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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의 모든 챕터: 챕터 651 - 챕터 660

722 챕터

제651화

야랑국 단 가의 눈앞에서 연기준의 첩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그러나 단평안은 이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신은 이미 상왕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상왕의 명만을 따를 것입니다. 부귀는 위태로운 곳에 존재하는 법. 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든든한 의지처를 얻고 상왕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어 언젠가 돌아왔을 때 한 사람 아래에서 높은 위치에 서고 싶을 뿐입니다.”단평안은 자신의 야망도, 연기준에게 기대하는 바도 숨기지 않았다.연기준은 표정 없이 말했다.“네 생각이 그렇다면 본왕은 너를 실망시킬지도 모르겠군. 본왕은 그 자리에 단 한 번도 흥미를 가져본 적 없다.”단평안은 오히려 확고했다.“말이라는 건 너무 일찍 할 필요 없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연기준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서인경은 단평안을 바라보며 그가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단 공자도 너무 일찍 말할 필요는 없지. 야랑국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먼저 버텨보고 말하거라.”단평안은 확실히 예전과 달랐다. 과거엔 먹고 마시고 노는 일밖에 몰랐지만 지금은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서도 눈빛 속에는 계략이 서려 있었다.서인경은 도저히 과거 자신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치던 그 모습과 지금의 그를 연결할 수가 없었다.“상왕비께서 염려 마십시오. 야랑국의 단 가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저는 절대 진국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단평안이 떠난 뒤 서인경은 의아해했다.“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그동안 고통을 견디며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것이지 장난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다. 두고 보자. 만약 이뤄낼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될 테니까.”서인경은 연기준이 태황태후 회갑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저희는 언제 할아버지와 고모를 보러 갑니까?”그러자 연기준이 곧 답을 내놓았다.“야랑국의 사신으로 가야 할 명분을 만들겠다. 그때 우회해서 들르자꾸나.”둘이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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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2화

봉한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줄로 지나가는 시위들이 곁을 스쳐가자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꼬막이는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서인경과 봉한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더니 가끔은 몸을 비틀며 뒤쪽을 확인해 보았다. 서인경은 계속 안고 있어 팔이 저려오자 중간에 한 번씩 자세를 바꿔 들어야 했다.여기저기 길을 묻고 찾으며 걸어가던 끝에 마침내 조금은 황폐해 보이는 궁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이런 곳을 지키는 환관과 궁녀들은 평소 권세 있는 주인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고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칠 돈도 없는 탓에 출세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문 앞의 환관 둘은 원망이 한껏 배어 있었다. 그들은 서인경을 보아도 누군지 몰라 빗자루를 들고 쫓아내려 했다.“가! 저리 비키거라! 여기는 너희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서인경은 문 앞의 쇠락한 풍경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땅에는 먼지와 낙엽이 두텁게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수년간 청소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어린 시절 이곳에 왔을 땐 여기 주인은 가장 총애 받는 황비였다. 문 앞의 환관과 궁녀들은 한 올의 머리카락도 허투루 두지 않았고 매일같이 바닥이 빛날 정도로 닦았었다.그런데 주인이 떠난 지금, 이곳은 차가운 잔재만이 남아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어릴 적 손톱으로 긁어보던 문간의 석사자도 한쪽이 크게 깨져 있었다.환관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자 조바심이 나 손을 들어 때리려 했다.“안 가느냐? 썩 물러나거라!”봉한설이 즉시 서인경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대담하구나! 상왕비를 때리겠다고? 네 목숨은 도대체 몇 개인 것이냐”환관은 그 말에 기절할 듯 놀라 빗자루를 떨어뜨리고 곧장 무릎을 꿇었다.“저는 죽어 마땅합니다!”서인경은 그를 무시하고 궁 안으로 향했다.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안쪽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하얗게 센 머리칼의 노인 한 명이 검소하지만 깔끔한 차림새로 나타났다. 바깥의 소란을 듣고 나온 듯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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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3화

