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의 모든 챕터: 챕터 71 - 챕터 80

100 챕터

제71화

강지연은 화들짝 놀랐다. 혹시 유학 준비 관련해서 지우지 못한 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온하준이 보고 있는 건 브랜드 매장 직원과의 채팅창이었다.지금 그가 읽는 부분은 직원이 보낸 메시지였다.[오래도록 저희 브랜드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강지연이 남긴 답장은 이랬다.[당연하죠! 전 제 최애를 응원해야 하니까요!]온하준은 그 브랜드의 모델을 검색해 본 뒤, 휴대폰을 그녀에게 툭 던졌다.그리고 비웃으며 말했다.“몰랐네, 강지연. 너도 덕질해? 어쩐지 몇 년째 같은 브랜드 옷만 사더라. 내 돈 가져다 남자 연예인 응원하는 데 쓴 거야?”사실 그는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그녀가 응원한 건 지금이 아니라 전 모델이었다. 그 채팅은 작년 기록이었고 그때 그 브랜드의 모델은 다름 아닌 그녀의 무용과 동기였다.그녀는 무대에 설 기회가 사라졌지만 예전 동기가 TV 화면 속 모델이 되는 걸 보니 진심으로 기뻐서 화장품도 향수도 의류도 그 브랜드만 골라 샀을 뿐이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작은 응원이기도 했다.올해 모델이 바뀐 후에도 이미 습관처럼 그 브랜드만 샀고 무엇보다 그 브랜드는 그녀에게도, 온하준에게도 잘 어울렸다. 그러니 굳이 바꿀 이유 또한 없었다.설령 남자 모델을 좋아하면 또 어떤가?온하준은 자신이 입은 셔츠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왜 이렇게 매일 찝찝한 옷 입은 기분이지?”결혼 5년 만에 이 인간이 이런 데는 또 묘하게 유머러스하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이하나가 돌아오니 사람이 이렇게 생기가 도는구나 싶었다.“그만해.”그녀는 손을 내저었다.“요즘 세상에 누가 고민거리 없겠어. 다 그렇게 사는 거야.”그녀라고 마음 편히 살았을까. 온하준을 그렇게 사랑했었는데 이젠 그 사랑조차 내려놓았다.‘이제 와서 누가 누구를 탓해.’“나 잘게.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 타야 돼.”그녀의 말투는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그때 장시범이 전화를 걸어왔다.“여보세요?”그녀는 침실 쪽으로 걸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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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결혼은 서로의 선택이었고 그때의 그녀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한 셈이었다.“한숨 쉰 거야? 그 사람이랑 통화 끝났다고 바로 한숨부터 쉬어?”온하준이 그녀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말했다.“너, 네가 누구랑 결혼했는지 잊었어?”강지연은 지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잊어버린 사람은 내가 아니야, 온하준.”온하준은 미간을 좁히더니 피식 웃었다.“그래서? 지금 이 쇼는 뭐야? 내가 질투라도 해서 하나를 버리길 바라는 거야? 날 자극해서 흔들어보겠다는 거지?”강지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네 멋대로 생각해. 난 할 말 없어.”그녀는 그대로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잠을 청했다.“일어나. 지금 당장.”온하준이 이불을 확 젖혔다.“온하준, 잠 좀 자자. 난 너처럼 뻔뻔하지 않아. 그냥 장 여사님 가족들하고 몇 마디 했을 뿐이야.”강지연은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이 인간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그러나 온하준은 차갑게 웃었다.“뭐야, 이젠 그 집안 사람들하고 죽이 잘 맞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그는 갑자기 그녀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얼굴 인식을 시도했다.“뭐 하는 거야? 휴대폰 줘!”그가 연락처를 찾으려던 찰나, 강지연은 힘껏 빼앗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내놔. 장시범 번호 당장 지워.”그가 명령했다.“내 돈 쓰는 사람이 내 통제를 벗어나는 건 절대 허락 못 해.”강지연은 휴대폰을 베개 밑에 더 깊숙이 눌러 넣었다.“너...”온하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틀렸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숙여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외간 남자 하나 때문에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강지연도 필사적으로 막아섰고 잠깐이었지만 둘은 팽팽히 맞섰다.온하준은 결국 인내심이 바닥나 휴대폰을 뺏는 것도 포기한 채 침대 앞에 서서 강지연을 내려다봤다.그 눈빛은 너무 낯설어서 오히려 공포스러웠다.강지연은 본능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겼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이불째로 그의 팔에 들어 올려졌다.그러고는 그대로 침대에 눕혀졌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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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그녀가 쉰 목소리로 아무리 소리쳐도 온하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의 손길은 점점 도를 넘었고 그녀의 몸은 이미 거의 다 드러난 상태였다.