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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면을 쓴 남편: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너 염치도 없어? 송남지! 그 사람은 내 남편인데 네가 뭐가 안심된다는 거야?”허상미가 발끈하며 악을 쓰는 모습에 송남지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이제 겨우 시작인데 왜 벌써부터 저 난리야?’송남지는 허상미를 제대로 엿 먹일 방법을 찾은 듯했다.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그녀는 허상미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억울한 표정으로 윤해진을 바라봤다.“난 그냥 윤 대표님이 데려다주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인데 왜 상미 언니는 저보고 뻔뻔하다고 하는 거죠?”아주 그냥 여우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윤해진은 눈을 부릅뜨고 허상미를 쏘아봤다.“이제 그만해, 허상미. 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들어가서 자. 난 그냥 남지를 데려다주는 것뿐인데 무슨 세상 망하는 것처럼 호들갑이야.”허상미는 열불이 나서 눈이 뒤집혔고 당장이라도 송남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송남지가 언제부터 저렇게 약한 척, 순한 척하는 걸 배웠지? 감히 불여우처럼 나와 윤해진과의 관계를 이간질하다니!’허상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송남지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자부했던 그녀였으니까.그래서 지금 이런 상황을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결국 허상미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여보, 배, 배가 너무 아파!”송남지는 냉담하게 허상미를 지켜봤다. 아까 전까지는 눈에 불을 켜더니 금세 순한 양처럼 굴고 또 갑자기 아픈 척 쌩쑈를 하는 꼴이라니, 그야말로 볼만했다. 하지만 똑같은 수법을 너무 많이 쓰니 이제는 별로 효과가 없는 듯했다.윤해진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저 사람 좀 돌봐줘요.”그 말을 남기고 윤해진은 한마디 덧붙였다.“병원에서 요양하라고 의사가 말했는데 말을 안 듣고 꼭 저렇게 억지를 부려.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부 당신 책임이야!”윤해진의 말을 들은 허상미는 아픈 척해야 할지, 아니면 평소처럼 행동해야 할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얼굴 근육마저 경직된 듯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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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자업자득이야. 평소에 입만 살아서 나를 괴롭히더니 내가 반격하면 어떻게 될진 생각도 안 했나 보지.’송남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아무 말 없이 윤해진을 따라 차고로 향했다.윤해진은 유화를 뒷좌석에 놓고 살갑게 송남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심지어 안전벨트까지 매주려고 했다.하지만 송남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제가 알아서 할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윤해진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윤해진은 윤 씨 저택을 벗어나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남지야, 너 정말 내가 좋은 거야?”송남지는 저녁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토했을 것이다.지금 송남지는 어쩔 수 없이 윤해진에게 맞장구쳤다.“네, 정말 좋으세요.”윤해진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송남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남지야, 이번에 네 도움이 컸으니 제대로 보답할게. 언제 시간 돼? 밥이라도 같이 먹자.”송남지는 정중하게 거절했다.“윤 대표님, 저희는 지금 신분이 부적절해서 함께 식사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고요.”윤해진은 뜨거운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우리의 신분이 적절하다면?”송남지는 윤해진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까 봐 조마조마했다.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윤해진이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냈다.“윤 대표님, 지금 기흥 문제는 성은 그룹에서 구두 약속만 받은 상태잖아요. 아직 계약서에 서명도 안 했고요. 괜히 저희에 대한 안 좋은 소문 때문에 기흥 프로젝트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손해가 막심할 거예요.”윤해진은 감탄과 감사의 눈빛으로 송남지를 바라보며 칭찬했다.“역시 네가 생각이 깊구나. 상미는 항상 자기감정만 생각하고 어린애 같아.”그의 말에는 허상미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송남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다 자기가 선택한 거면서.”윤해진은 제대로 못 알아듣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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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윤해진은 몸을 숙여 송남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남지야,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송남지는 본능적으로 윤해진의 손길을 피했다.지금 정신이 멀쩡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왜 이러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윤해진의 입술이 송남지의 뺨에 닿았고 그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미안해, 남지야. 이런 방법밖에 없었어.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송 씨 저택 밖 오동나무 아래, 나뭇가지 그림자가 흔들리는 가운데 정적이 감돌았다.윤해진의 얼굴이 다가와 송남지의 뺨에 입을 맞췄다.그 순간, 송남지는 완전히 정신이 번쩍 들었다.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에 깊숙이 파고드는 고통에 약간의 힘을 되찾았다.송남지는 이를 악물고 윤해진을 노려보며 경고했다.“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하지만 묘한 향기 때문인지 평소라면 분노로 가득 차 있을 송남지의 눈빛은 오히려 부드럽고 매혹적이기만 했다.윤해진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계획해 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송남지를 윤 씨 저택으로 불러들일 이유도, 일부러 송 씨 저택까지 바래다주겠다고 고집할 이유도 없었다.며칠 동안, 그는 송남지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 깊이 스며들었음을 깨달았다.어떻게든 그녀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사로잡았다.그 욕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고 한밤중에 송남지의 이름을 부르며 깨어나기 일쑤였다.