서인경이 사방을 둘러보자 화련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저는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킬 수 있다는 게 저에게는 가장 큰 복입니다. 평소에는 할 일도 없으니 이렇게 곳곳을 깨끗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희태비께선 깔끔한 걸 좋아하셨으니 언젠가 영혼이 돌아오신다면 이 모든 것을 보고 흡족해하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희태비가 세상을 떠난 후, 이곳의 궁인들은 떠날 사람은 떠나고 죽을 사람은 죽어 화련 하나만이 충심으로 남아 있었다.서인경은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져 미소 지었다.“어머님께서는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순간, 화련은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정말 좋습니다. 희태비께서 이런 호칭을 들으셨다면 분명 크게 기뻐하셨을 겁니다. 왕비 마마, 이리로 모시겠습니다.”화련은 눈물을 닦고 서인경을 데리고 정전으로 향했다.정전은 사람이 살지 않아 지금은 불당처럼 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희태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다. 향불은 은은하게 피어올랐고 바닥의 목어에는 깊게 패인 자국이 남아있었다. 화련이 날마다 이곳을 지키며 공양해온 흔적이었다.서인경의 가슴은 묵직하게 차올랐다.“화 상궁, 고맙습니다. 연기준을 대신해 감사드리지요.”이 지극한 정성은 정작 연기준조차 매일 실천하지 못한 일이었다.화련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왕야께서는 온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하시니 수시로 공양하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희태비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조차 못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희태비께 죄를 짓는 게 아니겠습니까?”화련은 향 두 개를 밝혀 서인경과 봉한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자, 희태비께 예를 올리시지요. 생전에 희태비께서 가장 바라신 것은 왕비 마마께서 왕야와 혼인하여 자신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이 말을 듣고 서인경은 연기준과 예정연의 혼약에 대해 더욱 의문이 들었다.희태비는 결코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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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4화

“설마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희태비의 과거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단 말입니까?”화련은 서인경이 실망할까 차마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최근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연기준의 혼약 상대라고 떠들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화련은 연기준과 서인경의 감정이 흔들릴까 마음이 조마조마 해졌다. 그녀는 애써 기억을 더듬었고 마침내 헛수고가 아니라는 듯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희태비의 입궁 전 일을 알고 싶으시다면 열셋 째 왕야의 옛 시종이었던 무현 오라버니를 찾아가 보십시오. 그때 왕야께서 갑작스레 급서하신 뒤 무현 오라버니께서는 왕야의 장례를 치른 후 변방으로 나가 군에 입대하셨습니다. 후에 다리를 다쳐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지금은 동성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그를 찾아가신다면 무언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희망이 보이자 서인경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습니다, 화 상궁.”꼬막이도 때맞춰 활짝 웃어 보이자 화련의 얼굴에는 꽃 피듯 미소가 번졌다.그녀가 꼬막이를 정말 아낀다는 사실이 눈에 보이자 서인경은 그를 희태비의 침전에 잠시 맡겼다. 봉한설이 함께 지키고 있으니 화련이 조금이라도 그 아이와 더 함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서인경은 혼자 궁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문 앞의 두 환관은 아직도 땅에 엎드린 채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서인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울상이 되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왕비 마마, 용서하십시오! 누추한 종놈이 눈이 멀어 그런 것입니다! 부디 죄를 묻지 마시옵소서!”서인경은 그들을 담담하게 바라보다가 은전 두 개를 꺼내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두 사람은 오히려 더 크게 놀랐고 이마가 깨질 듯 머리를 박았다.“제발 살려주십시오! 때리시고 벌하시는 건 괜찮습니다. 부디 목숨만은…”서인경은 한숨을 내쉬었다.자신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본왕비는 너희를 벌할 생각도, 죽일 생각도 없다. 안에 모셔진 분은 어릴 때 연기준을 길러주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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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5화