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 같았다. 뜨겁고 매끄럽게 밀려드는 그의 피부 감촉에 등골이 오싹할 만큼 두려움이 치밀었다.혹시 오늘 밤 정말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밀려왔다.“온하준, 계속 이러면 나 정말 널 미워할 거야!”이제 막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는데 그는 또다시 그녀를 지옥으로 끌어내리려는 걸까.절망이 지나가자 오히려 침착해졌다.지금의 그녀에겐 미친 듯 행동하는 온하준을 이길 체력은 없었다. 만약 정말 자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절대 다시 그의 블랙홀 속으로 떨어져선 안 된다. 내일은 피임약을 사는 게 급선무였다.어떠한 일도 그녀가 이 집을 떠나는 계획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늘 밤만 지나면 온하준을 떠나기까지 딱 스무날 남았다.5년을 견뎠는데 스무날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강지연이 더 이상 힘을 쓰지 않자 온하준의 손길도 느려졌다.그는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이제 말을 잘 듣네. 이렇게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 왜 자꾸 버티려고 해.”눈을 꼭 감자 눈물이 흘러나왔다.“울지 마. 살살 할게. 조금만 아플 거야...”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스치더니 이내 눈을 덮었다.눈을 왜 가리는지 잘 모르겠지만 얼굴을 가린다면 그녀를 이하나라고 착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벨 울렸어. 룸서비스인가 봐. 안 열면 직원이 그냥 들어올 수도 있어!”강지연은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말했다.“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들어와?”그는 오히려 더 거칠게 으르렁거렸다.초인종이 다시 울렸고 문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하준아!”“이하나야! 이하나가 왔다고!”그녀가 급히 외쳤다.드디어 통증이 사라졌지만 온하준은 그녀의 등을 떠나지 않았다.“하나가 와서 기뻐?”그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그 안엔 위협까지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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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왜 나만 불륜녀 포지션처럼 느껴지는 거야?’강지연은 속으로 투덜거렸다.“응...”이하나는 나른하게 콧소리를 흘리며 말했다.“하준아, 고마워. 정말 나한테 잘해주네.”“내가 아니면 누가 너한테 잘해주겠어?”온하준의 말투는 따뜻하고 다정했다.“하준아, 나 할 말이 있어. 절대 화내면 안 돼...”이하나는 여전히 애교 섞인 투로 말했다.강지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불러냈으면 얼른 데리고 나가면 될 일이지, 왜 문 앞에서 연애극을 펼치고 있는 건지. 그것도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응, 화 안 내. 온하준이 하나한테 어떻게 화를 내겠어. 난 너한테 절대 화 안 내.”그 말에 강지연은 예전에 봤던 그 ‘하나를 위한 100가지 약속’ 노트가 떠올랐다. 그 안에 있던 항목 중 하나는 ‘온하준은 하나에게 절대 화내지 않기’였다.그래, 그녀의 남편은 말한 건 기어코 지키는 사람이었다.“하준아...”이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나긋나긋해졌다.“말해.”“하준아.”듣기만 해도 말하는 사람이 몸을 배배 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나, 나, 네가 지연 씨랑 같이 자는 거 싫어. 두 사람 혹시... 그거 하는 거 아니지?”강지연은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세상의 새로운 면을 배웠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온하준의 대답은 더 대단했다.“아니. 난 걔랑 그거 안 해. 가자, 내가 방까지 데려다줄게.”문이 드디어 닫혔다.강지연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잠갔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대고 가슴께를 꼭 눌렀다.‘아프지 않을 리가 없지.’그 둔탁하고 묵직한 통증은 마치 누군가 가슴 위에 돌덩이를 올려놓고 계속 내리치는 듯했다. 그런데 아픈 건 무섭지 않았다.시간은 사랑을 이루어주진 못해도 상처는 아물게 해주니까.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제야 좀 편히 잘 수 있겠어.’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나도 네 온하준이랑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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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하준아, 너 아침부터 어딜 다녀왔어? 안 피곤해? 체크아웃이 뭐 그리 급하다고.”김도윤의 목소리였다.“내가 늦게 가면 강지연은 분명 새벽같이 도망쳤겠지.”온하준이 말했다.“아니, 그 여자가 도망가는 게 뭐 어때서? 결국 집으로 비행기 타고 갈 거잖아?”온하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가 한참 뒤에야 툭 내뱉었다.“그것도 맞지. 그냥 억울해서.”