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봄비가 잦아들고, 서울의 나무 가지엔 여린 녹색이 피어나고 있었다.그날은 평일 오후였고, 유리는 가게 문을 닫은 채 가만히 주방 뒷문 앞에 앉아 있었다.가게 앞쪽은 햇살로 환했지만, 이곳은 그늘이 져 있어 조금 더 시원하고 조용했다.손에는 종이봉투 하나. 그 안엔 방금 받은 메모와 인쇄 견본 샘플이 들어 있었다.이현이 건넨 거였다.“잠깐, 시간 괜찮아요?”며칠 전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카페로 유리를 불렀다.한쪽 벽엔 손으로 쓴 글귀가 걸려 있고, 자그마한 테이블에는 갓 내린 커피와 작은 견과류 접시가 놓여 있었다.이현은 가방 안에서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를 꺼냈다.“이건… 회사 일은 아니고요. 내 개인 프로젝트예요.”유리는 서류를 바라봤다. ‘식탁 사이’라는 이름,그 아래엔 손글씨처럼 자연스러운 서체로 적힌 부제목.당신의 요리가 머무는 자리,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온기.“이거… 뭐예요?”“소규모 식음 브랜드예요. 대단한 건 아니고, 작은 팝업 행사랑 케이터링 중심으로 시작하려고 해요.”“이걸… 저한테 보여주는 이유는요?”이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당신 이름이 이 안에 들어갔으면 해서요. 브랜드명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주인이 당신이었으면 해서요.”유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왜요? 내가 왜요?”“이건, ‘같이 해보자’는 말보다 먼저인 감정이에요.”“그게… 무슨 말이에요?”“당신의 방식, 당신의 손끝,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내가 함께 있어도 괜찮을지 묻는 거예요.”유리는 한동안 서류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브랜드를 하겠다는 사람치고… 말이 참 조용하네요.”“조용한 방식밖에 몰라서 그래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속도예요.”그날, 유리는 명확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현의 말은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 오래 남았다.오늘, 그 말이 다시 떠올라 유리는 뒷문 앞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서류를 펼쳐보면 작은 시안들이 있었다.그 중 하나엔 이런 문장이 적혀
이른 아침, 식당 안엔 햇살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서이현.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와 작은 종이 가방을 조리대 옆에 내려놓았다.“아직 문도 안 열었는데요.”문 너머로 들어오는 유리의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약간 놀란 톤이었다.“그냥… 오늘은 내가 먼저 와보고 싶었어요.”유리는 앞치마를 매며 그를 바라봤다.“낯설어요. 이곳에 당신이 먼저 있는 거.”“괜찮아요? 방해 아니고…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웃었다.“도움이 되려면, 우선 앞치마부터 해야 해요.”그날은 식자재 정리일이었다.냉장고를 비우고, 새로 들어온 채소를 다듬고, 밀가루 봉지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일.이현은 처음엔 어설펐다.애호박을 다듬다 손끝에 물을 튀기고,무게를 몰라서 유리가 웃을 만큼 한 움큼씩 들어 올리기도 했다.“무 세 개면 2.4kg쯤 돼요. 그만큼 들고 땀 흘릴 필요 없어요.”“이게 운동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아요.”“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요. 오늘은 그저… 조용히 손만 빌려주면 돼요.”그렇게 두 사람은 주방 안에서 각자의 자리로 움직였다.유리는 칼을 들고, 이현은 수세미로 채소를 씻었다.말은 많지 않았지만 서로의 움직임은 조금씩 리듬을 맞춰갔다.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유리는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이따가… 반죽할 거예요. 들깨 수제비.”“먹는 건 자신 있어요.”“만드는 건요?”“자신 없는 만큼, 열심히 해볼게요.”유리는 밀가루를 큰 대야에 담고 물을 조금씩 섞으며 손으로 천천히 반죽했다.이현은 그녀 옆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이런 거, 어릴 때 엄마 옆에서 본 기억은 나요. 도와드릴게요.”유리는 잠시 그의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밀가루는 너무 세게 쥐면 거칠어져요. 손 안에 두고, 가볍게 구기듯이.”“그거… 사람 마음 다루는 거랑 비슷하네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웃었다.“맞아요. 조금은 덜 쥐고, 조금은 더 느슨하게.”두 사람의 손끝에서 반죽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 유리는 식당의 의자 배치를 정리하고 있었다.주방은 잠시 불을 꺼둔 채, 햇살만이 테이블 위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문득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한 통의 메시지. 