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461 - 챕터 1470

1620 챕터

제1461화

경주 외곽의 별장.심유빈은 이곳에 머문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인터넷에서 불거졌던 논란이 잠잠해진 뒤, 그녀는 이 별장에서 조병호의 애첩으로 지내고 있었다.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실상은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를 바 없었다.조병호에게는 여자가 많았다. 심유빈은 그중 한 명에 불과했다.게다가 조병호는 접대 자리까지 많아 며칠에 한 번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다.그래도 대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몇십억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 한 장과 생활 전반을 관리해 주는 비서도 붙어 있었다.하지만 그 사건 이후 임현욱의 신분을 알게 되면서 심유빈의 마음은 더욱 뒤틀렸다.소예지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정작 자신은 제 손으로 자신의 인생을 막다른 길까지 몰아넣고 말았다.‘임현욱이라니.’‘그런 남자를 눈앞에 두고도 소예지는 왜 선택하지 않았을까.’‘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심유빈은 값비싼 실크 잠옷을 입은 채 통유리창 앞에 섰다.아래층의 잘 가꿔진 정원을 내려다봤다. 그러는 사이 임현욱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쉽게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군복을 입었을 때든 정장을 입었을 때든, 수많은 남자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심유빈은 예전에 소예지가 기지로 일하러 갔던 때를 떠올렸다.당시 고이한도 다급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었다.소예지를 임현욱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움직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같은 날, 심유빈 역시 일부러 찬물로 샤워하며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결국 중환자실에 실려 간 뒤에야 고이한을 불러들였다.지금 돌이켜 보면 예전의 그녀는 정말 위험한 선택을 수없이 반복했다.고이한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 때문에 진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그렇게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한때 심유빈도 남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외모도 출중했다. ‘피아노의 여신’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다.그때 조금만 더 신중하게 선택했다면 지금처럼 처참한 신세로 전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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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2화

정신이 든 순간, 소예지는 자신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급히 고개를 드니 미소 짓고 있는 고이한과 눈이 마주쳤다.소예지는 순간 얼굴이 뜨거워져 서둘러 몸을 바로 세운 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고마워.”“뭘 그런 걸 가지고.”고이한이 자연스럽게 대답한 뒤 물었다.“잘 잤어?”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았어.”“지금 우리 집으로 가서 저녁 먹자. 마침 하슬이도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 해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거든.”“그래.”소예지도 딸이 무척 그리웠다.한편 고씨 저택에서는 고이한과 소예지가 함께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는 소식을 듣자 진가영이 곧바로 가정부들에게 분주히 준비를 시켰다.고수경도 무척 기뻐했다.이번에 오빠가 직접 소예지를 데리러 갔다는 건,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까.예전 같았으면 소예지는 어떻게든 고이한과 마주치는 일을 피했을 것이다. 직접 마중을 나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저녁 여섯 시 반, 노을빛이 내려앉은 가운데 소예지와 고이한은 나란히 고씨 저택의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고하슬이 기쁜 얼굴로 뛰어나왔다.“아빠, 엄마!”고하슬이 신이 나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소예지가 먼저 다가가 딸을 품에 안았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이는 조금 더 자란 것처럼 보였다.“엄마, 아빠가 엄마를 데리러 갔던 거예요?”고하슬이 신이 나서 묻자 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아빠 잘했죠?”고하슬이 갑자기 어른스러운 말투로 한마디하자 소예지는 순간 멍해졌다.옆에 있던 고이한이 웃으며 몸을 숙였다.“그러니까 엄마도 아빠한테 잘해 줘야 해요!”소예지는 할 말을 잃었다.“가자. 아빠랑 엄마 배고프니까 같이 들어가서 저녁 먹자.”고이한은 딸의 작은 손을 잡았다. 소예지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이번에는 급히 오느라 선물조차 챙기지 못했다.“소예지 언니, 왔어요.”마중 나온 고수경이 소예지를 위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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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3화

