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351 - Chapter 360

542 Chapters

제351화

소우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왜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태자 저하이신 걸 잊으신 거예요?”“그럼 난 마땅히 관용을 베풀어야 했느냐?”소우연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의 책 속에서 이민수와 소우희는 언제나 남의 피와 눈물을 밟고 올라 정상에 선 인물들이었다. 관용과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감사해요, 부군.”소우희는 소우연의 가슴속 깊은 응어리였다. 이육진이 이번에 행한 일은 그녀를 대신해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준 셈이었다. 그녀가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다.“너와 나는 한 몸이다.”소우연이 전에 들려준 이야기나 꿈과는 상관없이, 평서왕 이남진과 그의 세자 이민수는 이미 5년 전에 이육진을 공격했던 이들이었다. 단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을 뿐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였다. 한 사람이 살려면 다른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찌 손을 놓고 자비를 베풀겠는가.한편 진규는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린 채, 소우희를 마차에 태워 그녀를 그대로 소 씨 가문 대문 앞에 내던졌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들은 이 광경에 크게 놀랐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여인은 가문의 둘째 아씨 소우희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고했다.“나리, 누군가가 문 앞에 다친 여인을 던져놓고 갔는데… 둘째 아씨와 많이 닮았습니다.”“뭐라 했느냐?!”막 차를 마시려던 소홍범은 깜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서재에 함께 있던 소현우와 소현준도 충격을 받았다.“우희가 돌아왔다고?”우림은 주저하며 다시 답했다.“틀림없이 둘째 아씨 같습니다만…”소홍범은 급히 밖으로 나갔고, 뒤따르던 두 아들 또한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대문 앞에는 이미 행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소홍범은 황급히 다가가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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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2화

의원은 급히 소우희의 몸을 치료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에서도 이름난 의원들이 찾아와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결국 모든 의원들의 결론은 하나였다.그렇게 소우희는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희야…!”임진숙은 가슴을 치며 죽을 듯이 울부짖었다.“희야…!”그때 밖에서 소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으로 들어섰다.늙은 나인이 소 노부인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소우희는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진흙덩이처럼 축 늘어진 몸을 보자 소 노부인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이게 어찌된 일이냐?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소 노부인의 분노 어린 외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홍범아, 반드시 우희의 원수를 갚아줘야 한다.”소홍범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무력함으로 가득했다.지금 소우희는 평춘왕을 살해하고 도망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분명 태자 짓이야! 그 요망한 소우연 짓이 틀림없어! 그 애가 나타난 이후로 우리 집안이 꼬이기 시작했어. 한준이는 다리를 잃고, 우희는 이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꼴이 되고 말았어!”임진숙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침상 위에서 그 말을 들은 소우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바로 소우연이 그랬어요! 소우연과 이육진, 그 두 사람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특히 이육진이 가장 증오스러웠다.그자는 어쩌면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는가? 자신을 구더기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다니!“보세요!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우연이야, 그 악독한 소우연이 우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요!”임진숙은 격하게 흐느꼈다.“그만해라! 소우연은 태자빈이다. 태자빈을 건드렸으니 이런 꼴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소홍범이 날카롭게 꾸짖자 임진숙은 흐느끼며 입을 다물었다.소현우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아버님, 과거 우리가 소우연에게 잘못한 건 맞습니다만,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그의 시선이 다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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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3화

소 노부인은 머리를 주무르고 다리를 문질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우희를 원망하고 있었다. 소우희가 모든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었다.그녀의 두통은 이제 더 이상 치료 약이 없었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가며 자신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자신은 죽어도 좋았지만, 소씨 가문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노부인은 울먹이며 소홍범을 불렀다.“홍범아, 잠시 밖으로 나오너라. 내 긴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소홍범은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소현우와 소현준에게 별채에 있는 소한준을 불러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임진숙은 침상 옆에서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두 손으로 소우희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댈 곳이 없었다.“어미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임진숙의 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했다. 이전에는 단지 소우연이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망가뜨리고, 또 그녀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마저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그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소우희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늘은 아령이 가져다준 약도 먹지 못한 탓에 온몸이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너무나 가렵고 고통스러웠다.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사지마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입에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긁어주고, 등이며 가슴이며 허벅지까지 긁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칠 듯이 근질거려 그녀는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임진숙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희야, 왜 그러니?”하지만 묻고 나서야 딸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한 채 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얘가 무얼 원하는 게냐?”나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녀도 모르겠습니다, 마님.”“손도 다리도 부러지고 혀까지 잘렸으니… 틀림없이 소우연 그 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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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4화

