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의 모든 챕터: 챕터 301 - 챕터 310

775 챕터

제301화

온하준은 곧장 강시우의 손에서 홍순자를 낚아채려 했다.“비켜! 내가 할머니를 안을 테니까.”하지만 강시우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홍순자를 안고 거의 뛰다시피 자신의 차로 향했다.“강지연!”미간을 찌푸린 채 강지연을 향해 소리쳤지만 그녀 역시 온하준을 무시한 채 강시우의 차로 달려갔다.그사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이 도착했다. 기호범은 침착하게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노인 상태가 아주 위급합니다. 일단 저 두 사람은 노인을 모시고 먼저 병원으로 가게 하고 안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전부 진술하겠습니다. 영상도 이미 다 찍어 두었고요. 짐승만도 못한 자식은 놈은 안에 갇혀 있습니다.”온하준은 창고 입구에 멈춰 서 있었다.한순간에는 강지연과 함께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한순간에는 강성호가 눈에 들어와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를 향해 눈길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온하준은 마치 쓸모없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그때 문득, 극도로 쇠약해진 홍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망설임 없이 강지연과 강시우를 뒤따라 차에 올라타고 서둘러 핸들을 돌려 병원을 향해 달렸다.강지연과 강시우가 홍순자를 응급실로 데려오자 의료진은 물론 대기 중이던 환자들까지 모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도대체 노인이 어떻게 이런 심각한 상태가 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곧바로 홍순자는 응급실 안으로 밀려들어 갔고 강지연과 강시우는 밖에서 기다렸다.며칠을 내리 불안에 떨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에 강지연은 긴장이 풀리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의자에 앉자마자 혼이 나간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강시우는 그녀 곁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손길을 살며시 뻗어 그녀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이제 괜찮아, 지연아. 괜찮을 거야.”사람은 구조됐지만 홍순자가 과연 어떤 상태인지 의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기에 강지연의 불안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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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2화

온하준은 한쪽에 서서 어떻게든 손을 보태려 했지만 좀처럼 끼어들 틈이 없었다.강지연 곁에 있는 이 남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디서 나타난 사람인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강지연과 호흡이 잘 맞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강지연은 그의 곁에서 꼬박 5년을 보냈고 그동안 외부 사람들과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떠난 지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곁을 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온하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강지연의 마음은 오롯이 홍순자에게 가 있었다.온하준이 여전히 곁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알 리도 없었다.강시우가 홍순자를 안정시키고 나서야 강지연은 병상 곁에 앉았다.수척해져 형체마저 달라진 홍순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강...”온하준은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고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을 끝까지 부르기도 전에 강시우가 먼저 그녀 곁에 서서 어깨를 감싸안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지연아, 이제 괜찮아. 다 지나갔어.”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가슴이 칼로 저며지는 것처럼 아팠다.“할머니가 너무 힘드셨잖아요.”“응, 알아. 나도 마음이 아파. 그래도 좋게 생각하자. 일단은 살아 계시잖아. 이제 잘 치료하고 퇴원하면 잘 보살피면 돼. 분명 좋아질 거야.”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알아요.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너무 괴로워요.”“지금 집에 가서 쉬자고 하면 절대 안 갈 거지?”강시우가 낮게 물었다.“네.”강지연의 대답은 단호했다. 누가 뭐라 하든 이곳에서 한 발짝도 떠날 생각이 없었다.“그럼 힘내고 밥도 좀 먹고 중간중간 쉬기도 해야 해. 안 그러면...”“알겠어요.”강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할머니가 언제든 깨어날 수 있으니까 울지 않을게요. 이따가 밥도 먹을 거예요. 할머니가 깨어났는데 제가 초췌해져 있으면 마음 아플 거잖아요.”강시우는 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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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3화