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윤해진은 송남지를 손에 넣을 작정이었다.서경시의 한여름 밤, 송남지는 수수한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윤해진에게는 기회가 되었다.그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송남지의 옷을 가슴까지 끌어내렸다.드러난 그녀의 어깨는 하얗고 매혹적이었다.윤해진은 넋을 잃은 채 송남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남지야, 너도 내가 보고 싶었지?”송남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몸은 솜처럼 흐물거려 도저히 힘을 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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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고개를 숙여보니 조수석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었다.“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윤해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송남지의 휴대폰을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 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그는 당황한 나머지 휴대폰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떨어뜨릴 뻔했다.고개를 들어보니 며칠 전 외곽 별장에서 봤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송남지도 격렬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하정훈을 보는 순간, 구원받는 기분이 들었다.윤해진은 이를 악물었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분노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차 문은 잠긴 상태였다.윤해진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그대로 차를 몰고 가기로 결심했다.다른 곳으로 가면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고 오늘 밤 송남지는 반드시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다만 시동을 걸자마자 엔진 소리에 차 밖에 있던 하정훈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윤해진, 저 짐승만도 못한 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던 것이다.찰나의 순간, 하정훈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차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윤해진의 앞길을 막아섰다.비록 윤해진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관성 때문에 차 앞부분이 하정훈의 무릎을 들이받았다.그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뜨겁게 달아오른 엔진 덮개에 두 손을 짚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앞 유리창 너머 윤해진을 노려보았다.섬뜩한 눈빛에 윤해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동시에 공포라는 감정이 뇌 속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상대의 눈빛은 확고했고 송남지를 데려가려면 자기 시체라도 밟고 가라는 듯,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윤해진은 그 기세에 질려 숨을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 문 잠금을 해제했다.하지만 하정훈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굳건하게 그의 차 앞을 막아섰다.그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윤해진이 직접 송남지를 차에서 내려주지 않는 한 말이다.윤해진도 상대방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듯했다.그는 짜증스럽게 핸들을 쾅 치며 욕설을 내뱉은 후, 마지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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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요?”송남지는 축 늘어진 채 하정훈의 품에 안겨 물었다.하정훈은 한 손에 유화 그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송남지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일단 너부터 집에 데려다 놓고 얘기하자.”송남지는 간신히 남아있는 이성으로 말했다.“안 돼요. 집은 안돼요. 엄마가 이런 꼴을 보면 엄청 걱정하실 거예요.”이제 안전해졌으니 괜히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하정훈은 송남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물었다.“그럼 우리 집에 갈래?”지금으로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하정훈의 차는 송 씨 저택에서 멀지 않은 오동나무 아래,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사실 그는 한 시간이나 일찍 송 씨 저택 근처에 와 있었다.송남지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처음에 윤해진의 차가 송남지를 데려다주는 것을 보았을 때는 솔직히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그런데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윤해진은 정말 짐승만도 못한 놈이었다.하정훈은 뒷좌석에 유화 그림을 놓고 조심스럽게 송남지를 조수석에 앉혀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채워주었다.송남지는 고개를 숙이다가 하정훈의 짙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보았다.그의 머리칼에서는 은은한 우디 향이 풍겨 나왔다.안전벨트를 채워주느라 몸을 숙인 하정훈의 옆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거의 닿을 듯했다.송남지는 갑작스레 숨이 가빠졌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머리를 가슴에 묻고 싶어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충동을 억눌렀다.하정훈은 안전벨트를 다 채워주고 나서야 송남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왜 그래? 많이 힘들어?”송남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으며 애써 말했다.“괜찮아요.”여전히 걱정됐지만 하정훈은 억지로 캐묻지 않았다.차 문을 전부 닫은 후, 하정훈은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모든 문이 닫히자 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서 에어컨 바람 소리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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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가장 가까운 병원도 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거의 30분은 걸릴 터였다.“조금만 참아, 남지야. 조금만 더 참아, 금방 도착해.”다행히, 교외 도로는 비교적 한산했고 밤이라 차도 별로 없었다.차는 인적이 드문 가로수길로 접어들어 쏜살같이 달렸다.