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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봄 옷을 벗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육완아가 양아버지에 대한 감정에는 경외심과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대부분의 집안이 그렇듯, 아버지는 항상 자식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뒀다. 평소엔 아무 말이 없다가, 한번 입을 열면 절대 좋은 일로 입을 여는 것은 아니었다.그날 밤 서재에서 자신에게 사씨 가문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을 뚜렷이 기억했다. 사준영에게 혼약이 있다고 말했었다. ‘이번에는 왜 부르시는 거지?’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하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육완아는 하진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아가씨를 만나고자 하시는데, 같이 가주겠습니까?”아버지의 질책이 두려웠던 육완아는 하진을 끌고 가기로 했다. 정말로 추궁당하면 하진을 내세워, 두 사람의 혼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을 밝힐 의향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와 사준영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하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의아해했다. “부친께서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요?”‘왜 나를 보자고 하시는 걸까?’조금 전, 그녀는 육 노부인 곁에서 노부인이 하인들에게 사씨 가문 부자를 불러들이는 것을 듣게 되었다. ‘혹 사준영이 나리 앞에서 무슨 말을 했던 걸까?’마음이 무거워진 하진은 번뇌와 우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빌미가 생길까 두려웠지만, 어쩔 수 없이 육완아를 따라 후원으로 걸어갔다.가장 깊은 곳까지 걸어가자,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나왔다.“아가씨, 들어오시랍니다.”육완아는 고개를 돌려 하진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 나중에 부르시면 그때 들어오세요.”하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밖에 서서 기다렸다. 사미정은 부름을 받지 못했기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언니는 참 재주가 좋아요. 오늘 우리를 놀려 먹으니, 후련합니까? 천한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간사하기 그지없네요.” 사미정은 당장에라도 하진을 물어뜯을 것처럼 노려보았다.비록 장사꾼은 가장 하등의 직업이라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짓이었다. ‘탐욕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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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아버지, 이미 혼인 파기 단자에 서명했고, 할머니께서도 다 보셨습니다.”육명장은 사준영을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육완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다, 애들 장난이 아니다. 어찌 여인의 결정으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 일가 어른들이 없었다고 해도, 양가 부모는 있어야 할 터. 그리고 이 일에 관여한 바가 있느냐?”연속된 추궁에 육완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육명장은 이미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사준영과 혼약을 맺은 여인의 집은 상업을 하고, 경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사준영과는 사촌 관계라는 것을 알아냈다. 사씨 가문의 가주인 사백산은 처가의 은혜를 받았고, 그것 때문에 이런 혼약이 생긴 것까지 알게 되었다.사준영과 죽마고우인데다, 상업 가문이면 어떻게든 관료 가문에 빌붙으려 할 것이다. 스스로 혼약을 파기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불합리함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다. 육명장은 자신의 수양딸이 그 여인을 위협했을지도 모른다고, 사씨 가문도 관여했을지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육명장이 육완아를 오해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하진이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두었기 때문이다.육완아는 조금 다급해졌다. “자발적으로 한 것이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육완아는 줄곧 조용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준영을 바라보며, 그가 한두 마디 거들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사준영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마치 혼인 파기 단자를 작성한 것이 한바탕 희극이라고 묵묵히 인정하는 것 같았다.육완아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했다. 