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버린 남자 대신, 그의 형이 내 인생을 뒤집어놨다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100 챕터

제51화

주변이 금세 술렁였다.사람들의 시선이 태안과 유림 사이를 오가며 붙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게 무슨 얘기야?’이런 표정을 지었다.유림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유림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미연아,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나랑 오빠가 사이가 좋은 건 맞아. 그래도 네가 다인이 편을 들어주고 싶다고 해서, 내 명예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리면 안 되는 거 아니야?”태안도 폭발했다.“임미연 씨, 진짜 선을 넘었어.”태안은 미연이 아니라 다인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너 진짜 대단하다. 유림이를 그렇게까지 모욕하면 내가 네 말을 믿고 마음이 약해져서 너 용서할 줄 알았어?”태안은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착각하지 마. 그럴수록 나는 너한테 더 실망해. 그리고 미연이 지금 한 말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도 이상하지 않아!”예전의 다인이었다면, 저 말은 칼이 됐을 것이다. 다인의 가슴을 갈라놓는 칼.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다인은 이미 태안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였는지, 아니면 진짜 끝내기로 마음먹어서였는지.다인의 마음은 묘하게 조용했고, 오히려 태안이 우스웠다.구경하던 사람들 중에는 예전에도 소문을 즐기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앞다투어 다인을 향해 말을 던졌다.“이거 옛날에 나도 들었어. 한다인이 명문가 딸이라고 기유림을 엄청 괴롭혔다며.”“맞아 맞아. 나도 들었어. 한다인은 기유림을 ‘천한 입양한 딸’이라고 했다던데?”“그게 끝이야? 한다인은 기유림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기유림이 기태안을 유혹한다고 몰아붙였다잖아. 그래서 해외로 도망가게 만들었다고.”“그런 것뿐이겠어? 한다인은 예전에 여자애들 괴롭힌 것도 유명했어. 원래부터 성질 더럽고 못된 애였지.”“...”말들이 쏟아졌다.날이 선 말, 비웃는 시선, 근거 없는 확신이 다인에게 달라붙었다.주빈찬 총장은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주 총장은 다인을 두둔하면서, 소문만 듣고 사실처럼 말하지 말라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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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너랑 상관없어.” 다인이 태안의 손을 툭 뿌리쳤다.다인이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태안이 다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길을 막았다.태안의 잘생긴 얼굴이 잔뜩 짜증을 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꼭 이렇게까지 계속할 거야?” “사람들 다 내가 너한테 몇 년이나 매달렸다고 하잖아. 네 여자친구 되고 싶어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다인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내가 남자친구 사귄다니까 왜 그렇게 급해진 거야?”태안은 표정이 굳은 채 말이 없었다.“오빠, 모금 행사 곧 시작해요. 우리 안으로 들어가요. 다들 시간 잡아둔 거잖아요.” 유림이 급히 태안의 손을 잡아당겼다.그 말이 떨어지자 다른 동문들도 맞장구를 쳤다.주빈찬 총장도 나서서 달랬다.“오늘은 학교를 위해 다들 시간 내어 돌아온 날입니다. 기분 망치지 말고, 다들 들어가죠.” 주 총장까지 그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총장 말에 따르며 하나둘 흩어졌다.태안이 다인을 힐끗 보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 일은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태안은 유림을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가자, 정란이 두 사람 뒤를 따라붙었다.다인은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서 미연과 함께 나가려고 했지만, 주 총장이 끝까지 붙잡았다.다인과 미연은 늘 주 총장을 존중해 왔다. 결국 두 사람은 남기로 했다.다인과 미연은 태안, 유림, 정란을 일부러 피해 자리를 골라 앉았다.모금 행사는 원래 강세대학교의 엘리트들이 학교에 보답하겠다며 여는 자리였다.시윤도 강세대학교 출신이었다. 시윤이 오늘 오면 행사장의 시선이 그에게 쏠릴 게 뻔했다.다인은 시윤이 정말 돌아와 참석할지 확신이 없었다. 이틀 동안 시윤과 연락이 뜸했고,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다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시윤에게 톡을 보냈다. [모금 행사 시작했어요, 돌아왔어요?]...한편, 차 안.시윤은 학교 쪽으로 차를 몰아 달리고 있었다. 우빈은 방금 다인이 모금 행사에 있다는 상황을 시윤에게 보고한 참이었다.