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에 갇혀있는 며칠 동안 강서희는 계속 강이한만 찾았다.“오빠를 만나게 해주세요.”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했다.“지금 모든 증거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이러셔도 소용이 없습니다.”“오빠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강서희는 모든 증거가 입증이 되었다는 경찰의 말을 듣는 순간 며칠간의 고생이 수포가 된 것 같았다.몇 년 동안 그녀가 아무런 나쁜 짓을 해도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았다.게다가 이유영이 살아있던 동안 강서희가 그녀를 아무리 괴롭혀도 다들 모른척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편이 되어주던 사람들이 자기를 심문하기 시작하고 엄마와 오빠까지 보러 오지 않자, 강서희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런 적 없어요, 전 아니에요!”총명한 강서희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구해주기 전까지 모든 질문에 부인만 한다면 쉽게 나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서희 씨, 저희가 묻는 건...”“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강서희는 계속되는 추궁에 소리쳤다.그녀는 강씨 집안 사람들이 지금은 화가 나서 모른척한다고 해도 화가 가라앉으면 자기를 구치소에서 빼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하지만 그녀의 모든 일에 같이 참여한 한지음이 수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고 빠져나가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기다림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강서희는 자기가 며칠 동안 구치소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도 몰랐다.전에 이유영이 구치소에 들어왔을 때 확실한 증거가 있었음에도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와줬지만, 강서희가 들어온 지 보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보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강씨 집안 사람들이 날 도와줄까?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을까?’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감을 잃어갔고 점점 절망감만 쌓여갔다. 드디어!보름 후, 누군가가 강서희를 만나러 구치소로 왔다.그녀는 강이한이 자기를 용서하러 온 줄 알고 기대감에 접견실로 향했지만, 마주한 사람은 강이한도 진여욱도
강서희가 진영숙에게 묻자 왕숙이 언짢아졌다.진영숙만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그녀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부인께서 요즘 바쁘십니다.""오빠는요?"강서희가 차갑게 웃었다.이 웃음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인지, 그녀가 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조롱하는 것인지 몰랐다.'바쁘다니, 뭐가 바쁘다는 말인가. 그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인가?'왕숙은 강서희를 보고는 억눌린 어조로 말했다."도련님의 상태도 요즘 걱정됩니다.""우리 오빠가 왜요?"강이한의 상태가 걱정이라는 말에 강서희의 말투가 긴장되기 시작했다.그녀는 정말 자신과 함께 자란 이 오빠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강씨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든 그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강이한이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듣기만 하면 그녀는 걱정됐다.강서희가 강이한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왕숙은 가뜩이나 답답했던 마음이 더욱 화가 났다."그들이 어떻게 아가씨를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그야말로 강씨 가문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이었다.왕숙은 분노로 가득 찼다."……""부인께서는 요즘 회사 일로 바쁘십니다. 도련님, 도련님은..."강이한 얘기가 나오자 왕숙이 굳었다.강서희는 인내심이 없어서 계속 기다릴 수 없었다."말해봐요."왕숙은 그녀가 그동안 외부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강서희가 가장 듣고 싶은 소식은 의심할 것 없이 강이한의 소식이었다.왕숙은 그녀를 쳐다보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그 여자가 죽었습니다."그 여자가 죽었어, 죽었다는 건 강서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왕숙, 지금 무슨 뜻이지?'"도련님은 매일 그 여자의 유골함을 가지고 홍문동에 가셔서 문도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회사도 상관하지 않습니다.""…""부인은 지금 바빠서 아가씨를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가씨도 강씨 집안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가족으로 지냈는데 어떻게 아가씨를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왕숙은 말할수록 화가 났다.이번에 강서희를 데려왔을 때,
왕숙이 나갔다.강서희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정신이 아찔했고 온통 머릿속은 홍문동의 모든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미치도록 이유영을 질투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죽은 사람을 질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질투했다."하하, 졌어.”자신을 조롱하며 웃다 보니 눈물까지 나왔다.'어쩐지 요즘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더라니. 가장 신경 쓰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지.'진영숙의 사랑은 항상 이기적이었고 그녀를 입양하더라도 그녀를 무시했고 잘해준 것도 그녀가 예뻐서, 이용할 가치가 있어서였다.