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가짜 결혼, 진짜 신분 / Chapter 401 - Chapter 410

All Chapters of 가짜 결혼, 진짜 신분: Chapter 401 - Chapter 410

476 Chapters

제401화

하지만 좀처럼 인기척이 없었다.백하린은 대문 앞에서 꼬박 30분을 기다렸다.깊은 밤의 시린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 무렵, 포기하고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여긴 왜 왔어?”드디어 문이 열렸다.헐렁한 검은색 스웨터를 걸친 이도운이 초췌한 안색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에는 거즈와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얼굴의 멍은 희미해졌을지언정 여전히 선명했다.다리를 절뚝이며 걷는 폼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헝클어진 머리칼과 대조적으로, 형형한 눈빛은 그가 방금 잠에서 깬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백하린은 곧장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그와 동시에 독한 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술 마신 거야?”이도운은 대꾸도 없이 뒤돌아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한때 꼿꼿했던 등은 힘없이 굽어 있었고, 비틀거리며 걷는 뒷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그는 거실 안쪽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집 안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발 디딜 틈 없이 쓰레기가 널브러졌고, 빈 술병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도운아, 네 꼴이 이게 뭐야...”예상치 못한 광경에 백하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떠날 때만 해도 이도운은 이혼을 결심했을지언정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하고 있었다.그런데 어쩌다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걸까.“서류는 언제 접수할 거야?”이도운은 다시 술병을 움켜쥐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꼭 나랑 이혼해야겠어?”며칠 만에 얼굴 보자마자 나온 첫마디가 또 이혼이라니, 백하린의 기분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네가 싸웠다는 얘기 아가씨한테 듣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오늘도 너 보려고 일부러 온 거야.”“어, 덕분에 안 죽고 살았네.”이도운은 냉소를 지으며 손에 든 술병만 내려보았다.툭툭 내뱉는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너 진짜 이럴 거야? 이경 그룹이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망하겠어? 나랑 이혼 안 해서 할머니 지원이 끊긴다 해도, 우리가 정말 이대로 끝날 것 같아?”백하린은 이도운이 여전히 돈 문
Read more

제402화

“이도운, 지금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거야?”백하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조차 가증스러울 정도였다.그간 쏟아부은 정성이 얼마인데, 여전히 자신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넌 그 애가 아니잖아.”이도운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그 찰나의 표정에 백하린의 안색이 돌변했다.“그게 무슨 소리야?”“네가 꼬박 10년 동안 날 속였다는 뜻이지. 이제 그 지긋지긋한 연극도 그만할 때가 됐잖아. 안 그래?”이도운은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 증오는 덩굴처럼 자라나고 있었다.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예전의 연민도, 가슴 아픈 통증도, 일말의 죄책감도 남아 있지 않았다.오직 혐오와 분노, 그리고 끝없는 원망뿐이었다.그녀의 거짓된 감정과 철부지 시절의 어리석은 선택만 아니었다면, 집안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추잡한 짓들로 그에게 유일하게 진심이었던 사람을 잃어버리는 비극 또한 없었을 텐데.지난날을 떠올리자 두 사람의 달콤했던 추억조차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다.백하린은 머리를 한 대 얻맞은 듯 띵했고,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결국 입술만 달싹거릴 뿐, 한참 동안 그가 던진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이도운이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못 알아듣겠어. 내가 대체 뭘 속였다는 건데?”백하린은 어떻게든 상황을 부정하려 했다.그저 이도운이 술에 취해 부리는 주정이길 바라며 다시 그에게 안기려 들었다.하지만 돌아온 것은 자비 없는 냉대였다.팔을 워낙 세게 뿌리쳤던 탓에 백하린은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뒤에 있던 모서리에 허리를 찧은 그녀는 손으로 벽을 짚고서야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설산에서 있었던 일, 꼭 직접 확인해줘야 속이 후련하겠어? 백하린, 넌 정말 양심도 없지. 다른 사람 공을 가로채서 뻔뻔하게 내 고마움을 사다니.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들끓는 분노를 참지 못한 이도운이 일어서려던 그녀를 다시 벽으
Read more