보고를 들은 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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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다인과 미연에게 꽂히는 시선들은 독을 머금은 것처럼 날카롭고 악의로 가득했다.하지만 실제로 다인과 미연은 익명으로 이미 기부를 끝냈다. 다인은 6억 원, 미연은 2억 원이었다.“기부는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마음이지, 너희는 그것까지 트집을 잡냐?”미연이 가리지 않고 쏘아붙였다. “모금 행사 왔다고 해서 무조건 돈 내야 해? 너희는 너희가 냈으니까 남들도 다 내야 한다는 거야? 돈 없는 사람은 어쩌라고. 그거 도덕으로 사람 묶어놓는 거랑 뭐가 달라?”미연은 숨도 안 고르고 이어갔다. “대학 4년 동안 다 뭘 배운 거야? 겉으로는 멀쩡하게 차려 입고서 이런 짓이나 하고, 안 창피해?”미연의 말에 주변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하지만 정란은 물러서지 않았다. “돈 없는 동문이 안 내면 누가 뭐래? 근데 너희는 다르잖아. 한 명은 스타고, 한 명은 명문가 아가씨인데, 설마 너희도 돈이 없겠어?”그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화살이 다시 다인과 미연에게 돌아왔다.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을 몰아붙이는 듯했다.그제야 속이 정리된 다인이 유림을 힐끗 바라보았다.아까 스크린에 올라가는 이름들 사이에서 정란의 이름이 없었다. 다인이 정란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얼마 냈는데?”시선이 한꺼번에 정란에게 쏠렸다.정란이 목이 탁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나...”유림이 급히 끼어들어 정란을 감쌌다. “정란 집안은 평범한 데다가, 사회에 나간 지 1년밖에 안 됐잖아. 그래도 마음을 담아서 6천만 원이나 냈어.”“정란이 6천만 원 내면 그건 마음이고, 미연이가 2억 원 내면 그건 뭐야?”다인이 그렇게 말하자 미연이 바로 송금 내역을 꺼내 보여줬다.두 사람의 호흡이 딱 맞아떨어지자, 조금 전까지 입을 놀리던 사람들도 더는 말을 못 했다.유림은 제대로 한 방 먹은 기분인지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속이 풀리지 않았는지, 정란을 부추겨 다인에게 계속 시비를 걸게 했다.다인이 6억 원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정란은 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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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시윤은 짙은 색 정장 차림이었다. 날 선 이목구비와 서늘한 시선, 가까이 서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힐 만큼 묵직한 기운이 사람을 움츠러들게 했다.시윤이 모습을 드러내자 행사장은 곧바로 술렁였다.이 모금 행사에 모인 사람들은 강세대학교를 나가 각 분야에서 이름을 알린 동문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시윤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GM그룹 기시윤 대표님... 기씨 가문의 진짜 실권자잖아.” 누군가 숨죽여 말했다.그 한마디로 아까까지 하늘처럼 떠받들던 태안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기 대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뿐이다.기시윤, 바로 이 이름이다.주빈찬 총장이 직접 무대로 올라가 시윤을 맞이했다.시윤은 딱딱하던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더니, 오늘 벌어진 일은 자신이 직접 정리하겠다고 말했다.“좋습니다.”주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사람들은 시윤 앞에서 한층 더 공손해졌다.그 사이 태안은 말 그대로 옆에 선 장식처럼 밀려났다.속이 뒤틀린 태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이러다 내가 완전히 밀리겠는데.’태안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어두운 생각이 조용히 자라났다.“설마... 시윤 형이?”미연은 곧장 ‘600억’과 시윤을 연결해 떠올리고 다인을 돌아봤다.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그 전화 이후로 시윤과 다인의 관계는 겨우 풀린 듯했다가 다시 차갑게 굳어버린 느낌이었다.다인은 시윤이 오늘 돌아오는지도 알지 못했다.그녀는 멍하니 자기 앞까지 다가온 시윤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오늘 못 오실 줄 알았어요.” 다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내가 못 오면, 너는 그냥 쟤들한테 당하고만 있었을 거야?” 시윤의 낮은 목소리에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예전에 쓰던 발톱은 어디다 뒀어? 왜 안 꺼내?”태안은 예전부터 다인에게 공주병이라느니, 성격이 고약하다느니 말해 왔다.다인은 태안이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성격을 고치려고 애를 썼고, 어느새 참는 쪽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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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원래는 태안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태안에게 분위기를 맞추려다 시윤을 건드린 꼴이 됐다.