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기억을 잃은 척할 때는 언제고: Chapter 41 - Chapter 50

497 Chapters

제41화

“윤제 씨, 잊은 거예요? 윤제 씨는 나랑 약속했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든 꼭 나를 지켜주고 믿어주겠다고요.”정다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다.정다인이 붉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배윤제는 마음이 약해졌다.그는 정다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이 바보야. 예전에 했던 약속들, 나 다 기억하고 있어. 강하율은 갑자기 끼어든 존재일 뿐,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너 하나뿐이었어. 강하율은 절대 내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어.”“네.”정다인은 배윤제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입꼬리를 올렸고 곧이어 발끝을 들어 배윤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배윤제는 거절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며 그녀를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정다인은 허리에 힘을 풀고 그의 셔츠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점점 더 깊이 키스를 이어갔다.정다인은 키스를 꽤 잘해서 남자의 욕망을 쉽게 자극했다.그런데 배윤제는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강하율의 수줍어하던 모습이 더 그리워졌다.그래서 정다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배윤제는 흥이 나지 않았고 결국에는 정다인을 옆자리로 옮겨 앉힌 뒤 말했다.“오늘은 피곤하니까 이만 자자.”말을 마친 뒤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정다인은 큰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이내 이를 악물며 분통한 눈빛을 해 보였다.잠시 뒤 그녀는 마음을 먹은 듯이 베란다로 걸어가 영상을 하나 보냈다.[박도윤 씨, 저 다 봤어요. 고백해서 차인 기분은 어떻던가요?][뭘 원하는 거예요?]박도윤은 곧바로 본론을 언급했다.[당연히... 서로 돕자는 거죠.]...강하율은 화장실에 갔던 게 맞았다.손목에 박도윤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어서 역겨웠기 때문에 손을 씻으러 간 것이었다.그리고 손을 씻고 나서는 옆길로 빠져서 그곳을 떠났다.그러다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와 걸음걸이가 불안해졌다.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큰 나무 아래 천천히 앉았다.밤바람이 불어오자 머리 위에서 나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붉은 천을 바라보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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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마치 마력이 있는 것처럼 강하율의 혼란스럽던 머릿속을 꿰뚫었다.그녀는 몽롱한 눈빛을 한 채 본능적으로 물었다.“누가 좋다고요?”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움직였고, 그 탓에 배윤호의 얼굴 위로 나뭇잎의 그림자가 흔들거리면서 그의 얼굴을 더 차가워 보이게 했다.“배윤제 말이야.”“...”배윤제의 이름이 다시금 들리자 강하율은 미간을 찌푸렸다.‘짜증 나 죽겠네. 또 배윤제야? 왜 배윤제를 항상 못 벗어나는 거야?’강하율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배윤호는 강하율의 살짝 붉어진 눈가를 보았다. 많은 미련이 남은 듯한 표정이었다.그 순간 배윤호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혼잣말하듯 되뇌었다.“상관없어.”어렴풋이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에 강하율은 마치 야수에 노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 몸이 얼어붙었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잡은 채 배윤호의 품에서 버둥거리다가 목을 졸려서 남은 상처에 옷감이 스쳐서 헛숨을 들이켰다.“윽...”강하율은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렸다.그러다 갑자기 배윤호가 움직이며 강하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강하율은 습관적으로 그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배윤호가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따뜻한 손바닥을 강하율의 등에 딱 붙이고서 그녀를 거침없이 끌어당겼다.다음 순간, 배윤호는 늘씬한 손가락으로 강하율의 턱을 쥐면서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바람이 불어오자 배윤호의 앞머리가 살짝 날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마치 안개비처럼 몽롱한 느낌을 주었고, 동시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했다.“배윤제가 그런 거야?”배윤호의 온기 없는 목소리에 강하율은 소름이 돋았다.강하율은 대답하고 싶었으나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맞아?”배윤호가 갑자기 몸을 숙이자 아주 가까이서 그의 호흡이 느껴졌다.거리가 너무 가까워 강하율은 감히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그저 멍하니 코앞에 있는 배윤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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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강하율은 자연스럽게 배윤호의 품 안을 파고들며 편한 자세를 취한 뒤 몸을 계속 움직였다. 치마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위로 올라갔고 스타킹의 분계선이 겉으로 드러났다.강하율의 허리를 잡은 뜨거운 손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배윤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그러나 강하율은 겁이 없는 건지 알겠다고 한 뒤 깊이 잠들었다.