제403화

도대체 왜일까.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홀연히 떠났던 강지현은 용서받는데, 어째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이도운을 사랑한 자신에게는 이토록 비정한 거지?...다음 날 정오.하원영은 커피 캐리어를 들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향하다가 인파에 밀려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마침 점심시간이라 인산인해 속에서 중심을 잡느라 손에 든 커피를 쏟기 직전이었다.“이쪽으로 와.”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고개를 들어보니 주시언이 비서들을 대동한 채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그는 앞만 응시하며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원영은 순간 의아했다.‘나한테 한 말인가? 날 못 봤을 텐데.’“하원영 씨, 대표님께서 같이 타라고 하십니다.”머뭇거리는 그녀에게 뒤따라오던 비서가 다가와 나직이 말을 건넸다.그제야 하원영은 어색한 걸음으로 그를 따라붙었다.주시언은 이미 엘리베이터 안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비서는 하원영이 완전히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서야 열림 버튼에서 손을 뗐다.“새 직장은 다닐 만해?”주시언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지극히 의례적인 안부였다.두 사람은 귀국 후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화해하며 친구 관계를 회복한 상태였다.며칠 전에도 짧은 대화가 오갔다.비록 하원영이 집에 잘 도착했는지 묻는 말에 그가 이모티콘 하나를 보낸 게 전부였지만.“네.”하원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그 말에 주시언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주시언이 몰래 살피던 찰나, 하원영 역시 그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둘은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주시언은 괜히 엘리베이터 안이 후끈거린다고 느끼며 입술을 축였다.어색함을 깨려 헛기침을 내뱉고는 짐짓 무심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 지현이가 힘 좀 썼지. 난 그냥 상황만 전달했을 뿐이고, 그쪽에서 네 재능을 높게 평가한 거니까.”“네, 네. 아주 뼈저리게 감사해하고 있어요.”하원영이 건성
Read more

제404화

그 말에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빴고, 몇몇은 하원영을 쳐다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몇 초가 지나서야 누군가 서둘러 대답했다.“아,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저희 팀을 아주 많이 신경 써주시네요.”하원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시언... 아니, 대표님. 이거 누가 시킨 거 아니에요. 제가 사고 싶어서 산 거예요. 그리고 다들 같이 가자고 했는데 제가 괜찮다고 우겼어요.”사실 개발팀 직원들은 하원영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강지현이 미리 손을 써둔 덕인지, 아니면 원래 다들 배려심이 깊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팀 내에서 하원영은 마치 막내 동생 같은 존재였다.출근 첫날부터 정성 어린 입사 선물을 챙겨준 것은 물론, 복잡한 절차 앞에서 쩔쩔맬 때면 먼저 다가와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 주기도 했다.아무리 살가운 성격이 못 되는 그녀라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매일 오후마다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대접하겠다고 나섰지만 다들 한사코 사양하는 분위기였다.결국 하원영은 혼자 몰래 커피를 사러 나갔던 것이다.직접 사다 주면 차마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주시언과 마주치며 일이 꼬여버렸다.하원영의 말이 끝나자, 주시언은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아... 그런 거였어?”“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했네요.”“아니에요, 대표님이 워낙 배려심이 넘쳐서 부하 직원 챙기려다 그러신 건데 사과하실 것까지야.”분위기를 잘 맞추는 직원이 얼른 대답을 가로챘다.“보니까 원영 씨가 넉넉하게 주문한 것 같은데, 대표님도 한잔하실래요?”“아뇨, 전 일이 있어서. 다들 식사 마저 하세요.”주시언은 코를 쓱 만지더니,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비서도 급히 그 뒤를 쫓았다.누군가 하원영을 툭 치며 커피 한 잔을 건넸다.“어서 가봐요. 대표님이 원영 씨 생각해서 그러신 건데 인사라도 드려야지!”하원영은 머뭇거렸지만, 등 떠미는 기세에
Read more

