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001 - 챕터 1010

1013 챕터

제1001화

시선이 마주친 그 짧은 시간동안 둘 다 눈 안에 든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이 서로의 맨얼굴을 들켜 버린 것 같았다.제은은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내려다보며 머릿속이 잠깐 텅 비었다. 그 뒤에야 이곳 직원들을 불러 정리를 맡기고, 쏟아지지 않은 음식만 추려 서림에게 건넸다. 또 서림이 걱정하는 말도 적당히 들어주고 달랬다.그런데 제은의 머릿속에는 자꾸 아까 그 눈을 마주친 순간이 남아 있었다.이건은 배우도 아닌데, 왜 눈이 사람을 저렇게 찌르나 싶었다.이건도 시선을 거두고 다시 노트북 화면 속 문장들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이건 역시 아까 눈이 마주친 뒤로 머리가 두 박자쯤 늦게 돌아갔다. 그제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따라잡았다.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준비도 없이 시선이 부딪친 데다가, 제은까지 같은 VIP 라운지 안에 있다 보니, 이건은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희고 차가운 조명이 이건의 눈매 위로 내려앉았다.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도드라진 눈썹뼈는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거기에 얌전한 안경테까지 얹혀 있으니, 원래는 사람을 찌르는 듯한 이건의 냉랭함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차갑게 거리를 두는 기운이 짙었고, 한층 더 차분해 보이기도 했다.이건은 시야 한편으로 제은의 눈길이 자기 쪽을 스치고 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전에는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해 버렸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신경이 계속 쓰였다.이건은 기분 나쁘게 미간을 좁혔다.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고, 억지로라도 일에 집중하려 했다.수범은 이건을 몇 번 불렀다. 그런데 이건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아까부터 제은의 얘기를 꺼낸 게 이건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아예 대놓고 입을 닫아 버렸다. 수범도 이건에게 괜히 더 말 걸지 않았다.수범은 이건과 제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수범은 곧장 고개를 돌려 제은 쪽을 봤다. 마침 제은이 시선을 거두는 참이었다. 수범은 그 틈
더 보기

제1002화

수범은 워낙 사람을 잘 상대하는 편이라, 비행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서림과 제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거의 다 파악했다.이건이 화장실에 다녀와 돌아왔을 때, 수범은 이미 자리에 앉아 이건을 기다리고 있었다.이건은 수범이 무슨 말을 꺼낼지 뻔히 보인다는 듯, 수범이 입도 열기 전에 먼저 잘랐다.“입 다물어.”이번에는 수범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다만 곧바로 제은의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고 먼저 물었다.“이서림을 알아?”이건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서림 쪽은 보지도 않았다.“몰라.”수범은 어이가 없었다.“이람 누나 회사 소속 배우잖아. 그것도 모르냐?”이건의 머릿속에는 애초에 서림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은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굳이 기억해 두지 않았다.이건은 미간을 좁혔다.“그래서? 나더러 또 가서 인사라도 하라는 거야?”수범은 대놓고 비꼬는 말투를 듣고 입가를 씰룩였다.“아니. 그게 아니라 이서림이 전에 있던 회사에서 진짜 심하게 조리돌림당했대. 매니저가 억지로 술자리에 데리고 다니면서, 손버릇 더러운 인간들한테 당하기도 했고.”“그런데 우연히 그걸 누가 보게 된 거야. 마침 그 사람이 돈도 있고 힘도 있어서, 거금을 들여서 이서림 기획사 계약을 정리해 줬대. 그래서 결국 이람 누나 회사로 들어간 거고.”수범이 굳이 그 ‘좋은 일 한 사람’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이건은 바로 알아차렸다. 그 사람이 제은이라는 걸.그제야 이건은 서림 쪽을 한 번 슬쩍 봤다.서림도 이건이 시선을 준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서림의 눈에는 약한 적대감이 실려 있었다. 이건의 착각이 아니었다. 서림은 이건을 꽤 불편해하고 있었다.이건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서림은 이건이 기억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예상했던 대로 수범은 바로 화제를 제은 쪽으로 돌렸다.“내가 말 안 해 주면 진짜 상상도 못 할걸. 이서림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람이 누군지
더 보기

