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051 - Chapter 1060

1062 Chapters

제1051화

현빈은 조수석 앞 수납함에서 초대장을 건네준 뒤,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있던 포장된 음식을 꺼내 들었다.“괜찮습니다. 제가 같이 올라갈게요.”“아니야, 아니야! 이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어. 괜히 바쁜데 시간 뺏으면 안 되지.”소진헌은 손사래를 쳤지만, 현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소를 지었다.“아닙니다. 이모부, 오늘은 시간 괜찮습니다.”소진헌은 결국 현빈에게 음식을 맡기고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현빈은 한참 말이 없었다.‘요즘 애가 좀... 어른스러워졌네.'소진헌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3층에 도착하자, 소진헌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현빈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어? 안 갔어?”현빈은 가볍게 웃으며 손에 든 스티로폼 상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잊을 뻔했네요. 외할머니가 차에 넣어주신 거예요. 과수원에서 딴 포도래요. 오늘 아침에 수확하셨는데, 정은이랑 같이 먹으라고 하셨어요.”소진헌은 순간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장모님 참 세심하시네... 괜히 너만 번거롭게 했네. 내가 들고 올걸.”현빈은 손을 살짝 뒤로 빼며 웃었다.“아니에요.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 올라가죠.”“그래, 그럼.”...7층에 도착해 소진헌이 열쇠로 문을 열었다.현빈은 기다리는 동안 살짝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재석 집을 힐끔 쳐다봤다.문이 열리자, 소진헌이 환하게 웃으며 현빈을 맞았다.“들어와, 들어와! 편하게 있어. 그냥 네 집이라 생각해!”“아빠, 다녀오셨어요. 나...”정은이 방에서 나와 인사했다. 그녀는 집에서 입는 편한 차림에, 머리는 집게 핀으로 대충 올려 묶어놓은 상태였다.그리고 툭툭 흘러내리는 잔머리들 사이로 살짝 붉어진 볼이 보였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느낌이었다.정은은 거실로 나와 현빈을 보자 깜짝 놀랐다.“오빠? 출장 갔다 왔어?”“응.”현빈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소진헌은 들고 있던 포장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고, 얼른 현빈이 들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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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2화

“현빈아? 현빈아!”“네?” 현빈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이모부, 무슨 말씀하셨어요?”“아니야, 별거 아니야. 이 차... 거의 식었네. 따뜻할 때 마셔야 제맛인데.”“죄송해요! 방금 생각이 좀 많아져서 잠깐 멍해졌네요.”현빈은 말하면서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먼저 향을 음미하고, 맛을 느끼며, 마지막엔 여운을 즐겼다.소진헌은 그런 현빈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어때?”“향이 맑고, 맛이 순하면서도 깊이가 있어요. 아주 좋은 모리화차예요.”소진헌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대단하구나!”두 사람은 차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현빈이 해외에서 겪은 일들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소진헌은 들을수록 흥미로워했지만, 현빈의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현빈의 시선은 줄곧 정은에게 머물러 있었다. 정은이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휴지를 집어 들고 입가를 꼼꼼히 닦았다.현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모부, 물이 식은 것 같아요. 이 온도로 세 번째 우림은 어렵겠네요.”소진헌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두 사람이 이야기에 빠져 있는 사이, 차가 이미 바닥났다는 것을.소진헌은 급히 주전자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내가 다시 끓여올게.”현빈이 말했다.“제가 할까요?”“아니야, 너는 여기 처음 왔는데, 손님한테 일을 시키면 되겠니? 그냥 앉아 있어. 내가 할게.”‘처음 온 건 아닌데...’소진헌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현빈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정은은 느닷없이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현빈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쳤다.정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오빠.”현빈은 정은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3개월 만이네.”“그러게요. 외할아버지 말로는 오빠가 해외에 갔다고 들었어요. 근처 나라들이 전쟁 중이라던데, 오빠가 있던 곳은 괜찮았어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 내가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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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3화