“풀어줘요.”강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풀라고요?”기호범은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이건 강시우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당연히 그 여자를 반쯤은 망가뜨려 놓을 거로 생각했다.“네, 풀어줘요.”강시우는 느긋한 말투로 덧붙였다.“가끔은 개가 개를 무는 장면도 꽤 볼만하거든요.”기호범은 짧게 응답했고 통화는 그대로 끝났다.전화를 끊기 직전 저 여자를 풀어주면 또 무슨 일을 벌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강시우가 있는 이상 노인이나 강지연에게 실질적인 위해가 가해질 일은 없었다. 그 밖의 소동이 아무리 커져도 그들과는 무관했다.강시우는 병실로 돌아와 다시 외할머니와 강지연 곁을 지켰다.한편, 빛이라곤 전혀 스며들지 않는 어느 지하실.이하나는 구석에 웅크린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누가 자신을 붙잡았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붙잡히는 순간 휴대전화는 빼앗겼고 그녀는 곧장 이 캄캄한 공간으로 던져졌다.밤인지 낮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도 고팠다. 하지만 공포는 그보다 훨씬 컸다.특히 오늘 그녀를 데려온 사람들 가운데 앞에 섰던 그 남자가 너무도 섬뜩해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억을 샅샅이 뒤져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순간, 지하로 떨어지던 그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왔다.그녀는 정말 물건처럼 던져졌고 계단 위에서 그대로 내팽개쳐진 채 몇 번이나 구르다 멈췄다. 온몸은 해체된 것처럼 아팠고 어디가 부러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잠시 뒤, 희미한 불빛 하나가 켜지며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한 사람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남자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이런 어둠 속에서 선글라스라니 얼굴을 가리려는 걸까 싶었지만 사실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니까.그들은 모두 마스크를 쓴 채 검은 셔츠를 입은 그 남자를 중심으로 내려왔다.“당신들 뭐야? 너희들 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이하나는 처음엔 몇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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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4화

이하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유서원에게 어떤 방식으로 돈을 보냈는지, 강성호를 어떻게 보석으로 풀어냈는지, 그리고 그들에게 강지연과 홍순자의 행방을 어떻게 은근히 흘렸는지, 나아가 강성호가 두 사람을 어디에 숨겨두었는지까지, 그녀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이야기를 전부 들은 남자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떠나기 전 그는 주변 사람을 향해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저 여자 잘 지켜봐. 단 한 마디라도 거짓이면 바다에 던져 상어 밥이 될지, 아니면 팔려 가 노예로 살지 선택하라고 해.”그 말이 끝나자 불이 꺼졌고 지하실은 다시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이하나는 기어서 사방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눌러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빛이 사라진 공간은 사람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그들이 정말 다시 오지 않는다면 굶어 죽기도 전에 이 어둠 속에서 먼저 미쳐버릴 게 분명했다.그러다 마침내 사람이 왔다.누가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앞서 봤던 남자의 체형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서 잠깐 스친 시계 유리의 반짝임과 숨을 죄어오는 기운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이하나는 거의 기어오르듯 그들에게 다가갔다.“내보내 줘요. 사람은 찾았어요? 어떻게 됐어요? 살아는 있죠? 제발 내보내 주세요. 난 그냥 강지연이랑 노인이 있는 곳만 알려줬을 뿐이에요. 온하준이 그 늙은이를 계속 신경 쓰는 게 싫어서 데려가라고 한 것뿐이에요. 해치라고 한 적은 없어요. 정말이에요. 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건 전부 강지연 그 여자 때문이지, 나랑은 상관없어요. 정말이에요...”이하나는 공포에 잠겨 있었다.홍순자가 정말로 고문당해 죽기라도 했다면 검은 셔츠의 그 남자가 분노해 자신을 화물선에 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배에 오르는 순간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밥이 되는 건 오히려 가벼운 결말일지도 몰랐다.그가 말한 팔려 가 노예로 사는 일은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차라리 죽음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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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5화

전화를 끊은 온하준은 병상 앞으로 다가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강지연,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할머니를 보살필게.”강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강시우가 그를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왜? 누가 사라지기라도 했대? 영혼의 단짝 같은 뭐 그런 여자?”온하준의 얼굴이 굳어졌다.“그쪽이야말로 참 싱겁네.”강시우는 가볍게 웃었다.“나도 너한테는 별 관심 없거든. 다만, 어떤 남자가 아내의 할머니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다른 여자를 위해 달려가나 싶어서. 좀 어이가 없잖아.”“입 닥쳐!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온하준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내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강지연을 향해 말했다.“강지연, 하나가 연락 안 돼. 혹시 할머니처럼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지 걱정돼서...”강시우가 다시 한번 냉소를 흘렸다.온하준은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웃을 때마다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자신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듯한, 설명하기 어려운 모멸감이 밀려왔다.“도대체 뭐가 웃긴다고 아까부터 그렇게 웃어대는 거지?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온하준의 말에 강시우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꾸했다.“웃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내가 구해야 할 사람은 이미 구했고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도 다 내 옆에 있는데. 게다가 모든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웃지 못할 이유가 없지.”“가장 소중한 사람?”온하준이 폭발했다.“그게 누군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강시우는 미소를 지운 채, 한 손으로는 강지연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홍순자의 손을 잡았다.“여기 있잖아.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들. 그런데 너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너!”온하준은 이를 악물었다.“여기가 병원이라 참는 거야. 적당히 해. 안 그러면...”“온하준.”그의 말을 끊은 건 강지연이었다.“여기가 병원이라는 걸 알면 빨리 가. 할머니 휴식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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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화