제1003화

이건은 심혜영한테 몇 번이나 연애나 결혼 얘기는 좀 그만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 특유의 집요함이라는 게 있었다. 심혜영은 알겠다고 해 놓고도, 다음에 만나면 또 똑같은 말을 꺼냈다.그래서 이건은 심혜영이 오기만 하면 바로 태도가 식었다.심혜영이 모진과 모연을 보러 가면, 이건은 아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심혜영이 이람을 붙잡고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제야 이건은 모진과 모연 옆으로 갔다.하준도 모진과 모연을 보고 있었다. 이건은 말없이 하준을 살폈다. 아직 하준을 자기 진짜 매형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하준이 자기 매형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이건은 나름대로 서하준이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그러다 중간에 하준의 핸드폰이 울렸다.“응, 알겠어. 내가 나가서 데리고 올게.”하준은 모진과 모연을 내려놓고, 이건에게 둘을 잠깐 봐 달라고 했다. 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준은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그때까지만 해도 이건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런데 하준이 다시 들어왔을 때, 뒤에 제은이 따라 들어오는 걸 보자 이건의 입꼬리가 내려갔다.굳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올해 새해 첫날은 아마 이건한테 가장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이건은 소파에 앉아 말없이 핸드폰만 만졌다. 제은을 없는 사람처럼 보아 넘기는 건 가능했다. 다만 목소리까지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제은은 사람이 많은 자리만 오면, 꼭 다른 인격이라도 꺼내 든 것처럼 굴었다. 아주 얌전했고, 붙임성도 좋았다.모진과 모연을 달래는 태도, 이람과 대화하는 방식, 하준 앞에서 보이는 비위 맞추는 듯한 태도, 거기에 약간 움츠러드는 듯 소극적인 기색까지. 이건이 봐 온 제은의 악독한 모습하고는 전혀 달랐다. 제은은 심혜영하고도 몇 마디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이건은 진심으로 제은의 성격이 비뚤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아니면 정말 수범의 말처럼 자신이
더 보기

제1004화

제은은 웃으며 말했다.“우리 엄마 아빠는 제가 사고만 안 치면 된다고 하셨어요. 연애하든 말든 제 뜻이 제일 중요하고, 따로 재촉도 안 하셔요.”“그래서 오히려 더 가까워졌어요. 저도 그런 쪽이 좋아요. 안 그러면 부담이 너무 크거든요. 혜영 이모도 이건 씨한테 그런 말씀 그만하세요.”심혜영은 제은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심혜영이 걱정이라고 꺼내는 말들이, 이건한테는 짐이 되고 있었다. 자꾸 묻고 건드릴수록 이건이 더 싫어한다는 뜻이었다.심혜영은 처음부터 제은을 꽤 좋아했다.“알았어. 나 이제 안 할게. 그냥 되는 대로 둬야지. 괜히 내가 더 말 얹었다가 귀찮은 사람 될라.”제은이 웃으며 받았다.“혜영 이모처럼 이해심 많은 사람을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요?”심혜영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집에서 맨날 사고를 치는 딸 생각이 났다. 날마다 새로운 일로 속을 뒤집어 놓는 자기 딸과 비교하면, 제은은 정말 말 잘 듣는 예쁜 딸 같았다.이건은 조금 놀랐다. 제은이 몇 마디 말로 심혜영의 마음이 열리게 만들고, 또 계속 재촉하면 자기가 얼마나 불편한지도 매끈하게 전하는 걸 똑똑히 봤다.이건은 저런 세세한 결을 잘 감지하는 편이었다. 다 보였다. 그렇다고 이건이 제은처럼 상황에 맞춰 몸을 굽히고, 변덕스러운 색을 갈아입듯 좋은 말을 골라 상대 기분을 챙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건의 거절은 늘 정면이었다. 직설적이었고, 때로는 상처를 남겼다.이건은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풀어서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대부분 속으로 꾹꾹 눌러 두었다. 바깥으로 나오는 건 냉담함과 무표정뿐이었다. 이람 앞에서만은 속에 든 약한 부분이나 감정을 조금 드러낼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건을 둘러싼 갑옷이 훨씬 두꺼웠다.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건은 새삼 이람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까다로운 동생을 오래 견뎌 줬고, 몇 년을 함께 버티면서도 끝내 동생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다. 이람은 정말 누나로서 동생인 자기한테 잘해
더 보기

