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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최근 들어 주영도가 다친 횟수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다친 것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주영도에게 이런 상처를 남긴 이가 바로 과거 그 누구보다 그의 몸을 아끼고 걱정했던 강루인이었다.주영도가 몸에 생긴 흉터들을 내려다보았다. 눈가에 짙은 쓸쓸함이 번졌다.그가 병원 침대에 앉아 있었다. 과다출혈로 인해 안색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옆에서 노윤환이 일복 터진 머슴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입원 절차 마쳤어요. 오늘은 일단 여기서 지내셔야 합니다.”주영도가 복잡한 감정을 감추려고 시선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노 비서, 루인이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강루인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가끔 통제를 잃고 폭주하기도 했다.결벽증 있는 상사를 위해 침대 시트를 갈던 노윤환이 멈칫했다가 속으로 생각했다.‘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이 멀쩡하면 그게 사람이겠습니까?’강루인이 정신력이 강해서 이 정도로 버티는 것이라 생각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진작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강루인 씨한테 의사를 붙여드릴까요?”노윤환의 질문에 주영도가 고개를 저었다.“내가 의사를 보내도 루인이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노윤환이 속으로 비아냥거렸다.‘그건 그래도 아시네요.’주영도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노 비서, 내가 어떻게 해야 루인이한테 용서받을 수 있을까?”‘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상황이 이 지경이 돼버렸는데 용서라니요? 꿈 깨세요, 제발.’그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대표님, 일단 쉬세요. 방법은 내일 생각하시고요.”‘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신도 아니고. 전에 강루인 씨한테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잡아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죽을 뻔한 사람이 너그러이 용서를 해준다? 그건 보살도 불가능할걸요?’주영도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긴 했지만 다행히 노윤환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강루인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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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강루인은 지금 이 상태로는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홍섭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강루인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 벌써 은퇴 생각을 해? 일흔이 넘은 나도 이렇게 현역으로 뛰는데 어디서 스승보다 먼저 은퇴를 입에 올려? 꿈도 야무져, 아주.”이홍섭이 설계 방안 몇 개를 강루인에게 건넸다.“일주일 안에 초안 뽑아내.”“스승님, 저 AI가 아니에요.”“네가 AI였으면 일주일이나 줬겠냐?”강루인이 말을 잇지 못했다.‘아니,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거절했다.“저 못 해요.”일주일이 아니라 보름을 줘도 그리지 못할 것 같았다.강루인의 말에 이홍섭이 눈을 부릅뜨고 화난 척했다.“졸업했다고 이제 내 말이 우스워?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말 몰라?”“스승님...”강루인은 계속 거절하고 싶었으나 머릿속이 엉망이라 그럴 기운이 없었다.이홍섭이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회초리라도 들까?”그때 옆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차성열이 입을 열었다.“제가 가져다드릴게요.”강루인은 어이가 없었다.‘선배까지 왜 저래?’이홍섭이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넌 좀 맞아야 해.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결국 맞지 않기 위해 강루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이홍섭이 역시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그는 강루인을 집에 보내지 않고 아예 작업실에서 지내라고 했다.매일 쏟아지는 설계도 수정에 강루인은 다른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이홍섭의 끊임없는 지적과 호통에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강루인이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그때 이홍섭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오늘은 그만하고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강루인은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착실한 학생처럼 짐을 챙겨 그를 따라나섰다.