이현이었다.-오늘은 저녁 약속이 생겼어요. 끝나면 연락할게요.짧고 단정한 문장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서로의 일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요즘이었고,연락의 공백에도 조급함은 없었다.하지만 그날 따라, 그 문장 어딘가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저녁 무렵. 유리는 오랜만에 혼자 외출했다.재래시장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찻집. 예전에 가끔 혼자 들렀던 곳이었다.그곳은 아직 그대로였다. 창문 옆 자리에 앉자 가게 주인이 다가와 익숙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이에요. 여전히 홍차, 맞죠?”유리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은 그 맛이 생각났어요.”따뜻한 찻잔이 놓이고, 그녀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길 건너, 우산을 든 연인들이 지나가고, 가게 안엔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유리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우린, 서로를 기다리는 데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서로를 잊는 데에도 익숙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그 생각은 마치 오래된 찻잔의 균열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조용히 퍼져나가는 감정이었다.밤이 깊어갈 무렵, 식당 문이 조용히 열렸다.비도 그쳤고, 공기는 한결 맑아져 있었다.이현이었다.그는 식당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유리는 주방에 있었고, 이현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늦었죠.”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응. 많이.”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현은 식탁 앞에 앉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유리를 바라봤다.그 침묵 속에서, 유리는 먼저 입을 열었다.“저녁 약속, 어땠어요?”“업무였어요. 식사 자리였고…그냥, 필요한 이야기들만 했어요.”유리는 국을 데우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자리가 당신한텐 익숙하죠.”“네. 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게 오늘은 좀 싫더라고요.”유리는
비가 내렸다.그리 거세지 않은, 봄비처럼 가벼운 빗방울이 천천히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유리는 아침부터 식당에 나와 반찬 몇 가지를 만들고 있었다.조용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이 흐르고, 주방의 조명이 따뜻하게 공간을 덮었다.앞치마를 조이고, 작은 국솥에 다시마와 멸치를 올린 그녀는 창밖을 한 번 바라봤다.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흐리게 퍼지고 있었다.오늘 같은 날은 무언가를 기다리게 만든다.아무 약속이 없어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예감.말보다 조용한 존재감 같은 것.점심시간이 막 끝날 무렵. 문이 조용히 열렸다.그 익숙한 문종 소리.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서이현이었다.회색 트렌치코트, 젖은 머리카락 끝, 손엔 작은 비닐 우산.그는 여전히 말없이 그 공간에 들어섰다.“혼자예요?”유리가 먼저 물었다.“네. 오늘은… 그냥 조용한 밥이 먹고 싶어서요.”그의 말에 유리는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그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따뜻한 국부터 줄게요. 그게 오늘엔 어울릴 것 같아서.”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이현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천천히 넘기고, 가끔 시선으로 유리의 움직임을 좇았다.그녀는 늘 같은 손길로 밥을 푸고, 반찬을 올리고, 가끔 라디오의 멜로디에 맞춰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이현은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문득 혼잣말처럼 말했다.“여긴… 오면 마음이 느려져요.”유리는 반찬 접시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느려지는 게 싫진 않아요?”“아니요. 요즘은 느린 게 더 필요한 시간이라서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비의 소리가 식당 안을 채웠다.이현은 국물을 천천히 마시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신은 어제 어땠어요?”유리는 묻지 않아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낯설 줄 알았는데… 그리 낯설지 않았어요.”“내 세상이요?”“응. 그 안에도, 내가 놓을 자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걸 초대한 사람이 당신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고요.”이현은 조용