소씨 가문을 돌봐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그저 더 이상 소우연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 소씨 가문이 그나마 숨이라도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소홍범은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하겠습니다.”“그래.”소 노부인은 이제야 안심한 듯 보였지만, 곧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소홍범을 내보냈다.“어서 가서 아이들과 의논하거라.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네, 아들이 바로 가겠습니다.”소홍범은 예를 갖추고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 앞에 하인이 서 있었으나, 방 안에는 아들들이 보이지 않았다.“다들 어디 간 것이냐?”하인이 당황하며 답했다.“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요.”모른다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소홍범이 찾으러 나가려던 참에, 소현우가 소한준을 등에 업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셋째가 우희를 보고 싶다 하여 조금 늦었습니다.”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 이야기하자.”형의 등에 업힌 소한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소우희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거짓으로 모든 사람을 속이고, 결국 자신이 다리를 잃게 만든 사람이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자신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증오는 소우연과 태자 이육진을 향해 있었다.그렇게 서재에 부자 넷이 모이게 되었다.한동안 침묵이 방 안을 짓누르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결국 소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소우연이 우희를 저렇게 잔혹하게 짓밟았으니, 언젠가는 우리도 같은 꼴이 될 겁니다. 소우연 그 여자는 애초에 정이란 게 없는 여자예요. 그리고 이육진은 예전의 그 태자가 아닙니다. 다리를 다친 이후 성정이 난폭해져서, 세간에서 그를 염라대왕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홍범은 긴장한 얼굴로 밖을 흘끔거렸다. 누가 이 말을 듣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집안이고 밖을 지키는 사람도 믿을 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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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5화

세 아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신신당부를 한 뒤 소홍범은 소현우에게 소한준을 업고 돌아가라 지시했다.그리고 남아 있던 소현준을 향해 말했다.“둘째야, 이 집안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이 너뿐이다. 네가 나서서 우희한테 이런 짓을 한 자가 누구인지 한번 알아보거라.”소현준은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아버님께서 조금 전 태자부를 건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조사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우희는 현재 평춘왕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 아이를 장군부에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위험합니다.”소홍범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굳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필시 그들의 짓일 테니까요. 이 상황에서 소씨 가문을 지키려면 소우희를 내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을 테니까요.”“우희가 평춘왕을 죽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제가 어머니를 모셨던 나인을 불러 직접 물어봤습니다. 나인의 말에 따르면, 우희는 평춘왕부에서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답니다. 호위병들도 그 아이의 지시를 따랐다 하니, 우희는 결코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현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그런 우희를 여전히 감싸고 계신다면, 소우연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소현준은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늘 소우연이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깊은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소우연이었다면, 소우희와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았을까?당연히 미웠을 것이다!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가고,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받았다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버님, 소우연은 결코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우희를 내치는 겁니다. 차라리 밖에서 의원을 찾아 치료시키더라도, 더는 가문에서 보호하지 않는 편이 현명합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소우희의 죄가 결코 가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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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6화