남에게 억울함을 안겨줬을 뿐이지, 당해본 적은 없었다.“문밖에 그 여인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믿지 않으시면, 불러들여 물어보시면 바로 아실 겁니다.”육명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육완아가 빠르게 문밖으로 나갔다. 바깥에서 사미정에게 두어 마디 대꾸를 해주던 하진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만약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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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하진은 태도를 바꾸었다. “나리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 아버님께서 훗날 덕을 보기 위해 사씨 가문을 도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인은 이익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아버님께서 중시하신 것은 고모부님의 재주였습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시어 도운 것입니다. 벼슬길에 올라, 위로는 나라에, 아래로는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기를 바라셨습니다.”하진의 어조가 점점 더 높아졌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 대만창을 혜안으로 재주를 알아본 상인으로 만들었다. 만일 대만창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손뼉을 치며 감탄했을 것이다.점점 목소리가 격앙되었던 하진은, 좀처럼 음을 내리기 어려워,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면, 그간의 정과 의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될 것이고, 그 맛 또한 변질될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육완아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겨서 아버지께 되묻는 거야?’육명장은 손맡의 찻잔을 들어, 여유롭게 한 모금 마시더니, 한쪽에 있는 사준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진이 들어온 후로, 사준영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향했다.육명장은 다시 한 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인 하진을 바라보았다. 이때, 육완아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제 제 말을 믿을 수 있지요? 사준영 도련님의 결백도 입증되었지요?”육명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식이 크면 마음을 붙들어 두기 어렵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그저 시집갈 생각만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대씨 가문과 사씨 가문의 일이니,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육명장은 아무 말도 않고 있는 사준영을 바라보았다. “사 도령은 할 말이 있는가?”하진과 사준영이 이 일로 육완아에게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부러움 같기도 했고, 질투심 같기도 했다. 피도 나누지 않은 양아버지도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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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오후, 육부의 주인들은 하인들의 호위 받으며 마차를 타고 떠났다. 육씨 가문 사람들이 떠난 후, 사씨 가문 사람들도 말을 준비하여 출발할 채비를 했다.올 때와 마찬가지로, 하진은 여전히 사미정과 한 마차를, 사백산 내외가 한 마차를, 사준영은 말을 타고 앞서갔다.몸종들은 같이 한 마차를 탔고, 다른 하인들은 말을 타고 앞뒤로 따라다녔다.돌아오는 길에, 하진은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사미정의 음흉하고 괴상한 비난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 하진은 사미정은 상대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그녀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 집에서 하룻밤만 더 보내고 내일 평곡으로 돌아가면 된다.얼마후, 마차가 사부 문 앞에 멈추었다. 규안이 하진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별채에 들어서자마자, 뒤따르는 하인은 안채로 가라고 전했다.규안은 걱정스럽게 하진을 바라보았다. 오늘 일을 규안도 지켜보았다. 대만여는 집으로 가자마자, 하진을 찾아 따질 것이 분명했다. 하진은 하인을 따라 안채로 갔다.문 앞에는 두 명의 건장한 하인이 서 있었다. 턱을 치켜들고,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휘장을 들었다.“아가씨, 마님께서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들어가십시오.”하진은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소매를 정리한 후, 치맛자락을 잡고 계단을 올라 방 안에 들어섰다.대만여는 상석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고, 사미정은 다른 한쪽에 앉아 있다가, 하진이 들어오자 비릿하게 웃었다. “고모님.”