“현빈아,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쪽 근황 말이야. 오늘 아침 뉴스에서 보니까...”소진헌은 계속 신나서 말했다.현빈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다.그는 양쪽 소매의 커프스를 풀고, 몇 번이고 자세를 바꿨다.그러던 순간, 아래층에서 갑자기 고성이 들렸다. 조용한 밤, 좁은 골목에 울려 퍼진 목소리는 더욱 선명했다.“아니, 누구네 마이바흐야! 골목 입구에 주차한 사람 누구야?! 좋은 차 타면 다야? 여기 CCTV도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세워?”“작년엔 포르쉐, 그전엔 페라리더니, 올해는 마이바흐냐! 정말 대단하네, 이 동네 참...”“누구 건지 빨리 빼! 돈 많으면 좀 조용히 살지, 왜 교통 방해하고, 동네 꼴을 망쳐?!”“...”‘어...?’소진헌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문득 깨달은 듯 현빈을 바라봤다.“현빈아, 네 차야?”현빈은 자연스럽게 일어섰다.“죄송해요, 이모부.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아이고, 괜찮아, 어서 가봐, 운전 조심하고.”“네.”현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정은이한테 인사만 하고 갈게요...”소진헌은 급하게 손을 저었다.“아, 내가 부를게. 정은아! 네 오빠 간다! 나와서 인사해.”안에서 대답이 들렸다.“네! 금방 나갈게요!”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고 정은이 나왔다.“오빠, 내가 계단 입구까지 배웅할게요.”“그래.”집 앞에 도착하자, 정은이 걸음을 멈췄다.“오빠, 꼭 외할머니께 고맙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음식 정말 맛있었어요. 포도도 달았고요.”현빈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포도는 아직 안 먹었잖아?”“크흠! 미리 말하는 거죠. 어차피 달 거니까.”“달지 않았다면, 외할머니가 저한테 가져다주라고 하지 않으셨을 걸요?”“알겠어.”“오빠, 잘 가요. 운전 조심하고요.”정은은 손을 흔들었고, 현빈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현빈은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자, 온몸에 서늘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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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4화

정은이 말했다.“질투하지 말고, 세미나 얘기 좀 해봐요. 잘 진행됐어요?”[응, 괜찮아. 일단 숙소는 잡았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야.]“며칠 동안 있어야 해요?”재석이 답했다.[회의 일정은 총 3일이야. 마지막 날 저녁 비행기로 돌아갈 거니까, J시에는 아마... 밤 10시쯤 도착할 거야.]“엄청 빠듯하네요?”정은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다음 날 출발하면 좀 여유 있을 텐데...”[알지, 근데 네가 보고 싶으니까.]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 말 한마디에 묘한 설렘이 정은의 마음을 간지럽혔다.‘보고 싶으니까’라는 말이...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정은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재석이 다시 물었다.[너도 나 보고 싶어?]“네...”정은은 작게 대답했다.그때, 재석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누가 문을 두드리네. 잠깐만 기다려, 끊지 마.]말을 마친 재석은 핸드폰을 침대 위에 두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정은은 약간 들리는 말소리에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궁금해졌지만,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2분쯤 지났을까... 재석이 다시 화면 앞에 나타났다.[미안, 이제야 끝났어.]“누구예요?”이 시간에, 게다가 세미나는 내일부터 시작인데...재석이 답했다.[세미나 주최 측 직원이었어. 오늘 밤에 사전 만찬이 있다고, 참석해달라고 하더라.]재석은 이미 주최 측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답변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것이 의아했다.게다가 직접 방문까지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한 일인데 말이다.하지만 재석은 그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 후로도 십여 분을 더 이야기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던 중, 소진헌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정은아!”정은은 전화를 끊기로 했다.재석은 아쉬운 듯 말했다.[자, 내일 또 얘기해요. 뽀뽀!!]정은은 살짝 웃으며 전화를 끊고, 방에서 두 발짝 뛰어나가며 말했다.“아빠! 왜 불러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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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5화

“음, 맞아요.”오고산이 설명했다.“원래는 전진욱 교수가 오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조재석 교수가 대신 참석하게 됐어요.”“그런데 조재석 교수님은 왜 만찬에 안 오신 거예요?”오고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호텔로 사람을 보내서 모시러 갔는데, 다른 일이 있다고 했대요. 그래서 못 온다고 했다는데, 여기 자리도 일부러 비워놨건만...”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오고산의 왼편을 바라봤다. 커다란 원탁의 한쪽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리가 남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조재석 교수를 위한 자리였다.‘역시, 조재석 교수니까 가능한 일이겠지...’그때, 중년의 한 교수가 입을 열었다.“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 구 교수님도 서비대학교 출신 아니신가요?”사람들의 시선이 오고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성 교수에게 향했다. 그 자리에는 오늘 이 연회장에서 유일한 여성 교수인 구세영이 있었다.구세영의 젊고 맑은 얼굴은 연회장에 앉아 있는 나이 지긋한 교수들, 희미한 머리숱과 주름진 얼굴들 사이에서 유독 두드러졌다.“구 교수님, 국내에서 생명과학과 물리학의 융합연구를 이끄는 가장 젊은 교수님 아닌가요?”“내 기억이 맞다면, M국에 있는 노스캐롤라대학교를 졸업하셨죠?”구세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지금은 어느 학교에 계세요?”“전엔 에모래대학교에 있었어요.”“전에? 그럼 지금은요?”세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완전히 국내로 돌아오려고요. 아직 학교는 정하지 않았어요.”“구 교수님 같은 분이시라면, 국내 어느 대학이든 선택하실 수 있을 텐데요?”“장 교수님, 너무 과찬이세요. 여기 계신 분들이야말로 선배님들이신데, 제가 뭐라고요.”“아유, 겸손하시긴. 예전에 조재석 교수님이랑 ‘양대 산맥'으로 불릴 정도였잖아요. 그 실력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생명과학과 물리학의 융합연구까지 이끌고 계신 거고요.”오고산은 그 말을 듣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구 교수님, 혹시 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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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6화