양승아는 거울을 통해 뒷좌석을 힐끗 보았다.“대표님, 강하율 씨도 쓰레기 아닌가요? 배윤제 씨를 향한 마음을 접지 못했으면서 대표님한테 그런 짓을 하니...”“뭘 봐? 그렇게 예뻐?”배윤호가 정장으로 강하율의 다리를 가려주었다.“...”양승아는 당황스러웠다.‘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숙소.강하율은 목이 말라서 눈을 떴다가 안혜슬의 큰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강하율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안혜슬이 자신을 숙소로 데려왔을 거라고 짐작했다.“혜슬아, 고마워.”안혜슬은 당황스러웠다.“뭐가 고맙다는 거야?”“네가 나를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강하율은 침대에서 일어난 뒤 손을 뻗어 침대맡에 놓인 물을 마시려고 했다.“아닌데? 네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바래다준 거야. 그 사람은 남자라서 나한테 연락해서 너를 돌봐달라고 했어.”“풉!”강하율은 물을 뿜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흐릿한 기억들이 떠올랐다.‘말도 안 돼.’그녀는 취해도 별다른 주사가 없었고 기껏해야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안혜슬이 그녀의 손에 프랑스어가 잔뜩 적힌 바디워시를 쥐여주었다.강하율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이건 뭐야?”안혜슬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 너 돌아왔을 때 네가 짝사랑하는 사람을 안고서 계속 향기가 좋다고 했거든. 그래서 그분이 사람을 시켜서 이걸 보내왔어.”쾅.바디워시가 바닥에 떨어졌다.강하율은 완전히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흐릿하던 기억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만 같았다.강하율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최후의 저항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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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거울에 가까이 다가간 강하율은 목에 남은 상처에 약이 발라져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자신이 셔츠 끈을 풀었던 걸 기억했는데 셔츠 끈은 예쁘게 묶여 있었다.그녀는 문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혜슬아, 나 돌아올 때 옷이...”안혜슬은 그녀의 질문을 짐작한 듯 곧바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너 돌아왔을 때 옷차림이 아주 단정했어. 심지어 리본까지 예쁘게 묶여 있었어. 역시 배윤호 대표님이야. 여자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나 봐.”강하율은 당황했다.‘하지만 난 분명히...’강하율은 문득 자신이 여자 직원 숙소에 살고 있고 혼자 방을 쓰는 것도 맞지만 숙소에 드나들 때 동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만약 옷차림이 흐트러진 채로 남자의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다음 날 어떤 소문이 돌지 알 수 없었다.그렇다면 배윤호가 리본을 묶어준 걸까?강하율은 차분하고 차가워 보이는 배윤호가 자신을 위해 리본을 묶어주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내일 어떻게 대표님 얼굴을 보지?’강하율이 비몽사몽인 상태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안혜슬은 그녀에게 일찍 쉬라고 당부한 뒤 본인 숙소로 돌아갔다.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강하율은 자기도 모르게 배윤호의 꿈을 꿨다.그녀가 기억하기로 두 사람은 전혀 친하지 않았다.배윤호는 배윤호 아버지의 첫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이었고, 배윤호의 엄마는 해외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였다.그래서 배윤호는 배씨 가문에서도, 외가에서도 남다른 존재였다.배윤호는 자주 국내와 해외를 오갔고 강하율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그리고 배윤제의 어머니는 배윤호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였고 강하율 어머니와 친구 사이였다.그래서 배윤제와 강하율은 꽤 친했다.그러나 그녀는 열네 살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그녀는 어렸을 때 한 번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많은 기억을 잃었고 그저 자신의 곁에 늘 있어 준 존재가 배윤제라는 것만 기억했다.그래서 그녀는 배윤제에게 특별하고도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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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가까이 다가가자 배윤호에게서 어젯밤처럼 상쾌한 향기가 났다.문득 정신이 번쩍 든 강하율은 서둘러 오늘의 스케줄표에 시선을 고정했다.“아침 식사 이후에는 가이드와 함께 주변 차 농장을 둘러보고 차를 시음하시면 됩니다. 점심에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실 예정이고 오후에는 회의실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디저트도 따로 준비하겠습니다...”꼬르륵.이때 강하율의 배에서 소리가 났고, 강하율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면서 귀 끝이 붉어졌다.배윤호는 잔을 들다가 흠칫했다.그가 낀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가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 배윤호가 시선을 들면서 말했다.“같이 먹자.”“감사합니다.”배윤호의 눈을 바라본 강하율은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많이 먹기에는 쑥스러워서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주머니 안에서 종이를 꺼내 오른쪽 윗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대표님, 저는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해서 차용증은 대표님께서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인은 이미 해뒀으니 말을 바꿀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배윤호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빈 종이에 이름을 막 쓰래? 