강지연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오빠는 아직 온하준을 잘 모른다고.이런 선택의 순간을 그녀는 이미 셀 수 없이 겪어왔다.가장 아찔했고 동시에 마음을 완전히 접게 만든 순간은 칼끝이 자신의 얼굴을 향하고 있던 그때였다. 그 상황에서도 온하준은 망설임 없이 이하나를 택했다.그렇게 위급한 순간에도 이하나를 선택했던 사람이 지금 멀쩡히 있는 강지연을 선택할 리 없었다.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온하준은 강지연을 보며 말했다.“강지연, 너도 알잖아. 나는 너랑 평생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바꾼 적 없어. 지금은 그냥 몇 가지 일만 처리하고 오면 돼. 다 끝나면 바로 돌아올게.”“꺼져.”강시우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온하준은 여전히 강지연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 보였지만 강시우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한 그 말이 닿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하나 쪽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온하준은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병실을 뛰쳐나갔다.문이 닫히는 순간, 강시우의 얼굴이 굳었다.그러나 옆에 있는 강지연을 보자 그는 곧 표정을 고쳐 잡았다.‘저런 사람을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으니.’“지연아...”강시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강지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웃었다.“오빠, 나 괜찮아요. 진짜예요.”이미 충분히 예상한 결과였기에 더 이상 아플 이유도 없었다.그녀와 온하준 사이는 이혼 서류 한 장만 남겨둔 상태였고 홍순자가 퇴원하면 정리할 생각이었다.그러니 이제 온하준이 누구를 선택하든 강지연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강시우는 괜찮다는 강지연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괜찮음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저렸다.그는 짧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제 지연이와 상관없는 사람들은 다 꺼지라 해.’그때 기호범에게서 전화가 왔다.“전화 좀 받고 올게.”강시우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사람은 풀어줬습니다.”기호범의 보고였다.“알았어요.”기호범은 망설이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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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7화

강시우는 강지연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괜찮아. 일 진행 상황 보고받은 것뿐이야. 전부 순조로워.”“오빠, 사업을 국내로 옮기면 나중에는 고모랑 같이 귀국해서 여기서 지낼 생각이에요?”강지연의 질문에 강시우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당분간은 아니야. 초반엔 내가 오가야 할 일이 많아서 자주 다니긴 하겠지만 이쪽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완전히 들어와서 살지는 그때 다시 생각해 봐야지. 무엇보다 엄마는 자기 일과 계획이 분명한 사람이야. 나 때문에 모든 걸 접고 들어올 분은 아니고.”“고모 정말 대단해요.”강지연은 강희라가 오랫동안 패션 업계에서 디자이너로 일해 왔고 최근에야 유명 브랜드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 넓은 세상에서 자신은 지난 5년 동안 자신을 스스로 가둔 채 살아왔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우리 지연이도 아주 대단해.”진심이 담긴 말에 강지연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인생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든, 어떤 모습으로 망가져 있든, 가족의 눈에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감각은 낯설면서도 따뜻했다.그 온기는 원래라면 스무 해도 더 전에 부모에게서 받아야 했을 것이었다.이미 오래전에 그런 기대를 접고 살았는데 서른을 앞두고 삶이 가장 흐트러진 이 시점에서, 그것도 고작 며칠 함께 지낸 오빠에게서 다시 받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오빠...”가슴이 묘하게 차올라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바보야.”강시우가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가족이잖아. 이제는 다 같이 뭉쳐서 행복하게 살아야지.”“네.”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쯤에 알게 된 혈연이 이렇게 따뜻할 줄은 정말 몰랐다.온하준이 병원을 뛰쳐나올 무렵, 이하나는 이미 김도윤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그녀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휴대전화는 그들에게 빼앗겼고 차에서 그대로 내던져져 외진 공터에 떨어졌다.마대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고 시야에 들어오는 건 텅 빈 도로뿐이었다.집은커녕 사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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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화