송남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운전 중인 하정훈을 올려다보았다.“더워요. 정훈 씨, 너무 더워요. 심장이 벌레가 갉아먹는 것처럼 간지러운데 나 죽는 거 아니에요?”“남지야, 죽지 않아. 조금만 더 참아.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야.”송남지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조수석에서 계속 몸부림쳤고 거친 숨소리는 얕은 신음으로 변해갔다.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하정훈의 심장은 손으로 꽉 움켜쥔 듯 아파왔다.그는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순간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고는 급하게 핸들을 꺾어 차를 한적한 샛길로 몰았다.또 한 번 급브레이크를 밟자 차는 가느다란 강변에 멈춰 섰다.강물은 달빛 아래 반짝이는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송남지는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간신히 쥐어짰다.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하정훈의 심장을 후벼팠다.그는 차를 세우고 송남지의 두 손을 잡았다.“내가 도와줄게!”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송남지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차가 멈추자마자 그녀는 하정훈에게 몸을 기울여 불타는 듯한 입술을 그의 얇은 입술에 포개었다.그 입맞춤은 긴 밤의 빗장을 풀어헤쳤다.모든 것이 순식간에 격렬하게 타올랐다.그날 밤 하 씨 저택에서와는 달리, 오늘 밤의 송남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그 미친 듯한 격렬함에 하정훈은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느꼈다.그는 그 밤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달빛은 잽싸게 지나가는 먹구름에 가려지고 초저녁은 어느새 새벽으로 넘어갔다.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한여름 밤의 벌레 소리, 그리고 차 안의 격렬한 숨소리가 어우러져 그날 밤 가장 아름다운 교향곡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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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침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송남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둑이 터진 듯 강변 차 안에서의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그녀는 필사적으로 하정훈의 품에서 벗어나 쏜살같이 욕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갔다.하정훈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멍하니 욕실 문 앞에 멈춰 섰다.“왜 그래?”하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 너머 흐릿한 그림자를 바라봤다.그가 봤을 때 송남지는 문에 바짝 기대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다급하게 말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먼저 샤워 좀 하려고...”하정훈은 문에 기댄 작은 그림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래, 기다릴게.”부드러운 목소리가 욕실 문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송남지는 문에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욕실 천장을 바라봤다. 따뜻한 조명이 불안한 그녀의 눈빛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뒤섞여 송남지의 뇌리를 스쳤다. 옅은 신음 소리까지 더해져 더욱 아찔했다.‘맙소사!’숫기 없는 소녀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매달린 건 처음이었다.송남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그녀는 한참 동안 샤워를 했다. 하정훈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릴 정도로 오래 씻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욕실에서 정신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한 것이다.송남지는 짙은 색 남성용 수건으로 몸을 감싼 채 욕실 문을 열었다.하정훈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물기 어린 김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고 뽀얗게 씻겨진 피부는 은은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하정훈은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고 송남지 역시 그의 시선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왜 여기서 기다려요...”정신을 차린 하정훈은 송남지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어 다급하게 해명했다.“네가 너무 안 나오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송남지는 촉촉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그럼 내가 전화했을 때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었던 건 송 씨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에요?”그렇게 묻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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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따뜻한 온기로 감싸여 있던 곳이 지금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아니라면 나는 객실로 갈게.”송남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너무 들이댄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괜히 남의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닌지 불안했다. 삽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하정훈이 침실 문턱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녀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가지 말아요!”하지만 너무 급하게 서두른 탓에 보폭이 너무 커졌고 가슴에 둘려 있던 남성용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가볍게 둔탁한 소리를 냈다.하정훈이 뒤돌아본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숨 막히게 야릇한 풍경이었다.온몸의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르는 듯했다.송남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크게 소리치면 하 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사람은 당황하면 정말로 뭘 해야 할지 모른다.이를테면 지금의 송남지처럼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하정훈의 눈앞에 서서 입만 틀어막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칠흑 같은 긴 밤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하정훈의 시선은 눈앞의 하얀 살결에 고정되었다.