서인경은 열셋 째 황자가 무슨 속셈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희태비의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아이를 보러 간 사람들은 모두 안쪽에 있었기에 마당에는 오직 그들 둘뿐이었다.열셋 째 황자는 그제야 안심하고 말을 꺼냈다.“황숙모, 황숙께 전해 주십시오. 대황자와 야랑국을 조심하라고 말입니다.”서인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대황자? 야랑국? 그자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인 것이냐?”“오늘 대황자께서 야랑국 팔황자를 데리고 폐하와 어전에서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침 제가 곁에서 폐하를 모시고 있었기에 조금 들었지요. 대황자께서는 막북에서 발생한 일을 자세하게 말했고 팔황자 역시 대황자 편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능지국에 사절로 있을 때 마침 그 근처에 있었다며 능지국 사람들이 수군댔다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우선 설산 빙봉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운을 떼더군요. 그리고 서 노장군께서는 죽지 않은 게 아니라 누군가가 구출해 간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고 했습니다.”서인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표정도 함께 굳어갔다.그러자 열셋 째 황자는 더욱 과장해 덧붙였다.“그리고 황숙과 황숙모께서 몰래 설산에 여러 번 다녀갔다는 말도 했습니다. 또 막북 설산은 백 년 넘게 얼어붙은 적이 없었고 마지막 빙봉 시기는 일불락 멸망 당시였다고 하더군요. 말투가 전부 서 노장군과 일불락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표정이 즉시 달라지셨어요. 황숙모,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미리 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그자가 뭐라고? 도대체 무슨 증거가 있다고 그러는 것이냐?”서인경이 돌연 얼굴빛을 바꾸며 격하게 반응하자 열셋 째 황자도 순간 멈칫했다.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무언가 단서를 찾으려 했지만 서인경은 억울함과 분노만 가득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우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감히 저런 말을 하는 것이냐?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전장과 백성에게 바치느라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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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6화

예정훈은 서인경의 사나운 두 뺨 세례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예정임이 표정을 굳히며 손을 들기 직전, 예정훈이 날렵하게 몸을 내밀어 서인경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았다.“비록 당신이 상왕비라 해도 저희 앞에서 함부로 날뛰며 무례를 저지를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은 저희 야랑국 팔황자를 때렸습니다. 이 일에 대해 진국은 반드시 저희 야랑국에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서인경은 예정훈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에 맞춰 그를 한 번 밀쳐냈다.“그렇다면 먼저 태자께서 제게 설명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팔황자는 가면을 쓰고 능지국 부장군을 사칭하며 능지국에 술책을 제공해 저희 진국을 해하려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이것이 야랑국 황제의 뜻이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겉으로는 진국과 친하게 지내는 척하면서 뒤로는 다른 나라들과 결탁해 우리에게 방해를 놓은 것 아닙니까!”서인경은 단번에 두 나라의 외교 문제로 논점을 끌어올렸다. 그때 어전에서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고 서인경은 곧바로 창끝을 대황자에게 돌렸다.“그리고 대황자! 막북 군영에서 저를 유산시키려 한 것도 모자라 불길 속에 저를 내던져 한 번에 두 목숨을 앗아가려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때는 폐하의 체면을 봐서 참았습니다. 한데 이제 와서 저희 할아버지의 공훈을 탐내며 훼손하려 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오늘 끝까지 따져봅시다.”말을 하다 보니 서인경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감히 여쭙겠습니다, 폐하! 저희 서 씨 가문은 모두가 충절입니다.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부모님도 그리고 제 고모까지... 모두 진국을 지키다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어찌하여 감히 외놈이 우리 조정의 충신을 의심하게 두는 겁니까?”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어전에서 튀어나오자 눈을 부릅뜨고 열세 째 황자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곧장 연기준을 바라보며 도움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줄곧 굳은 얼굴로 일관했다. 그 모습은 곧 서인경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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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7화