이홍섭이 데려간 곳은 협력업체와의 미팅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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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이홍섭이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주선 그룹이 참여한다면 이번 협력은 없던 일로 하죠.”“스승님.”강루인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홍섭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단호하게 밝혔다.예상치 못한 반응에 협력 측이 흠칫 놀랐다.협력이 무산됐으니 이 자리를 더 이어갈 이유도 없었다. 이홍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루인도 별수 없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스승님...”“왜 자꾸 불러? 그러다 꿈에 나오겠어.”강루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연세도 있으신 분이 어쩜 이렇게 화가 많으신지.’그녀가 말했다.“저 때문에 이러실 필요 없어요.”강루인과 주영도의 악연이지, 이홍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이홍섭이 강루인을 흘겨보더니 웃을 듯 말 듯 했다.“아무리 착각도 자유라지만 원래 이렇게 얼굴이 두꺼웠어? 누가 너 때문이래?”‘고집불통 영감님 같으니라고.’강루인이 되물었다.“저 때문이 아니면 왜 계약을 안 하시는데요?”이홍섭이 툴툴거렸다.“이게 아주 사사건건 간섭이야. 네가 선생이야, 내가 선생이야? 아주 기가 살아서는.”독설이 날아와도 강루인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생글생글 웃었다.“스승님이 걱정돼서 그러죠.”그가 피식 웃었다.“네 앞가림이나 잘해. 난 가질 거 다 가져서 네 걱정 따위 필요 없어.”‘오늘따라 왜 이렇게 화가 많으시지? 아침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교수님, 교수님...”그때 협력업체 관계자가 방에서 쫓아 나왔다.“섣불리 이러시지 마시고 얘기 좀 하시죠.”“더는 할 얘기 없습니다. 앞으로 주선 그룹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라면 전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그들과 말을 섞기 싫었던 이홍섭이 강루인과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루인아.”이홍섭을 설득하던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강루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협력업체 관계자가 웃으며 그를 반겼다.“주 대표님.”주영도가 다가오는 협력업체 관계자를 지나쳐 곧장 강루인의 앞으로 다가가 이홍섭에게 깍듯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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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이홍섭이 장전된 기관총처럼 주영도를 향해 거침없는 난사 수준의 독설을 퍼부었다. 그나마 그가 품격 있는 교수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이 튀어나왔을 것이다.욕 한마디 섞지 않는 영감을 만난 것이 주영도에게는 천운이었다.이홍섭의 한바탕 폭격이 복도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소매를 휘저으며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노윤환이 주영도를 제외한 모든 곳을 훑었다. 보지 않아도 상사의 안색이 얼마나 처참할지 불 보듯 뻔했다.협력업체 관계자들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채 존재감을 최대한 낮췄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이곳에 나타나지 말 것을...구경거리가 아무리 재미있다지만 어떤 구경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오늘이 지나고 주영도가 ‘입막음’이라도 시도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그런데 정작 주영도는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분노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루인의 편을 들어주는 든든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주영도가 고개를 돌려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쳐다봤다.“협력 건으로 만난 겁니까?”그 말에 관계자들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들은 주영도의 편이라며 태도를 분명히 했다.주영도는 그들이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전 빠질게요. 프로젝트 루인이한테 맡기세요.”강루인의 실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익숙지 않은 홍보 분야에서도 정점에 올라섰던 그녀였다. 전공 분야로 돌아간다면 그 이상을 해낼 것이 틀림없었다.관계자의 표정이 급변했다.“대표님...”‘투자자가 빠지겠다는 건 프로젝트를 엎어버리겠다는 소리인가? 줄을 잘 섰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직도 화가 나셨지? 아까 내가 대표님이 망신당하는 꼴을 구경해서? 아, 괜히 봤어. 함부로 구경해선 안 됐었는데. 그 바람에 프로젝트까지 말아먹고.’주영도가 말했다.“완전히 빠지겠다는 게 아니라 이름만 지우겠다는 겁니다. 이홍섭 교수님께 강루인과 일하고 싶다고 하세요.”관계자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그 뜻을 이해했다.