제405화

수습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기에는 때가 늦었다.주시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손에 든 커피를 꽉 쥔 채 뒤돌아 가버렸다.옆에 있던 비서들도 하원영을 한번 쓱 쳐다보고는 김이 빠진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하원영이 부서 입구로 돌아오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흩어졌다.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이때, 한 남직원이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원영 씨는 우리 대표님 별로인가 봐? 그럼 어떤 타입 좋아해?”“확실한 건, 그쪽 같은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예요.”하원영이 쌀쌀맞게 받아쳤다.그제야 남자의 손에 든 커피가 자신이 산 것임을 알아채고 곧장 낚아챘다.부서 여직원들 마시라고 돌린 커피였지, 남자 직원들 몫까지 챙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주시언은 강지현을 만나러 왔다.원래 오후에 보기로 약속했으나 점심시간에 마침 짬이 나 일찍 들른 것이었다.강지현이 자리에 없자, 그는 사무실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하원영이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입안 가득 퍼지는 쓴맛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어릴 때부터 쓴 거라면 질색하던 그였다.‘이왕 줄 거면 좀 골라서 주지,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바로 그때, 강지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인상을 쓰고 있는 주시언과 눈이 마주쳤다.“오빠, 괜찮아요?”회사라는 곳은 워낙 소문이 삽시간에 퍼진다.사무실로 올라오기 전에 조금 전의 해프닝이 이미 강지현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주시언이 방금 하원영의 부서 앞에서 고백하며 다시 매달렸다가 무참히 거절당했다고 했다.엘리베이터를 탈 때만 해도 이제 하원영과 친구라는 둥,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둥 했던 주시언의 호언장담을 떠올리며 의아해하던 참이었다.그런데 벌써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친 걸까?심지어 회사에서 고백이라니, 너무 모양 빠지는 일 아닌가.“아니, 안 괜찮아. 너무 써.”주시언은 커피를 내려놓으며 멋쩍게 대답했다.“그 마음 이해해요. 오빠도 너무 무리하지 마요.”남의 애정 문제에
Read more

제406화

커피잔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강지현이 또박또박 말했다.“시언 오빠가 죽어도 원영 씨 포기 못 하겠다는데, 다시 기회 좀 주면 안 될까?”사실 강지현은 하원영과 술을 마실 때부터 입이 근질거렸다.그녀가 보기에 주시언은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하원영 역시 조심스럽게 행동하면 할수록 그를 밀어내는 것이 버겁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었다.정말 모질게 마음먹고 평생 남남으로 살 거라면 모를까, 어차피 고백할 마음이 있다면 감정은 확실히 전달해야 하는 법이다.“강, 강지현!”주시언은 기침이 채 멎기도 전에 버럭 외쳤다.그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강지현은 재빨리 냅킨을 건네주며 말했다.“천천히 마셔요, 너무 흥분하지 말고...”“내가 지금...!”주시언은 기침하며 미간을 찌푸린 채 강지현을 노려보았다.따끔거리는 목구멍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서야 입을 뗐다.“하원영한테 보낸 메시지, 당장 삭제해!”“도와달라면서요?”“커피 말이야. 너무 쓰다고!”그제야 강지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시언은 그 틈을 타 휴대폰을 가져가서 서둘러 메시지를 삭제했다.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없자, 두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원영 씨 바쁜가 보네. 아마 못 봤을 거예요.”강지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주시언은 메시지가 삭제된 채팅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으로 일관했다.누가 봐도 기분이 상한 모습이었다.평소 성격 좋기로 유명한 남자도 차가운 표정을 지으니 꽤 위압감이 느껴졌다.강지현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한참 뒤에야 주시언은 휴대폰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입을 뗐다.“만약 원영이가 물어보면...”“내가 잘 설명할게요.”강지현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주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감정을 추슬렀다.하원영의 성격상, 설령 확인했어도 못 본 척 넘겼을 게 뻔했다.그런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는가.주시언은 강지현과
Read more