하진이 입을 열자마자, 검은 물체가 날아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이마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이어 귀에서 울리는 소리가 났다.뜨거운 무언가 머리에서 흘러내렸다. 얼마 후, 한쪽 눈이 흐려지며 잘 보이지 않았다.규안의 깜짝 놀란 듯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아가씨!” 하진은 손을 내밀어, 이마를 더듬었다. 손끝이 축축하고 끈적해서 눈앞에 가져다 보니, 피였다.“천것 주제에 감히 수작을 부려? 내 아들이 너를 거들떠보는 것을 영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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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고모님께서는 제가 주제 넘는다 하셨지요? 지금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은 고모님인 것 같습니다. 평소 경성 부인들에게 배척당하며 속으로 화를 삭였나 봅니다. 저를 억압하는 것으로 쾌감을 한번 맛보려는 거죠.”하진의 말은 대만여의 아픈 구석을 정확히 찔렀다.사백산이 권세 높았다면 대만여가 출신이 미천해도, 아무도 입방아를 찧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만여의 남편은 사원의 진흙으로 빚은 불상 마냥, 꿈쩍도 않고 앉아있는 인물이었다.수년이 지났지만, 사백산은 한 치의 진전도 없이, 여전히 7품 도사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대만여의 출신도 경성 귀부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대만여는 상상도 못했다. 줄곧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던 조카가 반항할 줄은.화가 났던 대만여의 비녀와 쪽진 머리가 덜덜 떨렸다. 대만여는 앞으로 나아가, 손을 들어 하진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하진은 손을 들어 막으며, 대만여를 노려보았다. “제 몸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입니다. 고모님께서 무슨 자격으로 때리세요?”하진이 대만여의 손을 거칠게 내치는 바람에 대만여는 비틀거렸다.사미정은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어머니를 부축하며, 하진을 꾸짖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것은 불경한 일입니다!”하진은 실눈을 뜨고 성미를 냈다. “우리 어머니도 어른인데, 더러운 말로 모욕하지 않았습니까!”분통이 터졌던 사미정은 얼굴이 벌게져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대만여는 몸을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모를 끌어들여 나를 억압하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느냐? 명심해라, 넌 아직 내 지붕 밑에 있다. 혼인을 물렸다고 해서 다 끝났다고 여기지 마라.”대만여는 입꼬리를 올렸다.“내 말 한마디면, 네 아비도 따라야 한다. 하물며 너 같은 계집애가 내 말에 반기를 들 수 있을 것 같으냐?”하진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대만여는 계속해서 말했다.“오늘부터, 내 명령 없이는, 너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고모님, 이제 억지로 가두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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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아가씨를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하진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빨리 피하자. 멍청하게 앞으로 나서지 말고.”규안은 울음을 그치고 하진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이마라서 다행입니다, 안 그랬으면 얼굴에 흉이 들었을 겁니다.”하진은 거울로 싸맨 이마와, 깨끗하게 씻긴 얼굴을 확인했다. 대만여는 빈말로 겁주는 사람이 아니다. 대만여는 반드시 그녀를 붙들어 둘 다른 방법을 마련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답신을 기다리는 것뿐이다.그전까지는 그녀는 문밖을 나설 수 없다.지금의 상황은 전생과 매우 비슷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녀의 태도였다.전생에 그녀는 자책하며 사준영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잃은 그녀였고, 두려울 것도 없었다. 상황이 닥치면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날 저녁, 사준영은 하진을 찾아왔지만, 그녀는 만남을 거부했고, 사준영은 마당에 잠시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하진은 평소처럼 잘 먹고 잘 지냈다. 마당에서 꽃과 풀을 돌보거나, 작은 부엌에서 간식을 만들거나, 혹은 창가에 기대어 바느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곁에서 하진을 지켜보는 하인들이 그녀의 상태를 대만여에게 보고했다.“그게 다냐? 다른 것은 없느냐?” 대만여가 묻자, 하인은 고개를 저었다.“다른 것은 없습니다. 아침에 밥 먹고 나면 마당에서 한가로이 앉아, 꽃과 풀을 돌보고, 오후에는 잠깐 낮잠 자고, 일어나서는 자리에 앉아 노리개를 만들고, 저녁에 목욕하고 나면 마당에서 더위를 식힙니다. 며칠 동안 변함없었습니다. 이젠 눈을 감고도 사촌 아가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대만여는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체념한 것 같구나.