이현은 책상 위 노트를 덮고 잠시 눈을 감았다.오전 회의가 길어지고, 브리핑이 이어졌지만 머릿속엔 다른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기억 속, 식당 한가운데 놓인 작은 테이블.국물 위로 피어오르던 수증기.그리고 그 건너편, 조심스레 웃던 유리의 얼굴.그건 어쩌면 그의 하루 중 가장 ‘느린 장면’이었고, 그래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이기도 했다.그는 곧장 메신저 창을 열었다.혹시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시간 괜찮을까요?당신 음식이 필요한 자리가 있어서요.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짧은 한 줄을 더 붙였다.일이지만, 마음은 초대예요.유리는 그 문자를 받자 한동안 손에 쥔 채 가만히 있었다.‘당신 음식이 필요한 자리’‘일이지만, 마음은 초대’그 말은 낯설고,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읽혔다.이현의 세상은 늘 정제된 자리였다.지분, 비율, 입장과 전략이 교차하는 세계.그곳은 유리의 감각과는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하지만 그 속에 ‘음식’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초대받는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그녀는 짧게 답장을 썼다.메뉴는 제가 정해도 되죠?당신 스타일로 말고, 제 방식으로.그리고 잠시 후, 이현의 답장이 왔다.당신 방식이면, 그걸로 충분해요.금요일 저녁. 행사는 한 갤러리 공간에서 열렸다.S그룹이 후원하는 문화 프로젝트. 초청 인사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낯설고 익숙한 이름들이 섞여 있었다.유리는 식재료 박스를 하나씩 옮기며 간이 주방을 정리했다.검은색 앞치마, 머리를 높이 묶은 단정한 모습.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그 공간 어딘가에 이현이 있었다.행사 총괄자로, 공식 인사로.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꾸만 주방 쪽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행사 내내 단 한 번도 직접 마주보지 않았다.대신, 서로의 시야 끝에서 조용히 존재를 확인하는 식이었다.첫 번째 플레이트는 작은 달걀찜 위에 얹은 감태와 깨.두 번째는 유자가 살짝 배인 무쌈 안에 가늘게 채 썬 소고기 조림.사람들은 조용히 먹고, 입 안에서
봄기운이 가볍게 깃든 오전.햇살은 식당 유리창을 조용히 통과했고,바닥 타일 위에 비친 빛무리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유리는 주방에서 된장을 풀며 작은 냄비를 앞에 두고 있었다.국물이 끓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벽시계를 바라봤다.11시 48분.점심 영업을 시작하기 직전,손님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전의 가장 고요한 시간.그때, 문이 열렸다. 가볍게 울리는 문종 소리에 유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곳엔 이현이 서 있었다.셔츠에 회색 재킷,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 하나.익숙한 듯, 그러나 여전히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자리, 있어요?”유리는 짧게 웃었다.“혼자 오셨어요?”“네. 오늘은… 혼자 먹고 싶어서요. 당신 밥을.”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창가가 따뜻해요. 거기 앉으세요.”이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그의 시선은 식당 안을 천천히 훑었다.정돈된 테이블, 항상 같은 자리에 놓인 수저통,그리고 주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유리의 옆모습.그 공간은 유리 그 자체였다.유리는 쟁반 위에 된장국, 밥, 두 가지 반찬을 담아 그의 앞에 조용히 놓았다.“오늘은 애호박이 아주 달아요.”“애호박… 기억하고 있네요.”“당신, 민트보다 애호박 좋아하잖아요.”이현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기억해줘서 고마워요.”“애호박 정도는… 잊을 수 없죠. 파리에서도 한 입 먹고, 혼자 감탄했잖아요.”“기억나요. 그땐… 당신이 웃는 걸 보느라 맛을 잘 느끼지도 못했어요.”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틈에 유리는 물컵을 놓으며 말했다.“오늘은, 맛을 천천히 음미하세요. 내 표정 말고.”그 말에 둘 다 짧게 웃었다.식사를 마치는 동안 이현은 말이 거의 없었다.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국을 마시고, 그저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걸 지켜보던 유리는 무심한 듯, 그러나 다정하게 물었다.“괜찮아요? 맛은?”이현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오늘처럼 천천히 밥 먹은 적, 언제였는지 모르겠어요.”“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