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621 - 챕터 630

665 챕터

제621화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유하 뒤에 따라붙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조금도 숨을 생각이 없었고, 노골적이며 공격적이었다. 마치 칼날처럼 유하의 등에 꽂힌 시선에 순간 솜털이 곤두서고 팔다리가 함께 굳어 버렸다.‘대체 누구야! 오승현이야?’‘숨어서 이런 짓을 하는 게, 내가 놀라고 겁먹는 걸 보는 게 재밌어서야?’‘아니면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어디서 비롯된 심리인지, 아니면 오래 억눌려 있던 감정의 반동이었는지, 유하는 피할 생각도, 주위를 둘러보며 시선의 근원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레스토랑을 나섰다.대낮의 햇살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고, 주변은 상가 밀집 지역답게 사람과 차량이 끊임없이 오갔다.유하는 인도 가장자리에 멈춰 서서 한낮의 햇빛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앞을 스쳐 지나가는 차량과 오가는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볼 뿐,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비치지 않았다.길게 내려온 눈매에는 서늘한 기운만이 또렷하게 깃들어 있었다.그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유하는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오승현이 내가 두려워하고 위축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난 절대 보여주지 않을 거야.’‘이렇게 대놓고, 햇빛 아래 서서 보라고 해. 보고 싶으면 마음껏 보라지.’유하는 핸드폰을 꺼내 태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지 않게 울린 뒤, 곧 연결되었다.태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하는 그 사람을 찌르는 듯한 시선을 그대로 견디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당신들 인제 그만 좀 해. 이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할 일이나 하지, 코시오는 어쩌고 그냥 내버려둔 거야? 하루 종일 나만 들여다보는 게 대체 무슨 의미야?”“뭐, 내 몸에 아직도 이용할 게 남아서 끝까지 빨아먹고 싶은 거야? 그럼 차라리 직접 말해, 이런 비열한 짓 하지 말고.”유하는 정말로 한계였다.가면 파티에서 벌어진 일만 해도 이미 한계선을 넘어섰는데, 이제는 집까지 마음대로 드나들고, 밖에 나오면 미행과 감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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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2화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을 제외하면, 태건은 승현 쪽으로 간 것이다.애초에 태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승현, 즉 오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승현의 요구와 명령이 유하라는 새로운 보스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다행이라면, 유하는 태건에게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오승현이랑 같이 있지? 오승현에게 확실히 전해. 직접 나랑 통화해야 할 거라고.”유하는 냉랭하게 말했다.태건은 잠시 침묵했다.유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이쯤 되니 더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승현이 지금 이 통화 반대편에 있든 없든, 태건이 들었다면 승현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차이는 없었다.유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이미 감정이 빠져나간 뒤처럼, 잔물결 하나 없는 고여 썩은 물과도 같았다.“오승현, 나 진짜로 너한테 질렸어. 넌 항상 이런 식이잖아. 내 생각이 어떤지는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늘 혼자만의 판단으로...”“그리고 내 일만 복잡하게 만들어. 뭐가 필요한지 물어봐도 절대 말하지 않아. 뭐, 이용한다는 걸 말로 꺼내기야 좀 그렇겠지만, 본인 진짜 뭐가 그렇게 말 못 할 일이라도 있나?”유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나도 네 성격이 얼마나 악질인지 잘 알아. 어떤 인간인지도 잘 알고. 이런 일쯤은 그냥 손버릇처럼 하는 거잖아. 했으면 했다고 하지, 왜 괜히 숨기고 둘러대면서 더 추해져?”유하는 위선으로 덮인 얇은 막을 단번에 찢어냈다.“설마 너 같은 사람이 그런 쓸데없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같은 걸 느끼기라도 한다는 건 아니겠지?”유하의 말투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진짜, 웃기지 마.”상대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유하는 더 이상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코시오를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참고 또 참아왔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그 사이에 이 사람들은 뭘 했지?’‘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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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3화