“충분히 그럴 가능성 있다고 봐요! 구 교수님도 몇 년 동안 해외에서 연구하셨잖아요.”“조재석 교수님은요, 몇 년 전 한국에 돌아오시고 나서는 학문에만 집중하셨잖아요. 개인적인 문제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예전엔 그냥 바쁘신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바쁜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와, 조 교수님이 그런 순정파였나? 하하하...”사람들의 장난스러운 말들이 오가자, 세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리 해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명할수록 더 오해가 깊어지는 것 같았다.‘재석이가 그동안 날 기다렸다고?’‘그럴 리가...’세영은 고개를 저었고, 믿기 어려웠다. ‘그 무뚝뚝하고 목표 지향적이며, 오로지 학문과 연구에만 빠져 있던 재석이가?’‘재석이 같은 사람이면, 감정에 시간을 허비할 리가 없었을 거야.’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마음 한구석에 미세한 불씨처럼 남았다.‘만약에...?’‘혹시 내가 예외일지도 모르잖아...’‘혹시 재석이가 내가 준 선물 속에 숨겨진 고백을 발견할 걸까?’ ‘그걸 알고 기다려준 걸까?’‘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어린 시절의 짝사랑을 시간이 지나서야 확인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그럼... 그건 단순한 짝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좋아했던 거잖아...’‘...’“구 교수님, 조재석 교수님한테 전화 한번 해 보시는 게 어때요?”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세영의 생각이 뚝 끊겼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네...?”“전화해 보시라고요. 조재석 교수님 불러서 같이 식사하면 좋잖아요. 학회장님도 자리를 비워두셨는데, 안 오시면 아깝잖아요.”사람들의 응원과 웃음 속에서 세영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아니, 나도 궁금하긴 해. 지금 전화하면 어떻게 될지...’그녀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연락처 목록을 천천히 넘겼다.몇 번의 기기 교체와 번호 변경이 있었지만, 그 번호는 늘 세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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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7화

다음 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세미나의 첫날이었다.개회식이 끝나고 네 명의 특별 초청 연사가 발표를 시작했다. 그중 마지막 순서는 조재석이었다.앞서 발표한 세 명의 교수는 모두 업계에서 존경받는 원로들이었다. 세 사람의 발표가 끝나고, 무대에 오른 재석은 그야말로 시선을 사로잡았다.‘저 사람... 왜 저렇게 눈에 띄는 거야...’세영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재석의 키 큰 체격과 단정한 외모, 그저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시선을 집중시켰다. 게다가 재석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논리 정연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명확했고, 재석의 설명 속에는 깊은 통찰과 엄격한 학문적 표현이 담겨 있었다.재석은 대본 없이 청중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발표를 이어갔다. 흐트러짐 없는 시선과 자신감 있는 태도는 재석의 발표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발표가 끝난 뒤, 그는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와 청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발표를 마치겠습니다.”청중의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재석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무대를 내려와 1열에 앉았다.사실, 오늘 발표자는 세 명뿐이었다. 전진욱이 갑작스럽게 참석하지 못하게 되면서, 주최 측은 그 대안으로 조재석을 선택했다. 조재석 교수만큼 적합한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재석의 연구는 이미 학계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고, 그가 무대에 서면 모두가 그의 가치를 알아보았다.세영은 중앙에서도 뒤쪽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가려져, 재석의 뒷모습만 겨우 보였다.‘이게 내가 앞으로도 마주할 거리일까?’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영과 재석 사이의 그 거리만큼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오전 세션이 끝나고, 사람들은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조재석 같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만의 작은 모임이 있었다. 점심 식사조차도 학문적 논의와 네트워킹의 자리였다.한 연회장의 문 앞에서 재석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로 받은 방 번호를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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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8화