주영도가 지금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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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이홍섭이 욕을 퍼붓지 않자 강루인은 그제야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거북이처럼 움츠린 목을 차마 꼿꼿이 펴지는 못했다. 괴팍한 노인네가 언제 또 심기가 뒤틀릴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상책이었다.이홍섭이 욕은 참았지만 말투까지 다정해지지는 않았다.“반찬이 네 발밑에 있냐? 아예 그릇 들고 식탁 밑에 기어 들어가서 먹지 그래? 궁상맞게 목은 왜 그렇게 움츠리고 있어? 허리 똑바로 안 펴? 네가 이렇게 쩔쩔매니까 남들이 우습게 보고 괴롭히는 거 아니야. 조금만 더 독하게 굴었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거다. 내가 어쩌다 너 같은 제자를 뒀는지. 내 평생 쌓아온 명예가 너 때문에 다 무너지겠어.”이홍섭이 당장이라도 가슴을 치며 통곡할 기세였다. 제자가 안쓰러워 일부러 더 모질게 굴었다.주영도 그 천하의 나쁜 놈이 멀쩡한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이홍섭은 애써 눈물을 감추며 더욱 사나운 척했다.“빨리 먹어. 삐쩍 말라서는. 너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내가 널 밥도 안 먹이는 줄 알겠어. 보릿고개를 겪은 사람도 너보다 더 살집이 있어. 길 가다가 너 같은 애 있으면 사람들이 피하지 않아? 혹시라도 부딪혔다가 뼈라도 부러지면 책임지라고 할까 봐 무서워서 말이야.”강루인이 입을 삐죽거렸다.“저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그만 좀 욕하시면 안 돼요?”“욕? 이게 욕한 거야? 내가 진짜 마음먹고 욕하는 꼴을 못 봐서 이러는구나.”말을 마친 이홍섭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시동을 걸자 강루인이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싹싹 빌었다.“제가 잘못했어요, 스승님. 제발 참으세요. 자, 어서 드세요. 다 식겠어요. 찬 거 드시면 위장에도 안 좋아요.”그러고는 비굴한 태도로 이홍섭의 앞접시에 반찬을 집어주었다.이홍섭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대더니 그녀를 한 번 더 째려봤다.“내 위장이 이 모양 이 꼴인 게 다 누구 때문인데.”‘스승님 위장이 안 좋은 건 보릿고개 시절에 얻은 고질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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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자극이 필요한 법이다.이홍섭의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강루인은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에 치여 딴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눈을 뜨기 무섭게 원고를 그리라느니, 수정을 하라느니 재촉하는 바람에 강루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한 일상을 보냈다.“이 서류 가지고 공사 현장에 좀 다녀와.”이홍섭이 강루인에게 서류를 툭 던졌다. 그가 거느리는 공사 팀 직원에게 전달해야 하는 서류였다.강루인이 서류를 챙겨 문을 나서려던 그때 이홍섭이 또 심부름을 추가했다.“오는 길에 행복전집에 들러서 육전 좀 사 와.”공사 현장은 남쪽이고 행복전집은 북쪽이었다. 오는 길에 들르기엔 너무나 멀었다.강루인이 말했다.“스승님, 육전은 너무 기름져요. 연세도 있으신데 소화 안 되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담백한 거 드시면 안 될까요?”너무 멀리 가기 싫었던 강루인이 은근슬쩍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이홍섭이 눈을 부릅떴다.“나 아직 칠순도 안 됐어. 연세가 있긴 개뿔. 넌 나이도 어린 게 어쩜 할머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해? 잔말 말고 얼른 다녀와. 일 좀 시키려 하면 저렇게 싫은 티를 낸다니까. 내가 아직 사지가 멀쩡해서 다행이지, 나중에 늙어서 침대에 누워 수발이라도 받아야 하면 넌 바로 나를 강물에 던져버릴 녀석이야. 맞지?”강루인은 말문이 막혀버렸다.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로 받아치는 데다 미래의 그녀를 벌써 배은망덕한 제자로 몰아세우는 통에 강루인은 더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꼬리를 내리고 문을 나섰다.뒤에서 이홍섭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2인분 사 와. 1인분으로는 모자라니까.”강루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알았어요.”그녀가 도착한 곳은 개발 구역에 위치한 공사 현장이었다. 주변이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담당자에게 서류를 건넸다.“고마워.”담당자가 강루인의 대학교 선배였다.강루인이 손사래를 치며 바쁘니 얼른 가보라고 했다. 이홍섭에게 육전을 사다주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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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예전에는 구아정이 조금이라도 아프다는 소식만 들으면 주영도는 만사를 제쳐두고 한달음에 달려왔었다. 언제나 가장 먼저 나타나 그녀를 걱정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그녀의 숨통이 끊어지기만을 바랐다.구아정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을 비웃었다. 