제1005화

이건은 굳이 제은에게 차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대로 운전석으로 가 버렸다.배려도 없고, 매너도 없고, 하나같이 구석구석 다 마음에 안 들었다.제은은 내내 이건의 행동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지만, 싫다는 티는 굳이 내지 않았다.같이 돌아가는 길이면 뒷자리에 앉아도 됐다. 아마 이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은이 조수석에 타는 걸 본 이건은 미간을 깊게 좁혔다.제은은 못 본 척 안전벨트를 맸고 주소를 말했다.“가.”이건은 애초에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조용히 운전만 했다. 기사처럼 태우고, 빨리 데려다주고, 빨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여겼다.오늘은 새해 첫날이라 거리 곳곳에 행사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사람은 사람대로 많았고, 차는 차대로 밀렸다. 도로에 올라서자마자 차는 조금 가다가 또 멈추기를 반복했다.차 안에 제은이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건한테는 고역이었다. 아마 이건은 평생 쓸 인내심 중 상당 부분을 지금 이 시간에 쏟고 있는지도 몰랐다.제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창밖을 봤다. 새해 분위기가 짙었다. 젊은 사람들도 많았고, 다들 들뜬 낯이었다. 그러다 제은이 불쑥 말했다.“같이 새해 분위기 좀 즐기고 갈래?”제은은 이건 앞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고 있었다. 다만 늘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지점에서만 손을 대면 됐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운이 좋게 심혜영 말을 대신 막아 준 일 같은 것. 그런 건 소리 없이 이건 생각을 조금씩 바꿔 놓을 수 있었다.평소에는 제은도 자기 성격대로 굴었다. 너무 과하게 꾸미면, 이건이 제은을 더 가짜처럼 느낄 게 뻔했다. 그러면 오히려 손해였다.방금 이 질문은 제은이 그냥 떠오른 대로 던진 말이었다. 괜히 일부러 상황을 만든 건 아니었다.기분이 괜찮을 때 나오는, 가벼운 제안 같은 것이었다.제은은 원래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판을 벌이는 데도 익숙했다. 이건에게 뭔가 제안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이건도 기대를 저버리
더 보기

제1006화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 안에는 엔진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 막 부딪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적막 같았다.그런데 제은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은 아까 제은이 한 말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쯤 비웃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건은 자기 감정을 밖으로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제은이 거기다 대고 더 따지고 들 명분도 애매했다. 괜히 몰아붙이면 제은이 억지를 부리는 꼴만 될 뿐이었다.아무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제은은 이유도 없이 짜증이 치밀었다. 방금 자기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려 봤다.‘내가 틀린 말 했어?’그렇다. 먼저 이건을 건드린 건 제은이었다. 때리기까지 했다. 제은한테 잘못이 있는 것도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이건이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본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지금 제은이 보이는 좋은 태도는 진심이 아닌 연기였다. 그래도 이건은 그게 연기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건의 눈에는 제은이 정말 화해하려는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이 정도로 태도까지 꺼내 놨는데도 이건은 조금도 받아 주지 않았다. 이건은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고, 끝까지 제은의 잘못만 있다는 식이었다.제은은 생각할수록 더 짜증이 났다. 낯빛이 완전히 식었다. 제은은 차가운 얼굴로 창밖만 봤다. 표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한 손이 다른 손등을 꽉 파고들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눌린 기분이 배어 나왔다.조금만 둔한 사람이라도 제은이 기분 나빠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이건 역시 상당히 예민한 편이었다.한참 뒤, 이건이 마침내 차갑게 비꼬았다.“내가 먼저 시비 건 것도 아닌데.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너 혼자 열받았네.”제은은 바로 고개를 돌려 이건을 노려봤다.“무슨 뜻이야?”운전대를 잡은 이건은 고개를 잠깐 제은 쪽으로 돌려, 제은 얼굴 위에 올라온 분노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앞을 봤다. 목소리는 더 서늘
더 보기

