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771 - Chapter 780

812 Chapters

제771화

장성훈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먹빛처럼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가라앉았고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거부감이 섞여 있었다.“아가씨,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강지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바짝 다가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장성훈의 각진 옆선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뭐가 안 좋은데? 넌 내 경호원이잖아. 지금 내가 다쳤는데도 안 부축해 주면 그게 어떻게 보호해주는 거야?”이에 표정이 더욱 굳어지며 장성훈은 웃음기 하나 없이 매우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모두 제 불찰입니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벌?”강지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도발하듯 말했다.“그럼 내가 벌줄게. 오늘 밤... 나랑 같이 자는 건 어때?”장성훈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여 강지안의 시선을 피하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씨, 그런 농담은 삼가해 주시죠.”“흥.”강지안은 코웃음을 쳤다. 긴장해서 팽팽해진 그의 옆얼굴을 보며 그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아빠가 나 잘 보호하라고 보냈잖아. 네 딴에는 이게 보호하는 거야? 지금 내가 다쳤는데 규칙대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장성훈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잠시 침묵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고 강지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지극히 진지했다.“아가씨, 제 목숨은 이미 아가씨의 것입니다. 언제든 가져가셔도 돼요.”마치 무언가가 목을 틀어막은 것처럼 강지안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그렇게 아무런 파문도 없는 장성훈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그는 무엇이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줄 수 있다고 했으나 감정 앞에서만큼은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단 한 발자국도 넘지 않았다.“내가 그렇게 별로야?”미묘하게 서운함이 배어있는 목소리로 강지안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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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2화

그녀는 게스트룸처럼 보이는 방 하나를 골라 주예린을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었다.딸을 재워 놓은 뒤, 최수빈은 창가로 걸어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을 바라보았다.‘저택 쪽에서 난 큰불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아무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아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답은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이런 때일수록 성급한 행동은 불필요한 문제를 부를 수 있고 누군가의 계획을 어그러뜨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잠이 오지 않던 최수빈은 책상 앞으로 가 노트북을 켰다.걱정과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무언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그래서 데이터 분석을 시작했고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오가며 화면 속 숫자들이 끊임없이 변했다.이렇게라도 해야만 자신이 아직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 어느새 밖이 희미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그때였다.문밖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발소리였다. 묵직하고 일정한 리듬...심장이 덜컥 뛰며 최수빈은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키 큰 남자의 모습이 안으로 들어왔다.주민혁이었다.그는 여전히 어제의 옷차림 그대로였지만 온몸에 먼지가 묻은 채 머리는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얼굴은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눈 밑에는 옅은 실핏줄이 보여 한숨도 못 잔 게 분명해 보였다.최수빈의 시선이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녀는 주민혁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저택에 불이 난 거 절대 사고가 아니에요. 할머니의 죽음도 우연이 아니고요. 이 모든 게 나한테 경고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런데도 민혁 씨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겠다는 거예요?”주민혁은 고개를 떨군 채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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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3화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은 온몸이 함께 떨려 왔다. 너무나 무거운 질문이기 때문이었다.마치 하나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고 그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정말로 목숨을 내던질 것만 같았다.그 순간, 최수빈은 주민혁의 몸에 배어있는 고통과 버거움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최수빈은 주민혁을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민혁 씨의 목숨이 중요하냐고 물었죠? 그럼 나도 물을게요. 민혁 씨한테는 나랑 우리 딸의 목숨이 중요해요?”그녀는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아니면 이렇게 물어볼게요. 나랑 예린이가 민혁 씨한테 중요해요?”주민혁은 그녀의 앞에 선 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늘 그랬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선과 함께 이어지는 침묵이었다.최수빈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내 질문에는 대답도 못 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민혁 씨의 목숨이 중요하냐고 물어요? 민혁 씨의 마음속에는 이미 답이 있는 거 아니에요?”수년간 이어져 온 결혼 생활 속에서 그들은 부부라기보다 대부분을 남처럼 살아왔었다.그런 관계 속에서 ‘중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 자체는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지나온 세월만 봐도 답은 충분히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주민혁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짙어진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볼 뿐이었다.기운은 차가웠지만 평소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답할게.”이내 목젖이 크게 움직이며 주민혁의 갈라진 듯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중요해.”그가 최수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너희는...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해.”전혀 예상하지 못한, 믿기 어려운 대답에 최수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아래로 늘어뜨린 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고 그와 함께 심장이 떨렸다.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서고 싶었지만 팔다리에 쇠가 올라간 듯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다.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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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4화