내가 너를 팔아버리면 어쩌려고.”강하율은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누가 산대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저 고개를 숙이고 머쓱한 표정으로 밥을 먹었다.배윤호는 한동안 강하율을 바라보았다.잠시 뒤, 배윤호는 강하율의 사원증 위 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글씨체가 꽤 반듯하긴 했으나 남자의 글씨체인 건 확실했다.“강하율, 글씨체가 꽤 다양하네.”“...”고개를 숙인 강하율은 자신의 사원증을 보았다.그녀는 혹시라도 자신이 추후에 발뺌하려고 일부러 못생긴 글씨체로 사인을 한 거라고 배윤호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사원증을 보여주며 말했다.“이건 제가 쓴 게 아니에요. 저는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어요.”그녀는 배윤제에게 부탁했었다.그러나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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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강하율은 당황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밀치는 바람에 문을 벌컥 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곧이어 동료 허지연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강하율을 부축했으나 그녀의 눈빛을 보니 일부러 그랬다는 게 느껴졌다.“강 팀장님, 죄송해요. 클라이언트가 보낸 메시지를 보느라 강 팀장님이 앞에 서 있는 걸 못 봤어요. 그런데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 있었던 거예요?”어제 허지연이 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강하율이 버림받았다는 소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직원들 사이에서 퍼지게 되었다. 심지어 소문에 살이 붙어서 더 자극적으로 변했다.그런데 이제는 남의 행복을 엿듣고 있었다는 소문까지 더해지게 생겼다.강하율은 능력이 좋아 동기들 중에서 가장 빨리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승진까지 했다.그래서 동료들 중에 강하율을 아니꼽게 여기며 겉으로는 친한 척 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하율이 살인범의 딸일 뿐만 아니라 정체 모를 남자 친구한테 버림받았다는 소문까지 돌자 다들 연기하는 것조차 귀찮아진 건지 대놓고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강하율을 바라봤다.“강 팀장님, 우리는 동료잖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요. 굳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누군가 먼저 말을 꺼냈다.“앞으로는 사무실에서도 조심해야겠어요. 자칫했다가는...”그 말을 한 사람은 강하율이 두려운 것처럼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의 눈빛은 매우 야멸찼다.강하율이 입을 떼려는데 정다인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사람 좋은 척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하율 씨, 오해하지 말아요. 사실 우리는 별말 하지 않았어요. 그저 다들 제 팔찌를 보더니 예쁘다고 해서 몇 마디 나눈 것뿐이에요.”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강하율이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는 걸 못 박는 말이었다.강하율은 괜히 싸우고 싶지 않아서 입술만 깨물었다.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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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강하율은 정다인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어서 말했다.“그럼 그 여자도 참 운이 없네요. 남자도 중고인데 팔찌까지 중고이니 말이에요.”“운이 없긴요. 그런 남자들은 돈을 좀 써서 허영심 많고 욕심 많은 여자들만 골라서 낚은 뒤 질리면 버리잖아요. 그런 남자들한테 넘어간 여자도 정상은 아니죠.”허지연이 비웃으며 말했다.강하율을 깎아내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사실상 정다인도 함께 욕한 꼴이 됐다.정다인은 안색이 한없이 어두워지더니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그만해요!”허지연 등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의아한 얼굴로 정다인을 바라봤고, 정다인은 그제야 평소처럼 온화한 척하며 말했다.“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잠시 뒤에 총괄님이 올 테니까 우리는 일단 일하죠.”“네.”허지연은 아쉬운 얼굴로 제자리로 돌아갔다.강하율은 몸을 돌려 탕비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잠시 뒤에 고객에게 행사장을 보여줘야 했는데 그 전에 커피를 한 잔 마실 생각이었다. 그런데 커피 머신을 켜자마자 정다인이 컵을 들고 들어와 그녀보다 먼저 머신 아래에 컵을 놓았다.정다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강하율, 겨우 말 몇 마디로 네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강하율은 컵을 헹구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중고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야.”정다인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손목의 팔찌를 쓰다듬었다.“하지만... 원래 주인은 나였고 중고를 만난 건 너야. 나는 그저 내 것을 다시 돌려받은 것뿐이야.”강하율은 움찔했다.정다인은 팔찌를 풀더니 일부러 팔찌를 높이 들어 올리고 천천히 돌려보았다.팔찌에 새겨진 이니셜은 예술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굉장히 흘려 쓴 글씨체라 보통 사람들은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모든 건 강하율의 착각이었다.