참으로 잔인한 현실이었다.주영도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구아정과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었다.구아정이 칠흑처럼 어두운 눈빛으로 주영도를 빤히 쳐다봤다. 쉰 목소리에 날 선 조롱이 가득했다.“왜? 이젠 내 옆에 다가오는 것조차 역겨운가 보지? 처음에는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더니. 아내인 강루인조차 내팽개치고 달려왔으면서.”구아정과 옛 추억이나 곱씹으려고 온 것이 아닌 주영도가 덤덤하게 말했다.“본론만 말해.”구아정의 입술이 쩍쩍 갈라질 정도로 메말랐다.“구연정을 향한 순애보가 참 눈물겹네. 그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잊지를 못하고 말이야. 그렇게 구연정을 못 잊으면서 왜 강루인이랑 결혼한 거야? 이혼은 왜 또 안 해준 거고?"주영도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네 쓸데없는 소리나 들어주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구아정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두 눈에 주영도를 향한 짙은 증오가 담겨 있었다.“뭘 그렇게 서둘러? 구연정 걔 당장은 안 죽어. 오히려 오빠 손에 곧 죽게 생긴 건 나야.”그녀가 원망하든 말든 주영도는 관심이 없었다.강루인이 느꼈던 것처럼 주영도의 냉혹함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다정함과 애틋함은 한 사람에게 온전히 머무는 법이 없었다.누군가에게 한없이 다정할 수도 있었고 잔인해질 수도 있는 남자였다. 이 모든 건 오로지 그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애초에 주영도에게는 마음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해보니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마음을 오직 구연정에게만 줬고 어쩌면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구아정이 죽기 전에 어떻게든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사람 같았다.“구연정을 다시 찾아오면 그다음엔 어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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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구아정의 말에 주영도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머릿속에 강루인의 이름이 불현듯 스치며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노 비서!”주영도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부름을 들은 노윤환이 즉각 문을 열고 들어와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주영도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지금 당장 강루인이 어디 있는지 알아봐.”노윤환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양동운도.”비서가 흠칫 놀라더니 침대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구아정을 흘끗 보았다. 무언가를 직감한 그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주영도가 고개를 돌려 살기 어린 눈빛으로 구아정을 노려보았다.“루인이가 무사하기를 비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죽지 못해 사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될 테니까.”이제 삶과 죽음에 초연해진 구아정이 악독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오빠, 이제 와서 무슨 절절한 순정남 행세야? 강루인이 그 꼴이 된 것도 결국 오빠 때문이고 내가 두 다리를 잃은 것도 다 오빠 때문이야. 마땅히 나한테 갚아야지.”주영도의 눈빛이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구아정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일단 강루인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구아정을 잘 감시하도록 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마.”주영도가 문 앞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병실을 나갔다.“하하, 늦었어. 강루인은 이미 나랑 똑같은 신세가 됐을걸? 걔도 이젠 나처럼 두 다리를 잃었어.”뒤에서 들리는 구아정의 외침에 주영도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걸음을 재촉하며 양동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양동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주영도가 즉시 양동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강루인 건드리지 마!]양동운이 이 메시지를 볼지, 본다 한들 멈출지는 알 수 없었다. 주영도의 경고를 무시하고 강루인에게 손을 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뜻이었다.주영도가 강루인을 찾고 있을 무렵 육전을 기다리던 이홍섭 역시 그녀를 찾고 있었다.아무리 기다려도 강루인이 돌아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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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양동운이 꽤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심지어 ‘친절하게도’ 강루인을 위해 의사까지 대동했다.