지금 그녀는 여기에 갇혀 계속 나갈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그녀의 악명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렇게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은 진영숙에게도 사용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었다.그러면 강이한은... 그녀의 모든 희망은 그에게 있지만 지금 그녀의 모든 희망도 그로 인해 깨졌다.그녀는 정말 졌다. 다시 재판하게 되었을 때, 강서희가 말했다."저, 한지음을 만나겠어요.”결국 말을 바꿨다. 전에는 항상 강이한과 진영숙을 만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한지음을 만나겠다고 했다.이 말을 할 때, 그녀는 마치 천지가 뒤집힌 후 모든 것이 평온해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감정도 예전만큼 격해지지 않았다.상대방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마침내 그녀의 요구를 만족시켰다.두 시간 후, 한지음이 왔다. 응접실에 있던 그녀는 미심쩍은 듯 손으로 부채질을 했고 보이지 않아도 강서희의 낭패를 볼 수 있었다.강서희는 그녀의 이런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는지 신경이 흐트러졌다.그녀는 지금 이렇게 낭패한 데 반대로 한지음을 보면...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한지음을 처음 보았다.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깨끗하고 거룩해서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모습을 보면 측은함을 금할 수 없었다.'지금 그 깨끗한 모습으로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웃기네!'"말해봐, 대체 어떻게 한 거야!"강서희가 흰 천을 두 눈에 뒤집어쓴 한지음을 보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그녀는 강
"한지음!""만약 네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나를 찾는 거라면 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우리의 시간을 지체할 뿐이야.”"분명히 너도 참여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모른 척 할 수 있지? 너만 깨끗한 척! 배후에 분명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해!”강서희는 무조건이라는 듯이 말했다.'그래, 한지음의 배후에는 분명 누군가가 있어.'눈앞의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한때 자신과 협력했을 때, 그녀는 이 여자가 자기를 통해 강이한의 곁에 붙어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차근차근 자신을 대신하고, 자신을 뛰어넘어 이유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모두 대신해 강이한의 곁을 지키게 됐다. 자기가 업신여기고 이용당했다고 생각했던 그 여자가 말이다.강서희는 한지음을 보고 너무 놀랐다. 특히 그녀의 입가의 야릇한 미소를 보고 말이다."너..."강서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무슨 말을 하려다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한지음을 만난 목적도 잊었다.힌지음이 일어나 손을 뻗어 흰색 치마를 정리했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우아해 보였다.이 우아함은 마치 한때 높은 위치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만 같았다.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비열해 보이지 않았다.특히 그녀의 숨김없는 우아함은 마치 일부러 인정하듯이, 전에 그녀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한지음, 너 이래서는 좋은 결말이 없을 거야!"좀 지나서야 강서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모든 사람을 속인 건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 거지?'강서희가 기만, 분노, 원한을 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한지음의 목적을 간파하지 못했다. 단지 이 여인이 이렇게 무섭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이유영을 그렇게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다.지금 강이한 곁에 있는 건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된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모든 것이 강서희를 둘러싸고 있어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나는 눈이 먼 사람일 뿐이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한지음은 더듬거리며 안에서 나왔다.밖에 나가자 접대받았다. 강이한이 옆에 배치해 준 사람이었다. 유씨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한지음을 부축하여 차에 태우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도련님께서 방금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했습니다."그 말을 듣자 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마음속의 공포가 머리 위로 치솟아 한지음을 부들부들 떨게 했다."어디요?"한지음이 차갑게 물었다."하울 승마장입니다."그녀는 원래 창백한 얼굴인데 안색이 더욱이 하얘지고 호흡마저 원활하지 않아졌다."지금 강이한이 청하시에 있는데, 괜찮겠습니까?"그녀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유씨 아주머니의 안색이 변했고 그녀의 눈빛에 음험함이 스쳤다. 한지음도 느꼈다.그래서 유씨 아주머니가 입을 열기도 전에 대답했다."가요."...강이한이 미쳤다.그는 진영숙의 눈에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가 유골함을 가지고 홍문동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소문이 나지 않게 막았다.하지만, 그래도 소식은 밖으로 새나갔고 청하시 전체가 떠들썩했다. 강씨 집안의 양녀가 강이한의 아내를 악랄하게 괴롭혔다고 말이다.또한 강서희와 강이한에 대한 불륜설도 시끌벅적한 모습으로 청하시를 뒤흔들었다.진영숙은 이런 소식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강이한은 줄곧 홍문동에 있었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지금 회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나 해?"진영숙은 소파에 앉아 있는 강이한을 안절부절못하며 쳐다봤다.그는 밤낮으로 그 작은 유골함을 안고 온 세상을 품은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은 회사가 발칵 뒤집혔고 여론이 들끓으면서 회사 주식도 덩달아 하락하고 있었다.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강이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수년간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고 지금 처리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다들 강이한이 정신을 좀 차리길 바랐다.그러나 강이한은 퇴폐적이었다.그는 기다리는 것 같았다."이대로 가다간 동쪽 교외의 일이 언젠가는 너에게 돌아갈 거야. 당신은 그것이 무슨 결과인지
