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의 결혼을 지지해요: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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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서현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저희 형편은 이래요. 그냥 받아들이세요.”엄진경의 말대로 서현주가 구한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지만 다행히 2층이라 짐을 금방 옮길 수 있었다.낡은 동네에 낡은 건물이지만 집 안의 시설은 부족함이 없었다. 방 두 개에 거실 하나로 이루어진 작지만 아늑한 공간, 서현주와 엄진경이 대충 짐을 풀고 나니 어느덧 정리가 끝나갔다.서현주는 능숙하게 책가방을 열어 연습장을 꺼냈다.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그녀는 단 한순간도 느슨해질 수 없었다.한편 연씨 저택으로 돌아온 연지훈은 문 앞에 서 있었다. 드나드는 가정부들이 협탁을 옮기며 입구를 막아섰다.땀범벅이 된 가정부는 살짝 몸을 비켜 연지훈이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연지훈은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가정부들의 출입을 막았다.‘저 협탁은 분명 현주 방에서 보았던, 귀여운 스티커가 붙어 있는 바로 그 협탁인데...’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가정부는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어르신께서 지시하신 일입니다. 직접 가서 여쭤보시는 게...”연지훈의 짙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무심코 협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가정부들은 연지훈의 눈빛과 싸늘한 목소리에 혼쭐이 나서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다만 그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다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잠시 후, 연지훈은 몸을 살짝 움직여 그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가정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협탁을 들고 나가려 했는데 또다시 연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내려놔요.”가정부들은 화들짝 놀랐다.“그렇지만 저희는 어르신께서 현주 씨 방의 모든 물건을 버리라고 지시하셔서... 그래서...”연지훈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원래대로 돌려놔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가정부들은 겁에 질린 채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그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나왔던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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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연지훈은 시선을 올리고 짙은 눈동자로 연동욱의 흐릿한 두 눈을 바라봤다.이에 연동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어쨌거나 현주는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잖니. 넌 늘 우리 집안부터 생각해야지, 외부인이 아니라...”연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한편 연동욱은 시선을 거두고 창가 쪽을 바라봤다.“아쉽다면 네가 다시 데려와도 좋아.”그의 예상대로 연지훈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누구나 알다시피 서현주와 연씨 가문이란 마치 서현주와 유이영의 관계와 같았다.연지훈은 오직 유이영만, 그리고 연씨 가문만 선택할 것이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또 무엇을 해나가야 하는지 너무 잘 안다.이 또한 연동욱이 그를 신뢰하는 이유였다.유이영의 배경은 서현주보다 훨씬 뛰어났고, 연지훈에게 줄 수 있는 도움도 서현주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컸다.감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유이영은 서현주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연동욱이 손을 내저었다.“가봐 이제. 내 독서에 방해하지 말고.”연지훈은 자리를 물러났다.이때 가정부가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어르신, 서현주 씨 방 안의 물건들을 계속 옮길까요?”연동욱은 잠시 침묵했다.“옮겨. 지훈이 의견은 무시해도 돼.”가정부가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엄진경이 따뜻한 우유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서현주는 의외로 연지훈의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엄진경이 건네준 우유를 받으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서현주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무슨 일이세요?”연지훈이 나직이 물었다.“어디야?”서현주가 대충 얼버무렸다.“밖이요.”연지훈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밖에 어디?”이에 서현주가 피식 웃었다.“설마 나더러 돌아오라고 하는 건 아니죠? 내가 보고 싶어졌어요?”그녀는 일부러 연지훈을 역겹게 만들려 했다. 연지훈은 늘 자신을 향한 그녀의 호감을 혐오했으니까.남녀 관계에 있어서 유이영에게는 넘칠 만큼 애정 표현을 하면서도 서현주에게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서현주는 이 남자와의 통화가 너무 싫어서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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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오래된 동네는 학교와 매우 가까워서 도보로 10분 거리였다.학교에 들어서자 서현주는 즉시 주변의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다.학생들뿐만 아니라 길을 지나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고 그 시선 속에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었다.이런 상황은 학교 안에서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 저학년 학생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달려오기도 했다.그러던 중 마음씨 착한 친구 한 명이 사실을 알려줬고 서현주도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서현주가 이미 연채린이 학교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물을 삭제했지만 그 게시물이 더 큰 소셜 미디어 플랫폼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높은 인기의 이유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유이영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연채린의 게시물은 익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더 큰 소셜 미디어 플랫폼으로 옮겨진 게시물은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론하며 연지훈과 유이영이 어린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고, 곧 결혼할 것이라고 암시했다.