“나를 미워해도 좋아. 어떤 일들은 너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으니까.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너와 예린에게 가는 상처를 최대한 줄이는 것.”최수빈은 거칠게 숨을 쉬는 그의 모습과 이마에 촘촘히 맺힌 식은땀을 바라보았다.아래로 늘어진 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주민혁은 말을 이어갔다.“너희에게 차갑게 굴었던 밤마다 난 단 한 번도 편히 잠든 적이 없어. 술에 취해 너를 볼 때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연기는 할 수 있었지만 나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더라. 모든 사람을 속이고 너까지 속일 수는 있어도... 의도를 품은 사람들 앞에서는 결국 다 들통나는 법이야. 내가 하루라도 널 사랑하고 있는 한, 그런 흔적들은 반드시 드러나지.”주민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최수빈을 바라봤다.“네가 아무리 냉정하게 굴고 날카롭게 굴어도... 난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그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은 가슴 깊숙한 곳에 커다란 가시 하나가 박힌 것처럼 느껴졌다.견딜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팠다.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연달아 조여 왔고 무겁게 내려앉은 감정은 끝내 가시지 않았다.주민혁은 시선을 거두었다.“박하린은 네 앞에 세워 둔 방패에 불과해. 그 사람 때문에 네가 오해하게 된 것도 알아. 난 해명하지 않았고 넌 그대로 믿었지. 내가 박하린과 함께 여러 번 네 앞에 나타난 건... 사실 네가 보고 싶어서였어.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그러더니 주민혁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네가 이혼을 말했을 때, 솔직히 마음 한구석이 편해졌어. 이제 네가 벗어날 수 있겠구나, 자유로워지겠구나 싶었거든. 그러면서도 네가 끝까지 마음을 굳히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로 떠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난 망설이지 않았어. 그게 너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오히려 가장 좋았지.”“넌 내가 착각했다고 생각하겠지. 네가 날 형처럼만 여겼다고.”주민혁의 목젖이 크게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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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5화

최수빈은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쏟아낸 말들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마치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가슴속이 몇 겹의 솜으로 꽉 채워진 것처럼 답답했고 숨이 막힐 듯 조여 왔다.주민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최수빈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무언가를 묻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너무도 혼란스러웠다.모든 일의 배후에서 작용한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도대체 어떤 위기가 그를 이런 선택을 하게끔까지 몰아넣은 걸까?어떤 위험이, 늘 침착하고 냉정하던 이 남자로 하여금 이렇게 거대한 판을 짜게 만든 걸까?그동안의 결혼 생활 동안, 주민혁은 최수빈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어쩌면 그들의 결혼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몰랐다.최수빈은 수없이 자유롭고 싶다 말했고 주민혁은 그것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모든 주겠다고 했었다.하지만 본격적으로 차가운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그녀가 원하는 건 그저 평범한 결혼 생활, 정상적인 부부 관계였을 뿐이었다.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나 늦어버린 뒤였다.위험이 닥쳐오자 주민혁은 최수빈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고 냉정한 태도를 보인 건 역시 그 나름대로의 ‘보호’였다.머릿속이 유난히도 어지러웠던 최수빈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주민혁은 창백해진 입술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어.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묻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우리의 감정은 좀 내려놓고. 그래 줄 수 있을까?”그의 머릿속은 흐릿했고 의식마저 아득해 보였다.최수빈은 고개를 숙이다가 그의 발밑 바닥에 고여 있는 핏자국을 보았다.오늘 주민혁은 너무 많은 말을 했고 쏟아낸 정보도, 감정도 지나치게 많았다.때문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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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6화