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그런데.” 하인이 망설이듯 말했다.“그런데 뭐?”“그런데 도련님께서 매일 한 번씩 찾아오십니다.”대만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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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여종이 불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막 꾸짖으려던 대만여는 육부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 여종의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육부에서 사람을 보냈다고?”“그렇습니다. 몇 분이 왔습니다.”대만여의 얼굴이 단숨에 화색으로 빛났다. ‘틀림없이 혼사를 의논하러 온 것이다.'“어서, 사람들을 안으로 모셔라.” 대만여는 여종에게 손님을 맞이하라 명하는 한편, 몸종들에게는 차와 다과를 준비하라 일렀다.얼마후, 화려한 옷차림에 금은보화를 단 사람을 모시고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웃으며 대만여에게 인사를 올렸다.대만여가 자리를 권하자, 그들은 사양하다가 한참의 실랑이 끝에 자리에 앉았다. 몸종들이 차를 올리고 다과를 차렸다.“노부인께서는 요즈음 평안하신지요?” 대만여가 물었다.“예, 평안합니다. 이댁의 아가씨 안부도 물으셨습니다.” 대만여는 그들이 사준영과 육완아의 혼사 때문에 온 것으로 확신했다. 절대 예의상의 문안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노부인께서 우리 미정을 이리 챙겨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어제 우리 아이가 완아 아가씨를 그리워했습니다.”대만여는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자매가 없이 커서 그런지, 그 댁 아가씨를 친자매처럼 여긴답니다.”그들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만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대만여는 난처해하다가, 곁에 있던 여종에게 분부했다. “가서 도련님의 명첩을 가져오너라.”양가에서 혼사를 의논하려면 마땅히 남자 쪽에서 여자 쪽에 가야 하지만, 육씨 가문의 문벌이 사씨 가문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대만여는 굳이 예절을 따지지 않았다. 대만여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챈 한 명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노부인께서 젊은 청년들이 함께 웃고 떠드는 것을 유난히 즐거워하십니다. 하여 이댁 아가씨를 잠시 육부로 모셔가 며칠 지내게 하면 어떨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부인께서 허락하시는지요.”대만여는 당황하여 굳어버렸다. 부끄러움과 노여움, 분함과 기쁨이 뒤섞여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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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아가씨, 아가씨!”이때, 규안의 목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규안은 급히 창문 아래로 달려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안채에서 잠시 오시라 하십니다.육부에서 아가씨를 모시러 왔답니다!”하진이 눈을 깜빡이더니 몸을 일으켜 반쯤 밖으로 내밀었다. “육부에서 나를 데리러 왔다고?”규안이 방 안으로 들어와 하진의 복장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네, 육부에서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모시러 왔답니다.육 노부인께서 아가씨를 모셔가 며칠 지내게 하려 한다 하셨습니다.”하진은 정신이 멍했지만,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것은 기회였다. 대만여에게서 벗어날 기회였다.육 노부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면, 노부인은 그녀의 든든한 배경이 될 터였다. 하진은 가진 밑천이 없었기에, 혼자 대만여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사준영은 여전히 그녀에게 미련을 두고 있었다.그녀는 반드시 세력을 빌려야만 했다.간단히 단장을 마친 후, 하진과 규안은 전갈을 전한 사람을 따라 안채로 향했다.대만여는 하진을 보자마자 마중 나가 친근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눈웃음을 쳤다. “육 노부인의 총애를 받다니,참 운이 좋구나. 그리 가서는 부디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집에서처럼 제멋대로 성질 부리고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말을 마친 대만여는 하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꺼낸다면, 절대로 사씨 가문에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고모님, 심려 놓으십시오. 고모님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마땅히 언행을 주의하고 예의범절을 지킬 것입니다.”하진의 태도는 대만여를 만족시켰다. 일단 그녀의 태도를 보아, 반항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살펴보려 했다.이때, 육부의 사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마에 어찌 붕대를 감았습니까?”