그 순간, 대황자는 자신에게 닥칠 큰 화를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이 일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난번에도 무사히 넘어갔으니 이번에도 그대로일 거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공문을 펼쳐 든 후 한 줄만 읽고 곧바로 안색이 바뀌었다.“여봐라! 대황자와 야랑국의 팔황자를 사형수들의 감옥에 가두거라. 내 명이 있기 전까지 그 누구도 그들을 만나선 안 된다!”대황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저는 억울합니다! 부디 살펴 주십시오!”예정임 역시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문 속에 자기 죄까지 적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애초에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가면 부장의 일은 서인경이 알게 되더라도 증거가 없으니 진국의 황제는 건드릴 수 없을 거라고.그를 처형한다면 이건 양국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저는 야랑국 황자입니다! 그러니 진국의 폐하가 저를 처벌할 권리는 없지요!”그 오만한 태도 탓에 황제의 표정은 더 차갑게 식었다.“내가 야랑국 황제와 통신하고 나면 내게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되겠지. 끌고 가거라!”그의 명이 떨어지자 즉시 어림군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욕설이 섞인 반항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을 끌어냈다.예정훈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서인경을 보다가 형식적인 어투로 물었다.“감히 여쭙건대, 폐하. 제 아우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 크게 노하신 겁니까?”황제는 공문을 그의 얼굴에 던지듯 내밀었다.“이 일은 야랑국 황제가 직접 내게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다 해도 나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예정훈은 문서를 받아 들고 훑어보다가 얼굴을 굳혔다.거기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변경 주둔 장군의 공문이 아니라 수년간 계속된 유아 실종 사건의 전말과 서인경이 추측한 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진국의 백성들을 금단 약물에 중독시켜 살수로 길러낸 일, 그리고 그 살수들이 어느 날 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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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8화

예정연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띤 채 다가왔다.“한데 본공주는 이곳의 풍경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도.”뒷말은 노골적으로 서인경에게 들으라는 듯 던진 말이었다.이것이 서인경과 예정연의 첫 대면이었다. 그제야 서인경은 그녀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그녀는 말 그대로 산뜻하고 아름다웠다. 피부는 희고 고왔으며 굴곡진 몸매에 자연스레 풍기는 요염함이 깃들어 있었다. 짙고 선명한 이목구비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서인경은 문득 궁금해졌다. 야랑국 여인들이 다 이런 것인지 아니면 오직 이 여인만 이런 것인지.서인경이 예정연을 살피는 동안 그녀도 서인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입가에 조소를 띠며 말했다.“어제 전각에서는 거리가 멀어 잘 보지 못했는데 지금 가까이서 보니 진국의 상왕비라는 사람이 고작 이 정도였군요. 가슴도 없고 굴곡도 없고... 저희 야랑국 여인의 절반도 못 따라오네요.”서인경은 자기 몸을 아래로 한번 바라보고 다시 예정연의 풍만한 앞가슴을 흘끗 본 뒤 태연하게 말했다.“맞습니다. 저는 정연 공주님과 달라서 가슴과 엉덩이로 먹고 살진 않거든요.”그 말에 예정연의 얼굴빛이 단번에 굳어졌다. 중원 여자들은 부끄럼 많고 조신하다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보통 여인이라면 이런 말에 얼굴을 붉히고 입도 떼지 못했을 테지만 서인경은 태연하다 못해 대담했다.예정연은 코웃음을 치며 연기준을 바라보았다.“이런 여인을 희태비께서 상왕비로 점지해 주신 겁니까? 중원에 오래 있으시다 보니 머리도 눈도 다 무뎌지셨나 봅니다?”연기준의 얼굴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으려는 찰나, 서인경의 손바닥이 먼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당신 같은 게 희태비를 입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건 다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예정연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인경을 바라보았다.“당신이 감히 저를 때린 것입니까? 저는 폐하를 대표하여 진국에 온 사신입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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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9화