고하슬은 목욕을 마친 뒤 침대에 올라가 그림책을 펼쳐 들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엄마가 침대에 올라와 책을 읽어주기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소예지도 씻고 침대에 올라가 딸을 품에 안은 채 그림책을 펼쳤다.그러다 고하슬이 전보다 훨씬 많은 글자를 읽는 것을 보고 궁금해졌다.“요즘은 누가 글자를 가르쳐줬어?”“고모가 매일 시간을 내서 가르쳐주세요. 저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고하슬이 해맑게 대답했다.소예지는 마음이 따뜻해져 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응, 정말 잘했네.”모녀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고하슬이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그러다 아이는 점점 졸음이 쏟아졌는지 소예지의 팔을 베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반면 소예지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조용히 팔을 빼낸 뒤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가 섰다.아버지가 그해 병간호 기록을 남긴 이유, 고이한의 진심 어린 고백 그리고 해변에서 나눴던 긴 대화까지 이번 해외 일정 동안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그 과정에서 소예지는 그의 변화를 직접 지켜봤다. 그의 솔직함도, 묵묵한 노력도,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도 모두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너무 많은 생각이 몰려오자 오히려 긴장이 풀리며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소예지는 이불을 들추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그러자 고하슬은 따뜻한 온기를 찾아 자연스럽게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숙여 곤히 잠든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다음 날 아침.고이한이 위층으로 올라왔다.오늘은 고하슬을 회사로 데려갈 예정이었다.소예지도 그가 자신이 마음 편히 실험실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하슬 역시 회사에 가고 싶어 했기에 신이 나서 아빠를 따라 집을 나섰다.소예지가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 최근 계속 교체 중이던 장비들은 어느새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소예지, 왔구나.”이서연이 자료를 안은 채 로비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귀국하자마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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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4화

“내가 처음 프로젝트 팀원을 선발할 때 너를 뽑지 않았던 거 기억나?”양정화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그 전에 고 대표가 나에게 미리 부탁을 해왔어. 팀원을 뽑을 때 더 엄격하게 심사해 달라고 했지. 이미 백혈병 프로젝트를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결국 네가 실력으로 다시 프로젝트팀에 들어온 거야.”소예지는 당시 젊은 패기로 양정화와 내기를 벌였던 일을 떠올렸다.돌이켜보면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기억나요.”소예지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그때는 고 대표도 네 실력을 제대로 몰랐어. 나중에 네가 월반 시험 성적을 받았을 때 보니 꽤 놀란 눈치더라. 따로 나한테 전화해서 너를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양정화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때 알았어. 성격은 차가워 보여도 너에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소예지는 그날 고이한에게 들었던 고백을 떠올렸다.그가 실험실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은 이유는 업무를 통해 자신과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소예지의 연구로 수익을 내기 위해 투자했다고 보기에는 고이한 명의의 바이오메디컬 회사는 아직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뇌-컴퓨터 프로젝트 역시 이제야 막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을 뿐인데 이미 투자한 금액은 천억 원에 육박했다.받은 도움만 따지자면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계산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이한이 처음 조 단위의 자금을 들여 아버지의 실험실을 마련해 주었을 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소예지가 백혈병 돌연변이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고이한은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그 점만 놓고 봐도 당시 소씨 집안은 이미 고이한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양 교수님, 이런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소예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너희 둘 다 아직 젊잖아. 서른도 안 됐지? 지난번에 고 대표를 봤는데 머리가 온통 하얗게 세어 있더구나.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어.”양정화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소예지는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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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5화

ㄴ양정화와의 대화를 마친 소예지는 다시 생각을 연구로 돌렸다.이번 M국 교류회는 그녀에게 새로운 연구 방향에 대한 많은 영감을 주었다.의학은 원래 작은 가능성 하나까지도 끝없이 검증해야 하는 분야였다.소예지는 연구비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줄이고 오차 범위도 가능한 한 낮추려 했다.이번 프로젝트는 별도로 마련된 연구 자금이 투입되는 새로운 분야인 만큼 더욱 신중해야 했다.오후가 되자 소예지는 회의를 열어 새로운 연구 방향을 발표한 뒤 안시윤에게 말했다.“내일 나랑 같이 MD 가서 회의하자. 거기 신규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우리한테도 참고가 될 것 같고 특허 세 건 사용권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해.”곁에 있던 이지원이 웃으며 말했다.“이런 일은 고 대표한테 전화 한 통만 해도 해결되는 거 아니야?”소예지는 옅게 웃었다.“그래도 밟아야 할 절차는 밟아야지.”소예지는 언제나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명확히 나누는 사람이었다.오후 다섯 시가 되자 고이한의 차가 실험실 앞에 멈춰 섰다.고하슬은 작은 책가방을 멘 채 차 안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예지가 문을 열고 타자 고하슬은 곧장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소예지는 딸을 안으며 물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고하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고이한을 바라봤다.“아빠, 오늘 저녁 뭐 먹을까요?”“엄마가 먹고 싶은 걸 먹자.”고이한은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려 뒤에 앉은 모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잠시 생각하던 소예지가 입을 열었다.“집 근처에 레스토랑 하나 있는데 하슬이가 좋아하는 곳이야.”“좋아. 길만 알려줘.”고이한은 백미러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식당에 도착한 뒤 고하슬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주문했다.소예지는 오후에 간단히 뭘 먹고 온 탓인지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맞은편에 앉은 고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 입맛 없어?”“오후에 간식 먹었더니 아직 배가 안 고파.”소예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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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6화

