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471 - 챕터 1480

1620 챕터

제1471화

소예지는 순간 멍하니 굳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젓가락을 들어 새우를 집어 입에 넣었다.맞은편에 앉은 고이한은 조심스러운 기대를 품은 채 소예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가 새우를 먹는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오랜 시간 굳어 있던 얼굴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아온 듯한 미소였다.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이한과 눈을 마주쳤다.“당신도 먹어.”고이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소예지는 가볍게 눈을 깜빡이며 그의 희끗하게 변한 머리카락을 유심히 바라봤다.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고이한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관자놀이 부근의 머리카락을 쓸었다.“뭘 그렇게 봐?”소예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검사 한번 받아볼래?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외용 치료도 병행하면 좋아질 수도 있어.”고이한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온기가 차올랐다.소예지가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그래. 당신 말대로 할게. 이쪽 분야 전문가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알아봐 줘. 치료에도 잘 협조할게.”고이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남은 식사를 계속했다.식당을 나선 뒤 소예지가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 내가 데려다줄게.”“당신은 실험실로 돌아가. 나는 김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게.”고이한은 그녀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는 순간, 고이한이 문득 입을 열었다.“모레 만찬이 하나 있는데 파트너가 필요해. 당신이 같이 가줄 수 있을까?”소예지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꼭 가야 하는 자리야?”“당신이 나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고이한이 나직하게 부탁했다.소예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시간 내볼게.”소예지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자 뒤에 서 있던 고이한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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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2화

심유빈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한껏 치장하고 나니 확실히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하지만 이 화려한 겉모습도 조병호 같은 사람들에게는 결국 돈으로 꾸민 장식품에 불과했다.다만 심유빈도 잘 알고 있었다.조병호의 곁을 떠나는 순간, 지금 누리고 있는 화려한 생활조차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게다가 그녀는 조병호의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그가 자신에게 싫증을 느끼기 전까지는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저녁 여섯 시가 되자 조병호가 보낸 기사가 드레스숍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심유빈은 차에 올라타 조용히 눈을 감았다.오늘 만찬이 조병호의 지인들만 모인 자리이기를, 그리고 절대로 그 사람만큼은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조병호가 어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방탕하게 유흥을 즐기는 재벌 2세들이었다.고이한이나 하종호, 윤하준 같은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자리와는 거리를 두는 부류였다.마침내 차가 어느 호텔 앞에 멈춰 섰다.심유빈은 차에서 내려 눈앞의 고급스러운 호텔을 올려다봤다.그 순간 이유 모를 불안과 초조함이 가슴속에서 일었다.그녀가 이브닝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몇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다가와 호텔 로비 앞에 멈춰 섰다.차가 그대로 심유빈의 앞을 가로막았다.속으로 불평하려던 찰나, 운전석 문이 열리며 김경환이 모습을 드러냈다.심유빈은 깜짝 놀라 황급히 로마식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김경환은 뒷좌석 쪽으로 돌아가 누군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심유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잿빛 새틴 드레스를 입은 소예지가 차에서 내렸다.조명 아래에서 소예지는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있었다.가느다란 허리와 눈처럼 하얀 피부가 드러났고 조명 아래 그녀는 진주처럼 은은한 분위기를 풍겼다.그때 반대편 차 문이 열리며 또 한 사람이 내렸다.놀랍게도 고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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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3화

심유빈은 등을 곧게 편 채 조병호의 팔을 붙잡고 로비로 들어섰다. 얼굴에는 억지스러운 미소를 걸었다.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심유빈은 하종호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며칠 전 언론에서 하종호가 해외에서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그러니 오늘 밤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은 고이한과 소예지였다.어쩌면 윤하준도 와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 와 물러설 여지는 없었다.어차피 이 사교계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언제까지고 그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제 와 계속 도망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무엇보다 고이한과 소예지가 나란히 만찬에 참석한 모습을 보고도 두 사람의 관계를 쉽게 믿을 수 없었다.‘소예지가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정말 고이한에게 아무런 앙금도 남아 있지 않은 걸까?’적당한 기회만 잡는다면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다시 균열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심유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렇다면 오늘 밤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심유빈은 고이한과 소예지의 신경을 긁어 두 사람의 즐거운 밤을 망쳐놓을 생각이었다.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최상층에 도착했다.문이 열리자 화려한 조명 아래 펼쳐진 호화로운 연회장이 한눈에 들어왔다.심유빈은 잠시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한때 그녀는 이런 만찬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동행이 아니고서는 이런 자리에 다시 발을 들이기조차 어려웠다.심유빈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잠시 스쳤지만 이내 익숙한 요염한 표정으로 감정을 감췄다.그녀는 조병호의 팔을 붙잡은 채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를 정확히 찾아냈다.고이한이었다.고이한은 소예지와 함께 연회장 중앙에 서서 나이 지긋하고 기품 있는 재계 거물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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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4화