강루인은 이 부류의 인간들이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짓이 없었다.그렇기에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가 그들의 손바닥 안에서 마음껏 주물러지는 노리개가 됐다는 게, 그녀의 인생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게 너무나 화가 났다.강루인이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눈앞에 펼쳐진 의료 기구들을 본 순간 강루인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그녀가 말했다.“나 마취제 알레르기 있어.”의사가 멈칫하더니 양동운을 돌아봤다. 하지만 양동운은 강루인이 찾은 핑계라 생각했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놓아줄 줄 알았어?”강루인이 저항을 포기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사실을 말했을 뿐이야.”거짓말인지 알아내려고 양동운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가 주영도인 걸 보고는 눈을 파르르 떨었다.전화를 받지 않자 주영도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양동운도 마음이 다급해졌다.애초부터 비밀스럽게 움직이면서 강루인을 납치한 게 아니었다. 작정하고 뒤진다면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그리고 그 시간이 양동운에게는 아주 귀중했다.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강루인의 다리를 잘라야만 했다.원래 하려고 했던 알레르기 테스트 따위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양동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테스트 생략하고 바로 시작해.”강루인이 명령을 내리는 양동운을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죽일 생각은 없었다면서? 누가 주영도의 친구 아니랄까 봐 똑같이 잔인하구나.’양동운이 의사에게 서두르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의사가 강루인에게 의료용 솜 뭉치를 건넸다.“이거라도 물어요. 통증이 조금이라도 덜할 겁니다.”죄책감을 덜어보려는 가식적인 행동에 강루인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리더니 솜을 거부했다. 의사는 그녀의 노골적인 경멸에 무안한 듯 시선을 피하고 제 할 일을 계속했다.강루인이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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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바닥에 쓰러진 양동운을 내려다보는 강루인의 눈동자에 지독한 원한이 넘실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양동운의 얼굴을 지나 다리로 옮겨갔다.두 눈에 광기가 서린 채 입꼬리를 올렸다.“내 다리가 갖고 싶다고?”말을 마치자마자 양동운이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한번 의자를 들고 그의 다리를 내리찍었다.정신이 혼미하던 양동운이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놀란 경호원들이 문밖에서 몰려왔다.“네가 뭔데 내 다리를 가져가?”악에 받친 강루인이 다시 한번 의자로 양동운의 종아리를 내리쳤다.그저 사람을 잘못 보고 결혼을 잘못한 죄밖에 없는데 이들은 무슨 자격으로 강루인의 인생을 마음대로 짓밟는단 말인가?그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목숨만 소중하고 그녀의 생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강루인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리가 필요하다며? 줄게, 가져가.”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의자가 내리꽂혔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양동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미친년아, 당장 그만두지 못해? 으악.”강루인의 눈동자에 살기가 가득했다.‘내가 미쳤다고? 날 이렇게 만든 건 너희들이야.’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들과의 악연을 끊어내려 했지만 그들은 그녀가 행복해지는 꼴을 보지 못했다. 기어코 벼랑 끝으로 밀어 넣어 살길조차 주지 않았다.미치지 않는다면 이들의 손에 죽어 나갈 판이었다.“멈춰!”뒤늦게 달려온 경호원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강루인이 양동운의 부러진 다리를 짓밟으며 차갑게 말했다.“가까이 오지 마.”“으악.”양동운이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뒤틀며 저항하려 하자 강루인이 의자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강루인이 차가운 철제 의자로 양동운의 머리를 짓눌렀다.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의자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 의자 다리를 붉게 물들였다.한 번만 더 움직이면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소리 없는 경고였다.경호원들이 함부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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