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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아주 느린 귀환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1 07:41:32

비행기 바퀴가 파리 샤를드골 공항의 활주로에 닿는 순간,

이현은 창밖으로 어스름이 번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은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고, 창유리에 내려앉은 습기는 그의 이마에 맺힌 조용한 불안을 닮아 있었다.

공항에서 나서는 길,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도착했어요'라는 단 한 줄을 쓰기까지 몇 번이고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결국, 그 메시지는 보내지지 않았다.

‘그냥, 가야겠다.’

이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가 머무는 거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유리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해는 어느새 완전히 져 있었고,

길 아래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대화 소리와 지나가는 자동차의 타이어 소리,

가끔 들려오는 트램의 종소리만이 그녀의 귀에 맴돌았다.

그녀는 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지만 한참 전부터 식어 있었고,

그 안의 홍차는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문이 울렸다.

그 순간, 유리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숨을 들이쉬며 그 울림의 정체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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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2.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는 공간

    파리의 겨울은 낮이 짧았다.오후 네 시가 채 되기 전,가게 안은 벌써 희미한 어둠의 기척에 잠식되기 시작했다.유리는 창가에 놓인 조명을 하나씩 켜며 조용히 하루를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늘도 말없이 일했다.그 조용함 속에는 이젠 예전처럼 고립이나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대신, 온기가 담겨 있었다.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이현은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는 서류를 정리하며 가게 한쪽에서 들려오는 유리의 조리도구 소리, 뜨거운 물이 흐르는 소리,천천히 부서지는 수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그 모든 소리는 그에게 음악이었다.요란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더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그날 밤. 유리는 퇴근 준비를 마친 뒤, 주방의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거기엔 이현이 모르게 붙여둔 작은 메모지 하나가 숨어 있었다.‘오늘의 소스 맛… 참 좋았어요. 첫입보다 마지막이 더 깊어졌어요. 당신 마음처럼요. 이현’그녀는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작게 숨을 내쉬었다.자신이 얼마나 조용히 그리고 서툴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기에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그녀에겐 너무 큰 위로였다.그녀는 다음 날, 가게 문을 닫은 뒤 커피 머신 위에 종이 쪽지 하나를 조심스레 올려두었다.‘당신이 있는 공간에선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요. 그게 참… 좋네요. - 유리’그다음 날. 이현은 그 쪽지를 발견한 순간 마치 작은 숨결 하나가 가슴에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무언가,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조용히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그날 밤, 그는 식탁 위에 다 마신 찻잔 옆에 또 다른 메모를 올려놓았다.‘당신은 말이 없을 때 가장 큰 말을 해요. 그게 나한텐… 늘 조용한 고백 같아요. - 이현’그 후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말보다 쪽지로 더 많은 것을 나눴다.그들의 문장은 짧았지만, 그 속엔 아주 깊은 신뢰와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오늘 창문 너머로 보인 구름, 당신 생각났어요. 묘하게 따뜻하고, 깊었거든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1. 우리만을 위한 우유 한 잔

    하루 전, 눈이 가볍게 내려앉은 새벽의 파리 골목은 모든 것이 한 톤 낮아진 색으로 번져 있었다.간판 앞의 철제 난간 위에도, 가게 유리창 가장자리에도 작은 흰 점들이 조용히 내려와 앉았다.유리는 그 창문 안에서 혼자 조용히 의자에 앉아 그날 쓸 메뉴를 한 글자씩 적고 있었다.‘오늘은… 그냥 나를 믿고 해보자.’분홍빛 분필로 칠판에 글자를 남길 때,손이 살짝 떨렸지만 그 떨림마저도 그녀는 숨기지 않았다.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손끝에 담긴 두려움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가게 오픈까지는 아직 한 시간도 남아 있었지만 이현은 벌써부터 가게 안에 있었다.그는 벽 한쪽을 닦고, 커피 머신의 물을 확인하고, 작은 조명 하나하나에 불을 켰다.“이현 씨. 괜찮아요. 이거 다 혼자 해도 되는데…”유리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옆에 있고 싶어요. 오늘은 특히 더.”그 말에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그녀는 이제 알 수 있었다.이현이 하는 말은, 표현이 서툴러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이라는 걸.첫 손님이 들어오기 전, 가게는 마치 숨을 참고 있는 공간처럼 고요했다.이현은 주방 쪽 의자에 앉아 유리가 마무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그녀는 오늘을 위해 하나하나 직접 만든 테이블 매트와 작은 생화 한 송이를 모든 테이블에 올려두고 있었다.작은 꽃병마다 다른 꽃이 꽂혀 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계절의 냄새들이었다.라벤더, 로즈메리, 마가렛. 이현은 묻지 않았다.그녀가 왜 그 꽃들을 골랐는지. 왜 저 자리에 놓았는지.그저, 그녀가 이 공간을 천천히 자신의 온기로 덮어가는 그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싶었다.오전 열한 시, 첫 손님이 문을 열었다.그것은 우연히 지나가던 중년 부부였고, 메뉴판도 보지 않은 채“안에 향기가 참 좋네요.”라는 말과 함께 가게 안에 앉았다.유리는 그들에게 하루 전날 준비했던 크레페롤과 따뜻한 사과차를 내놓았다.그 부부는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0. 당신의 온도