"정말 미쳤구나!”그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진영숙의 광기에 직면한 강이한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이면서 조용히 말했다."이 결과를 난 받아들일 거야."이유영은 연속 두 번의 인생에서 모두 불타는 고통을 겪었다. 전생에 그가 그녀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그녀는 모든 감각을 잃었고 의사가 그녀가 살아 있다고 말한 것 외에는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그는 매일 그녀와 마주 보며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면서 그는 그녀가 깨어나기를 매일 기다렸다. 그는 그녀를 위해 최고의 성형외과 의사까지 찾았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 고통을 받는 게 마음이 아파서 수술하지 않았고 그녀가 새로운 고통을 겪지 않는 한평생 그녀를 지켜주어도 좋다는 생각까지 했다.심지어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깨어나서 자신이 못생겨진 얼굴을 보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살아 있는 한, 그는 그녀의 곁을 평생 지켰지만 결국 악몽이 찾아왔다.식물인간인 그녀는 간암 말기에 걸렸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그녀는 떠났다. 고통을 맛보게 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영원히 그녀와 함께할 기회조차 없어져 버렸다.하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이 생에서 그가 그녀에게 한 짓이 더 개망나니라는 것을. 여기서마저도 그녀로 하여금 '강이한'이라고 불리는 고통을 받게 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그는 그녀의 악몽이었고, 그도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었다.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준 모든 고통을 감수할 것이었다. 한때 그가 그녀에게 했던 것들을 이젠 그가 모두 감수할 차례였다.심지어 그녀보다 더 아플 수도 있었다.진영숙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너, 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니?"'미쳤어, 진짜 미쳤어! 그동안 상관하지 않았던 게 그 사람들이 자기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야? 지금 그 대가를 치르겠다
마지막 고비에 이르러서도 그녀는 여전히 한지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인정하면 가장 무거운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그녀도 한지음을 끌어들이려고 했다.하지만 강서희를 실망하게 한 것은 그녀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강이한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그러던 중 왕숙이 그녀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려다 실패했다. 그녀는, 그녀가 온갖 나쁜 짓을 했기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다만, 그녀의 모든 죄가 정해질 때까지도 강이한은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강서희는 감옥에 가기 전, 왕숙이 그녀를 보러 갔을 때, 왕숙에게 말했다. 강이한에게 한지음을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말이다."당신은 아직도 도련님을 생각하고 있지만 도련님의 마음은 계속 그 죽은 사람에게 있습니다.""아주머니,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강서희 말투에는 전에 없던 침울함이 섞여 있었다.예전에는 이런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지금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단지 자신과 강이한의 사이에 대해서 체념했을 뿐이었다.그녀가 노심초사해도 얻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 것이 아니면 강요하지 말라는 말만 얻었다. 한때 강서희는 운명을 가장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운명을 받아들였다.이번에 그녀는 정말 철저하게 운명을 인정했다. 철두철미하게 운명에 따랐다."아가씨."왕숙은 울면서 강서희를 보았다.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강서희의 눈빛을 본 그녀는 입가까지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그래도 강이한의 근황에 대해서 말했다."도련님도 아마 일을 겪으실 겁니다.""네?""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밝혀내었는데 모든 화살은 도련님을 향했습니다.""…""그게 사실이라면 도련님도 아가씨와 같은 결과가 될 것입니다!"강서희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새하얘진 얼굴로 왕숙을 쳐다보았다.동공이 수축했고 눈동자가 멍해졌다.'오빠도 나와 같은 결과에 직면한다고? 아니, 안 돼.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정말 모든 것이 밝혀졌고 모든 것이 강이한을 향하고 있었다.강서희의 이유영에 대한 괴롭힘, 강이한은 이유영을 지독하게 대했던 것까지, 모든 것이 뒤엉키고 강씨 집안의 스캔들이 일파만파로 밝혀지며 숨을 곳이 없는 듯 들통나 청하시를 놀라게 했다. 나아가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진영숙이 홍문동에 도착했을 때, 왕숙이 있었고 강이한은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아뇨, 이건 제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강이한의 말이 들려올 뿐이었다. 진영숙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고 초조해했다.