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의 모든 챕터: 챕터 1401 - 챕터 1410

1590 챕터

제1401화

에라가 갑자기 국내에 상주하기로 한 데에는 분명 단순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터였다.최수빈의 마음도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에라의 얼굴에 떠오른, 이미 다 이긴 사람 같은 미소를 바라보자 불안함은 한층 더 짙어졌다.그러나 최수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주민혁의 팔짱을 끼고는, 아무런 동요도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에라 씨, 국내에서 일 잘 풀리시길 바랄게요.”“좋은 말씀 고마워요.”에라는 미소를 지은 뒤, 다시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목소리에는 묘하게 유혹하는 듯한 자신만만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주 대표님, 전 저희 두 회사의 협력에 대해 아직 더 이야기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자원은 주상 그룹에도 분명 필요할 겁니다. 특히 신에너지 분야의 핵심 기술은 말이죠. 캐셔 그룹이 줄 수 있는 건, 주 대표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주민혁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빛에 온기라곤 전혀 없었다.“협력의 전제는 진정성입니다. 에라 씨에게 그게 없다면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에라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표정을 수습했다.이내 그녀는 커피 한 모금을 가볍게 마신 뒤, 잔을 놓으며 손끝으로 벽을 톡톡 두드렸다.그러고는 웃는 듯 웃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진정성이라면, 당연히 있죠. 주 대표님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며칠만 지나면 마음이 바뀌실지도 모르니까요. 어떤 기회는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는 법입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최수빈을 훑었다. 그러다 다시 주민혁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주 대표님은 똑똑한 분이잖아요. 누구와 손을 잡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인지, 당연히 아실 거라고 믿어요.”말을 마친 에라는 주민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여유롭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식탁을 지나칠 때는 일부러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고, 두 사람을 향해 턱을 살짝 치켜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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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2화

주민혁은 낮게 물었다.“확실해? 언제 일어난 일이야?”휴대폰 너머로 진한수가 무어라 보고했는지, 주민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전화를 끊은 뒤, 주민혁은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차가 순식간에 속도를 올리자 최수빈은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움켜쥐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주민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플라잉 테크가 에라의 손에 넘어갔대. 캐셔 그룹이 어젯밤 밤새 인수 절차를 마쳤고 지금은 에라가 플라잉 테크의 최대 주주이자 실질적인 지배자가 됐어.”“뭐라고요?”최수빈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을 받은 듯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게 말이 돼요? 플라잉 테크는 줄곧 주상 그룹의 협력사였잖아요.”게다가 그쪽 회장님은 아버님과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고, 관계도 늘 좋았는데 갑자기 에라에게 인수당했다고요?”설령 심종연이 체포됐다 해도 일이 이렇게 빨리 돌아갈 리는 없었다.플라잉 테크는 국내 항공우주 분야의 오래된 기업으로 여러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주상 그룹 산하 여러 계열사와도 오랜 기간 협력해왔었다. 두 회사가 함께 묶여 있는 프로젝트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주민혁은 이번에 유럽 시장을 확장하면서 플라잉 테크와 손잡고 신기술을 공동 개발할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큰 변수가 생긴 것이다.주민혁이 낮게 말했다.“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파악 중이야. 다만 캐셔 그룹이 플라잉 테크의 지분 전부를 세 배나 되는 프리미엄을 얹어 사들였다고 해. 회장 쪽에서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밤사이에 계약서에 서명했고.”“에라가 제대로 큰 판을 벌인 거야.”최수빈의 마음이 바닥 끝까지 가라앉았다.플라잉 테크의 기술은 천공연구원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핵심 부품 상당수를 플라잉 테크에서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에라가 플라잉 테크를 인수한 것은 단순히 주상 그룹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천공연구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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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3화

