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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떠나지 않는 이유(1)

Author: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8 00:01:25

이헌은 부러진 붓끝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밑으로는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결재하던 조세 장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뭐라 하였느냐.”

이헌의 목소리가 바싹 메말라 갈라졌다.

취선당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흑위대장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아가씨께서…… 아직 안채에 머물고 계시옵니다.”

“…….”

“마차와 호위 무사들을 대령해두고 며칠을 기다렸으나, 처소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셨사옵니다. 식사도 거의 물리고 계시며…….”

흑위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자가께서 툇마루에 남겨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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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놈이 지금 율법을 핑계로 과인을 능멸하는 것이냐!”이도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하지만 이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핏발 선 눈동자로 이도를 똑바로 쏘아보았다.“능멸이 아니옵니다. 국법의 수호자인 소신이, 어찌 제 마음이 단 한 뼘도 남아 있지 않은 여인들을 들여 그들의 인생을 속이고 국법을 훼손하겠사옵니까.”이헌의 서늘한 살기가 연회장의 여인들을 향해 뻗어나갔다.“소신의 마음은, 이미 역모의 누명을 벗고 대군저에 머물고 계신 서씨 가문의 여식에게 완벽하게 종속되어 법적으로 묶여 있사옵니다. 그 여인 외에, 제 곁을 내어줄 자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사옵니다.”그것은 거절이 아니었다.자신의 옆자리는 오직 서연이라는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완벽한 성역(聖域) 임을, 조선의 국왕과 만조백관 앞에서 폭력적이고도 광기 어리게 선언하는 맹목적인 못박기였다.이도의 얕은 정치적 수작은, 이헌의 이 미친 율법적 궤변과 병적인 순애 앞에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버렸다.쨍그랑-!이도의 손에서 거칠게 내던져진 백자 찻잔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뜨거운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경회루 연회장에 울려 퍼지던 풍악 소리가 일순간에 뚝 끊어졌다.“네, 네 이놈…… 진안!”용상에서 벌떡 일어난 이도의 전신이 분노로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과인이 친히 하사한 여인들을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어찌 감히 국왕인 내 앞에서 역적 가문 출신의 계집에게 마음이 종속되었다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이도의 사자후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은 연회장의 공기를 찢었다.도열해 있던 명문가의 여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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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정이 밤낮으로 정무에만 매달리며, 피를 토할 정도로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대조전의 가장 깊숙한 방. 국왕 이도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번져갔다.“예, 전하. 궐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에 의하면, 섭정 대감께서 그토록 아끼던 서상서의 여식이 대군저를 떠나려 하지 않자 심인성(心因性) 질환을 앓고 있다 하옵니다. 일에 미쳐 있는 것도 실연의 상처를 잊기 위한 발버둥이라 하더이다.”“실연이라…… 하하하!”이도는 용상의 팔걸이를 치며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병권을 강탈당하고 훈구파의 수족들이 모조리 도륙 나며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했던 그에게, 이헌의 심리적 약점은 하늘이 내린 유일한 동아줄이었다.“아무리 율법과 무력을 틀어쥐고 세상을 호령한다 한들, 결국 계집 하나 때문에 속을 끓이는 나약한 사내에 불과했구나.”이도의 동공에 탐욕스러운 빛이 일렁였다.섭정이 일에 미쳐 판단력이 흐려지고, 여인의 문제로 심리가 널뛰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의 빈틈을 파고들 가장 완벽한 적기였다.“도승지.”“예, 전하.”“당장 궐내에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라. 그리고 도성 내에서 가장 가문이 뼈대 있고 용모가 뛰어난 명문가의 여식들을 모조리 연회장으로 불러들여라.”이도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비릿하게 혀를 찼다.“섭정의 그 텅 빈 옆자리에, 과인이 친히 ‘위로’라는 명분으로 수족들을 꽂아 넣어주마. 내 첩자들이 섭정의 후실로 들어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이간질로 그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면…… 저 괴물의 권력도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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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역질 나는 세상 속에서, 오직 단 한 사람.그녀만이 이 더러운 섭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었다.자신이 완벽한 자유를 선언하고 거대한 부를 안겨주었음에도, 그녀는 결코 고개를 숙이거나 타협하지 않았다.자신을 향해 거짓으로 미소 짓지도 않았고, 권력에 기대어 안락을 구걸하지도 않았다.그녀는 그저 그 차가운 방 안에서, 살을 에는 듯한 고통과 자신의 존엄을 묵묵히 끌어안은 채 가장 무겁고 굳건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아가씨야말로……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결한 존재이십니다.’이헌의 흔들리던 눈동자에, 맹목적이고도 광적인 신앙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그녀의 그 끔찍한 침묵과 증오조차, 이제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의 완벽한 증거로 다가왔다.그녀가 자신을 혐오하여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마저도, 그녀가 이 더러운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하고 투명한 증명이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이헌은 겉옷을 걸칠 생각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겨울밤의 찬 바람이 살갗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지만, 그는 뼛속까지 시린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그의 무거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서연이 머무는 안채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외곽 담벼락 앞이었다.감히 처소 문앞까지 다가갈 용기조차 잃어버린 이헌은, 그저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담벼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거칠고 차가운 돌담의 감촉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타고 서늘하게 전해졌다.“…….”이헌은 돌담에 이마를 기댄 채, 느리고 처절한 숨을 내쉬었다.담장 너머의 어딘가에는 그녀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숨 쉬고 있을 터였다.‘이 얄팍하고 역겨운 세상의 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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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헌은 부러진 붓끝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그의 발밑으로는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결재하던 조세 장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뭐라 하였느냐.”이헌의 목소리가 바싹 메말라 갈라졌다.취선당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흑위대장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아, 아가씨께서…… 아직 안채에 머물고 계시옵니다.”“…….”“마차와 호위 무사들을 대령해두고 며칠을 기다렸으나, 처소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셨사옵니다. 식사도 거의 물리고 계시며…….”흑위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자가께서 툇마루에 남겨두고 오신 오동나무 상자 역시…… 처음 그 자리에 놓인 그대로, 단 한 번도 열어보지 않으신 채 방치되어 있사옵니다.”툭.이헌의 손에 쥐여 있던 부러진 붓대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그의 시야가 기괴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숨을 쉴 수가 없었다.자신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내며 그녀의 발밑에 바쳤던 그 완벽한 구원의 서류들을, 그녀가 뜯어보지도 않은 채 버려두었다고?“어찌…… 어째서.”이헌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서안을 부여잡았다.그의 핏발 선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흔들리며 극도의 혼란을 토해냈다.자신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계했다.원수들을 도륙 내고, 율법으로 무죄를 증명했으며, 그녀의 아버지가 머물던 그 화려한 옛 영지까지 원래의 모습보다 더 완벽하게 복원해 주었다.