강이한은 그냥 전화를 끊었다.왕숙과 진영숙은 일제히 앞으로 걸어갔다. 진영숙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왕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그분은...”"꺼져!"왕숙은 방금 강서희의 말을 강이한에게 전했는데 꺼지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진영숙은 왕숙이 강이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고 알 만큼 인내심이 없었다."이한아, 빨리 가!”이제 그 증거들이 조사되기 시작했고, 진영숙은 정말 걱정이 컸다. 강이한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진영숙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말했다."듣긴 했어?”더 이상 가지 않으면 못 갈 것 같았다.설마 정말 들어가서 이유영이 겪었던 고생을 감수하겠다는 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 두 달도 아닌데. 수단을 써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게다가 현재 강이한의 태도를 보면 끌려가면 평생 살수도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이정과 이시국이 왔다."이한아."진영숙은 부탁하듯 강이한을 바라보며 그가 빨리 떠나기를 바랐다.아들이 이런 최후를 맞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는 없었다."집사님.”"예, 도련님.”"사모님,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한아.""마님, 도련님은 지금 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십시오."집사님이 공손히 말씀하셨다.그의 걱정에 비해 한결같은 강이한의
“박연준, 네가 강이한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고 또 이제는 강이한 어머니까지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난 여태 몰랐네.”그 말은 날 선 조롱처럼 들렸다.동시에, 과거 강이한과 박연준의 사이가 이유영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되새기게 했다.그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유영의 냉정한 말에 박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다른 일 있어서 먼저 끊을게.”이유여은 박연준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사랑이란 그저 우스운 감정에 불과했다.차는 천천히 백산 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지혁 씨.”“네.”“지혁 씨는 사랑해 본 적 있어요?”이유영은 지혁을 향해 불쑥 물었다.예전의 이유영은 사랑이란 존재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군가를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토록 반짝이던 사랑이란 단어 뒤편에 어떤 진실이 숨어 있었는지 이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의 말을 들은 지혁은 묵묵히 앞을 응시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핸들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이유영은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쾅!”그 순간, 갑작스러운 충격음과 함께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이유영은 아픈 이마를 짚고 있었고 지혁은 차에서 내려 사고 처리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 문이 열렸다.“아가씨.”지혁이 이유영 앞에 공손하게 나타났다.“무슨 일이에요?”“셋째 도련님 차입니다.”“...”그 말을 듣고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자꾸 나타나는 셋째 도련님의 존재에 우연한 사고인지 아니면 이미 계획된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이유영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어떻게 된 거예요?”“셋째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이유영은 이 전설 속의 셋째 도련님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엔데스 가문과 정씨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밖에서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유영은 몰랐다. 그 아이가 결국 진영숙이 데려온 의사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은.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아!”분노가 치밀수록 이유영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진영숙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놔, 놔 이 미친년아! 악!”“짝!”이유영의 손바닥이 진영숙의 뺨을 후려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말릴 용기를 잃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유영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다시 한번 움찔하고 말았다.이유영의 행동에 소리 내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숨을 삼켰다. 진영숙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결국 이유영은 진영숙을 놓아주며 말했다.“주제 파악하라는 의미에서 그랬어요. 당신은 할머니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에요.”그렇다. 진영숙은 할머니가 될 자격이 없었기에 이유영도 그녀를 아무 감정 없이 내던질 수 있었다.진영숙의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머릿속이 멍해진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 사이 이유영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저년이 감히...”감히 뭐라고?예전엔 강이한 곁에서 순한 토끼처럼 보호받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유영이 밖으로 나왔을 때,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감쌌다.그 순간, 가슴속의 억눌린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지혁은 이유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용준을 밀쳐내고 앞으로 다가왔다.