소예지는 확실히 조금 힘겨워 보였다.고이한이 몸을 숙여 고하슬을 받아 안는 순간, 소예지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고이한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소예지도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잠시 시선이 얽혔다.소예지는 먼저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고이한은 딸을 품에 안은 채 희미하게 웃으며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소예지는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문을 열어준 뒤 고이한이 신발을 갈아 신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자 소예지도 함께 따라 올라갔다.한 사람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사람은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주며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며 하슬이를 재웠다.딸을 재우는 일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 너무도 익숙했다.딸아이에 관한 일만큼은 두 사람은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다.고하슬이 잠든 뒤 소예지가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양희순이 차를 준비해 두었다가 뒤이어 내려온 고이한에게 말했다.“고 선생님,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고이한은 고개를 끄덕인 뒤 소예지를 바라봤다.“마침 호텔 상반기 매출과 관련해서 당신 의견을 듣고 싶은 게 있었어.”소예지는 관련 자료를 이미 검토한 상태였다.전반적인 실적은 안정적이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새로운 계획이 좀 있는데 당신 의견도 듣고 싶어.”고이한은 소파에 앉아 양희순이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양희순은 두 사람을 배려하듯 거실을 조용히 빠져나갔다.넓은 거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고 옅은 차 향이 공간을 채웠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그래, 말해봐.”소예지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고이한은 벨모아 호텔의 브랜드 고급화와 사업 확장 계획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혹시 소예지가 이해하기 어려울까 봐, 전문 용어 대신 최대한 알기 쉬운 표현으로 세계 호텔 시장의 흐름까지 다시 풀어 설명해 주었다.소예지는 다시 한번 그의 사업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인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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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7화

소예지는 고이한을 한 번 바라본 뒤 재빨리 감정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았다.오늘 소예지는 심플한 아이보리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우아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난 채 남성 임원들이 대부분인 회의 자리에서도 그녀 특유의 맑고 단정한 분위기는 더욱 돋보였다.안시윤도 자리에 앉자 엔지니어가 앞으로 나가 발표를 시작했다.소예지는 집중해서 발표를 듣고 있었고 옆에 앉은 안시윤은 빠짐없이 내용을 필기했다.고이한은 시종일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겉으로는 회의에 집중하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소예지에게 향했다.발표가 끝나자 주현우는 소예지에게 새 연구의 문제점을 짚어달라고 요청했다.소예지 역시 몇 가지 문제와 제안이 있었다.그녀는 기술적 난점을 논리정연하게 분석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뛰어난 지성과 연구를 향한 집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수많은 시선 중에는 감탄과 자부심, 그리고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바라보는 듯한 애틋함이 담긴 시선도 하나 있었다.소예지가 이 분야에서 얼마나 뛰어난지는 주현우를 비롯한 몇몇 임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그들은 그녀가 회의에서 여유롭게 전체 흐름을 장악하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본 적이 있었다.한때 MD의 혁신적인 기술 역시 소예지의 이론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지금도 그들은 그 이론을 토대로 생명공학 분야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안시윤의 시선 역시 계속 소예지에게 머물렀고 존경과 감탄이 그의 눈에 뚜렷하게 어려 있었다.아직 젊은 그는 자신의 뜨거운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했다.안시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표정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젊고 생기 넘치는 그 모습이 고이한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건드렸다.고이한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조금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잔의 표면을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그는 누군가가 그런 눈빛으로 소예지를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그 감정이 단순한 존경과 감탄에 불과하더라도 고이한에게는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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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8화