하지만 이를 질투한 고3 학생 서현주가 둘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어 그들의 감정을 무너뜨리려 했다는 내용이었다.유이영은 국내외에 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었고, 팬들은 유이영과 연지훈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형부’라 부르며 만족해하고 있었다.이 게시물이 올라오자 유이영의 팬들은 분노하여 SNS에서 서현주를 ‘세컨드’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게시물을 보았을 때, 서현주는 분노보다는 오히려 아이러니했다.‘국내외 유명 피아니스트?’유이영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에 서현주는 다시 한번 감탄했다. 연지훈은 유이영에게 엄청난 감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유이영은 피아노 분야에서 결코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데뷔 이후 발표한 모든 작품은 돈을 주고 작곡가를 고용해 만든 것이었다심지어 음원 플랫폼에 올라온 피아노 연주곡조차 다른 사람이 대신 연주한 것이었다.또한 대형 음악 경연 대회에서도 미리 녹음된 음원을 틀어놓고 유이영은 그저 피아노를 치는 척 시늉만 했다.처음에는 연지훈도 이 사실을 몰랐다.하지만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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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수업 쉬는 시간, 서현주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머리 위로 물세례를 당할 뻔했다.“세컨드 주제에, 죽어!”그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물이 쏟아지는 위치보다 살짝 비켜섰다. 그러고는 눈앞으로 쏟아지는 물을 덤덤하게 바라보았다.전생에 화장실에서 물세례를 당하는 일은 수없이 겪어왔다.이번 생에 그 기억을 가지고 왔으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리가 있을까?화장실 밖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멈췄다.서현주는 연지훈과 유이영이 모두 이 명문고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풋풋한 사랑을 시작했고 그 순수한 연애가 가장 소중한 순간으로 간직됐다.연지훈은 남다른 집안 출신에 오만하고 귀하게 자랐으며, 고등학교 시절에도 당당하게 연애를 해왔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 선생님들까지 연애 사실을 알게 됐다.선생님들은 두 사람의 성적을 걱정하며 몇 번이고 불러서 면담했지만 이들은 연애 사실을 바로 인정했다.연지훈은 이렇게 말했다.“영향 없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실제로도 그랬다. 얼마나 오래 사귀든 두 사람의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연지훈은 늘 1등 자리를 지켰고 단 한 번 놓친 이유는 그가 결석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수능에 응시하지 않고 각종 대회 참가를 통해 해외 대학 입학 자격을 얻었고 졸업 후에도 학교의 레전드로 남았다.서현주가 이 모든 것을 그토록 자세히 알고 있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그들의 연애 스토리를 교육의 핵심으로 자주 언급했기 때문이다.졸업 후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과 새로 온 학생들은 그들을 잊지 않고 오히려 학교의 자랑으로 여기며 그들의 빛나는 업적을 끊임없이 회자했다.이로 인해 학교의 많은 학생과 선생님들은 두 사람의 팬이 되었고 심지어는 둘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팬까지 생겨났다.이 둘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완벽한 커플로 여겨졌다.팬들은 그들의 관계에 누가 되는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이 순간, 이 학생들은 서현주를 ‘삼각관계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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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그 여학생은 이를 박박 갈았다.“서현주, 너 두고 봐.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서현주는 인파를 헤치고 걸어 나오며 태연하게 말했다.“좋아. 기다리고 있을게.”유이영의 학교 축제 피아노 연주는 며칠 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SNS의 게시물 때문에 그녀의 연주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최초의 게시물은 삭제되었지만 유이영의 팬들과 연지훈, 유이영을 응원하는 커플 팬들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SNS에서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이어졌고 그 안에는 서현주를 향한 저주와 비난이 가득했다.전생에서 이런 수법은 너무 흔했다. 서현주는 꽤 많이 봐왔고 또 많이도 겪어왔었다.하여 이런 기세에 전혀 억눌릴 그녀가 아니었다.다만 이 모든 게시물이 누가 뒤에서 조종하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서현주 역시 수수방관하지 않고 곧장 SNS에 피드를 올렸다.[두 분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멘트 뒤에는 장미 이모티콘을 추가했고 유이영의 프로필 사진까지 첨부했다. 그 사진은 바로 연지훈과 유이영이 손을 잡고 찍은 뒷모습 사진이었다.피드에 금세 좋아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현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짐을 챙겨서 학교를 나섰다.학교 밖에는 연지훈의 롤스로이스가 멈춰 서 있었다.이런 고급 차가 붐비는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누구를 데리러 왔는지 수군거렸다.서현주는 똑바로 앞을 보며 가던 길을 돌아서 갔다.하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뒤에서 팔을 붙잡았다.“현주 씨, 대표님께서 차에 타라고 하십니다.”서현주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대신 전해주세요. 난 이미 연씨 가문에서 나왔으니 더는 내게 간섭할 자격 없다고요.”“자격이 없어?”연지훈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다만 서현주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연지훈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서현주.”그녀는 필사적으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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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순간 서현주의 시야가 어두워졌고 이내 연지훈의 품에 안겼다.쾅.