“맞는지 아닌지는 떠보면 알겠지.”...그날.국내 산업 정상회의가 호텔에서 성대하게 열렸다.정부 주도로 열린 이번 대규모 행사에는 업계의 내로라하는 주요 기업 수장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고, 화려한 분위기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신경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단연 새롭게 두각을 드러낸 플라잉 테크의 신임 수장, 에라였다.에라는 캐셔 그룹의 막강한 자본력을 등에 업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플라잉 테크를 인수했다. 그 일은 순식간에 업계에 거센 파장을 일으켰다.플라잉 테크는 국내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닌 기업으로, 여러 핵심 기술 특허를 보유한 곳이다. 때문에 이전부터 주상 그룹, 천공연구원과의 협력도 산업망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상태였다.인수 초기만 해도 세간에는 자금 출처를 둘러싼 추측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캐셔 그룹이 회색 지대의 거래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흘러나왔다.하지만 에라는 영리했다.그녀는 논란이 된 자금 흐름을 빠르게 끊어냈고 해외 시장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폭넓은 인맥을 앞세워 불과 몇 달 만에 플라잉 테크의 흔들리던 기반을 안정시켰다.에라는 버건디색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의 선을 따라 흐르는 드레스는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정교하게 꾸민 얼굴에는 흠잡을 데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사람들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는 그녀에게서는 손짓 하나, 걸음 하나에도 국제무대를 누비는 엘리트다운 여유가 묻어났다.“안 대표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지난번 푸르트 박람회 이후로 처음 뵙는 건데 안색이 날이 갈수록 더 좋아 보이시는 것 같아요.”에라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기업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친근했지만 선을 넘지 않았고 적당히 친숙한 척하는 행동은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안 대표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감탄한 눈빛을 띠었다.“에라 씨는 젊은데도 참 대단하군요. 플라잉 테크가 에라 씨 손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완전히 새로운 길을 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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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4화

“제 생각엔, 우리 세 회사가 손을 잡으면 신에너지 분야에 분명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앉은 것이 주변 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딱 적당한 크기였다.말을 마치자마자 본디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순간 조금 가라앉았다. 적잖은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달라진 것이다.에라가 주민혁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플라잉 테크에 들어선 뒤로 그녀는 협력을 빌미 삼아 몇 번이고 주민혁에게 접근했다. 노골적이든 은근하든, 그 호의는 이미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다.지금 그녀의 말 역시 겉으로는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했지만 속내는 달랐다.마치 자신과 주민혁 사이에 남들은 모르는 특별한 교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은근히 두 사람의 가까운 관계를 과시하려는 말이었다.주변에서 낮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옆에 선 최수빈은 와인잔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에라를 바라보았다.“에라 씨, 말씀은 고맙네요. 협력은 원래 서로에게 이익이 있어야 성사되는 겁니다. 주상 그룹과 천공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전폭적인 지원이라고까지 할 건 없죠.”그제야 에라는 마치 이제야 최수빈을 발견한 사람처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수빈 씨 말씀이 맞아요. 그래도 협력 논의 과정에서 주 대표님께서 여러모로 도와주신 건 사실이잖아요.”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시 반걸음 앞으로 다가섰다.목소리는 조금 낮췄지만 주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핵심 단어를 놓치지 않을 만큼 또렷하기는 했다.“주 대표님, 협력 프로젝트의 해외 홍보 방안 말인데요. 제가 그쪽으로 꽤 괜찮은 해외 네트워크를 몇 군데 확보해뒀거든요. 나중에 시간 한번 잡아서 자세히 이야기 나눠보실래요?”둘만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겠다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 말이었다.그러나 주민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에라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피했다.순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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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5화

“그럴 줄 알았다니까. 주 대표님이랑 최수빈 씨야말로 천생연분이지. 저기 에라 씨는 그냥 혼자 김칫국 마신 거였네!”사방에서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에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 달라졌다.동정하는 눈빛도 있었고 비웃는 눈빛도 있었다. 그중에는 대놓고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흥미로워하는 시선도 섞여 있었다.에라의 애매한 말에 휩쓸려 오해했던 사람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에라가 혼자 착각한 거였다며 혀를 끌끌 찼다.상상도 못 한 전개에 에라의 얼굴을 이내 새하얗게 질렸다.주민혁이 하필 이 순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재결합 소식을 발표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건 의심할 여지 없이 공개적으로 에라에게 망신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조금 전까지 그녀가 일부러 만들어냈던 친밀한 분위기는 한순간에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에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그리고 울상에 가까운 미소를 간신히 짜냈다.“축하드려요, 주 대표님.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더 버틸 수 없었던 에라는 몸을 돌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가더니, 도망치듯 행사장 구석으로 걸어갔다.초라하면서도 분노한 듯 보이는 뒷모습은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에라가 허둥지둥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최수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녀는 곁에 선 주민혁을 올려다보았다. 눈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타이밍 하나는 정말 잘 고르네요.”주민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수빈을 녹여버릴 만큼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이다.곧 그가 팔에 힘을 주어 최수빈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더니 손끝으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쓸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듣기 좋게 울렸다.“저런 사람을 상대할 땐 빠르고, 정확하고, 확실해야 해. 괜히 계속 들러붙어서 네 기분 상하게 두고 싶지 않으니까.”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두 사람에게 몰려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주 대표님, 최수빈 씨,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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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6화