주현우는 오늘 회의에서 몇 가지 반가운 조짐을 읽어냈다.어쩌면 소예지가 앞으로 MD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그렇다면 MD의 특허를 그녀에게 아낌없이 제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소예지가 주현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감사합니다, 주 대표님.”“저한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고 대표님께 감사드려야죠. 어쨌든 그 권한을 내주기로 결정하신 분은 고 대표님이니까요.”주현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은 그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소예지는 살짝 놀랐다가 고이한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고마워.”고이한의 시선은 줄곧 소예지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그 눈빛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듯 깊고 고요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당신 연구라면 그만한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어.”그 말을 듣고 나서야 몇몇 엔지니어들도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소예지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그녀는 지나치게 직접적인 고이한의 시선을 피한 채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MD의 신뢰와 지원에는 감사해. 하지만 밟아야 할 절차와 지불해야 할 비용은 우리 팀도 규정대로 처리할게.”소예지는 여전히 공적인 일은 원칙대로 처리하는 편을 선호했다.이렇게까지 일방적인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특히 이번 연구는 소예지 개인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였기에 고이한이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몰아주는 건 팀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고이한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그는 소예지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듯 더는 고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주현우는 말을 마치자 팀원들과 함께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안시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한 뒤 소예지에게 말했다.“예지 누나, 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실험실로 돌아갈게요.”소예지가 안시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가는 길 조심해.”“네.”안시윤은 고이한을 향해서도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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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9화

소예지도 사실 며칠 전부터 학교 주변 매물을 알아보고 있었다.인정하기 싫어도 고이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그 학교 인근의 학군 부동산은 워낙 인기가 많았다. 특히 환경이 좋고 보안이 철저한 단독주택과 고급 아파트는 일반 부동산 중개업체를 통해서는 좋은 매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게다가 가격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이한에게 별도의 경로와 인맥이 있다면 훨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이번에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었다.가능하다면 마당이 넉넉해서 고하슬과 젤리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래. 그럼 단독주택으로 좀 알아봐 줘.”고이한이 옅게 웃었다.“알겠어. 바로 사람 시켜서 매물 알아보라고 할게. 9월 전에는 이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맞춰볼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고이한은 소예지가 좋아하는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준 뒤, 화제를 MD의 신규 연구 프로젝트로 돌렸다.그는 소예지의 더욱 깊이 있는 의견을 듣고 싶어 했고 MD의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소예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고하슬의 초등학교 입학 준비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다.과외 선생님을 구하는 문제와 아직 영어 회화가 유창하지 않은 점까지 자연스럽게 상의했다.“조랑말을 한 마리 키우는 건 어때? 주말마다 승마장에 가서 타게 하면 하슬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고이한이 나직하게 말했다.승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젓가락을 쥔 소예지의 손이 살짝 굳었다.머릿속에 자신도 모르게 오래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4년 전, 고이한과 심유빈 그리고 하슬이가 함께 승마장에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그때 가슴 깊이 파고들었던 통증과 씁쓸함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고이한을 바라봤다.“당신, 하슬이한테 승마장에서 말 사준 적 있지 않아?”고이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아직 없는데.”“4년 전에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입원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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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0화

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고이한을 바라봤다.예전에 그가 사람을 시켜 자신과 강준석의 사진을 몰래 찍게 했던 일도, 한밤중에 찾아와 두 사람의 관계를 추궁했던 일도 잊지 않고 있었다.“그럼 그때 정말 나랑 강 선배가 사귄다고 생각했던 거야?”소예지가 턱을 괸 채 물었다.고이한은 단호하게 되물었다.“그럼 당신이 말해봐. 강 박사가 M국 최고의 연구 환경을 포기하고 당신을 따라 귀국한 이유가 뭐였는데?”소예지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당신, 강 선배를 조사했어?”“응. 강 박사에 대해 알아야 했으니까.”고이한은 순순히 인정한 뒤 말을 이었다.“하지만 한 가지는 내가 잘못했어.”“뭔데?”소예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강 박사가 여러 번 당신의 진짜 실력을 봐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어.”“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적어도 그 일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지는 않았을 거야.”고이한의 목소리에는 깊은 후회가 배어 있었다.수많은 감정이 뒤엉킨 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내가 강 박사를 너무 적대적으로만 봤어.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당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훨씬 일찍 알아봤을 텐데.”“그랬다면 당신이 그런 억울한 일을 겪지도 않았을 거고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그렇게 무리해서 월반하고 졸업할 필요도 없었을 거야.”고이한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덧붙였다.“결국 내가 만든 결과야.”소예지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그 시절은 그녀에게도 몹시 힘든 시간이었다. 자신의 연구 경력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시기이기도 했다.연구팀에서 배제됐고 그녀가 품었던 꿈과 이뤄낸 성과는 모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잠시 후 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고이한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때 양 교수님에게 연구팀을 꾸리라고 한 최종 목적이 백혈병 연구였어?”고이한은 확실하게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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