고미술 경매라면, 예전의 유하는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하에게는 그런 데에 마음을 쓸 여유도, 시간을 낼 여력도 없었다.게다가 경매 이야기가 나오자, 유하는 자연스럽게 예전에 있었던 한 경매가 떠올랐다. 경쟁에서 밀린 끝에 무려 7천억이라는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가격에 낙찰됐던, 그 붉은 루비 귀걸이였다.당시 유하는 비교적 희소성이 있는 그 귀걸이를 디자인 영감으로 삼아 국제 쇼에 가져가, 루비 테마 의상 전시에 활용할 생각이었다. 쇼에 오르는 모델이 직접 착용하게 하면 테마에도 잘 맞고, 연출적으로도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승현이 본래 가치와는 비교도 안 될 높은 가격으로 그 귀걸이를 낙찰받아 하연우에게 주었고, 일정까지 촉박해지면서 유하는 결국 루비 테마 디자인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테마 하나에만 참여했는데,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소소한 주목을 받는 정도에 그쳤다.“죄송하지만, 요즘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유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말을 마친 뒤 그대로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시야 한켠으로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흔들리는 손목에 묶인 선명한 붉은 실이 단번에 눈에 띄었고, 유하는 뜻밖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명훈 씨?”“유하 씨, 오랜만입니다.”지명훈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 뒤, 유하의 옆에 서 있는 남진을 바라봤다.“실례지만 이쪽 분은...?”방금 막 거절을 당해 미묘하게 기운이 가라앉아 있던 남진은, 명훈의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에 잠시 놀랐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배남진입니다.”“‘배’ 씨라면,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명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는 지명훈이고요, 예전에 유하 씨랑 소개팅했던 사람입니다.”남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유하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난감해졌다.‘보통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나?’유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명훈 씨는 여긴 어쩐 일이세요?”“병문안 왔습니다.”지명훈은 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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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4화

“네, 알겠습니다.”병실 안, 창가에 서서 환자복을 입고 있던 승환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명훈이 병실 문을 등 뒤로 닫으며, 손에 든 전화기에 대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승환은 차갑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좀 괜찮아졌어?”명훈은 전화를 끊고도 다가오지 않은 채, 문 옆 벽에 기대어 서서 옅은 미소를 띠고 승환을 바라보았다.“자기 출신 좀 알게 된 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이야?”“또 왜 나타난 거지?”승환이 냉담하게 물었다.“그냥 너랑 얘기 좀 하려고 왔어. 마침 전해줄 말도 있고, 교수님이 며칠 안에 도착하셔. 교수님이 널 직접 보고 싶어 하셔.”명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말인데, 이제 어느 쪽에 설 건지는 정했어?”승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진짜 이해가 안 되네.”침묵이 이어지자, 명훈은 관자 쪽을 가볍게 두드리며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이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 계속 오씨 가문에서 존재조차 드러낼 수 없는 사생아로 살 건지, 아니면 친부를 따라 D국 본가로 돌아가서 롱나 가문의 다음 세대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건지. 이게 그렇게 선택하기 어려워?”명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롱나 가문은 어떤 가문인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귀족으로, 역사상 교황을 배출한 가주만 해도 여러 명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지도교수이자 승환의 생부인 코시오는 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모계 역시 서구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근래에 들어 다소 쇠락하긴 했으나,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코시오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태생부터 범상치 않은 신분인데,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승환은 명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짙은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왜 이렇게 갑작스럽지?”‘전에는 아직 지켜보는 단계 아니었나?’명훈은 미소를 유지한 채,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진작에 와야 했어. 너도 시간이 많지 않아. 빨리 결정해. 교수님이 오셨는데도 선택을 못 하면, 그땐 선택권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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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5화

승환은 창틀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명훈은 그런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말을 이었다.“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사생아인 너는 소유하와는 애초에 영원히 가능성이 없다는 거...”“소유하 쫓아다니는 남자들 중에서 아무나 하나만 데려와도, 너는 경쟁 상대조차 안 돼. 아니면 네가 수학에 재능 좀 있다고 그걸로 버텨보겠다는 거야?”명훈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그쪽 재능이 대단한 건 인정해. 앞으로의 길도 분명 밝겠지. 하지만 너는 아직 너무 어리고 소유하를 노리는 남자들은 이미 다들 한 자리씩 잡은 사람이야. 사회적 지위도 있고, 각자 자기 영역에서 확실한 기반을 가진 사람들이라고.”명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사생아로는 안 된다면... 롱나 가문의 후계자는?’승환은 창틀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얼굴빛은 변하지 않았고, 목소리 역시 억지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분은 내 누나야.”‘앞으로도 변하지 않아.’명훈은 웃었다. 턱을 살짝 치켜든 얼굴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너에게 힘이 없으니까 소유하가 네 누나로 남아 있는 거야. 승환아, 사람은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가치도 없고, 무언가를 원할 자격도 없어.”잠시 말을 끊은 명훈은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우리는 너에게 그 자격을 줄 수 있어. 이렇게 계속 주저앉아서 체념하며 살 건지, 아니면 판 위에 올라가서 말을 쥔 사람이 될 건지, 제대로 한 판 붙어볼 건지.”승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말은 그럴듯한데, 결국 내가 말이 되는 거잖아. 아니면 당신들 말이고.”명훈은 속마음을 들킨 데에 대한 당혹감 같은 건 전혀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적어도 너는 판 위에 올라가게 되지. 이 세상 사람 중에, 99퍼센트는 아예 판 위에 오를 자격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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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6화