귀청을 때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서현주의 머릿속은 끊이지 않는 굉음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온몸이 굳어버리고 머리를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이건 엄연한 교통사고였다.그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지만 여전히 숨을 쉴 수 없었다. 온몸이 무서울 정도로 뻣뻣하게 굳었다.그녀의 딸 연하나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귓가에는 딸아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아직도 들리는 듯했다. 눈앞은 온통 붉게 물들었는데 연하나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였다.서현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하나야, 우리 하나...”그 순간, 그녀는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고 숨결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누군가 목을 쥐어짜는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아무런 예고도 없이 서현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서현주, 현주야.”서현주는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하나는? 우리 하나 어디 있지?’“서현주!”연지훈의 목소리가 착잡해졌다. 그는 커다란 두 손으로 서현주의 어깨를 꽉 잡고, 거의 차량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인 그녀의 상반신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서현주는 미처 예고도 없이 연지훈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쳤다.그녀는 온몸이 움찔거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연지훈을 바라봤다.연지훈의 손은 그녀의 어깨 아래로 내려와 팔을 잡았다. 이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서현주의 머리가 서서히 ‘재운행’을 했다.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전동 자전거를 탄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마침 그들의 차 문에 부딪혔다.전동 자전거 뒷좌석에는 그녀의 고등학생 딸이 타고 있었다. 아마도 딸의 하교를 마중하러 온 모양이었다.중년 여성은 얼굴이 창백해져 다급하게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서현주는 다치진 않았지만 전생의 교통사고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해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연지훈은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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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전동 자전거 뒷좌석에 탄 고등학생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손으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연지훈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여 관자놀이를 문질렀다.이때 서현주가 차창을 내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대표님.”연지훈은 손을 내리고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아까는 죽도록 무서워하더니?”서현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가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곧이어 입술을 앙다물다가 나지막이 말했다.“그냥 넘어가요.”고개를 숙였지만 그녀는 연지훈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연지훈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이거 내 차야. 네가 그냥 넘어가자고 하면 수리비도 내가 내야 하는데.”서현주는 거의 무릎을 꿇을 지경인 중년 여성을 보았다. 그녀는 차창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그럼 어쩌시려고요?”연지훈은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그래, 그냥 넘어가자. 대신 이번 일은 네가 빚진 거다.”그 말을 끝으로 연지훈은 임지안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곁눈질했다.중년 여성은 감격에 겨워서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뒷좌석의 소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서현주를 보았다. 서현주 역시 그 소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서현주는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라 이 소녀가 오늘 화장실에서 자신을 막아섰던 학생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떠올랐다.소녀가 입을 열었는데 서현주는 태연하게 시선을 거두고 차창을 올렸다.이 차는 미세한 흠집이 났을 뿐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연지훈과 임지안이 차에 올라탄 후 곧장 시동을 걸었다.한편 서현주는 연지훈의 요구를 기다렸다.이때 연지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아까 그렇게 무서웠어?”“네.”서현주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 연지훈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차가 서서히 집으로 가는 방향을 이탈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어디로 가는 거예요?”연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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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엄진경은 서현주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다.“지훈이 찾아왔었어?”서현주는 몸을 숙여 신발을 갈아 신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쯤 유이영이랑 애틋한 시간 보낼걸요.”엄진경은 순간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말투도 퉁명스러워졌다.“지훈이한테 빌어는 봤니? 우리 다시 돌아가게 해달라고 말해봤냐고? 언제까지 여기서 지내? 말이 안 되잖아.”신발을 다 갈아 신은 서현주는 허리를 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엄진경을 바라보았다.“꼭 큰코다쳐봐야 정신을 차리겠어요, 엄마는?”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엄진경은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졌다.애초에는 딸 현주를 연씨 가문에 시집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이다.하지만 남편이 연동욱 어르신을 구하느라 목숨을 잃었고, 여덟 살이던 서현주는 연씨 가문에 맡겨져 그 집안 아이들과 함께 자라게 되었다.어릴 적 서현주는 인형처럼 예뻤다. 