제1007화

그렇다고 해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제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설령 제은이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제은은 그걸 누구에게도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뭘 고칠 생각도 없었다.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아까 했던 말들은 전부 제은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이었고, 남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무엇보다 제은은 자기가 틀린 말을 했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상대가 조이건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냥 답답할 만큼 고지식한 남자를 만난 것뿐이다. 이건이 굳이 제은이랑 정면으로 부딪치지만 않았어도 됐다. 말 한마디쯤 좋게 하고, 성격도 조금만 더 사람답게 부드러웠으면 됐을 텐데 하며 아쉬웠다.심지어 심혜영까지도 말만 하면 자꾸 시비를 거는 사람처럼 받아치고, 부드럽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 이건 같은 사람이랑 지내는 수범이야말로 진짜 고생이 많겠다고, 제은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그러다 제은은 비웃듯 웃었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이건 같은 인간은 확실히 다루기 어렵다. 그런데 일단 한번 무너뜨리고, 그 뒤에 한 방 더 제대로 먹이면 상처가 아주 깊게 남을 부류였다.반대로 가볍고 흐물흐물한 부류는 한 대를 때려도, 오히려 신나서 한 대 더 때려 보라고 반대편 뺨을 들이밀 수도 있었다. 그런 인간들은 제대로 아프게 하기가 어렵다.오늘 제은이 이건 대신 심혜영의 말을 받아낸 일도, 겉으로 보면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완전히 헛수고는 아니었다. 정말 아무 영향도 없었다면, 이건은 제은이 표정 굳히는 걸 보고 바로 받아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무의식적으로는 제은을 의식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참고 있었다.제은은 바로 그런 변화를 좋아했다. 조금씩 달라지는 흐름이 눈에 보이는 것. 제은의 손으로 뭔가를 바꾼다는 감각.그러니까 기다리면 됐다. 제은은 반드시 조이건을 아프게 할 생각이었다.아까 이건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때보다, 차라리 이렇게 받아치고 나니 제은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더 보기

제1008화

제은은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워서 이런 기본적인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가 더 치밀었다. 속이 들끓었지만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제은은 서림을 먼저 달랜 뒤, 서림의 매니저를 불러 밖으로 나갔다.몸을 돌리는 그때, 제은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매니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서림 앞에서 제은은 다정한 언니 같았다. 걱정해 주고, 달래 주고, 다 받아 주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매니저를 스치는 제은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뭐야... 평소에 보던 강제은이랑 왜 이렇게 달라?’평소의 제은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쪽이었다. 매니저들한테도 잘했고, 씀씀이도 컸다.병실을 나선 제은은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바깥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 눈이 잘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이었다.제은은 몸을 돌리자마자 매니저 뺨을 세게 때렸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우리 서림이를 어떻게 보고 따라다닌 거야, 어?”매니저는 맞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눈만 크게 떴다.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제은을 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저, 저는...”“저는은 무슨! 씨X. 내가 너희한테 너무 잘해 줬더니 일도 대충 해도 되는 줄 알았어? 어? 쓸모없는 것.”제은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건 애초에 벌어지면 안 되는 사고였다. 평소 서림 앞에서는 늘 ‘좋은 사람’으로 행동했다.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매끈하게 맞췄다. 나타날 때마다 서림 주변 사람들한테 작은 선물도 챙겨 줬다. 그러다 보니 경계심이 전부 풀린 모양이었다. 겉으로만 좋게 굴어서는 소용없었다. 어떤 것들은 한 번 세게 눌러 놔야 했다.제은은 매니저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다음부터 서림이랑 일할 때는 한순간도 한눈팔지 마. 알았어? 또 미리미리 안전 문제부터 확인해.”“위험해 보이는 거 있으면 네가 먼저 다 걸러. 오늘 같은 일 또 생기면, 네가 내 욕받이가 돼야 할 거야. 너 그거 감당 못 해. 알아들었어?”매니저는 겁에 질려 낯이
더 보기