현재 청산이 준서를 데리고 회사에 나타난 효과는 상당히 강력했다.그 결과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조용했던 회사가 들끓기 시작했고, 각종 소규모 단체 채팅방에서는 미친 듯이 정보가 오갔다.이야기는 점점 부풀려지더니, 결국에는 ‘임 대표님이 MB그룹 전 대표이사 오승현의 여자를 제대로 빼왔다’라는 결론으로 굳어졌다.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는 결혼은 언제 할지, 그럼 회사는 휴무를 주는지, 직원들에게는 보너스나 복지 혜택이 나오는지로 흘러갔다.직원들 눈에 보기엔, 청산이 워낙 오랫동안 혼자였던 터라, 어렵게 생긴 경사라면 회사 차원에서 한 번쯤 크게 축하해 주는 게 당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덩달아 덕을 좀 보지 않겠느냐는 분위기였다.정작 연구개발팀을 데리고 사무실에서 대형 회의를 진행 중이던 청산은 이런 소문이 얼마나 널리 퍼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아이 하나 데리고 왔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 줄은 몰랐다.물론, 청산은 그 상황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청산은 화면 위에서 빠르게 넘어가는 PPT를 바라보며 기술적 방안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아 게임기를 들고 있는 준서를 무의식적으로 흘끗 바라봤다. 준서를 데리고 출근하겠다고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청산은 정말로 바빴고, 그렇다고 아이를 혼자 둘 수도 없었다.무엇보다 유하에게 약속한 이상, 아이는 반드시 자신의 시야 안에서 직접 챙겨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청산의 시선을 느꼈는지, 준서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청산을 올려다보며 불만을 터뜨렸다.“너무 지루해요, 배도 고파요, 저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어른들이 쏟아내는 전문 용어와 설명은 준서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졸음이 몰려왔고, 게임을 해도 졸음을 막지 못했다.‘아빠도 예전엔 이랬겠지. 그래도 아빠는 이런 거 안 들었잖아. 진짜 지루해.’준서는 청산을 따라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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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7화

‘대나무숲’ 주택단지, 유하의 집.해가 기울어 저녁이 되자, 붉게 물든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유하는 1층 창가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귀에 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성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긴 대화 속에서 유하는 가끔씩 짧게 대답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시점은 저희가 조금 더 상의해서 정해지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다만 자산 정리랑 분할 쪽은 고모할머니께서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시면 좋겠어요, 어떻게 나누시든 저는 고모할머니 뜻을 따를게요.”“네, 알았어요.”“...”“네, 알겠습니다.”“걱정 마세요, 믿고 있어요.”통화를 이어가던 중, 현관 쪽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청산과 함께 나갔던 준서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유하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서 전자 도어락을 열었다.“그럼 고모할머니, 이만 끊을게요. 최대한 빨리 정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유하는 통화를 마쳤다.문이 열리자마자 준서가 그대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왔어?”유하는 아들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이어 뒤따라 들어오는 청산을 향해 고개를 들어 미소로 인사한 뒤, 다시 준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청산 아저씨랑 같이 나가서 재밌게 놀았어?”“흥, 하나도 안 재밌었어요!”엄마를 보자마자 준서는 곧바로 고자질을 시작했다.“아저씨가 저 속였어요!”유하는 의아한 얼굴로 청산을 바라봤다. 청산은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중간에 급한 일이 생겨서 준서를 국정원에 잠깐 데리고 갔는데, 약속했던 ‘CN 대형 언어 모델’ 소스 코드는 못 보여줬어. 그때 상황이 좀 안 좋았거든.”“다음에 꼭 보여준다고 했잖아, 그게 뭐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 오는 내내 투덜대더라, 진짜 쪼잔하긴.”청산이 웃으며 준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준서는 청산의 손을 바로 쳐냈다.“누가 보고 싶대요? 안 봐요!”준서는 문밖에 서 있는 청산을 한 번 노려보더니, 그대로 쾅 소리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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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8화