“아가씨.”“가요.”용준은 여전히 당당한 이유영의 모습을 보며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이유영의 휴대폰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은 이유영의 모습은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여보세요.”“어디야?”“풍산.”“유영아...”전화 너머의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박연준은 지금 이유영이 강씨 집안을 어떤 태도로 맞서고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강씨 집안에서 강이한이 곁에 없는 동안에는 진영숙의 말에 고스란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홍문동으로 이사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진영숙이 찾아오면 이유영은 그녀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고 감히 그녀의 말에 거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도대체 언제부터일까?’아마 강이한과의 이혼을 결심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부터 이유영은 진영숙의 말에 더 이상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그땐 고작 진영숙의 지시를 어기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감히 나한테 손을 대?”한참 뒤에야 겨우 말을 꺼낸 진영숙이 이유영을 노려보았다. 눈빛에는 이빨을 드러낸 짐승 같은 기세가 실려 있었다.이유영은 고작 이런 걸로 화를 내는 진영숙이 가소로웠다.이유영은 아직 다 마시지 않은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을 들고 망설임도 없이 진영숙의 얼굴에 뿌렸다.“앗!”진영숙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손을 댄다는 건 이런 거예요.”이유영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영숙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퍽!”손에 들고 있던 잔이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산산조각 났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예전의 풍산 사람들이 기억하던 이유영은 언제나 조용하고 온순한 여인이었다. 누가 감히 지금 이유영의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분노로 찬 이유영은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진영숙 역시 이유영을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예전에도 이유영에게 자주 화가 났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었다.진영숙은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유영은 격하게 숨을 들이마신 진영숙을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다시 백산 별장에 가거나 우리 가족 근처에 얼씬거리면 그땐 당신 진짜 가만 안 둬.”그 마지막 한마디는 징벌처럼 무겁고 섬뜩할 만큼 냉정했다.월이는 이유영의 세상 전부이자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힘들게 월이를 낳으면서 강씨 가문은 이 아이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아
끊임없이 박연준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던 강이한의 모습을 이유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두 사람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사이였다.늘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고 그 모습을 본 이유영도 두 사람 사이에 과거의 악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악연이 한 여자 때문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 여자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모든 게 이토록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영만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그 7년 동안 강이한은 얼마나 다정했던가?그 친절함 속에 실은 다른 여인을 향한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유영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박연준은 강이한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었다.이건 과거의 이유영이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다시 실감하고 있었다.“어쨌든 강이한 씨의 어머니잖아요.”조금 전 용준이 한 말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마치 우스운 농담을 듣는 듯했다.“형님이 돌아오신 후에 처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용준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이유영을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이유영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진영숙이 월이를 데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분노는 가슴 깊이 타오르고 있었다.“지혁 씨.”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지혁은 그녀의 뒤에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네, 아가씨.”“전 들어가야겠어요.”이유영이 내뱉은 짧은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용준은 지금까지 이유영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 냉혹함에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네!”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은 곧장 앞으로 다가섰다. 분위기는 마치 폭발할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이유영은 어지럽게 엉킨 현장을 냉정히 바라보며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용준은 지혁을 막으려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