“내가 너라도 억울하지. 네 돈 쓰면서 바람까지 피워? 이런 마누라는 일찍이 내치는 게 맞지!”김도윤이 거들었다.“맞아. 그냥 손봐줘야 해. 하준아, 넌 너무 물러. 한 번 혼내주면 며칠은 얌전할걸.”온하준의 친구들이 그녀의 흉을 안 보는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그때 이하나가 입을 열었다.“그만들 해. 하준이도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어. 너희들이 이렇게 말하면 하준이 마음이 편하겠어? 게다가 우리 하준이가 사람 좋고 착했으니까 너희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거야. 하준이가 얍삽한 상인이었으면 너희 지금 굶고 있을걸?”잠시 정적 후, 김도윤이 맞장구쳤다.“맞아. 하준이가 의리 있고 선해서 우리가 이렇게 믿고 따르는 거지. 우리도 다 하준이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야. 그래도 역시 하나 너밖에 없다. 네가 하준이를 제일 잘 알아.”또 다른 친구도 거들었다.“그래.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돌아와 줘서 다행이야. 하준이가 이 몇 년 동안 고생 너무 많이 했어. 그러니까 옆에 너 같은 사람이 있어야지.”“됐어, 이 얘긴 그만하자. 너희들이 다 나 생각해서 말하는 거 알아. 그래도 너희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약하자면 그녀와 함께한 지난 5년은 지옥이었고 이하나는 그 지옥에서 온하준을 건져 올린 천사인 셈이다.강지연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아침 아메리카노가 이렇게 쓰긴 처음인데.’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기둥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테이블을 스쳐 지나갔다.정면에서 마주친 건 김도윤이었다. 그는 빵 조각을 집어 먹다 고개를 들었고 강지연이 미소를 띠고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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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온하준에게 말했다.“미안해. 내가 미처 못 봤네. 근데 이 커피 그렇게 맛없어? 한 모금도 안 마셨네. 근데 말이지, 온하준. 네 인생이 더 쓴 것 같아, 아니면 커피가 더 쓴 것 같아?”온하준의 친구가 들고 있던 스푼을 그 자리에서 떨어뜨렸다.강지연이 이런 말을 한 건 아까 그들끼리 나눴던 얘기를 전부 들었다는 뜻이었다.“어머? 도진 씨, 왜 숟가락도 제대로 못 잡아요? 제가 놀라게 했나요? 미안하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식사 천천히 하세요.”강지연은 잔잔하게 웃으며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뒤에서는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고 이어 이하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윤아, 제발 진정 좀 해! 충동적으로 굴지 말라고 했지? 하준이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든지 하준이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자니까? 됐어, 내가 갈게! 내가 가서 말할게!”“지연 씨!”이하나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다리를 불편했던 강지연은 금방 따라잡혔고 이하나는 그녀 앞에 서자마자 말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졌다.“지연 씨, 미안해요. 어젯밤은 정말 내가 잘못했어요. 하준이를 그렇게 불러내면 안 됐는데 너무 무서워서... 나, 상상도 못 할 일들을 많이 겪어왔거든요. 어젯밤에도 악몽을 꿨고... 정말 미안해요. 화낼 거면 나한테 해요. 물을 끼얹든 욕을 하든 다 받아줄 테니 하준이는 제발 탓하지 말아줘요. 네?”그동안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온하준은 이하나가 뛰어가자 바로 따라왔다.이하나가 울음을 멈추자 강지연 앞에는 어느새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온하준은 그녀를 거의 노려보듯 응시했다.“강지연, 하나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뭐에 화가 났든, 나한테 말하라고 했잖아.”그 모습이 우습고 서러워서 강지연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그녀는 이하나에게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온하준은 발 벗고 나서서 이하나를 감싸 주었다.친구들이 그녀를 비웃고 헐뜯을 때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면 그들도 그렇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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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나도 도윤이랑 의견이 같아. 이런 방식은 여자들이 흔히 쓰는 거지. 갑자기 정 회장 아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 생각해봐, 정씨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중의 금수저잖아. 어떤 여자를 못 만나봤겠어? 여자 연예인들이 줄을 서도 이상할 게 없는데 그런 사람이 강지연을 눈여겨볼 것 같아?”“아휴, 너희들 정말... 지연 씨는 하준이 아내야. 그렇게 말하면 하준이가 마음 아프잖아.”이하나는 그들을 말렸다.“하준아, 도진이도 지연 씨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한 거지. 