그 이름이 나오자, 재석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그 촛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작은 메시지도 함께.그러나 재석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듣고 보니... 약간 기억이 나네요.”사실이었다. 그 기억은 어렴풋했다.학부 시절, 재석의 모든 관심사는 오직 물리학이었다. 전공을 바꾸고, 물리학에 빠져 매일 같이 수업과 도서관을 오가며 책을 읽고 연구하던 나날들.같은 반에 누가 있었는지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가 세영을 기억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정은이 무심코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선물한 촛대 속에서 발견한 그 문장.그게 아니었으면, 아마 기억하지 못했을 터였다.그때, 세영이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조 교수, 오랜만이에요.”“네.”재석의 반응은 담담했다. 오히려 지나칠 만큼 차분했다.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뭐야, 이거 너무 시큰둥한 거 아니야?’‘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건 좀...’‘...’기대했던 ‘감격의 재회' 같은 건 전혀 없었다.그때, 주성만 교수가 서둘러 분위기를 바꿨다.“자, 자! 다들 왔으니까 이제 음식이나 먹읍시다!”뜨겁게 김이 나는 요리들이 하나둘씩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사람들은 다시 편안한 대화 속으로 돌아갔다.그 후로는 아무도 재석과 세영을 두고 농담하지 않았다.사람들도 눈치가 있었고, 재석의 반응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괜히 호기심에 농담을 이어갔다가 재석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다.그렇게 점심 식사는 무난하게, 그리고 조용히 마무리되었다....식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오후 세션을 위해 강연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강연장으로 가려면 작은 정원을 지나야 했다.재석은 다른 교수 한 명과 함께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조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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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9화

재석의 솔직한, 그리고 직설적인 말에 세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 말은 숨김이 없었다. 너무도 명확했고, 너무도 단호했다.‘저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가 있었을까?’세영은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재석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피어난 작은 기대와 설렘은, 싹이 트기도 전에 재석의 한마디에 처참히 잘려 나갔다. ‘이게 끝이구나.’세영의 혀끝에 쓴맛이 돌았다.“그렇군요...”재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고, 몇 걸음 앞에 있던 사람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부 교수님, 잠시만요.”“어? 조 교수? 점심 먹었어요?”“네, 먹었습니다. 그런데 부 교수님,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이쪽 방향은 강연장 쪽이 아닌데요.”부영식 교수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비볐다.“아, 저기 맞은편에 쇼핑몰이 있더라고요. 어제 지나가다가 봤는데 행사 중이래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길래, 애들하고 집사람 줄 선물 좀 사 가려고요.”재석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저도 같이 가겠습니다.”“네...?”부영식은 순간적으로 눈을 깜빡였다.“조 교수도요?”“네, 문제 있나요?”“아니, 문제라기보단... 좀 의외라서요. 조 교수는 특산품 같은 거 잘 안 사시잖아요?”부영식은 여러 차례 재석과 학회에 참석했었다. 신기한 물건이 많은 해외에서조차, 재석은 단 한 번도 선물 같은 걸 사 간 적이 없었다. 재석은 그 말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번엔 좀 달라요. 여자 친구에게 줄 거거든요.”“네? 뭐라고요?!”부영식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여자 친구가 생기셨다고요?!”“네.”재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아니, 언제요? 처음 듣는데요! 진짜예요? 농담 아니죠?”재석은 고개를 젓고 단호하게 말했다.“전 그런 걸로 농담하지 않습니다.”부영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죠, 잘했어요! 이제야 정착했네요. 드디어 혼자가 아니군요. 축하해요! 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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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0화

3일간의 세미나 일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마지막 날 저녁, 예정보다 길어진 세미나를 마무리하며 환영 만찬이 열렸다.세영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걸어 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중간중간 동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정중하게 웃으며 짧게 끊어냈다.세영이 찾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그러나 만찬장이 거의 다 찼을 때까지도, 세영이 찾는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주 교수님.”“어? 구 교수? 무슨 일이에요?”주성만 교수가 그녀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다들 오신 거죠? 유덕균 교수님이 안 보이시던데... 그리고 조재석 교수도요.”주성만 교수는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아, 유덕균 교수님은 오늘 오후 비행기로 일찍 떠나셨어요. 그래서 만찬에는 못 오셨고...”그는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했다.“조재석 교수는... 못 봤어요?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아마 잠깐 왔다가 갔거나, 방에 계시겠죠. 둘 중 하나일 거예요.”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만찬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시간, 세영은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씻고, 상쾌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자연스럽게 메이크업하고, 긴 머리를 풀어 내렸다.학회장에서의 냉철하고 차분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세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이제 가야지.’그녀는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 재석의 방 앞에 섰다.잠시 망설였지만, 곧 손을 들어 노크했다.“조 교수, 안에 있어요?”아무 대답도 없었다.세영은 한숨을 쉬고 다시 한번 말했다.“나, 구세영이에요.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여전히 조용했다.세영은 눈을 감았다가 떴고, 다시 한번 힘주어 노크했다.그때, 문이 살짝 열렸다.“어...?”세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밀어보자, 틈새가 더 넓어졌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그녀는 살짝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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