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991 - 챕터 1000

1013 챕터

제991화

이건은 제은의 다급한 낯을 보고 그저 웃음이 나왔다.“내가 네 말 들을 것 같아?”제은은 이를 악물었다.“네가 이람언니한테 말하면, 나 진짜 평생 너 안 놔둬.”이건은 제은이 이람을 많이 좋아한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람이 제은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만약 제은이 이람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지금쯤 경호원한테 시켜서 이건을 반쯤 죽여 놨을 것이다. 이렇게 힘도 안 실린 협박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이건 입장에서 제은이 이람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사실 꽤 호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제은이 좀 정상적이기만 했다면, 이건도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제은은 이건한테만 유독 정반대였다. 그 점만 봐도 제은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드러났다. 한 사람을 좋아하면 정말 그 한 사람만 좋아할 뿐, 그 밖의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미친개한테 단단히 물린 기분에, 이건은 기분이 더러웠다.“지금 나한테 끝을 봐 주고 있냐?”제은의 낯이 굳었다. 이를 거의 부술 듯 악물었다. 이건이 지금 제은을 협박하고 있었다.손 떼면, 이건도 이람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제은이 멈추지 않으면, 이건은 반드시 이람한테 다 말할 것이다.이람은 제은에게 너무 특별한 존재였다. 제은은 도저히 이람이 자기를 싫어하게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개새끼.’호화로운 룸 안에서 제은과 이건은 둘 다 엉망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 버티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제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식으로 몰린 건 정말 처음이었다. 제은한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사람 하나 손보는데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자꾸 손발이 묶이는 기분이라 더 답답했다.이건에게 물린 어깨는 욱신거리듯 아팠다. 그 통증까지 겹치자 제은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이건은 제은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고, 훨씬 더 처참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등은 꼿꼿했고, 눈에는 차가움과 물러서지 않겠다는 독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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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화

마치 10대 때나 하는 시리고 어설픈 짝사랑 같은 감정, 제은은 그런 건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마음이 큰 걸 수도 있었고, 애초에 아무렇지 않았던 걸 수도 있었다. 어쨌든 제은은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하고 괴로워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그게 생겨 버렸다.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 감각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제은은 오늘 밤 분명 잠을 못 잘 거라고 예감했다. 밤새 화만 날 것 같았다.그런데 다음 날, 제은은 이람에게 전화받았다.[이건이랑 무슨 일 있었어?]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이람의 목소리에 제은은 관자놀이가 지끈 아팠다.제은은 날이 밝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것도 고작 한 시간쯤 잤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이람한테 전화가 오자 머리가 욱신거렸다.그래도 제은은 곧바로 정신을 붙들었다.“별일 없었어요. 우리끼리 이미 다 풀었고, 얘기도 끝났어요.”이람은 어젯밤 수범에게서 전화받았다. 수범은 돌려 말했지만, 결국 이건과 제은이 크게 부딪혔다는 얘기였다.이람이 무슨 일이었는지 자세히 묻자, 수범은 자기는 그때 회사 일 처리하느라 같이 가지 못해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그래서 이람은 이건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이건은 그냥 한바탕 말다툼했을 뿐이라고 했다. 태도도, 말투도,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이건한테는 그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하지만 수범이 이람한테까지 말을 꺼낸 이상, 이람은 신경이 쓰였다. 제대로 알고 싶었다.이람이 말했다.[근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이상해?]제은은 웃으며 답했다.“언니 목소리 들어서 너무 좋아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저랑 이건이 둘 다 젊고 또래잖아요.”“또래끼리 작은 충돌쯤은 있을 수 있죠.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어요.”[그래.]이람은 사람을 쥐고 흔드는 성향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이 자라는 과정도 이람은 쭉 봐 왔다. 예전처럼 하나하나 다 신경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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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3화