주민혁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점점 더 빽빽하게 맺혔다. 창백한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다시 말을 꺼내기에는 이미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민혁 씨가 한 모든 행동에는 민혁 씨 나름의 이유가 있고 내가 내린 모든 결정에도 나만의 이유가 있어요.”최수빈은 주민혁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잘못된 결정이라면 그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날 잡아서... 우리 모든 걸 제대로 얘기 좀 해봐요.”주민혁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주예린의 방으로 가 아이를 깨워 함께 나갈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남자의 옆을 지나던 순간, 주민혁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고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너무나 무거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최수빈은 뒤로 두 걸음이나 밀려났다.그제야 최수빈은 그의 오른손이 다시 크게 다쳤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이대로 지혈하지 않으면 과다 출혈로 쇼크가 오고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최수빈은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게 하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안색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이렇게까지 초라하고 지쳐 보이는 주민혁의 모습은 최수빈도 처음이라 마음속에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요동쳤다.그리고 오늘 그가 했던 말들은 도무지 한 번에 소화할 수가 없었다.결국 그 모든 선택의 뒤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주민혁은 끝내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래서 더더욱 시간을 내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고 한두 마디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예 질문 목록을 따로 적어 하나하나 짚어야 할 것 같았다.적어도 다시 마주하게 될 때, 마음에 걸림돌이나 오해는 남기지 않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는 문제들을 전부 정리하고 싶었다.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이제는 아무 관계가 아니게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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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7화

최수빈은 강지안의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얼어붙은 것 같았다.그 자리에 굳어 서서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고 강지안을 똑바로 바라보는 채 입술만 몇 번 달싹였을 뿐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의아해하며 탐색하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던 눈빛에는 이제 공포만이 남아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숨을 쉴 때조차 날카로운 통증이 동반되었다.그동안 그녀가 애써 외면해왔던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혼자 있을 때 유난히 길어지던 침묵, 깊은 밤마다 눌러 삼키던 한숨, 언제나 감정이 닳아버린 듯 무감하고 냉랭했던 태도...그 모든 것을 최수빈은 그냥 지나쳐왔었다.그 순간 그것들은 모두 얼음송곳이 되어 가차 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찔러댔다.주민혁은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었다.“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겨우 말을 꺼냈지만 최수빈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그대로 목소리에 배어 나왔다.“그 사람은 분명...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목구멍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해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이제야 알 것 같았다.주민혁이 그동안 보여온 목숨을 내놓는 듯한 선택들, 기적처럼 살아남았던 수많은 순간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그는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게 아니라 자기의 내면과 감정 속에서 끝없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강지안이 입꼬리를 조금 비틀었다.“약을 먹는 걸 거부해왔어요. 그럴수록 상태는 계속 나빠졌고 앞으로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는... 수빈 씨도 알 수 없을 겁니다. 정신과 약물은 각자 차이는 있어도 뇌 기능에 영향을 줘요. 증상이 심할수록 더 그렇죠. 반응이 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민혁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민첩함이 생명이잖아요. 민혁이의 기준에서는 어떤 것이든 자기 목숨보다 앞설 수 있어요.”최수빈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답답하고 숨이 막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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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8화

그녀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불은 켜지지 않았고 옆얼굴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손에는 펼쳐진 책 한 권이 들려 있었지만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손가락은 어느 한 페이지에 멈춘 채 미동이 없었고 시선은 그에게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숨을 잠시 멈추며 주민혁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그러자 정신을 잃던 순간이 또렷이 떠올랐다.‘눈을 뜨면 이번에도 수빈이가 곁에 없을 줄 알았는데... 분명 내가 연기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거지?’남자가 목젖을 작게 움직이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최수빈이 먼저 움직였다.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수빈의 동작은 아주 조심스러웠고 무언가를 깨울까 봐 조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침대 곁에 다가와서는 고개를 숙인 채 창백한 주민혁의 얼굴을 스치듯 바라봤다.목소리에는 특별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채 담담하고 잔잔했다.“배고파요? 밥 먹을래요?”이에 주민혁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배가 고프기는 했었다.속이 텅 빈 느낌에 은근한 통증까지 있었지만 신체적인 불편함보다도 최수빈의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그녀는 따져 묻지도, 비꼬지도, 어젯밤 왜 갑자기 쓰러졌는지조차 언급하지 않으며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밥을 먹을 건지만 물었다.하지만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원래 이런 것이 아니었기에 너무도 이상했다.주민혁은 경계심과 탐색하는 듯한 기색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최수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는 최수빈이 겉은 부드러워 보여도 안에는 가시가 가득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진짜로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만 그 날을 접었고 대부분의 평온한 모습은 가면에 불과했다. 그 아래에는 훨씬 거센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태도가 이상해.”그가 입을 열었다. 막 잠에서 깬 탓에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지만 말뜻은 분명했다.“강지안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최수빈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침대 난간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며 뼈마디가 하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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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9화