그의 목울대가 저절로 꿈틀거렸고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게 깔렸다.“이번에는 정말로 나를 붙잡는 거야?”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송남지는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었다.‘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적어도 남의 자리를 뺏는 짓은 안 했잖아?’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가지 마세요.”하정훈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고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실, 내가 여기 머무는 건 간단해. 이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어.”말을 마친 그는 몸을 숙여 송남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침실 온도가 낮아서 막 샤워하고 알몸으로 있으면 감기에 걸리기 쉬워.”알몸이라는 말에 송남지는 하정훈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이제 그녀는 스스로 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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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하정훈은 살면서 오늘 밤처럼 얼이 빠진 듯 멍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아까 뜨거운 물로 샤워한 게 실수였다. 차라리 냉수 샤워를 할 걸 그랬다.송남지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옆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무의식적으로 그 품에 안겼다.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품을 찾아든 것이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우디 향이 너무 좋았다.우디 향을 사용하는 남자는 흔하지만, 하정훈에게서 나는 향은 어딘가 특별했다.그 특별함에 이끌려 송남지는 하정훈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며 향기를 탐하듯 들이마셨다.마치 품 안에 작은 고양이라도 안고 있는 듯, 하정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쿵, 쿵!품 안의 작은 고양이는 얌전히 있지 못하고 그의 품 안을 헤집으며 옹알거렸다.하정훈은 잘 들리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참을성 있게 물었다.“뭐라고?”마침내 송남지가 세 번쯤 웅얼거리고 나서야 하정훈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마워요, 정훈 씨.”칠흑 같은 밤, 하정훈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별말씀, 여보.”다음 날 아침.하 씨 저택에서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하종현과 오가은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송남지는 어른들을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으로 2층에서 급히 내려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사과부터 했다.“아저씨, 아주머니, 죄송해요. 늦잠을 자서 기다리게 했네요.”하정훈은 그런 그녀의 옆에 여유롭게 앉으며 대신 말했다.“늦잠 잔 거 아니에요. 내가 두 분께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안 해줬어요.”오가은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송남지에게 갓 짜낸 주스를 따라주었다.“뭘 오래 기다리긴. 마침 잘 일어났으니 같이 아침 먹으면서 정도 쌓고 그래야지.”‘정을 쌓는다?’어쩐지 낯선 단어였다. 적어도 송남지는 윤 씨 가문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손윤영은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 가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가족이 아니니 정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다들 그저 한 사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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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그녀는 하정훈의 어떤 반응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는 그저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그래. 알았어. 유화는 내가 가정부에게 시켜 서재 금고에 넣어 뒀어.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짧은 말이었지만 송남지는 여러모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그림은 내 작품이라서 값어치가 없을 텐데 굳이 금고에 넣을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제 생일은 어떻게 아세요?”하정훈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송남지의 질문에 대답했다.“네 작품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더더욱 금고에 넣어 두는 거야. 그리고 네 생일은 딱히 비밀도 아니잖아. 난 너에 대해 알아봤거든.”송남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하긴 하 씨 가문 정도 되는 집안이라면, 아무 여자나 며느리로 들이지는 않겠지. 비록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며느리로 맞이할 여자이니 어느 정도는 알아봤을 거야. 생일처럼 기본적인 정보는 알아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그녀가 겨우 그 의문을 해소할 즈음,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최미경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식탁은 비교적 조용했기에 하정훈은 자연스럽게 최미경이 송남지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남지야, 너 또 하 씨 저택에 있는 거니? 왜 이렇게 철이 없어. 너랑 정훈이 결혼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삼일이 멀다 하고 그집에 살다시피 하면 그집안 친척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송남지는 최미경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천천히 말했다.“엄마, 오늘 집에 돌아가면 결혼식 날까지는 안 올 거예요.”하정훈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송남지가 올려다볼 때쯤에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그녀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하정훈이 말했다.“기사 불러서 너 집까지 데려다 줄게. 그리고 그림이 여기 있는 게 영 불안하면 가져가도 괜찮아.”송남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에요. 하나도 안 불안해요. 그냥 여기 놔두세요.”이 세상에 윤해진처럼 그런 식으로 그녀를 협박하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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