“무슨 일이야?”이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말투에는 짜증과 숨길 생각조차 없는 혐오가 가득했다.마침 수범이 이건에게 먹을 걸 가져다주러 온 참이었다. 수범은 이건의 모습을 보며 속이 답답했다.제은이 한 번 손을 대자 타격이 너무 컸다. 다행히 제은이 제때 멈춰서 더 큰 일로 번지지는 않았을 뿐이었다.수범은 이제 진짜로 제은이 무서웠다. 몹시 싫었다.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더 확실히 알게 됐다.물론 수범은 이건의 태도도 이해했다. 이건은 원래 저런 성격이었다. 남의 비위를 맞추고 살살 눈치 보는 타입이 아니었다. 제은이 이렇게까지 심한 짓을 했는데도 이 정도 반응이면, 오히려 이건답게 많이 참은 쪽이었다.수범은 친구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빨리 통화가 끝나기만 바랐다. 괜히 길어지면 한마디 더 나오는 순간 또 일이 틀어질 것 같았다.수화기 너머로 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별일은 없어. 그냥 네 안부나 물어보려고. 우리 경호원이 너를 너무 세게 패서 문제라도 생긴 거면, 내가 네 누나한테 뭐라고 하겠어.]“우리 누나가 너한테 연락했어?”이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수범을 힐끗 봤다.수범은 뜨끔해서 시선을 피했다.이건은 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챘다.제은이 말했다.[응. 와서 따지더라. 조이건, 이번엔 내가 졌네. 네가 누나를 들고나오니까 내가 어쩔 수가 없더라.]이건은 제은의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싫었다.분명 먼저 일을 벌인 건 제은인데, 말끝마다 억울한 건 자신이라는 식이었다.애초에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생각하는 방식도 전혀 안 맞는 상대와는 말을 길게 섞을수록 더 기가 막혔다.이건은 말없이 있었다.제은이 다시 말했다.[됐어. 누가 너를 이람 언니 동생으로 태어나게 했겠냐. 너랑은 여기서 멈출게.]이건이 툭 내뱉었다.“바라던 바야.”제은이 물었다.[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이건은 거기까지 듣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는 차갑게 핸드폰을 두어 번 내려다본 뒤 수범을 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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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화

건민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수범은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부터 받았다. 제은이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건민이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자, 수범은 생각할 것도 없이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건민은 더 붙잡지 않았다. 수범은 전화를 끊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제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제은을 상대하려니 수범은 조금 압박을 느꼈다.제은은 전화 너머로 수범을 비꼬듯 말했다.“역시 내가 직접 불러야 움직이네. 지 대표 몸값 대단하다.”그 익숙한, 사람 위에 서 있는 듯한 말투에 수범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었다. 다행히 제은은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자기가 사과하려고 연락한 거라고,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꼬인 감정을 풀어 보자고 했다. 이건 쪽은 자기를 아예 상대조차 안 해 주니, 방법이 없어서 수범한테까지 부탁하게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제은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수범은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일에서는 이건과 한마음이었다. 그래도 회사 창업자는 이건과 수범 둘뿐이었다. 많은 일에서 수범에게도 결정권이 있었다. 수범은 이건에게 따로 말하지 않은 채, 제은을 만나러 갔다.카페는 꽤 분위기가 있었다.수범이 도착했을 때, 제은은 이미 와 있었다. 제은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제은은 아무 표정이 없을 때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기운이 있었다. 누구든 짜증 난다는 듯,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아가씨 특유의 분위기였다. 그래서 제은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 같았다.수범은 새삼 생각했다. 요즘 세상이 괜히 얼굴을 본다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강제은이라는 인간은 속이 썩을 대로 썩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은 제은을 제대로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제은이 가진 분위기는 분명 남달랐다. 저절로 고급스럽고 화려하다는 착각까지 얹히게 했다.수범이 안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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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5화