“왕비 마마, 기다리고 계세요. 머지않아 당신 스스로 상왕비 자리를 내놓게 될 겁니다. 그때 되면 왕부에서 절을 하며 빌겠지요. 부디 제가 당신 남편을 데려가달라고 말입니다.”말을 끝낸 예정연은 승리를 확신한 듯한 미소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 짓고 간 그 미소가 계속해서 서인경의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녀는 너무도 자신만만했다. 그 당당한 태도를 보니 마치 자신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그녀 혼자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연기준은 서인경의 불안함을 눈치채고 가볍게 손을 감싸 쥐었다.“두려워할 것 없다. 어머니는 절대 우리를 속일 분이 아니다.”서인경은 마음속 깊은 곳에 걸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압니다. 한데 예정연은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녀의 손에 우리가 모르는 숨겨진 패가 있는 것 같아요.”고개를 돌린 순간, 예정연이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두고 보자고.”찝찝한 예감은 궁 밖으로 나설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희태비의 침전으로 돌아와 해맑게 웃는 꼬막이의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화 상궁은 연기준을 보자 급히 예를 올렸다.“상왕께 문안드립니다.”“화 상궁, 예를 삼가십시오. 그동안 어머니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아닙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일뿐입니다. 왕야, 저도 왕야와 왕비께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저를 따라오십시오. 희태비께서 남기신 유물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 아이가 생기신 후 왕야께 전해드리라 분부하셨습니다.”연기준은 어머니에게 유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그는 서인경과 시선을 맞춘 뒤 꼬막이를 열다섯 째 황자에게 맡기고 두 사람을 따라 편전에 들어섰다. 본전보다 작은 편전은 화 상궁이 머무는 곳이었다.그녀는 서랍 깊은 곳에서 검은 비단 상자 하나를 꺼내 연기준에게 건넸다.“선제께서 붕어하시던 날, 태비 마마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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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0화

그들은 희태비의 침전을 떠났다.화 상궁은 대문 앞에 서서 멀어져 가는 일행을 끝까지 배웅해 주었다.서인경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왠지 미묘했다.“화 상궁 곁에 사람을 붙여두세요.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연기준도 뒤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화 상궁은 문을 닫고 천천히 희태비의 위패 앞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앉아있던 화 상궁은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마마… 이제 저승에서는 편안하시겠지요? 왕야께서는 서 가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고 왕비 마마께서는 귀여운 세자를 낳으셨습니다. 세자는 너무 예쁘고 왕야의 어렸을 적 모습과 꼭 닮았더군요. 장성하면 분명 왕야와 열셋 째 왕야처럼 준수해질 것입니다. 두 사람은 지금 무척이나 다정합니다. 마마께서 저에게 맡기신 물건도 방금 왕야와 왕비 마마께 전해드렸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그들이 스스로 걸어가야 할 테지요. 한데 마마께서 생전에 가장 두려워하시던 일이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야랑국 덕비의 따님이 나타나 왕야와의 혼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 걱정 마십시오. 저는 결단코 그 혼약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왕야와 왕비 마마의 인연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두 분은 반드시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마마께서 이루지 못한 그 길을 두 분은 끝까지 완성하실 겁니다.”화 상궁은 말끝을 떨며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그리고 제사상 아래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의 위패를 꺼냈다.‘상왕, 연도현의 위패’그녀는 두 위패를 나란히 놓았다.“저는 압니다. 마마께서 생전에 열셋 째 왕야와 함께 할 날만을 꿈꾸셨다는 것을요. 오늘 제가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황천길 위에서는 부디 두 분이 부부로서 함께하시길. 누구도 더는 이별시키지 못하게 부디...”서인경과 연기준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바로 희태비가 남긴 비단 상자를 꺼냈다.상자에는 두 개의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알아보기 어려운 문양이 뒤얽혀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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