“조 대표님도 참, 사람 민망하게 왜 그러세요.”심유빈은 반쯤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조병호를 살짝 밀어냈다.그때 연회장 중앙에 선 고이한을 발견한 조병호가 심유빈의 허리를 짓궂게 꼬집었다.“예전에 그렇게 가까웠던 사이인데 가서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심유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고이한에게 향했다.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옆에 이미 다른 분이 계시는데 저 같은 사람을 기억이나 하겠어요?”“조 대표님, 고 회장님과 인사 나누고 싶으세요? 제가 소개해 드릴까요?”유 대표는 이 기회에 조병호에게 생색도 내고 고이한과의 인맥까지 넓혀볼 생각이었다.조병호는 어색하게 넥타이를 매만지며 손을 내저었다.“됐어.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데 괜히 방해할 필요 없지.”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눈빛에는 감추지 못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고이한은 경주 사교계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곳에 얼마나 막강한 인맥을 두고 있는지는 조병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아무리 오만한 조병호라도 자신이 고이한과 대등하게 어울릴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심유빈은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부드럽게 맞장구쳤다.“맞아요. 굳이 저쪽 사람들까지 신경 쓸 필요 없죠. 우리는 우리끼리 즐겨요.”유 대표는 심유빈의 노골적인 맞장구를 알아챈 듯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심유빈은 불쾌함을 감춘 채 오히려 유 대표와 시선을 맞췄다. 조병호에게만 의지할 수 없는 이상, 이용할 수 있는 인맥은 하나라도 더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유 대표님, 오랜만인데 한잔하시죠.”유 대표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듯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들었다.“좋습니다. 오랜만의 재회를 위해 건배하죠.”곧이어 조병호의 친구 몇 명이 더 다가왔다.심유빈은 그들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끌어놓고도 상품을 품평하듯 자신을 훑는 눈길에는 속이 뒤틀렸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고이한과 소예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두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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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5화

“당신 인생은 당신이 선택한 거고 그 길을 걸어온 것도 당신이에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어요.”소예지가 담담하게 받아쳤다.“여기서 혼자 고고한 척하지 마요.”심유빈은 갑자기 몸을 바로 세우며 날카롭게 말했다.“소예지 씨, 제가 하나 알려드릴게요. 남자는 다 똑같아요. 특히 고이한처럼 모든 걸 가진 남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법이에요.”“지금 당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이용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에요.”“언젠가 당신보다 더 쓸모 있는 여자가 나타나면 당신도 저처럼 가차 없이 버려질 거예요.”심유빈의 눈빛에는 짙은 원망과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마치 가슴속에 쌓인 원망을 모두 소예지에게 쏟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듯했다.“세상에는 당신보다 젊고 예쁜 여자가 얼마든지 있어요. 남자들은 원래 새로운 여자에게 쉽게 눈이 돌아가잖아요. 고이한과 재혼했다가 또 더 젊은 여자에게 눈을 돌릴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심유빈은 소예지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을 찾아내려 했다.하지만 소예지는 그녀를 실망시켰다.그저 조용히 손을 씻고 휴지로 물기를 닦은 뒤 무심하게 물었을 뿐이었다.“할 말 다 했어요?”심유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소예지 씨,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떤 남자를 못 만나겠어요? 그런데 왜 굳이 다시 고이한에게 돌아가려는 거예요?”“임현욱이라는 사람도, 그 집안도 얼마나 대단한데요. 고이한 같은 전남편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게 아니라 임현욱을 선택했어야죠.”밖으로 나가려던 소예지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녀가 고개를 돌려 심유빈을 바라봤다. 임현욱의 이름이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심유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임현욱의 신분, 저도 이미 알아요. 정말 대단한 집안이더라고요. 아무리 고이한이라도 그 집안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겠죠?”소예지의 눈빛이 단숨에 날카로워졌다.심유빈이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리자 소예지의 목소리도 한층 차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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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6화