제은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손은 여전히 커피잔 위에 얹혀 있었다.“내가 갑자기 엄청 친절한 척하면 오히려 너만 놀랄 거야. 너도 안 믿을 테고. 나도 그런 식으로 꾸며 내는 건 못 해.”“내가 너희랑 관계를 좀 풀어 보려는 건 결국 이람 언니 때문이야. 너도 알잖아. 이람 언니는 내 우상이야.”“근데 이건이 이람 언니를 들먹이니까, 내가 더는 밀어붙일 수가 없더라. 나도 이람 언니가 나랑 이건 사이 문제로 신경 쓰는 건 싫어.”“그래서 그냥 서로 꼬인 거 풀고 넘어가려고 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도 전부 이람 언니 때문이고.”수범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해.”‘그래, 역시 이람 누나한테 말하길 잘했네.’‘이건이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거 봐, 뱀은 급소를 쳐야지. 그래야 한 번에 끝나지.’“그치?”제은이 웃었다. 깊은 눈 안에는 연기하는 티가 조금도 없었다. 예전에 이서림을 설득할 때처럼 자연스러웠다.제은은 협상하는 방식도, 말을 굴리는 감각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참 말을 길게 이어 간 뒤, 수범이 조금 경계를 푸는 기색을 보이자 제은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물론 나 좋은 사람 아닌 거 알아. 나도 물러날 생각은 있어. 따옴표 붙인 물러남이지만...”“근데 그 전에 내가 조이건을 한 번 세게 패고 나니까 속이 좀 풀렸거든. 그래서 그나마 한발 물러날 마음이 생긴 거야.”말투에는 아가씨 특유의 차갑고 높은 기세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수범은 입가를 아주 살짝 당겼다.‘진짜 강제은답다.’제은이 말했다.“내가 지 대표 회사 사람들까지 다 같이 불러서 밥 한 번 사려고 했어. 좀 제대로...”제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범이 끊었다.“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이건이가 강제은 씨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지금은 침대에서도 잘 못 일어나.”제은은 ‘침대에서도 잘 못 일어난다’라는 말에 입꼬리가 아주 짧게 올라갔다.‘하, 꼴좋다. 내 앞에서는 그렇게 버티더니, 뒤에서는 누워서 끙끙 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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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화

“안 돼.”예상대로였다. 이건은 제은의 도움을 거절했다.그것도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대놓고 싫다는 표정이었다.수범이 말도 없이 몰래 제은을 만나고 온 일에도 이건은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다.수범은 제은이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꺼내기 전부터 한참을 설득했다.가령 제은이 이람 누나 체면을 봐서 저러는 거라든지.수범은 입이 닳도록 좋게 설명했다. 제은을 향한 이건 태도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졌으면 해서였다. 그런데 돌아온 건 차갑기 짝이 없는 두 글자뿐이었다.예상 못 한 반응은 아니었다.수범도 이건이 크게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 일은 회사가 당장 돈이 없어 무너질 상황도 아니었다. 제은이 손을 보태는 건 없는 걸 살려주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걸 더 키워 주는 쪽에 가까웠다. 수범도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다.수범은 더 권하지 않았다. 대신 궁금한 걸 물었다.“강제은이 저렇게 한발 물러날 정도면, 네 누나가 진짜 엄청 대단한 사람인 건 맞나 보다. 앞으로는 우리 안 건드릴 것 같긴 한데. 넌 말이야, 이건아. 계속 그렇게까지 강제은을 대놓고 싫어할 거야?”제은이 정상적으로 굴기만 하면, 수범은 제은이 꽤 일 처리를 잘하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말도 잘했고. 세상 물정 모르는 타입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들한테 그렇게까지 못되게 굴었던 건, 결국 상대를 굳이 배려해서 맞춰 줄 생각조차 없었기 때문일 뿐이었다.이건은 미간을 좁혔다. 제은이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수범의 태도가 저렇게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은 수범에게 못을 박듯 말했다.“강제은 말은 그냥 흘려들어. 진짜라고 다 믿지는 말고.”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특히 제은 같은 부류는 더더욱 그랬다.자기 앞에 무릎 꿇고 개처럼 꼬리 흔들며 빌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여자였다. 그런 인간이 멀쩡해질 리 없었다. 달라진 척하는 거라면 모를까?물론 이건도 알고는 있었다. 제은이 자기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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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7화