    파리의 겨울 아침은 유독 고요했다.창문 밖에는 어제보다 더 많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가게 안은 전날 정리한 상태 그대로 숨소리 하나 없이 잠들어 있었다.그러나 유리는 이른 새벽 혼자 조용히 가게 문을 열었다.그녀의 손엔 작은 장바구니와 몇 가지 메모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이현 씨를 위한 요리를 처음부터 끝까지…내 방식대로, 내 속도로 해보는 거야.”그녀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하얀 앞치마를 둘렀다.그리고 가게 안에 하나씩 조심스럽게 불을 켜기 시작했다.그날 그녀가 고른 요리는'콘소메에 담긴 치킨 크레페롤'.뜨겁지 않게, 하지만 따뜻하게 감싸는 맑고 깊은 맛의 국물 속에 천천히 말아 올린 얇은 크레페와부드럽게 익힌 닭고기를 채워 넣은 섬세한 한 접시였다.닭고기는 미리 전날 소금과 허브에 재워두었고,크레페 반죽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달걀과 밀가루, 버터를 조심스레 섞어 만들어두었다.국물은 양파, 당근, 셀러리, 닭뼈를긴 시간 우린 후 몇 번의 거름망을 통과시켜 투명한 황금빛을 머금게 만들었다.그 모든 과정 속에서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손끝에 묻어나는 기억과마음의 온도를 천천히 덧입히듯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았다.점심이 가까워질 무렵,이현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조용히 열었다."유리 씨?"그의 목소리에 유리는 싱크대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예쁘게 차려 입지도 않았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날만큼은 어떤 날보다 따뜻해 보였다."조금 이르게 왔네요."그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그냥… 보고 싶어서요."이현도 조용히 웃었다.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앉아요. 오늘은 제가 만든 거, 그냥… 아무 말 없이 먹어봐요."그녀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하얀 접시 위에 콘소메 한 그릇이 조심스럽게 놓였다.그 안엔 바스라질 듯 부드러운 닭고기와얇게 말린 크레페 속에 담긴 정성이 고요한 국물 위에 조용히 안겨 있었다.이현은 아무 말 없이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59. 이 공간의 온도 같은 맛

    창밖에는 겨울 햇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유리의 손끝이 분주히 움직일 때마다,주방 안의 공기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 조금씩 배어들었다.하얀 양파를 얇게 썰고, 당근과 셀러리를 작은 주사위처럼 다듬고,올리브오일을 천천히 두른 팬 위에 재료를 하나씩 올려놓을 때마다기억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조용히 되살아났다.“하…”유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기름이 뜨거워지며 튀어 오르는 소리,양파가 투명해지는 순간의 짙은 단내,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팬의 움직임을 살피는 습관까지.‘오랜만이다. 정말, 너무 오랜만이다.’그녀의 손은 여전히 유연했고, 무릎에 닿은 앞치마 천은 예전처럼 그녀를 안심시켰다.그 순간만큼은, 이방인의 도시 속에서도 그녀가 그녀다워지는 순간이었다.이현은 주방 한 켠에 서 있었다.유리가 요리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녀의 동작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표정은 한없이 차분해 보였지만,그 속에 스쳐 지나가는 긴장과 미세한 설렘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그녀가 오븐 문을 열고, 팬을 들고, 냄비의 뚜껑을 들어 올릴 때마다 이현은 가슴속 어딘가가 살짝 따뜻해졌다.무엇보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때“음, 이건 조금 덜 볶아졌네.”“여기 간은… 조금만 더.”이런 말들 속엔 그녀가 다시 자신을 회복하고 있다는 조용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드디어, 하얀 접시 위에 ‘그녀의 첫 요리’가 올려졌다.잘 익힌 닭다리살을 베이스로 감자퓨레와 올리브 타프나드,그리고 레몬 껍질을 갈아 넣은 간단한 샐러드가 곁들여져 있었다.이현은 식탁 의자에 앉았고, 유리는 조심스럽게 그 접시를 앞에 내려놓았다."첫 시식이에요. 아직 메뉴도 정해지지 않은 그냥... 감으로 만든 거예요."그녀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지만,그 말 끝에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기대가 숨겨져 있었다.이현은 포크를 들고 한 입을 조심스럽게 떴다.부드러운 닭고기, 살짝 새콤한 샐러드,그리고 감자 속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58. 내가 이 도시에 있는 이유