나도 여자니까 알거든. 관심 끌고 싶을 때 나도 가끔 그랬어...”그때, 온하준이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이 소동에 종지부를 찍듯이.“강지연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책임이고 내 문제야. 결혼할 때부터 원래부터 혼자 감당할 생각이었고 너희까지 얽히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결국 너희까지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했네.”“무슨 소리야?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할 필요가 있냐? 다 친구잖아.”“맞아, 하준아. 우린 그냥 네가 힘들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지연은 이미 식당을 벗어났기에 더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침에 마신 진한 아메리카노의 쓴맛이 혀끝에서 위장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온하준의 세계에서 억울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김도윤, 김도진, 그리고 이하나였다.아직 늦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이 5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만약 그 5년을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흘려보냈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절망했을지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강지연은 방으로 올라가 바로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기에 라운지에서 조금 더 먹은 뒤 곧바로 탑승 시간이 됐다.이 항공편의 기종은 비즈니스석이 양쪽 창가에 1인석, 가운데에 2인석으로 배치된 구조였다. 그녀는 창가 좌석을 골랐다.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두고 기체 움직임을 기다리며 가방에서 영문 원서를 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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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그럼 덮지 마.”“하지만 비행기 안이 너무 춥잖아. 나 추워.”이하나는 원피스를 입어서 팔이 죄다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온하준은 외투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줬다.“내 옷 덮어.”강지연은 굳이 보지 않아도 이하나가 자신에게 슬쩍 던진 승리의 눈빛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책만 보며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러나 이하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지연 씨, 나 하준이 옷 좀 입어도 괜찮죠?”잔뜩 겁먹고 억울한 표정을 짓는 이하나를 보자 강지연은 웃음이 나왔다.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는 연기인 걸까? 그녀에게? 아니면 옆에 있는 온하준에게?강지연은 고개를 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네, 당연히 괜찮아요.”사람도 보내줬는데 옷 한벌 쯤이야 뭐.“고마워요, 지연 씨. 정말 다정하시네요. ”이하나는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강지연은 다시 책을 펼쳤다.그때 온하준이 그녀를 불렀다.“하나야.”온하준이 이하나에게 어떤 눈빛을 보냈는지, 이하나는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아, 나 지연 씨랑 잘 지내고 싶어서 그래. 그래야 네가 집에 가도 지연 씨가 잘해줄 거 아니야.”소설이었다면 이런 대사는 오직 멍청한 남주만 홀딱 넘어가는 전형적인 클리셰일 터.그리고 지금 온하준이 딱 그 클리셰 속 주인공처럼 보였다.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금쯤 온하준과 그의 충직한 두 졸개 머릿속엔 분명 이런 멘트가 떠다니고 있겠지.‘역시 하나야. 세심하고 착하고 배려심도 깊고...’강지연은 그저 조용히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서로 얼굴 안 보고 말도 섞지 않고.하지만 이하나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지연 씨, 뭐 보고 있어요?”머리를 쏙 들이밀며 묻는 그 말에 강지연은 조용히 책을 덮었다.“그냥, 심심해서요.”“헐, 영어 원서네요? 지연 씨, 이거 진짜 읽을 줄 알아요? 와, 대박...”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눈빛엔 조롱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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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그녀도 그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곧 온하준도 서서히 웃음을 거뒀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조용해졌다.강지연은 온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렇게 웃겨?”온하준의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졌고 강지연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이랑 같이 아내를 비웃는 게 그렇게 좋아?”