하진은 대만여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슬쩍 빼내고, 육부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사대부 집안의 총애받는 여인들은, 낮은 벼슬아치 집안의 마님보다 오히려 더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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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넓고 커다란 방 중앙에는 자단목 병풍으로 안과 밖을 구분했고, 바닥은 윤기가 났다. 창문 살에는 비단 천이 발려 있었고, 북쪽 벽의 보물 진열장 위에는 갖가지 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고요하고 우아한 색조였다.그저 육 노부인께만 인사를 드리는 줄 알았던 하진과 사미정은 병풍을 돌자, 방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때문에 살짝 놀랐다. 두 사람은 먼저 웃어른께 인사를 올렸다.육 노부인이 손짓하여 두 사람을 앞으로 오게 하였다. 두 사람에게 몇 마디 질문을 던지던 노부인은 이내 하진의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찌 며칠 사이에 이마를 다쳤느냐?”함께 들어왔던 사람들은 앞으로 나서서 하진의 상처에 대해 설명했다.육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왼쪽에 줄지어 앉은 첫 번째 부인을 가리키며 말씀했다. “여긴 우리 집안의 둘째인 하 부인이다.”맨 앞에 화려한 옷을 입은 부인이 앉아 있었고, 그 뒤로 젊은 여인 몇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필시 육씨 집안의 둘째 부인 사람들 같았다.하진과 사미정이 앞으로 나가 인사를 올렸고, 하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예를 갖출 것 없다.”두 사람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다른 편으로 향했고, 육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우리 집안의 셋째, 요 부인이다.”둘째 부인과 마찬가지로, 셋째 부인도 맨 앞에, 그 뒤로 젊은 여인 몇이 앉아 있었다.셋째 부인은 용모가 수려하고 화려했으며, 꾸밈새가 둘째 부인보다 더욱 눈부셨다. 게다가 나이도 어려 보여, 인상에 남았다.그날 선방에서 줄곧 대만여를 의심했던 그 부인이었다. 만약 저 부인이 아니었다면, 하진은 혼인 파기 단자를 순탄하게 얻지 못했을 것이다.하진과 사미정이 다시 한번 절을 올렸다.육 노부인에게 며느리가 있다면, 두 부인은 육 노부인의 며느리와 동년배일 것이다.요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을 힐끗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노부인, 참으로 재미있는 계집입니다. 기억하지 못할까 봐,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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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할머니, 미정 아가씨는 제 행랑채에 머물게 해주세요. 남는 방에 묵으면 이야기를 나눌 짝이 생겨 좋을 것 같습니다.”육완아의 제안에 육 노부인은 그러라고 허락했다.사미정은 육완아의 하원에 머물게 되었고 하진 혼자 난월거에 머물게 되었다. 하진은 자신의 몸종 규안과 평곡에서 데리고 온 공씨를 데리고 난월거에 들어갔다.행랑채 안에는 육씨 가문의 하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방에서 시중을 들거나, 바깥을 청소하거나, 부엌에서 찬을 만들고 있었다.난월거의 몸종들은 하진이 들어오자, 안팎으로 짐들을 풀고 정돈하기 시작했다. 모든 정리와 배치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 질 녘이었다.하진은 수놓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나한평상에 기대앉았다. 규안은 긴장이 풀린 하진은 다리를 주물러주었다.“아가씨, 여긴 참으로 넓은 것 같습니다. 하인들도 하나같이 의젓합니다.”규안의 말에, 하진은 당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씨 가문은 보통 집안이 아니다. 이 댁 나리께서는 게다가 높은 분이시니…”“얼마나 대단한 분이십니까?” 규안이 물음에 하진은 잠시 고민했다. 규안은 비록 글을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따라다니며 셈에는 밝았다. “대연에서 가장 높은 분이 황제 폐하이다. 그분께선 황제 폐하 다음으로…”규안이 낮은 탄성을 내지르고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고! 그리도 높은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재상과 비교하면 누가 더 대단합니까?”하진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재상은 문관의 우두머리이고, 육 나리께서는 무관의 우두머리이다.”“무관의 우두머리요? 주먹과 발기술이 필시 대단하시겠군요.” 규안은 청산사에서 육명장과 마주친 적이 있지만, 무장처럼 보이지는 않았다.하진은 고개를 흔들며 학자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 않다. 추밀사라는 벼슬은 비록 무관의 우두머리나, 예로부터 문관이 맡아왔다. 그분께 소속된 삼아가 바로 무장들이 맡은 직책이다.”규안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하진이 하는 말이면 그게 무엇이든 믿었다. “여긴 육부이고, 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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