디부터 볼 거냐?”바르센이 물었다.엘로디아는 빵을 하나 집었다.“할머니가 색인에 적어둔 연계 문서부터.”“어제 말한 황실 납품 중지 기록?”“응. 그 전 석 달.”바르센은 잠시 생각하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내가 같이 가야 하느냐?”“아니.”엘로디아의 대답은 빨랐다.“아버지는 할머니한테 그 기록에 대해 들은 적 있어?”“직접적인 내용은 없다.”“그럼 내가 먼저 볼게.”“그래.”아버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서운해하지도 않았다.그게 고마워서 엘로디아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확인 끝나면 이야기해줄게. 아직은 내가 먼저 읽고 싶어.”“네가 봐야 하는 기록이라 남긴 것 같으니 그래야지.”마리엘이 빵을 뜯다가 중얼거렸다.“나는 같이 가도 되지?”“응.”“왜 나는 되고
옛 가마 창고는 저택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르메르가 아직 황실 혼인도공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사용했다는 작업장 뒤편.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오래된 가마와 재료 창고가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엘로디아는 어릴 때도 이곳에 자주 왔다.아버지 몰래 흙을 만지다가 치맛자락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고,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저 돌은 뭐냐, 이 흙은 왜 색이 다르냐, 가마 안은 왜 검으냐고 끝없이 물었다.그때는.이곳에 200년 된 물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언니.”마리엘이 뒤에서 불렀다.“응?”“뭘 찾아야 하는지는 알아?”“큰 갑발.”“큰…… 뭐?”“갑발.”“그게 어떻게 생겼는데?”엘로디아가 손으로 대강 크기를 그렸다.“이 정도.”마리엘의 눈이 커졌다.“그게 찻잔을 굽는 거라고?”“찻잔만 굽는 건 아니야. 안에 도자기를 넣고 가마에서 보호하는 내화 용기야.”“그런데 왜 그렇게 커?”“그걸 모르니까 찾는 거고.”엘로디아는 문 앞에서 멈췄다.바로 열지 않았다.먼저.창고 관리 기록.저택에서 가져온 오래된 열쇠 꾸러미.그리고.마력결 검사 도구.마리엘이 그걸 보더니 말했다.“언니 진짜 달라졌다.”“뭐가?”“예전 같으면 벌써 문 열었어.”“…….”반박할 수 없다.엘로디아가 헛기침했다.“사람은 성장하는 거야.”“황실 가더니?”“도공 시험 보면서.”“황태자 전하 만나면서가 아니고?”엘로디아의 손이 열쇠 위에서.멈췄다.“그건 왜 나와?”“그냥.”“마리엘.”“왜?”“너 전하한테 뭐 들었어?”“아무것도.”마리엘이 너무 빠르게 대답했다.수상하다.하지만.지금은 갑발.“나중에 보자.”“뭘?”“너.”마리엘이 웃었다.엘로디아는 열쇠를 돌렸다.끼익.문이 열렸다.먼지 냄새.마른 흙.오래된 나무.그리고.가마에서 한 번 이상 불을 먹은 내화재 특유의 냄새.익숙하다.엘로디아는.그 자리에서.잠깐.숨을 들이켰다.집.그중에서도.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종류의 냄새.