송미연과 육민성은 혼인신고까지 마친 사이였지만 부부라기보다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함께 사는 동맹에 더 가까웠다.서류상으로만 부부였을 뿐, 결혼 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각방을 썼고 평소에 마주치는 일도 대부분 일 때문이었다.가끔 집안 어른들 눈을 의식해 함께 집에 들어가 다정한 부부인 척 연기를 할 때면 손을 잡거나 가볍게 포옹을 했는데 어딘가 늘 어색하고 서툴렀다.연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지나칠 만큼 깍듯했다.그런데 스키장에서 그날 밤을 보낸 뒤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눈밭에 함께 넘어졌을 때 자신을 감싸 안던 육민성의 품, 두꺼운 스키복 너머로도 고스란히 전해지던 손바닥의 온기가 괜히 송미연의 심장을 들쑤셨다.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미묘한 공기, 한밤중 송미연의 이불 끝을 조용히 여며 주던 손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로 곁에서 느껴지던 숨결...그리고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느껴지던 육민성의 다정한 눈빛까지, 모든 것이 잔잔하던 송미연의 마음 한가운데 툭툭 떨어져 자꾸만 파문을 일으켰다.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송미연은 곁에 육민성이 있는 것이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누군가 술을 권할 때 말끔하게 대신 받아내 주는 모습도,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든 채 퇴근하는 자신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또 자신을 보며 웃을 때 살짝 떨리는 그 눈빛까지도 말이다.송미연은 술잔을 쥔 육민성의 손을 바라봤다. 섬섬옥수처럼 기다란 손가락, 또렷한 마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당황할 만큼 충동적인 생각이었다.테라스 쪽에서 들리던 짓궂은 환호성이 어느새 잦아들자 육민성은 시선을 거두고 송미연을 돌아봤다.그녀가 멍하니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하자 육민성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왜? 내 손에 반했어?”속마음을 들킨 송미연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하지만 이내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치 무언가를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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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7화

송미연은 육민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아까 결혼식 얘기한 거,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마요.”“우리의 시작이 계약 결혼이었던 건 맞지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미연 씨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야. 나는 미연 씨가 조금이라도 서운한 일 겪는 건 싫어. 남들한테 웃음거리 되는 건 더더욱 싫고.”가장 소중한 친구, 이 말은 가느다란 바늘처럼 송미연의 가슴 한복판을 콕 찔렀다.아주 아픈 건 아니었지만 대신 속이 시큰거렸다.조금 전까지 마음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던 설렘도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반쯤 꺼져 버렸다.결국 육민성이 결혼식 제안에 응한 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그저 자신을 가장 소중한 친구로 여기기 때문이었고 체면 상하지 않게 해 주고 싶어서였을 뿐이었다.송미연은 눈을 내리깔며 속에서 일렁이는 실망감을 감췄다.“알겠어요. 얼른 가봐요.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육민성은 송미연의 말투가 미묘하게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피곤한 줄로만 여겼다.그래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라며 한마디를 더 남긴 뒤, 연회장 쪽으로 돌아섰다.송미연은 그 자리에 선 채 육민성이 사라진 방향만 오래도록 바라봤다. 한참이 지나도록 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이내 그녀는 손을 들어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비워 냈다.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알싸하고 떫은 맛을 남겼다.자신과 육민성이 얼마나 우스운 관계인지, 그녀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집안 어른들을 속이기 위한 계약 결혼, 서로 필요에 의해 손을 잡은 동맹 같은 관계...하지만 스키장에서의 그 포옹, 한 침대에서 함께 보낸 그 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육민성의 다정한 눈빛이 자꾸만 그녀를 기대하게 만들었다.‘결국 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네.’송미연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려 수영장 옆 바 쪽으로 걸어가서는 다시 위스키를 주문했다.얼음도 넣지 않은 채 그대로 들이켜더니 절반이 넘도록 단숨에 삼켰다.독한 술기운이 곧장 머리끝까지 치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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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8화