진혁은 화제성이 엄청났다. 어디를 가든 팬들이 몰렸고, 인터뷰만 끝나면 돈을 쓰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화제에 오를 만큼 파급력이 컸다. 진혁이 한마디만 얹어 줘도 이건의 회사에 꽤 큰 바이럴이 붙을 수 있었다.진혁은 왜 자기가 그런 말을 해야 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제은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면, 진혁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이런 류의 질문은 선을 잘 알아서 지켜야 했다. 진혁은 거기까지 물을 위치가 아니었다.위로 올라가는 관계일수록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위치를 아는 감각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 꺼내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사교 자리에서 맞춰 주고 분위기를 읽는 건 진혁이 잘하는 쪽이었다.진혁은 자연스럽게 게임 제목이 뭔지만 물었다. 미리 조금 해 보고 익혀 두겠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관심 있는 척만 했다가 들키면 괜히 구설에 오를 수도 있으니까.제은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같이 게임 이야기를 이어 갔다.건민은 술을 잔뜩 가져왔고, 영미는 기술 담당처럼 붙어서 게임 설명을 맡았다.진혁은 다음 날 부을까 봐 술은 마시지 않았다. 대신 레몬이 들어가 있는 물을 마셨고, 시선은 내내 게임 쪽에 가 있었다.진혁도 가끔 스트레스 풀려고 게임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니 꽤 놀랐다.‘산해’는 완성도가 높았다. 제작 퀄리티도 뛰어났고, 게임 안에 녹아 있는 문화적 의미 부여도 선명했다.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처음에는 제은의 부탁을 들어주는 셈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진혁은 금방 이 게임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한참 게임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다들 지쳐서 소파에 늘어졌다.진혁은 미간을 가볍게 문지르다가 담요 하나를 집어 제은에게 덮어줬다.그 기척에 제은이 눈을 떴다. 제은은 눈을 차갑게 떴다.진혁은 그 시선을 받고 잠깐 움찔했고, 조금 난처한 낯빛으로 말했다.“미안, 깨웠네. 나 먼저 갈게.”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혁도 굳이 민망한 티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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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8화

수범은 제은을 꿰뚫어 보는 이건의 눈에 놀라면서 금방 납득했다.“강제은이 우리한테 보상하겠다고 했잖아. 우리가 다 거절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몰래 도와줄 줄은 몰랐네. 진짜 제대로다.”수범은 당연히 기뻤다. 반면 이건은 썩 기쁘지 않았다.기쁘지 않기보다는 마음이 복잡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제은이라는 점이 자꾸 걸렸다. 그게 이건을 묘하게 흔들었다.수범은 원래 인간관계에서만 속을 태우는 편이었다. 상대 체면이나 기분, 배경 같은 걸 자꾸 신경 썼다. 반대로 회사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오히려 덜 흔들렸다.제은이 쥐고 있는 자원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진혁과도 아는 사이였고, 부탁 하나 넣는 건 별일도 아닐 수 있었다.제은이 진심으로 힘을 보태겠다고 하면, 얻을 수 있는 건 지금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었다.물론 수범도 그렇게까지 계산적으로 멀리 보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면 제은을 이용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리니까.수범에게 지금 있는 작은 바람은 하나뿐이었다. 이건과 제은이 진짜로 좀 풀렸으면 좋겠다는 것. 앞으로 제은이 더 도와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손해는 없을 테니까.제은이 먼저 한발 물러난 지금이 관계를 조금이라도 돌려세울 기회처럼 보였다.그래서 수범은 이건에게 제은에 대해 좋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거의 세뇌에 가까운 수준이었다.“이건아, 너랑 강제은이 이렇게까지 틀어진 건 처음 얽힌 방식이 너무 별로였던 탓도 커. 서로 오해도 있었고.”“넌 강제은을 싫어하고, 강제은도 널 싫어하니까, 강제은도 너한테 악의부터 들이박았던 거잖아. 애초에 둘 다 감정이 나쁜 상태로 부딪혔으니까 더 심하게 꼬인 거고.”“근데 지금은 네 누나가 한 번 끼어들었잖아. 그게 완충 역할이 된 것 같아. 이번에 강제은이 하는 거 보면, 자기 편한테는 진짜 잘하는 타입 같기도 해. 통도 크고, 챙길 줄도 알고.”“너 안 믿을 거 아는데, 하건민이랑 소영미가 왜 그렇게 강제은 편 드는지도 좀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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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9화