제407화

주병찬이 딱히 숨기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주호석은 그저 그녀를 따로 보고 싶어 하는 듯했다.“무슨 생각해?”생각에 잠긴 듯한 강지현을 보며 주시언이 넌지시 물었다.강지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긴장돼서. 엄경미도 어르신 댁에 계시잖아요. 괜히 저를 곤란하게 만들까 봐 걱정이네요.”“정 그러면 내가 같이 갈까?”주시언이 말했다.“다음 주면 나도 시간 좀 낼 수 있을 것 같은데.”그의 제안에 강지현이 가볍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됐어요. 저번에 오빠가 M국에서 막 돌아왔을 때만 생각하면, 전 아직도 무섭단 말이에요.”주시언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하지만 자리를 뜨기 전, 다시금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강지현, 겁먹지 마. 주씨 가문이 아무리 이래저래 말이 많아도 결국 네 집이야.”무심한 듯 다정한 그 한마디가 강지현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그녀는 울컥 차오르는 감동을 담아 힘차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주시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지현도 책상을 정리하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길에 올랐다.오늘부터 휴가를 낸 그녀는 며칠간 집에서 김태하와 시간을 보낸 뒤, 주호석을 만나러 출국할 예정이었다.저녁에는 지순옥 일행이 집으로 식사하러 오기로 되어 있어 오랜만에 직접 요리 솜씨를 발휘해 보기로 했다.혹여 그녀가 고생이라도 할까 걱정된 김태하는 일찌감치 사람을 시켜 식자재를 잔뜩 준비해 두었고,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부터 이미 도우미들이 달라붙어 밑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사실 요리라고 해도 준비된 재료를 팬에 익히거나 간을 맞추는 정도의 수고였지만, 김태하는 그마저도 안쓰러웠던 모양이다.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시간에 맞춰 메뉴는 다 정했냐며 메시지를 보내왔다.강지현이 머릿속으로 자신 있는 요리들을 떠올리며 김태하에게 답장을 보내던 그때, 주단우가 현다영의 자리로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다영아.”주단우와 이야기를 나누던 현다영이 강지현의
Read more

제408화

현다영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주단우, 그는 그저 악마일 뿐이라는 것을.감정을 장난감처럼 주무르고 진심을 짓밟는 것은 예사였고, 타인의 생명조차 발밑의 먼지처럼 가벼이 여기는 인간이었다.아니, 애당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죽어 마땅한 자였다.하지만 모든 실체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에게 다가가야만 했다.“다영아...”“지현 언니, 제 걱정은 말고 언니 몸이나 잘 챙기세요. 주단우가 나한테 관심이 있든 없든, 마지막에 웃게 될 사람이 누구일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니까요.”현다영이 처음으로 강지현의 말을 끊었다.그녀의 표정은 단호했고, 눈동자 너머에 서린 한기는 강지현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언제나 순한 양처럼 다정하기만 했던 소녀가 순식간에 낯선 타인처럼 느껴졌다.결연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말투는 마치 자신의 전부를 걸고서라도 반드시 해내야 할 업보를 짊어진 사람 같았다.“다영아, 도대체 왜 그래? 너랑 주단우 사이에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불안해진 강지현이 현다영의 손을 꽉 붙잡았다.맞닿은 손바닥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현다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이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도착한 곳은 지하 주차장, 이제 강지현은 떠나야만 했다.“지현 언니, 미안해요. 이건 제 문제예요. 저도 알아요. 지금 얼마나 극단적이고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지. 근데... 그냥 이렇게 하고 싶어요.”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단우를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싶었다.강지현의 말처럼 주단우와 감정놀음 하는 건 확실히 위험했다.만약 자신이 품고 있는 이 시커멓고 지독한 속마음을 알게 된다면, 강지현은 절대로 그냥 보고만 있지 않겠지.하지만 고작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정도론 성에 차지 않았다. 가슴 속 분노를 잠재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자신의 방식이 통한 걸까. 요즘 주단우는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칭찬 몇 마디면 마치 개를 길들이듯 남자의 사소한 버릇까지 고쳐 놓았다.매일 밤
Read more