“천공이랑 주상 그룹의 협력은 장기 전략이에요. 에라 씨 말 몇 마디로 깨질 관계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헛된 꿈은 접는 게 좋을 거예요.”“헛된 꿈을 접어요?”에라는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듯 코웃음을 쳤다.“미연 씨, 너무 자신만만하신 거 아니에요? 주 대표님은 지금 온통 최수빈 씨한테만 정신이 팔려 있잖아요. 천공을 진심으로 챙겨 줄지 누가 알아요? 잘 생각해 봐요. 천공은 최수빈 씨가 공들여 키운 곳이에요. 그분이 천공을 돕는 것도 결국은 최수빈 씨 비위 맞춰 주려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미연 씨는요? 천공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죽어라 일해 놓고, 남 좋은 일만 하면서 들러리로 남는 게 정말 괜찮아요?”송미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에라 씨, 말조심하시죠.”“난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이에요.”에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장 가장자리로 걸어갔다.그러고는 송미연에게 등을 보인 채 사람을 떠보듯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미연 씨랑 육 대표님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름 좀 들은 게 있거든요. 두 분, 계약 결혼이시라면서요? 육 대표님, 괜찮은 남자죠. 젊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빠지지 않고... 주 대표님 쪽이 안 되면 육 대표님도 꽤 괜찮은 선택지인데.”곧 그녀가 몸을 돌려 송미연을 바라봤다.“미연 씨가 절 도와 육 대표님과 천공이 플라잉 테크 쪽으로 붙도록 설득만 해 주면, 제가 미연 씨한테도...”그러나 에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송미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싸늘하게 식은 얼굴에는 더는 참을 생각이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에라 씨, 술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 이런 헛소리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가 주세요.”말을 마친 송미연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 더 있다가는 정말 에라와 정면으로 부딪칠 것 같았다.에라는 단호하게 돌아서는 송미연의 뒷모습을 보며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다.원래는 송미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제일 좋고, 그게 안 되면 한 번쯤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어쨌든 송미연이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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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9화

행사장의 여전히 소란스러웠다.육민성은 몇몇 협력사 대표들에게 둘러싸인 채 샴페인 잔을 들고 있었다.얼굴에는 예의 바르지만 확실하게 선을 긋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시선이 자꾸만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송미연과 헤어진 지 고작 십 분 남짓,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졌다.조금 전까지 응대를 하면서도 머릿속엔 계속 송미연의 모습만 맴돌았다.테라스에 서 있던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육민성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그렇게 적당히 핑계를 대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갑자기 수영장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사람이 빠졌어요! 어서요! 누가 수영장에 빠졌어요!”그 외침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영장 쪽으로 쏠렸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육민성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순식간에 온몸을 휘감았다.그래서 거의 반사적으로 옆 사람들을 밀쳐 내고 수영장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선명했다.‘미연 씨가 아직 그쪽에 있는데?’수영장 가장자리에 도착한 그는 다급하게 주변을 훑었다.그 순간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쥐인 것처럼 조여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물가의 선베드 위에는 송미연의 외투가 놓여 있었다.오늘 아침, 그가 직접 골라 준 아이보리색 트렌치코트였다.조금 떨어진 바닥에는 하얀색 가는 하이힐 한 켤레가 나뒹굴고 있었다.앞쪽에 잔디 부스러기가 조금 묻어 있는, 오늘 송미연이 신고 있던 바로 그 구두였다.그런데 정작 송미연은 보이지 않아 육민성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그와 동시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재킷을 벗을 틈도, 넥타이를 풀 여유도 없이 육민성은 차가운 수영장 안으로 몸을 던졌다.얼음장 같은 물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살을 파고드는 냉기가 사지 끝까지 파고들며 몸을 굳게 만들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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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0화

육민성은 응급처치 순서대로 침착하게 송미연의 가슴을 눌렀다.한 번, 또 한 번...힘은 고르게 들어갔고 동작은 흔들림 없이 정확했다.하지만 그 한 번 한 번의 압박은 마치 제 심장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창백하게 질린 송미연의 얼굴, 꼭 감긴 눈꺼풀을 바라보는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스키장에서 추위에 코끝이 빨갛게 물든 채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그녀의 얼굴, 함께 집에 들어가 어른들 앞에서 다정한 척 연기하던 날, 몰래 육민성을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모습, 전날 밤 호텔에서 육민성의 재킷을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던 뒷모습까지...그 모든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눈 깜짝할 새 스쳐 지나갔다.그제야 육민성은 깨달았다.언제부터인가 송미연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인공호흡! 빨리 인공호흡 하세요!”곁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자 육민성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송미연의 코를 조심스럽게 막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갰다.수영장 물에 젖은 차가운 감촉과 함께 옅은 술기운, 그리고 송미연에게서만 느껴지는 은은하고 달콤한 숨결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육민성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간절하게 송미연에게 숨을 불어넣었다.한 번, 또 한 번,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송미연의 의식은 여전히 혼탁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사방은 끝없는 차가움과 검은 적막뿐이라 마치 깊은 바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린 듯했다.숨이 막혀 왔다. 살기 위해 뭐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손끝에는 텅 빈 허공만 스칠 뿐이었다.이대로 정말 끝나는 건가 싶던 그 순간, 따뜻한 기운 하나가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익숙한 삼나무 향이, 육민성에게서 늘 나던 바로 그 향기였다.그녀는 마치 마지막 구명줄이라도 붙잡는 사람처럼 무의식중에 아주 작게 입술을 열었다.그리고 바로 그때, 갑자기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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