원래는 이번 주말에 장례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하지만 며칠 전 저택 쪽에서 큰 화재가 나면서 집안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예정대로 진행할 거야.”주민혁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고 그 안에는 묘한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할머니는 생전에 이런 걸 특히 중요하게 여기셨어. 마지막 길만큼은 편안하게 보내드려야지.”최수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가 조용히 말했다.“나도 갈게요.”이에 주민혁은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봤다.노을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눈동자 깊숙한 곳의 감정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망설임, 갈등, 그리고 주민혁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다정함 같은 것들을 말이다.그 순간 그는 문득 강지안의 말이 전부 허튼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곧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준비할게.”비서에게 모든 걸 맡겨 쓸데없는 사람이나 일들이 더는 최수빈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최수빈은 ‘네’ 하고 짧게 답한 뒤, 먹을 걸 챙기러 가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손목이 붙잡힌 것이다.주민혁의 손은 차가웠다.손끝에는 얇은 굳은살이 느껴졌고 힘은 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그렇게 뒤를 돌아본 최수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주민혁의 눈동자와 마주쳤다.“최수빈.”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강지안이 네게 무슨 말을 했든 난 네가 동정 때문에 내 곁에 머물거나, 그 말 때문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건 원하지 않아.”그러다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아주 조금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날 미워해도 돼. 화를 내도 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도 되지만 억지로 감정을 눌러가며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난 네 동정 필요 없거든.”그는 한 번에 파도처럼 덮쳐오는 감정이 얼마나 버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런 걸 최수빈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랐다.이 말을 들은 최수빈은 갑자기 무언가에 심장이 쏘인 것처럼 움찔하며 아파졌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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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0화

그런데 발걸음이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 거실 옆에 늘 잠겨 있던 그 방으로 향했다.최수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방은 크지 않았지만 놀랄 만큼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벽 한쪽에는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책은 한 권도 없고 대신 자잘한 소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그중에 모서리가 깨진 토끼 모양의 도자기가 하나 있었는데 대학 시절 야시장에서 고리 던지기로 따냈던 것이었다. 나중에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고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누렇게 바랜 노트 한 권, 그 안에는 그녀의 엉성한 낙서가 남아 있었다. 삐뚤삐뚤하게 두 사람을 그려 놓고 옆에는 ‘주 대표님과 사모님’이라고 적은 것이었다.그리고 오래된 액자 하나, 그 안에는 최수빈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높게 묶은 포니테일, 흰 셔츠 차림에 작은 호랑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모습...그들이 처음 만났을 무렵 찍은 사진이었다.최수빈의 숨이 턱 막혔다.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서야 이 방 전체가 거의 그녀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책장 맨 위에는 그녀가 매년 생일마다 받았던 선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주민혁이 준 것도 있었고 그녀가 스스로 샀던 것도 있었다.이미 오래전에 버려졌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곳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벽에는 그녀가 무심코 붙여두었던 포스트잇들마저 그대로 붙어 있었다.[민혁 씨, 오늘도 또 지각.][짜증남.]그리고 그중 하나에는 빨간 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그런데 사실 웃을 때는 꽤 잘생김.]방 안쪽의 장식장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온통 그녀의 사진뿐이었다.풋풋했던 학생 시절부터, 그와 결혼한 뒤의 모든 순간들까지...심지어 몇 장은 최수빈이 잠든 사이 찍힌 사진이었다. 미간은 살짝 찌푸렸음에도 옅게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사진 아래에는 메모 한 장이 눌려 있었는데 바로 힘 있게 눌러 쓴 주민혁의 필체였다.[수빈이가 인상을 찌푸릴 때는 진짜로 화가 난 것.]최수빈은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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