이하나는 감히 신고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신고하는 순간 조사가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지금까지 애써 숨겨온 것들이 모조리 드러날 게 분명했다.김도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이하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됐어, 김도윤. 그냥 두자. 나 요즘 점 봤는데 재운이 안 좋다고 하더라. 돈 나가면 액운을 막아준다고도 했고. 이번 일은 그냥 그렇게 넘기자. 어차피...”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그를 힐끗 바라봤다.“강지연 돌아온 거 너도 알지? 강지연 할머니도 아마 데려갔을 거야.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소식 들은 거 있어?”김도윤은 잠시 멍해졌다.“언제?”“오늘 오후.”이하나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고정했다.“하준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겠어.”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하준이가 강지연 할머니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너도 알잖아. 만약 할머니가 학대당한 게 우리랑도 연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하준이가 가만있을까?”김도윤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건 아닐 거야. 우리는 주소만 알려줬잖아. 그건 도와준 거지. 아들이 혼자 사는 엄마 찾겠다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어? 효도하겠다는 사람 도와준 건데.”“하지만 그 사람들이 효도하려고 찾아간 게 아니잖아.”이하나는 속이 답답했다.이런 말을 지금 해봐야 온하준이 믿어주지도 않을 텐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하지만 김도윤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었다.“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는 그냥 아들이 엄마를 찾는 줄 알았을 뿐이야. 그게 죄야?”그제야 이하나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맞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그건 강씨 집안 일이잖아. 누가 우리한테 진실을 알려준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냥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지.”김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그리고 하준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 네가 무슨 말 하든 결국은 너를 믿고 넘길 거야. 그러니까 무서워할 거 없어.”이하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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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9화

이하나의 집, 아침.온하준은 머리를 쪼개는 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돌리려다 두통보다 훨씬 끔찍한 감각이 먼저 스쳤다.이불을 젖혀 아래를 확인한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숙취는 그 자리에서 단번에 사라졌다.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더 무서운 건 이곳이 이하나의 침실이라는 사실이었다.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그의 옆에는 이하나가 누워 있었다. 이불은 반쯤만 덮여 있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온하준은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이하나를 덮어주었다.머릿속은 아득했지만 그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그때 방문 밖에서 김도윤의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아, 하준아. 어디 있어? 하나야? 두 사람 어디 있는 거야?”온하준은 급히 침대에서 내려오다 화병을 넘어뜨렸다.그 소리에 김도윤은 곧장 방문을 열어젖혔다.“하...”이름을 끝까지 부르기도 전에 김도윤은 눈앞의 장면을 보고 굳어버렸다.온하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아니야. 이게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하준아...”그때 이하나도 눈을 떴다.두 사람의 소리에 놀라 깬 그녀는 상황을 인식하자마자 짧은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끌어안았고 눈가는 순식간에 젖었다.“하준아...”온하준의 머릿속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어젯밤 이하나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강도를 만난 충격 때문인지 이하나는 내내 울었고 김도윤은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는 술을 조금 마시면 잊을 수 있다며 잔을 꺼냈다.그 ‘조금’이 문제였다.요즘 온하준 역시 쌓인 일이 많아 마음이 복잡했던 터라 술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그를 무너뜨렸다.주량이 이렇게까지 형편없던 건 아니었는데 기억은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겨 버렸다.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장면은 단 하나였다. 이하나가 그의 품에 파묻혀 울고 있던 모습.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는지를 흐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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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0화

“그래, 하준아.”이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정말이야. 네가 잊고 싶다면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해도 돼. 만약... 정말 만약에 김도윤 말처럼 이 세상에 네가 숨 돌릴 곳이 하나쯤 필요하다면 나는 늘 여기 있을게. 네가 생각나서 오면 따뜻한 밥 해두고 기다릴게. 같이 이야기하고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때까지 옆에 있어 줄게.”온하준의 머릿속에는 김도윤의 말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이미 벌어진 일이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말.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하나의 집을 나왔는지조차 또렷이 기억하지 못했다.문이 닫힌 뒤 김도윤과 이하나는 서로를 바라봤고 거의 동시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온하준은 회사로도 병원으로도 가지 않았다.방향도 목적도 없이 차를 몰다 정신이 멍한 상태로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몸에 밴 술 냄새가 견딜 수 없이 역했다.그는 옷을 벗어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았다.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거실에 두었던 휴대전화 벨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전화를 건 사람은 김도윤이었다. 회사로 와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었다.“너희끼리 해.”온하준은 힘없이 말했다.“하준아, 중요한 회의야.”김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크로시 그룹이랑 협업하기 위해 열린 회의야. 네가 빠지면 안 돼.”“그럼 미뤄.”그는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지만 머릿속의 소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잠시 후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또 김도윤이었다.온하준은 받지 않으려다 잠시 망설인 끝에 전화받았다.“김도윤, 크로시 그룹 건 그렇게 급하지 않아. 회의는 내일로 미뤄.”지금 그에게는 무엇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하준아,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김도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했다.“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 없어. 하나가 그러더라. 네가 부담되면 자기는 떠날 수 있다고. 다시 해외로 나가도 된다고.”“그럴 필요는 없어.”온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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