잠시 망설이던 유하는 결국 앞치마를 받아 청산의 허리에 둘러 주었다. 앞치마의 끈을 잡아 청산의 등 뒤에서 천천히 묶어 주고도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옆에 서서 필요한 도구를 간간이 건네주었다.주방에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으로 울렸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낮에 아이가 다녀온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유하는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앞으로는 준서를 국정원에 데리고 가지 마, 프로젝트를 떠나서 그런 곳은 원래 보안이 굉장히 엄격한 데잖아, 아이를 데려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아.”국가 단위의 사업이 얽힌 장소였다.준서야 아직 상황 판단이 어려울 나이지만, 청산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생각해 보면 꽤 무모한 선택이기도 했다.청산은 거품이 잔뜩 묻은 냄비를 헹구면서도, 말을 놓치지 않았다.“알고 있어, 나도 선은 지키고 있었어. 다만 그때는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준서를 혼자 둘 수도 없었고, 급하게 핑계를 댄 것도 사실 내 잘못이야.”“못 지킬 약속은 애초에 하면 안 되는 건데, 하필 상대가 아이니까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지. 이따가 내가 직접 가서 준서한테 사과할게.”“선배한테 괜히 번거로운 일 맡긴 건 아닌지 걱정됐어.”유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낮에... 준서가 많이 힘들게 하진 않았지?”준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괜찮았어.”청산은 가볍게 웃으며, 씻어낸 냄비를 유하에게 건넸다.“내가 맡은 일이니까 당연히 책임져야지. 그리고 준서도 조금 고집이 센 것뿐이지, 기본적으로는 꽤 귀여운 애야.”그러다 문득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아까 식탁에서는, 내 편 들어준 거지?”유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씻은 냄비를 받아 시선을 피해 선반에 올려두었다.“그냥... 선배랑 준서가 그렇게 부딪히는 모습이 보기 싫었어. 이건 나도 생각이 있는 문제고, 선배 혼자 애쓰게 둘 수는 없으니까.”청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손에 거품이 남아 있어 더 다가오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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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9화

주방 안, 수전에서는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지만 사람의 소리는 없었다.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졌다. 청산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하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안 되는 거야?”“돼!”청산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망설일 수 있겠어.대답하자마자 유하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허공에서 멈췄다. 손에 가득 묻은 거품이 그제야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손을 거두어들였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공개를 생각하게 됐는지 묻고 싶었지만, 곧 다른 생각이 스쳤다.‘그게 중요해?’“언제?”청산이 묻는 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이번엔 유하가 제대로 허를 찔렸다. 청산이 담담하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망설임 없이 바로 허락할 줄은 몰랐다. 한참 뜸 들이다가 겨우 한마디가 튀어나왔다.“사흘 뒤?”“사흘 뒤?”‘너무 빠른 거 아닌가?’청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고, 말하는 속도도 자연스레 빨라졌다.“너무 빠르지 않아?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이렇게 급하면 도저히 시간이 안 맞아. 게다가 난 아직 프러포즈도 안 했잖아.”“긴장하지 마.”청산의 반응을 보자 유하의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약혼이니까 괜찮아, 일단 확실히 해두고 나중에 우리가 정식으로 결혼할 때 크게 해도 되잖아.”“그건 안 되지.”청산은 단호하게 말을 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도 중요해, 난 너에게 최고의 것을 해주고 싶어.”이건 청산과 유하의 결혼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그 과정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청산은 유하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대충 넘길 수 있겠는가?유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마음속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엉켜 요동쳤고, 곧이어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이 밀려왔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는 거품으로 미끈거리는 청산의 손을 붙잡았다.“선배... 미안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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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0화

“내가 전에 말했잖아, 넌 나를 얼마든지 이용해도 된다고. 그리고 세상에 너처럼 이렇게까지 솔직한 사람이 어딨어, 바보처럼 상대에게 다 말해버리고.”“이 말은 내가 마지막으로 하는 건데,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난 진심으로, 정말 십만 분의 일도 망설임 없이 기꺼이 나설 거야.”“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마, 너한테 쓸모가 있다는 게 난 오히려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나한테 조금만 더 잘해주면 난 그걸로 충분해.”유하는 심장이 둔중한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내려앉았다. 그리고 눈가가 붉어졌고, 입을 열려 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본능처럼 남자의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슴께에 묻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청산은 고개를 숙여 턱으로 유하의 정수리를 가볍게 쓰다듬듯 문질렀고, 그러다 문득 웃으며 말했다.“게다가 말이야, 내가 너를 거절했다면 넌 대체 누구를 찾았을까? 설마 그 배남진 씨?”남자의 말투에는 아주 미묘하게 시큰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그럴 리가...”유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배남진 씨를 만난 건 준서 선생님 직무 정지 건 때문에 이야기하러 간 거였어... 선배가 없었다면, 난 굳이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을 거야.”말끝으로 갈수록 유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하지만 청산은 분명히 들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유하야, 그거면 충분해.”그제야 청산은 깨달았다. 자신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선택이 순수한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용이라는 요소가 더 크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기뻤다. 적어도 유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른 건 전부 상관없었다.‘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되지.’청산은 유하의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서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이 얘기, 고모할머니께는 말했어? 약혼식은 국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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