진혁은 연예인이라는 위치에 있는 만큼, 아마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호감을 받아 왔을 것이다.진혁은 아직도 처음 제은이 놀자고 따로 불러냈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제은이 진혁을 바라보던 눈은 사람을 보는 눈이라기보다 물건을 고르는 눈에 가까웠다.진혁은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제은의 그 시선이 꽤 불쾌했다.그래도 남자라는 존재는 예쁜 여자한테 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제은의 성격 자체가 진혁의 호기심을 건드렸다.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제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원래 진혁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은 앞에서는 서서히 열등감 비슷한 게 올라왔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혁은 제은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다. 하물며 집안 배경 차이까지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진혁의 집 재력도 약한 편은 아니었다. 부모 자산도 수백억원대는 됐다. 그런데 제은이 속한 세계는 거기서 몇 단계가 아니라 몇십 단계는 더 위에 있었다.겉으로 쓰는 돈의 수준만 보면 비슷해 보일 수도 있었다. 명품을 사고, 비싼 걸 두르고, 그런 소비만 보면 겹치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진혁은 예전에 제은과 건민이 대화하는 걸 듣다가 투자 규모 얘기가 오가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몇백억 원쯤 되는 돈이 제은에게는 몇백만 원처럼 가볍게 오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몇백억 원은 진혁 부모가 평생 모은 전 재산에 가까웠다. 누군가에게는 인생 전체를 거는 액수인데, 제은한테는 그냥 굴릴 수 있는 여유 자금일 뿐이었다.그러니 제은과 줄다리기하게 되면, 진혁 쪽에는 애초에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진혁은 이게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만난 제은의 모습은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예전처럼 감정을 겉으로 바로 쏟아 내지 않았다. 가끔은 생각이 길어지는 듯한 때도 있었다.제은이 말없이 가라앉아 있으면, 진혁 머릿속에는 제헌의 차갑고 날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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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0화

제은의 목적은 이건과 바로 말을 섞는 게 아니었다. 제은이 사람한테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이건이 우연히 발견하게 만드는 쪽이 더 중요했다.이건은 차갑긴 해도 본바탕은 남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존심도 높고, 스스로 세운 기준도 분명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선한 쪽에 시선이 가기 마련이었다.예전까지 제은이 이건을 상대하던 방식은 전부 틀렸다. 제은이 악녀처럼 굴수록 기준이 강한 이건은 제은이 더 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건의 마음을 흔들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이건이 마음에서 제은을 완전히 반대편에 세워 버렸다.서림은 원래 몸이 약한 편이었다. 식사도 불규칙했고 많이 먹는 편도 아니라 저혈당 증세도 있었다. 제은이 몇 번이나 그렇게 지내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서림은 그때마다 몸매 관리도 되고 좋다고 했다. 마른 몸이 화면에는 더 예쁘게 나온다는 식이었다.제은도 몸매는 좋았다. 다만 서림처럼 힘없이 마른 쪽과는 전혀 달랐다. 제은은 어릴 때부터 개인 트레이너를 붙여 체력 관리를 받았고, 체조도 배웠다. 운동은 전반적으로 다 잘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에너지가 많아서, 맷집도 좋은 편이었다. 예전에 연나한테 맞았을 때도 제은은 그렇게까지 못 견딜 정도라고 느끼지 않았다. 반대로 서림이 그런 일을 겪었으면, 진작 눈물 콧물 다 쏟았을 것 같았다.서림은 식습관도 엉망이었다. 공항으로 가려고 나서는 길에도 아무것도 안 먹었다. 평소 같으면 제은이 꼭 뭐라도 먹였을 텐데, 오늘은 일부러 말리지 않았다.호텔에서 공항까지 오는 동안 서림은 이미 기운이 다 빠져서 녹초가 된 상태가 됐다. 몸이 흐물흐물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제은은 직접 서림을 배웅하러 나왔다. 대신 귀에 꽂은 이어피스 안에서는 영미 목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조이건이랑 지 대표가 왔어. 지 대표가 널 봤고, 방금 조이건한테도 말했어. 조이건도 너 쪽 한 번 보긴 했는데 그냥 스치듯 봤어. 지 대표 계속 이쪽 보고 있어.”제은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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