페르난 디오르가 도착하기 전까지 엘로디아는 완성된 찻잔을 세 번이나 닦았다.닦을 필요는 없었다.이미 깨끗했다.그런데도 한 번 닦고, 빛에 비춰보고, 다시 내려놓았다가 또 들었다.첫 번째 초벌 시제품.두 번째 초벌 시제품.그리고 완성품.세 개를 나란히 놓으면 변화가 더 잘 보였다. 첫 번째 손잡이는 중지를 받쳐주겠다는 생각이 너무 앞서 아래쪽 곡선이 길었다. 두 번째는 그 길이를 줄이고 접촉점을 짧은 면으로 바꿨다. 완성품은 거기에서 입술이 닿는 전을 조금 더 얇게 다듬고, 실제 사용 때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장식을 완전히 덜어냈다.새하얀 잔.눈에 띄는 문양도 없다.금도.황실 문장도.없다.그런데 엘로디아는 지금까지 자기가 만든 그릇 가운데 이 잔이 꽤 마음에 들었다.“또 보고 계세요?”로제가 물었다.엘로디아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검사하는 거야.”“제가 보기엔 십 분 전에도 검사하셨는데요.”“십 분 사이에 뭐가 생길 수도 있잖아.”“가만히 놓여 있던 잔에요?”“유약의 미세 균열은 냉각 후에도 나타날 수 있어.”“그럼 오 분 뒤에도 보시겠네요.”“……한 번 정도는.”로제가 웃음을 참았다.엘로디아는 못 들은 척 찻잔을 돌렸다.손잡이 접합부.이상 없음.유약 표면.미세 기포 하나.이미 기록했다.사용에는 영향 없음.굽.안정적.타음.정상.그래도.오늘은 자기 검사가 끝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주문자가 쓴다.실제 차를 담는다.책을 읽고.내려놓고.다시 든다.그때까지.완성이 아니다.“영애.”“응.”“긴장되세요?”“아니.”로제가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엘로디아가 입술을 다물었다.“……조금.”사실.도공 시험 때보다 이상하게 더 긴장됐다.시험은 심사위원이 점수를 준다.이번에는.돈을 준 사람이 판단한다.무엇보다 이건 자기가 자격을 얻은 뒤, 엘로디아 르메르라는 이름으로 받은 첫 주문이었다.황태자의 도움으로 들어온 주문도 아니다.황태자비 후보라서 받은 것도 아
질의서를 제출한 뒤 답이 돌아오기까지 십 분.짧다면 짧고, 두 시간짜리 회의 안에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후보들은 그동안 손에 쥔 자료만으로 다섯 사업을 다시 나눴다. 당장 하지 않으면 사람이 다치거나 손실이 커지는 것, 일부 규모를 줄여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 시행 시기를 나눌 수 있는 것.엘로디아는 종이 한가운데 선을 그었다.필수. 조정 가능. 확인 필요.셀레스트가 옆에서 그걸 보더니 물었다.“그릇 검사하니?”“비슷하게 생각해보려고.”“예산이랑 그릇이?”“금이 갔다고 다 버리는 건 아니잖아. 반대로 겉이 멀쩡하다고 계속 써도 되는 것도 아니고.”엘로디아는 북부 겨울 도로 보수 사업을 짚었다. “예를 들어 여기. 전 구간을 다 보수하면 좋겠지만 돈이 부족하잖아. 그러면 어느 구간을 안 고쳤을 때 실제로 도로가 끊기는지를 봐야 할 것 같아.”맞은편의 후보가 자료를 넘겼다.“북부 도로는 세 구간이네요. 산악로, 광산 연결로, 북부 곡물창고 연결로.”“전부 같은 상태는 아니고요.”“산악로가 제일 오래됐어요.”누군가가 바로 말했다.“그럼 거기부터 고쳐야 하는 것 아닌가요?”엘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오래됐다는 건 사실이다.그런데 오래됐다는 것과 지금 가장 위험하다는 건 같은 말이 아니다.셀레스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손가락으로 표를 두드렸다.“통행량은 광산 연결로가 두 배야.”“하지만 산악로가 무너지면 마을 세 곳이 고립됩니다.”“그럼 또 달라지지.”한마디씩 의견이 붙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다섯 사업 중 무엇을 버릴지 정하는 회의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부 자료를 보기 시작하자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사업 하나를 통째로 살리고 다른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었다. 한 사업 안에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부분과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부분이 섞여 있었다.엘로디아가 펜을 들었다.“사업 단위로 깎지 말고 공정 단위로 나누면 어때요?”“공정?”“도로 보수도 전 구간이 아니라 붕괴 위험 구간부터. 진료소도 증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