크면서 점점 더 예뻐지고 또한 연동욱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서인지 딸아이의 기품이 진정한 재벌 딸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웬만한 재벌가 안주인 자리는 충분히 넘볼 만했다. 적어도 엄진경은 그렇게 생각했다.서현주를 연씨 가문에 시집보내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어느 날 서현주가 심한 고열에 시달려 몸도 제대로 못 가누게 되자 연지훈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의사를 불렀다.그때만 해도 서현주와 연지훈은 무척 가깝게 지냈고 서로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엄진경은 딸아이가 연지훈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랑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하지만 유이영이 돌아온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살얼음판이 되었고 심지어는 팽팽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여기까지 생각하노라니 엄진경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그녀는 연지훈도 서현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연지훈은 서현주에게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고 오직 동생으로만 여길 뿐이었다.서현주는 식탁과 주방을 둘러보았는데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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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드디어 올 것이 왔다.서현주는 잘 알고 있다는 듯 시선을 내리고 차분하게 말했다.“네, 기억하고 있어요.”이승주가 말을 이었다.“학교 측에서 네가 곧 수능을 앞두고 있으니 공부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네 공연을 취소했대.”서현주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모든 걸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저 대신 다른 사람을 초청했나 보네요?”이승주는 잠시 머뭇거렸다.“그래... 네가 축제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걸 알아. 선생님도 어떻게든 널 위해 이 기회를 쟁취해보려고 했는데 학교 측 결정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니 공부에만 집중하렴. 앞으로 연주할 기회는 많을 거야. 적절한 기회가 있다면 선생님도 꼭 너한테 연락할게.”서현주는 부드럽게 말했다.“이해해요, 선생님. 저 괜찮아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이승주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듯했다.“그래? 정말 포기하는 거야?”서현주는 담담하게 웃었다.“네, 그렇죠.”그녀는 학교 측에서 유이영과 연지훈을 초청하여 네 손 연주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지훈은 학교에 도서관과 강의동을 지어줬고 장학금도 지원했다. 그는 학교 측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동문이었다.학교 축제 연주는 유이영의 의견이었을 것이고 연지훈은 이를 거절할 리가 없다.전생의 서현주는 어리석게도 바로 교장실까지 찾아가 학교에 자신의 연주곡을 남겨달라고 요구했다. 놀랍게도 학교 측은 즉시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학교 측에서 이미 유이영의 의견을 물었고 유이영이 그녀의 연주를 허락했다는 것이었다.유이영은 그녀가 연씨 가문에서 빌린 피아노를 망가뜨렸다. 결국 서현주가 학교 축제에서 연주한 곡은 음정도 맞지 않고 엉망진창이었다. 반면에 유이영과 연지훈의 네 손 연주는 환상적인 효과를 거두어서 그녀와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거기에 유이영의 이후 온라인 활동까지 더해져 서현주는 네티즌들에게 소설 속 남녀 주인공 사이를 방해하는 ‘짓궂은 악당’이라 불렸고 학교 측으로부터 질책까지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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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그 시각, 연승재는 휴대폰 속 문자를 바라보며 얼굴에 띈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옆에 있던 친구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뭐래? 온대?”“당연하지. 내가 부르는데 안 와?”말하면서도 연승재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전에 너희들도 다 봤잖아. 현주 걔 나한테 종일 ‘오빠, 오빠’ 하면서 얼마나 매달렸어? 그렇게 멍청한 애가 내 말을 안 들을 리가 있겠냐?”친구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오케이. 그럼 우리도 제대로 준비해서 너 복수하는 거 톡톡히 도와줘야지.”연승재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문자를 들여다보며 모두가 모르는 사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친구들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서현주가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전에 그녀는 비굴하고 소심해서 연승재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했고 반항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심지어 경배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마치 친오빠로 여기는 것 같았다.그때의 연승재는 이토록 만만한 ‘여동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녀의 나약한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서현주는 그의 아주 작은 호의에도 감격에 겨워했는데 정작 그는 이를 하찮게 여길 뿐이었다.서현주는 그에게 단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장난감이었다.하지만 이번에 돌아온 후, 서현주가 정말로 달라졌다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녀의 눈에서 예전의 경배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팽팽하게 맞설 따름이었다.이에 연승재는 살짝 당황스러웠다.이번에 돌아와서 서현주에게 화를 내고 험한 말을 내뱉었던 것은 유이영과 연채린을 대신해서 복수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은 서현주가 다시 그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여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고 예전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를 바랐던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그는 서현주가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내뱉었어도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며칠 동안 연승재는 줄곧 불안했다.오늘 한번 떠보듯이 서현주에게 문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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