제409화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만나 봐야 아는 거지.”주단우는 일부러 강지현의 속을 긁어댔다.요 며칠 현다영에게 부쩍 흥미가 생긴 건 사실이었고, 매일같이 그녀를 건드려보고 싶긴 했다.물론 그렇다고 진지하게 만날 생각까지는 없었다.그런데 가만 보니, 현다영이 벌써 제 매력에 푹 빠진 모양이었다.아니면 강지현이 그녀와 몇 마디 나눴다고 이렇게까지 화가 나서 전화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둘 사이를 떼어놓고 싶다면, 그냥 현다영더러 자기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단속하면 그만이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단우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올라갔다.“어디 한번 해보든가. 당신을 주씨 가문에서 완전히 쫓아내 버릴 수도 있거든.”강지현은 주단우가 더는 말을 보태지 못하게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주단우는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것을.현다영에게 아무리 마음이 쏠린다 한들, 자신의 경고가 어느 정도는 먹혀들 게 분명했다.강지현은 뒤틀린 기분을 억누르며 집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주단우, 이 나쁜 자식!’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지순옥이 제일 먼저 달려 나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아이고, 우리 손주며느리 이제 오니?”고작 며칠 못 봤을 뿐인데, 할머니는 몇 년 만에 상봉한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며 강지현을 안고 볼에 뽀뽀해댔다.얼굴에는 화색이 도는 게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은주희 역시 문가로 마중 나와 웃으며 말했다.“고생 많았지? 마침 몸에 좋은 차를 몇 종류 우려냈는데 잘 왔다. 얼른 와서 좀 마셔봐.”“네, 좋아요!”은주희와 지순옥을 보자 불쾌했던 기분은 눈 녹듯 사라졌다.‘가족이 있어야 진짜 집이지.’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다정함과 온기에 강지현은 이 순간을 가슴 깊이 새겼다.밖에서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곳에 있는 한 그녀의 털끝 하나 닿지 못할 것이다.안쪽에는 김태하와 김윤석이
Read more

제410화

지순옥은 지금도 꿈을 꾸는 것만 같다.어릴 적부터 유난히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며 고지식하기만 했던 손자의 뼛속에 이토록 다정다감한 사랑꾼 기질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전에는 김태하가 풍류도 모르고 성격도 냉담하고 재미가 없어, 애먼 처자만 고생시키는 게 아닐까 걱정했었다.하지만 이제 다정하게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강지현은 몇 분간 휴식을 취한 뒤, 서둘러 주방으로 가 아주머니들과 함께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김태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김윤석이 찰떡같이 달라붙어 객실에서 나왔다.아까 다 듣지 못한 뉴스에 대해 마저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그럼에도 강지현이 요리를 절반쯤 마쳤을 때 김태하는 어느새 그녀의 곁에 나타났다.여자의 뒷모습만 봐도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묵묵히 접시 나르는 일을 도왔다.“서 있지 말고 좀 앉아서 쉬어. 힘들잖아.”강지현은 가스 불을 살피며 그에게 어서 나가라고 재촉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태하의 손이 그녀의 이마를 살며시 닦아냈다.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두 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은주희는 아들이 강지현의 곁을 떠날 줄 모르자 앞치마를 두르고 다가왔다.“어머님, 안 오셔도 돼요. 거의 다 됐어요.”강지현도 혼자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머니들이 함께 거들고 있었기에 이미 마무리 단계였다.“지현아, 이제 됐다. 메인 요리는 네가 다 했으니 마무리는 내가 할게. 누군가 마음이 쓰여서 더는 못 봐주겠구나. 마누라 걱정에 아주 울기 일보 직전이거든.”은주희의 짓궂은 농담에 무뚝뚝하던 김태하의 얼굴에 드물게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어머니!”투정 섞인 낮은 부름이었지만, 은주희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그녀가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휘젓자마자, 김태하는 기다렸다는 듯 강지현을 반강제로 이끌고 주방을 나섰다.식사 준비가 끝나기 전, 십여 분 남짓한 짧은 틈을 타 두 사람은 침실로 몸을 숨겼다.반나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김태하의 인
Read more
PREV
1
...
3940414243
...
4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