그때 한 여성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본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에요?”“실수로 떨어뜨렸어요.”심유빈은 짧게 대답한 뒤 가방을 챙겨 화장실을 나갔다.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고이한은 소예지가 돌아오자 곧바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소예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고이한이 낮은 목소리로 걱정스럽게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괜찮아. 여덟 시쯤에는 돌아가고 싶어.”고이한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시간은 일곱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그래.”바로 그때 화장실 쪽에서 걸어 나오는 심유빈이 고이한의 눈에 들어왔다.그의 표정에서 온기가 빠르게 사라졌다.고이한은 소예지의 표정이 굳은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고이한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소예지는 연회장으로 돌아오는 심유빈을 곁눈질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별말 안 했어.”하지만 고이한은 심유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심유빈이 소예지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지 알기에 무슨 말을 했을지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지금 나갈래?”고이한이 나직하게 물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이 회장님 오시는 걸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야?”“다음에 내가 직접 찾아뵐게.”고이한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중요한 약속보다 지금 소예지의 마음이 먼저였다.소예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고이한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곁에 있던 몇몇 손님에게 먼저 실례하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소예지의 손을 잡고 연회장 출구로 향했다.심유빈은 그 모습을 보며 그대로 굳어섰다. 고이한이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떤 모욕보다 깊게 파고들었다.심유빈은 고이한이 소예지의 손을 잡고 연회장 문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마치 자신의 존재가 그들의 평온한 시간을 더럽히기라도 한 듯했다.고이한은 분명 화장실에서 심유빈이 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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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7화

차창 밖으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끝없이 흘러갔다.소예지가 집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심유빈의 말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었다.그저 조금이라도 일찍 돌아가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이번 주 내내 이어진 긴장감 넘치는 실험 때문에 몸과 마음이 조금 지쳐 있었다.그때 고이한이 입을 열었다.“김 비서, 옆에 차 세워.”김경환은 곧바로 침착하게 핸들을 꺾어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붙였다.차가 멈추자 고이한이 다시 말했다.“택시 타고 퇴근해.”김경환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차렸다.“네, 대표님.”소예지는 의아한 눈으로 고이한을 바라봤다.그런데 고이한은 차를 돌아 그녀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문을 열어준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앞으로 와.”소예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차에서 내려 그가 열어준 조수석에 앉았다.그녀는 고이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운전석에 앉은 고이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드라이브나 하자.”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대신 너무 빨리 달리지는 마.”고이한은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여유롭게 핸들을 돌려 해안도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차는 고가도로를 지나 시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한참을 달리자 뒤편의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야경은 점점 멀어졌고 대신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고이한은 해안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도로를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삼십여 분 뒤 차는 전망대가 있는 다리 옆에 멈춰 섰다.오늘은 날씨가 좋아 도심을 벗어난 사람들이 곳곳에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고 캠핑을 나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멀리 해변에는 몇 군데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여기 기억나?”고이한이 나직하게 물었다.소예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걸 느꼈다.“기억나.”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곳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고이한이 자주 드라이브를 데려오고 함께 산책하던 장소였다.그때 소예지는 그의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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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8화