소우연 집안이 모조리 멸문당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이민수는 고개를 돌려 무릎 꿇고 있는 아령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소우연을 흉내 낸 화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그저 의지할 곳 없는 가엾은 아이처럼 보였다.자신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불쌍한 존재 같았다.불쌍하다니.아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예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오늘 아령이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그는 눈빛을 바짝 세우며 경계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너 소우연을 많이 미워하는구나. 소씨 집안 사람들도. 그들이 멸문당하길 바라는 거냐?"아령은 숨이 턱 막힌 듯 입을 벌린 채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참을 머뭇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저는… 그저… 그들 때문에 세자 저하께서 이런 고초를 겪으신 것 같아서요. 그들이 저하를 망쳐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아령은 마치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몸을 한껏 낮추며,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민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려 했다.역시나 그녀의 그 약한 태도는 이민수의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렸다.그녀를 바라보며 이민수는 생각했다.이유가 무엇이든 소씨 집안은 죽어 마땅했다.소우희가 천명을 타고났다는 말이 없었더라면, 어릴 적 소우연이 복성이라며 자신과 정혼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소씨 집안은 다 죽어야 마땅했다.그중에서도 이육진과 소우연은 반드시…“세자 저하… 그럼 저는…”아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민수는 한참을 침묵하다 낮게 말했다.“가 보거라.”“예.”아령은 조용히 숨을 돌리며 자리를 물러났다.이민수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그의 내면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정신은 극도로 일그러지고 있었다.어릴 적부터 곁을 지켜오던 환관 상평조차 자신과 닮았다는 이유로 무참히 죽였다.지금은 아령이 치료해주고 있기에 그나마 몇 날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그다음은?아령은 알고 있었다.이대로는 끝장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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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7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연인은 말없이 곧장 이지윤의 방으로 향했다.천둥이 치고 불꽃이 튀듯 뜨겁게 서로를 탐한 두 사람은 두세 번이나 물을 불러가며 한참을 얽혀 있었다.기력이 다 빠진 뒤, 아령은 지윤의 가슴 위에 힘없이 몸을 기대었다.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젖히며 그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다.이 얼굴의 진짜 모습을 본 사람은 오직 자신뿐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아령이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저하, 사실 이민수도 저의 진짜 얼굴을 봤어요.”“뭐라고?”남자가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령이 그의 가슴을 눌러 제지했다.“진정하세요. 전 괜찮아요.”이지윤은 짧게 숨을 들이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네가 그 자 곁에 있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냐?”아령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지만… 더 놀랄 일이 하나 더 있어요.”그녀는 일부러 말을 아끼며 여운을 남겼다.이지윤의 눈엔 그녀를 향한 갈망과 호기심이 가득했다.“무슨 일이냐?”“이민수… 이제 남자로서 기능을 모두 잃었어요.”아령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그렸다.“어떻게 된 건지 맞혀보시겠어요?”이지윤은 얼굴을 찌푸렸다.“병이라도 걸린 것이냐?”“비슷해요.”더 이상 밀당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아령은 숨김없이 말했다.“소우연이 이민수의 그곳을 잘라버렸어요. 거의… 환관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뭐라…?”이지윤은 숨이 턱 막힌 듯 눈을 크게 떴다.“그건…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일이 아니더냐.”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흥분이 그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이로써 이민수는 완전히 끝장났다는 생각에 이지윤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아령아, 이제 내 곁으로 돌아오너라. 더는 평서왕부에 머물 필요 없다.”평춘왕이 죽은 뒤부터, 이지윤의 야망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권력을 쟁취하기보다는 지금의 지위를 지키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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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8화

소녀의 걱정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이지윤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그리고는 아래에 누운 소녀를 찬찬히 내려다보며 말했다.“모란꽃 아래서 죽는 게 정녕 풍류라 하였으니, 그 말이 틀리진 않구나.”그 말처럼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듯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처음엔 서로 추위를 피하려고 안겼던 두 사람.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향한 진심과 오래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그녀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려 했다.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그는 주저 없이 함께할 작정이었다.한편, 소범준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커다란 귀비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방은 제법 넓었지만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고, 공기엔 눅눅하고 텁텁한 곰팡내가 배어 있었다.그는 주위를 둘러봤다.여기가 어디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검을 뽑으려 팔을 들자, 손발이 축 늘어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바로 그때, 한 하인이 들어왔다.그는 공손하게 말했다.“나으리,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아씨께서 오실 겁니다.”‘아씨…?’그제야 소범준은 쓰러지기 직전에 자신의 등 뒤에 있던 이가 아령이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가 돌아서는 찰나, 손에 들고 있던 미약을 확 뿌렸던 것이다.손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고작 어린 계집아이한테 당하다니…그녀가 뭘 노리는지는 몰라도,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니 죽일 생각은 아닌 듯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령과 이지윤이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이지윤을 보는 순간, 소범준은 여기가 평춘왕의 본채였다는 사실을 단번에 깨달았다.“나으리.”아령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이지윤은 그를 흘긋 보며 말했다.“이 자가 너를 쫓아온 자더냐?”“예, 왕야.”두 사람은 대놓고 다정한 기색을 드러냈다.소범준 앞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는 태도.세자 이민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이토록 노골적인 걸 보면,자신이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단 뜻일 터.그렇다면… 자신을 살려둔 이유는?입막음을 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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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9화