온하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지연 씨...”이하나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또 연기 시작이군.’강지연은 더 이상 들어줄 생각이 없었고 들을 의무도 없었다. 그녀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는 그들과의 모든 접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이후 이하나가 온하준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억울함을 호소하든 이젠 전혀 상관없었다. 차라리 애초부터 서로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그 후, 그들은 더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릴 때, 짐을 꺼내려는데 이하나가 유난히 걸크러시인 척하며 수납장 문을 확 열고는 온하준에게 말했다.“하준아, 빨리 지연 씨 짐 좀 내려줘. 지연 씨는 몸이 불편하잖아!”온하준은 원래 이하나의 짐을 꺼내주려던 손을 멈추고 강지연 쪽으로 다가가 짐칸을 열었다.강지연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하나 체면 생각해서 그녀를 도와준 건가?온하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웃겨?”그는 그녀의 이런 웃음이 아주 싫었다.강지연은 오히려 더 부드럽게 웃었다.“음, 내가 하나 씨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이하나를 언급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강지연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다리가 불편한 그녀가 이하나를 위협이라도 할 수 있다는 듯이.이하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고마울 것까지는 없어요.”강지연은 이하나를 무시하며 온하준만 줄곧 바라보았다.“내가 하나 씨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건가? 내 남편을 1분만 빌려줘서 짐을 꺼내주게 해줬으니까?”“강지연!”온하준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화가 난 건 온하준뿐이 아니었다. 김도윤과 김도진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었고 김도윤은 심지어 주먹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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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비록 끝내 완전히 나을 수 없더라도 그 치료 과정이 그 의사에게 하나의 사례로, 하나의 경험으로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 그녀는 생각했다.삶에 희망이 생기고 나니 사람이 이렇게까지 평온해질 수 있구나 하는 기분도 들었다.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근처 상가에서 새로 문을 연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그녀는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은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이제 유학 비자 예약을 해야 했다.가장 가까운 날짜로 선택했고 예약이 성공했다는 메일이 도착한 순간, 가슴이 또 한 번 콩닥콩닥 뛰었다.며칠 동안 계속된 이동 탓에 몸이 조금 피곤했다.예약을 마친 그녀는 간단히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한 뒤 이른 시간에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켰다. 집을 알아보고 유학 준비 후기를 읽고 혹시 같은 학교 선배가 있는지도 찾아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의 부동산 사이트를 발견했고 낯선 거리와 생소한 구조의 집들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그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오더니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오랜 고생 끝에 비로소 마주한 행복의 눈물이었다.마치 보이지 않는 날개가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등 뒤에서 자라나는 듯한 느낌. 그렇게 어느새 자라버린 그 날개로 이제는 정말 아주 멀리, 아주 높이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창밖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이 도시와의 작별도 어느새 하루 더 가까워져 있었다.이제는 남은 날짜를 세며 살아가는 나날이었다.온하준이 오늘 해성에 도착한 뒤, 어디로 갔는지 이젠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그가 언제 돌아오나 현관문만 바라보며 기다렸겠지. 특히 결혼 초에는 그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묻고 어디에 다녀왔는지도 물었다.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이, 딱 두 글자였다.“회사.”회사에 간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외에 해줄 이야기는 정말 하나도 없었던 걸까?사실 그녀도 자신이 어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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