다인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사과로 다 끝나면, 경찰은 왜 있어요?”시윤은 원래도 차가운 얼굴이었는데, 거기에 더 서늘한 기운이 덧씌워졌다.“요즘 너희가 너무 편하게 살았나 보네.”“형, 다인이 말 아무렇게나 듣지 마...”태안이 급히 끼어들면서 설명하려고 했다.시윤은 태안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차갑게 말을 끊었다.“몇 년 ‘기 대표’ 흉내 냈다고, 세상이 네 거로 보이냐?”시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다인은 한씨 가문 아가씨야. 한 회장님이 애지중지 키운 사람이지.”시윤의 눈에 거친 기운이 비쳤다. “너희 같은 것들이 감히 다인이 험담을 해?”시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주변은 숨도 크게 못 쉬는 분위기로 굳어졌다.시윤은 H시의 절대 권력자였다. 손을 뻗는 곳마다 닿지 않는 데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태안조차도 감히 못 했다.유림은 속이 뒤집히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시윤의 분노를 알고도 질투가 먼저 튀어나왔다.“큰오빠, 아직 제대로 확인도 안 했잖아요. 왜 다인 편만 드세요? 태안 오빠 체면은 생각 안 하세요?”시윤이 유림을 쳐다봤다.“여기서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시윤은 굳은 표정으로 우빈에게 지시했다.“오늘 있었던 일, 제대로 다 조사해. 누가 감히 한다인한테 이런 짓을 했는지, 끝까지 확인해.”차갑게 말을 던진 시윤은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인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미연은 두 사람을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사람들을 멀찍이 떼어낸 뒤에야 미연이 입을 열었다.“기 대표님, 오늘 일만 보면요. 기 대표님 합격이에요. 앞으로 다인이 잘 챙겨주세요. 전 기 대표님만 믿을게요!”다인은 말이 막혔다.미연이 떠난 뒤, 시윤은 표정을 정리했다.“집에 가서 얘기하자.”다인은 짧게 대답했다. “네...”다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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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기씨 집안 두 형제가 나를 진짜 바보로 보고 가지고 노는 게 분명해!’다인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좋아요. 인정하셨잖아요. 그럼 말해요. 우리 언제 이혼해요?”화가 잔뜩 난 다인은, 털이 곤두선 길고양이처럼 날을 세운 채 더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오빠 시간 되는 날로요. 이혼신고 하러 가요. 내가 여기 계속 남아 있으면 방해만 되잖아요.”말을 끝낸 다인은 몸을 돌려서 나가려고 했다.그때 손목을 잡아채는 힘이 느껴졌다.시윤의 넓은 손바닥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그대로 끌려 돌아선 다인은 억지로 고개를 들고 시윤을 마주 보게 됐다.시윤은 숨을 고르고 다인을 내려다봤다.깊은 눈동자가 다인에게 고정됐다.“그래도 나한테는 성질 내네.”다인은 더 열이 받았다.“내가 언제 오빠한테 성질 냈어요?”‘부탁 좀 하자.’‘좋아하는 사람이랑 밤을 보내고, 왜 나 같은 가짜 아내를 옆에 붙잡아 둬?’다인은 마음속으로 생각을 곱씹었다.다인이 시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 됐고, 좋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일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시윤은 다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시윤의 눈빛은 어두웠다.“지금 이게 성질 아니고 뭐야.”“나는 분명히...”설명하려다 말을 멈춘 다인이 손목을 빼내며 말했다.“오빠 말이 맞아요. 오빠가 그렇다 하면 그런 거겠죠. 어차피 우리 서로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잖아요.”다인은 발을 올려 계단을 올랐다.가냘픈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계단을 오르는 내내 발걸음이 묘하게 무거웠다.그런데 ‘시윤 오빠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다인은 오히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걸음을 옮겼다.다인은 지난 5년을 떠올렸다.태안에게 묶여서, 태안이 던지는 가시 돋친 말과 태도를 ‘관심’이라고 착각하며 버텼다.태안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때문에 다인은 점점 다인답지 않게 변해 갔다.‘이제는 안 해.’‘누구든 억지로 붙잡거나 억지로 맞춰주지 않을 거야.’‘나를 먼저 지켜야,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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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다인은 손을 꽉 쥐었다 풀었다.“우리... 계약결혼이잖아요. 언제든 끝낼 수 있는 거고요. 그래서 내가 알아서 빠지겠다는 건데... 내가 그게 잘못한 거예요?”