    그날 오후, 유리는 오래된 거리의 부동산 창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자그마한 가게 임대 안내가 붙어 있는 그 낡은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며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문이 삐걱거릴 것 같은 작은 입구,세 명이면 꽉 찰 듯한 조리 공간, 그리고 밖으로 작게 난 유리창.‘여기서, 시작할 수 있을까?’그녀의 손등이 코트 안에서 천천히 조여들었다.이현은 그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유리 씨, 여기 마음에 들어요?”그녀는 작게,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에 들어요. 지금 내 마음 같은 공간이에요. 작고 조용하고, 시간이 조금 멈춰 있는 것 같고.”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창문 너머로 함께 시선을 맞췄다.“그럼, 여기부터 시작해요.”유리는 그 말에 마침내 숨을 내쉬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리는 이현의 팔에 가만히 팔짱을 꼈다.조심스럽고도 따뜻한 손짓.그녀의 뺨에는 오랜만에 맑고 편안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이현은 그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어떤 장소도, 누군가의 꿈이 시작되는 곳이라면 충분히 의미가 있어.’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그 꿈의 한 자리에 자신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창문을 활짝 열어둔 좁은 가게 안에는 미세하게 떠오르는 먼지 입자들 위로 햇살이 길게 내려앉고 있었다.유리는 앞치마를 질끈 묶고, 벽 한쪽에 오래된 페인트 자국을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하얀색이었는지, 회색이었는지 모를 얼룩진 벽면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댈 때마다 시간의 결이 손끝에 스며드는 듯했다.페인트칠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그 아래에 눌려 있던 따뜻한 온기와 꿈의 흔적들은 그녀의 숨결에 따라 조금씩 되살아나는 중이었다."저 벽은 남겨둘 거예요?"이현이 가게 문턱에 기대서서 물었다.유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네. 지우지 않으려고요. 이 가게가 나보다 먼저 살아 있었던 시간이니까.그 시간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건 좀 미안하잖아요."그 말에 이현은 작게 웃었다. 유리는 그 답도 듣지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57. 한 사람의 자리

    그 말에 이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컵과 자신의 잔을 살며시 부딪쳤다.작고 조용한 ‘짠’ 소리. 그 속엔 ‘다시 시작하자’는 약속이 말보다 먼저 담겨 있었다.오후가 되자, 두 사람은 시장으로 향했다.파리의 동네 시장은 늘 그런 식이었다.물건보다 말이 많고, 속도보다 향기가 먼저였다.유리는 계절 채소를 고르며 한참을 머뭇였고,이현은 그녀가 고른 것을 조용히 옆에서 받아 들었다.“저녁엔 뭐 먹고 싶어요?”유리가 묻자 이현은 고개를 기울였다.“당신이 만든 것이라면 뭐든 괜찮아요.”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유리는 그 말 한 줄에 살짝 눈을 피했다.‘아직도… 완전히 그 말에 담긴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걸까?’이현은 그녀의 그 미묘한 동작을 알아채고도 묻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의 순서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저녁 무렵, 식탁엔 고소하게 구운 닭고기와 발사믹 소스를 살짝 얹은 샐러드,그리고 단호박 수프가 놓였다.간결하지만 정성이 담긴 식사였다.이현은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이 맛, 오랜만이에요. 단호박이 이렇게 따뜻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도 당신 덕이었는데.”유리는 수줍은 듯 웃었다.“당신은 항상 그렇게 말이 예뻐요.”이현은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그리고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잠자코 기다렸다.“…그런데 그 말들이 한동안 나한텐 부담이기도 했어요.”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당신이 너무 완벽하게 말해주니까, 내가 더 조심하게 되더라고요.내 감정이 엉켜 있는 게 당신한텐 실망이 될까 봐.”그 말은 그녀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듯한 아주 조심스러운 고백이었다.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기다릴게요.”그가 말했다.“내 마음이 당신을 앞질러서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그의 말은 깊은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빛 한 점 같았다.“나는 지금도 충분히 좋아요. 같은 공간에 있고,같은 식탁에 앉아 있고,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8. 요동치는 북소리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7. 무너지는 틈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6. 귀를 세운 마음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5. 오해의 미소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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