소범준은 말없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아니, 설마 그럴 리가…“그럴 리 없다고요? 예전엔 그래도 온화한 군자였죠. 하지만 지금은 저에게조차 온갖 핑계를 대며 억압하고 있어요. 상평조차 그렇게 쉽게 죽였는데 저나 소 장군이라고 다르겠어요?”아령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이지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아령 말이 맞아. 너 자신을 위하지 않더라도 네 아내와 자식들은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소범준은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저는 세자 저하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전 모두 세자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니까요.”아령은 조용히 말했다.“그렇다면 제가 하는 일은 못 본 걸로,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너… 정말…”“예전의 세자께서는 분명 훌륭한 분이셨어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희생한다고 해도, 장군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함께 희생시킬 건가요?”그녀는 조용히 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소범준은 잠시 고민하다 일단은 상황을 넘기기로 했다.입을 열려는 찰나 아령이 먼저 말했다.“아이들도 이제 글을 배워야 할 나이가 되었잖아요. 마을 훈장은 별다른 학식도 없고요. 왕야께서 이미 아이들을 위해 훈장을 초빙하셨어요. 걱정 마세요, 소 장군.”“너희… 너희들…”거짓말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범준은 후원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직접 보게 되었다.그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지금 상황에서 무슨 낯으로 마주할 수 있겠는가.뒤돌아보며 아령과 이지윤을 바라봤다.가슴에 팔짱을 끼고 턱을 괴고는 낮게 물었다.“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 나리께서는 지윤 왕야 같은 곁가지 황족이 왕좌를 다툴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소범준은 말없이 웃었다.아령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역사 속 황제들 가운데엔 뜻밖의 인물들이 꽤 많아요. 결과는 말보다 강하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몰라요.”“그래. 그렇지.”소범준은 사실 이민수든 이지윤이든, 그들이 이육진을 이길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그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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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0화

귀환길,소범준이 마차를 직접 몰고 있었다.만안당 앞에 다다르자 아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멈춰주시겠어요, 나으리.”“무슨 짓이오?”소범준은 얼굴을 굳혔다.그는 아령과 이지윤의 관계를 조용히 숨기고 있는 중이었다.오늘은 27일. 태자빈이 직접 의진을 하는 날이었다.그런 날 그녀가 공공연히 태자빈을 찾아간다면, 그 소문은 곧장 이민수의 귀에 닿을 게 뻔했다.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아령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소범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일은…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나으리.”소범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처음엔 단지 얼굴이 예쁘고 손재주가 좋은 계집이라 생각했지만, 이제야 알겠다.이 아이는 예쁠 뿐 아니라 무서울 만큼 영리했다.아령은 품을 여미고 우아한 걸음으로 만안당 안으로 들어갔다.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순서를 기다렸다.15 분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마침내 소우연을 마주할 수 있었다.소우연을 향해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태자빈 마마, 혹시… 제가 아이를 가진 건 아닌지 봐주실 수 있을까요?”소우연이 고개를 들었다.눈앞의 소녀는 눈빛이 반짝였고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순간. 어쩐지 낯이 익다는 기분이 들었다.그 미소엔 은근한 도전의 기색도 엿보였다.다시 자세히 보니…소녀는 단정한 얼굴로 잔잔히 웃으며, 기대 어린 눈빛으로 진맥을 기다리고 있었다.옆에서 진료 기록을 정리하던 정연도 그 청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문득 생각했다.‘눈매가 어딘가 태자빈 마마를 닮았어…’게다가 그녀는 다른 환자들과 달랐다.존경이나 감사가 아니라, 그저 정면으로 소우연을 응시하는 시선.그것이 정연의 마음을 묘하게 불편하게 만들었다.물론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태자빈의 의진은 단순한 진료가 아니라, 태자부의 명성과 체면을 쌓기 위한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소우연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아령의 손목 위에 손끝을 올리고 조용히 맥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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