다인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묻어 있었다.시윤은 다인보다 훨씬 컸다. 그런 시윤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다인의 눈시울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 붉게 물든 눈시울에 꼭 다문 입술, 감정을 잡아두려고 애쓰는 모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시윤의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방금 전의 말이 다인에게 이렇게 큰 파도를 일으킬 줄 몰랐다.“미안.”시윤은 자기 자신이 너무 성급해서 다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그리고 분명해졌다.태안이 다인에게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다인은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속에서 쓴맛이 올라왔다.‘미안하다는 건... 결국 내가 말한 게 맞다는 뜻이잖아.’‘우리 결혼은 끝날 거라는 거.’“미안하단 말 안 하셔도 돼요.”다인이 힘없이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계약결혼이고, 언제든 끝낼 수 있다고요.”“누가 이혼하재?”시윤의 표정이 굳었다.다인은 어리둥절했다.“그럼... 아까 왜 미안하다고...”다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윤이 알아차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시윤의 눈썹 사이에 걸려 있던 응어리가 조금 풀렸다.“마사림은 그냥 내 친구고, 같이 일하는 파트너야.”시윤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좋아한 사람은 마사림이 아니야. 그리고 너랑 이혼할 생각도 없어.”다인은 시윤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협력 관계가... 밤중에 같이 있어?’‘전화도 대신 받아?’다인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시윤은 다인의 생각을 읽은 듯 조용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마사림은 우리 회사 부대표야. 이번에 H시로 같이 출장 갔는데, 그날은 인수합병 건 세부사항을 맞추느라 늦게까지 얘기했어.”시윤은 설명을 더 보탰다.“중간에 내가 급히 자리를 비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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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다인의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찜기에 던져진 채로 익어가는 기분이었다.다인에게 바짝 붙은 시윤의 열기는 다인의 숨결을 흐트러뜨릴 만큼 강했다.그 감각에 미칠 것 같아서 힘껏 시윤을 밀어내면서 허둥지둥 말했다.“씻... 씻고 올게요.”욕실 문이 재빨리 닫혔다.시윤은 다인이 급히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다인은 한참을 씻었다.뜨거웠던 열기가 겨우 가라앉자, 다인은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그날 밤은... 오해였네.’그러자 오히려 마사림이 궁금해졌다.시윤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수 년 동안 스캔들 하나 없었고, 곁에 여자가 있다는 말조차 들린 적이 없었다.시윤이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라면, 분명 만만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다인이 욕실에서 나온 건 한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하지만 방 안에는 시윤이 없었다.다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상주댁이 다인에게 시윤이 서재에 있다고 알려줬다.상주댁은 다인에게 이것저것 덧붙이며 시윤 편을 들었다.“대표님이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여자 마음을 달래는 건 서툴러요. 사모님, 너무 속 끓이지 마세요.”아까 1층에서 오간 말들이 상주댁에게는 다툼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다인은 반쯤 농담으로 웃었다.“괜찮아요. 속이 답답하면... 그냥 쌍화탕 말고 보리차 같은 거나 좀 마시면 되죠.”상주댁은 다인의 그런 태도를 좋아했다.상주댁은 다인을 볼수록 좋은 집에서 자라고 예쁘고 기품 있는 사람일수록 성격이나 품행이 더 반듯한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다인은 물 한 잔을 따라서 거실로 돌아온 후, 다시 원고를 펼쳤다.집에는 시윤의 서재 말고는 따로 일할 만한 방이 없었다.다인은 평소에도 글을 쓸 때면 1층 거실의 티테이블에서 작업했다.오늘은 유난히 글이 잘 풀렸다.다인이 정신없이 쓰다 보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민지였다.[다인아, 괜찮아? 거기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다인은 민지의 말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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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공지에는 대본 소개가 실려 있었다.다인이 쓰고 있는 작품과 주된 줄기가 정면으로 겹쳤다.