제1009화

그전에도 이건을 대하는 제은의 태도는 훨씬 심했다. 다만 그때는 서로에 대한 미움이 정면으로 부딪치던 때였다. 지금은 일단 화해한 상태였다. 그러니 만들어 둔 이미지를 지키려면, 계속 덧입히고 또 덧입히면서 이건에게 ‘강제은이 진짜 달라졌다’라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그런데 방금 일로 그게 또 허사가 된 것 같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좋은 인상은 시간이 쌓여야 남지만, 나쁜 인상은 단 한 번이면 충분했다.거기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방금 제은은 아무 연기도 하지 않았다. 저런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건, 제은한테도 본능적으로 불쾌한 일이었다.적어도 이건한테는 저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제은은 어두운 불빛 아래서 이건과 잠깐 시선을 맞췄다. 이어서 손을 다시 꽉 말아 쥐었다. ‘됐어. 봤으면 본 거지.’서림이 다친 일로 화를 풀지 못하면, 제은은 오늘 밤 잠도 못 잘 게 뻔했다.제은은 매니저를 데리고 다시 서림 병실로 돌아갔다.다만 제은은 몰랐다. 제은이 몸을 돌린 뒤에도, 이건의 시선이 한동안 그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는 걸.이건은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눈에도 조금 변화가 생겼다.이건은 원래 조용한 곳을 좋아했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제은이 꾸며 낸 척만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제은은 서림을 진짜로 걱정하고 있었고, 자기 사람을 꽤 아끼는 쪽이었다.제은 태도가 거칠고 독한 건 원래 그랬다.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다만 아까 그 매니저는 제은의 저런 면을 처음 본 모양이었다. 놀라서 얼어붙은 게 다 보였다.본색이 드러났다는 건, 그만큼 제은이 진짜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이건은 눈을 내리깔아 핸드폰 시간을 봤다. 밤 10시였다. 자정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이건은 제은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손끝으로 몇 번이나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한참 뒤에야 겨우 한 줄을 보냈다.[차에서 기다릴게.]문자를 보낸 뒤, 이건은 먼저 차로 내려갔
더 보기

제1010화

제은은 이건의 호감을 얻고 싶었다. 이건은 도덕 기준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은이 남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면, 마음속 인상이 바뀔 리 없었다.제은은 이를 악물었다. 제은은 애써 움직였으면 반드시 그에 맞는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하던 일을 중간에 접는 것도 질색이었다. 겨우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는데, 화에 치우쳐 이건이 있는 걸 못 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게 제은에게는 몹시 패배감이 들었고, 시간도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제은은 굳이 대가를 받고 연기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성과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이쯤 되자 제은도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댄 채 새까만 고속도로 바깥만 봤다. 손을 몇 번 쥐었다가 폈고, 자기 옷깃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졸음이 몰려왔다. 차 안이 너무 조용해서일 수도 있었고, 이건 운전이 생각보다 안정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이게 제은 착각인지는 몰랐다. 분명 병원으로 올 때만 해도 이건은 차를 몰아붙이듯 달렸다. 빨리 끝내고 빨리 떠나고 싶다는 기색이 아주 선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차를 차분하게 모는지, 제은은 그게 잠깐 이상하게 느껴졌다.다만 졸음이 먼저 왔다. 그 생각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더니 바로 흐려졌다. 제은은 눈을 감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터지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제은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눈을 떴다. 바로 욕부터 하려다가 이내 누군가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아, 맞네. 오늘은 새해 첫날이잖아.’‘날짜가 막 넘어간 날이지.’제은은 앞 도로 상황을 봤다. 아직 고속도로 위였다. 제은은 계기판을 한번 흘겨봤다. 속도는 겨우 시속 백 킬로미터 남짓이었다.제은은 곧바로 짜증을 냈다.“왜 이렇게 천천히 가?”이건은 멀리 고속도로 바깥에서 터지는 불꽃들을 한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속도를 올렸다. 차는 금세 시속 백팔십 가까
더 보기
이전
1
...
979899100101102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