  • 회귀한 대군의 후회   [135화] 베란다의 망령(1)

    취선당의 창호지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 여명이 스며들었으나, 집무실 안을 밝히는 촛불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이 장부는 틀렸다. 평안도에서 올라온 징세 내역과 호조의 재고가 정확히 오백 냥이 비어.”이헌의 서늘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텅 빈 집무실을 울렸다.“다시 계산해서 가져와. 그리고 평안도 관찰사에게 경고장을 띄워. 한 번만 더 이따위 구멍 뚫린 장부를 올리면, 그 즉시 직첩을 회수하고 옥에 가두겠다고.”“예…… 예! 섭정 대감!”호조 좌랑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장부를 빼앗아 들고 쫓기듯 뒷걸음질을 쳤다.그가 물러가자마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조 참의가 산더미 같은 판결문 다발을 이헌의 서안 위로 조심스레 밀어 올렸다.이헌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 서류들을 미친 듯이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살인 사건의 증거가 명백한데 형량이 고작 장형 삼십 대? 이따위 판결을 내린 고을 수령이 누구냐.”“그, 그것이…… 가해자가 양반가의 자제인지라, 수령이 관대한 율법을 적용한 듯하옵니다.”“관대?”이헌의 핏발 선 눈동자가 뱀처럼 흉흉하게 번뜩였다.“율법에 양반과 상놈의 잣대가 따로 있다고 궐에서 가르치더냐. 당장 그 수령을 파직하고, 가해자는 대명률에 따라 참수형에 처해라.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관대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면, 네놈의 목부터 칠 것이다.”“명, 명심하겠사옵니다!”대신들이 숨을 죽인 채 벌벌 떨며 물러났다.서연의 처소 앞에 사면 복권 서류를 남겨두고 돌아선 그 밤 이후.이헌은 말 그대로 국정에

  • 회귀한 대군의 후회   [134화] 묵언(黙言)의 이별(1)

    “……아가씨.”이헌의 입술 사이로 형편없이 억눌린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방 안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완벽한 침묵.하지만 이헌은 그녀가 숨을 죽인 채, 문밖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그는 덜덜 떨리는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꽉 쥐었다.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지금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십 년 전, 당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자들.”이헌은 가쁜 숨을 삼키며, 자신이 이 밤을 위해 짐승처럼 질주하며 이뤄낸 핏빛 결과물들을 하나하나 읊조리기 시작했다.“우의정 김윤합과 훈구파의 수족들, 그리고 지방에서 백성의 피를 빨던 토호들까지. 그 원수들의 목은…… 모두 율법으로 완벽하게 끊어놓았습니다.”“…….”“조정의 만조백관이 엎드려 아가씨 가문의 무죄를 보증하는 수결을 하였고, 국왕의 옥새가 찍힌 사면 복권 교서가 반포되었습니다. 잃어버리셨던 가문의 명예와 터전은, 과거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번듯하게…… 완벽히 되돌려 놓았습니다.”이헌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오동나무 상자로 향했다.이 상자 안에 든 서류 한 장 한 장이, 그가 피를 토하며 엮어낸 구원의 방패였다.이제 이 서류만 있으면 그녀는 더 이상 천민이 아니었다. 누구도 감히 그녀를 노비라 멸시할 수 없는, 조선 최고의 양반가 영애로서의 삶이 온전하게 준비되어 있었다.&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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