말을 더 거칠게 하자면, 단순히 ‘비슷한 장르’ 정도가 아니었다.이야기 전개의 겹치는 폭도 상당했고, 주요 설정까지 닮아 있었다.민지가 분통을 터뜨렸다.[지금까지 너한테 한마디도 안 했잖아. 그 여자한테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발버둥 치는 거 보니까, 백 퍼센트 줄 대고 들어온 거야.]다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나한테 말을 안 하면... 내가 찾아가서 물으면 돼지.”전화를 끊은 다인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회의실에서는 제작사 쪽에서 나온 사람들과 감독이 관련 스태프들을 모아 회의를 막 끝낸 참이었다.다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회의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굳어졌다.다인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고 그 공지와 새 작품에 대해 따져 물었다.제작사 측의 공진도가 연신 한숨을 쉬었다.“요즘 시장이 너무 치열합니다. 뭐든 빠르고 확실하게 가야 하고요. 시장 타이밍이라는 게 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한 작가님 원고는 최소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 보름 동안 찍을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면 먼저 돌려서 반응을 보자는 겁니다.”“성과가 괜찮으면, 한 작가님 작품도 바로 이어서 갈 수 있어요.”논리만 보면 맞는 말이었다.하지만 다인은 웃지 않았고 차갑게 되물었다.“그런데 찍겠다는 그 대본, 제가 쓰는 거랑 겹치는 게 너무 많은데요. 제 기획안이랑 시놉시스가 다른 사람한테 넘어간 거 아닌가요? 제 걸 갖다가 다른 사람한테 준 거죠?”다인의 목소리에는 비꼬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다인의 작품 주 줄기, 인물 설정 같은 건 공진도와 감독 양효찬만 알고 있었다.두 작품이 이렇게까지 닮은 게 우연일 리 없었다.공진도가 미간을 구겼다.“지금 무슨 뜻이죠?”다인은 거의 확신한 얼굴로 말했다.“제 기획안을 다른 사람한테 넘겼잖아요. 기유림한테 줬죠.”공진도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책상을 세게 치고 일어섰다.“한 작가님, 그건 명백한 모욕입니다. 지금 저를 모함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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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왜? 속상해서 말도 안 나와?”유림은 다인 앞까지 다가오더니, 늘 쓰고 다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말끝마다 비틀린 기색이 묻어났다.“한씨 가문이랑 기씨 가문 관계만 믿고, 태안 오빠를 억지로 5년이나 사귀게 만든 거잖아.”“진짜 역겹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태안 오빠는 너랑 절대 혼인신고 안 해.”다인은 유림의 이런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3년 전에 이미 봤으니까.“나랑 혼인신고 안 하면, 너랑 하게?”이어서 비웃듯 웃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3년 전에 너, 기태안 침대까지 기어 올라가려고 머리 굴렸잖아.”회의실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유림은 숨길 마음도 없다는 듯 오히려 뻔뻔하게 받아쳤다.“그래서 그게 뭐? 네가 태안 오빠한테 말해 봐. 태안 오빠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그건 사실이었다.그때 유림이 해외로 나가게 된 일도 태안은 다인 탓으로 돌렸다.기철민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그 일 이후 다인과 태안은 완전히 끝났을지도 몰랐다.‘기태안이 이렇게까지 멍청한 줄 알았으면...’다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난 3년을 더 허비하지 않았을 거야.’다인은 생각을 끊고 유림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다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기태안을 뺏겠다고... 이제는 내 밥줄까지 건드려? 기유림, 너 진짜 내가 만만해 보여?”유림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맞아. 일부러 그랬어. 그래서 어쩔 건데?”유림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지금 태안 오빠가 내 편이야. 대본은 곧 촬영 들어가고. 한다인, 너는 그냥 받아들여. 내가 갖고 싶은 건, 전부 뺏을 거야!”다인은 유림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묘하게 사람 속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남의 지식재산권 훔쳐 놓고도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네. 기유림, 너 진짜 뻔뻔하네.”“그래서?”유림은 비웃듯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말했잖아. 네 거, 다 내 거라고.”유림은 다인을 위아래로 훑었다.“너야 뭐, 고작 드라마 작가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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