지금의 고이한에게서는 일할 때 보이던 날카로움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달빛이 그의 반듯한 윤곽을 선명하게 비췄고 희끗하게 변한 머리카락은 독특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더했다.그때 소예지의 뒤쪽에서 몇몇 여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그중 목소리가 유난히 큰 여자가 감탄하며 말했다.“와, 저 사람 머리 염색한 거 아니야? 완전 은발이네. 진짜 멋있다.”“연예인 아니지? 그런데 왜 저렇게 잘생겼어?”주변이 조용한 데다 여자들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아 그들의 대화는 소예지와 고이한에게도 고스란히 들렸다.소예지는 고개를 돌려 곁에 선 고이한을 바라봤다.고이한의 입가에도 희미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들은 말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앞머리가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평소보다 몇 살은 어려 보였고 나른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까지 풍겼다.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독특하면서도 제법 잘 어울렸다.고이한은 소예지가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걸 알아차리자 마치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예지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은근히 긴장되기까지 했다.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소예지의 시선이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고이한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에는 희미한 아쉬움이 어렸다.멀리서 터져 오른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았다.소예지는 난간에 턱을 괸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불꽃을 바라봤다.화려한 불빛이 소예지의 맑고 고운 얼굴 위로 번갈아 비쳤다.스물여덟 살인 그녀는 본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갸름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정갈한 화장까지 더해지자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고이한의 시선은 어느새 불꽃놀이에서 벗어나 소예지의 옆얼굴에 머물러 있었다.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불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환한 표정을 눈에 담았다.고이한의 시선이 소예지의 하얀 목덜미에 잠시 머물렀다.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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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9화

몸이 갑자기 허공으로 들리자 소예지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흘렸다.두 팔은 반사적으로 고이한의 어깨를 감쌌다.“안고 갈게.”고이한이 나직하게 말했다.“괜찮아.”소예지는 몸을 움직여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움직이지 마.”고이한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고이한, 내려줘.”소예지의 목소리에도 고집이 배어 있었지만 고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전망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소예지는 순식간에 주변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느끼고 몹시 난처해졌다.그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고이한은 품에 안은 소예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걸음을 맞추며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주변에서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달빛 아래, 키 큰 남자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안고 해안가를 걷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지나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고 두 사람을 돌아봤다.고이한은 발밑을 살피면서도 품 안의 소예지에게 온 신경을 기울였다.가까이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그녀의 머리카락 향에 그의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소예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안겨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차 앞에 내려섰을 때도 다리에는 아직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소예지는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얼굴이 달아오른 채 좀처럼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고이한은 트렁크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낸 뒤 세심하게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건넸다.“좀 마셔.”소예지도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물병을 받아 몇 모금 마셨다.다시 뚜껑을 닫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뚜껑은 여전히 고이한의 손에 들려 있었다.“이리 줘.”고이한이 손을 내밀었다.소예지는 아직 물이 남아 있는 병을 그에게 건넸다.당연히 뚜껑을 닫아 내려놓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고이한은 그대로 남은 물을 전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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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0화

바로 그때 소예지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강준석이었다.소예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준석 선배.”“예지야, 지금 컴퓨터 앞이야? 봐줬으면 하는 데이터가 있어서.”“나 지금 집에 가는 길인데 이따가 봐도 돼?”“당연하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내일 낮까지 피드백만 주면 돼.”강준석이 말했다.“그래. 그래도 최대한 오늘 밤에 피드백 줄게.”소예지가 말을 마치자 강준석도 바쁜 듯 곧바로 대답했다.“그럼 나 먼저 끊을게.”통화를 마친 소예지는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고이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짧게 숨을 고르는 모습에서 감정을 억누르려는 기색이 읽혔다.소예지도 그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차 안은 좁았기에 분위기가 조금만 달라져도 금세 느껴졌다.소예지는 휴대폰 화면을 끄고 곁에 앉은 고이한을 슬쩍 바라봤다.‘방금 선배의 전화 때문인가?’잠시 생각해 봤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먼저 입을 연 건 고이한이었다.“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고생이 많네.”아무래도 고이한도 방금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질투가 다소 억지스럽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울게.”“그럼 앞으로는...”고이한은 앞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소예지를 한 번 바라봤다.“예지라고 불러도 돼?”소예지는 순간 멈칫했다.“그냥 호칭일 뿐이잖아.”소예지는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뒤 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소예지라고 불러주는 게 더 익숙해.”이제 소예지는 9년 전의 소녀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그녀의 말에는 쉽게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한 힘이 실려 있었다.고이한은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하지만 이내 웃으며 스스로를 달래듯 말했다.“그래. 당신 말대로 할게.”라온파크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고이한은 먼저 차에서 내려 소예지 쪽으로 걸어갔다.소예지도 곧바로 문을 열고 내렸다.고이한은 소예지의 걸음에 맞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27층과 28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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