강하율은 컵을 꾹 쥐면서 애써 감정을 억눌렀으나 엄청난 모욕감 때문에 안색이 창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정다인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강하율,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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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배윤제를 본 강하율은 살짝 놀랐다.그녀는 둘 사이에 더 할 말은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배윤제는 엄연히 그녀의 상사였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강하율은 장천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배윤제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에 장천우는 당황했다.그는 강하율이 혹시라도 이상한 말을 할까 봐 어떻게 경고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강하율은 너무도 무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윤제만 바라보던 여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강하율은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가녀린 몸으로 꼿꼿이 서서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저를 찾으셨다고요.”강하율의 목소리는 아무런 기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배윤제는 메뉴판을 펼치다가 흠칫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앉아. 어제의 사고로 내가 보상해 주겠다고 했으니 먹으면서 뭘 요구할지 고민해 본 뒤에 결정해서 알려줘.”배윤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은근히 ‘사고’라는 말을 강조했다.마치 강하율에게 더는 그 일을 물고 늘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보상해 주겠다고 했으나 그마저도 사실은 정다인을 위한 것이었다.그리고 보상이라고 하지만 배윤제는 자신이 아량을 베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의 뻔뻔한 태도에 강하율은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그녀가 정다인을 해쳤다고 단정 지었을 때는 그녀의 목을 조르더니 정다인의 자작극이라는 걸 알고서는 사고라고 우기니 말이다.어떤 모습이 진짜 배윤제의 모습인 걸까?어쩌면 강하율은 아직도 배윤제의 실체를 모르는 걸 수도 있었다.하지만 이미 헤어진 마당에 상사의 일이 그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강하율은 더 이상 따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 싱긋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사고였고, 정다인 씨도 무사하면 된 거죠.”강하율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려 했다.배윤제는 강하율의 배려심 넘치는 말에 이상하게 짜증이 치밀어올랐다.그가 아는 강하율은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감옥에 간 이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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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배윤제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더니 조용히 기다렸다.잠시 뒤, 강하율의 앞접시에 새우가 일고여덟 마리쯤 쌓였다.배윤제가 젓가락을 들어 강하율의 앞접시에 놓인 새우를 집으려는 순간, 강하율이 접시를 들고 몸을 피했다.강하율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새우를 먹고 싶으시다면 직원을 부르세요. 저는 방금 손도 안 씻고 새우를 깠거든요.”강하율은 말을 마친 뒤 배윤제가 건드렸던 새우를 옆에 빼두고는 남은 새우들을 맛있게 먹었다.역시 스스로 까서 먹는 게 가장 맛있었다.배윤제는 옆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새우를 보자 울컥했다.그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면서 말했다.“강하율, 지금 뭐 하자는 거야?”강하율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비위생적이잖아요. 대표님은 다른 사람 침이 묻은 음식을 드실 수 있으세요?”“...”배윤제는 말문이 막혔다.그는 기억을 잃은 콘셉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그러나 번번이 자신에게 대드는 강하율의 모습에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경고했다.“강하율, 이런 식으로...”“이런 식으로 대표님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고요? 대표님, 여기서 밥을 먹으라고 하신 건 대표님이세요. 먹지 않아도 문제고, 먹어도 문제라면 대체 저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강하율은 오랫동안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그녀는 기억 상실을 핑계로 한 황당한 이별도 받아들였는데, 배윤제는 끈질기게 계속해 그녀를 괴롭혔다.“강하율!”배윤제는 호통을 치면서 차가운 눈빛을 했다.“난 보상하려는 것뿐이야. 네가 뭐라고 변명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내 결정은 바뀌지 않아. 그러니까 선 넘지 마.”어처구니없는 말에 강하율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배윤제가 보기에 그녀의 모든 행동에는 불순한 의도가 있었고 모든 행동이 다 잘못이었다.그러다가 강하율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보상은 됐고 대신 질문 하나만 할게요. 그 별 모양 팔찌 말이에요. 저한테서 가져가서 정다인 씨한테 선물로 준 거죠?”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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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강하율은 배윤호가 태연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그녀가 있는 쪽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자 강하율은 안도했다.그러나 강하율은 이내 의아해했다.‘내가 왜 안도하는 거지? 바람을 피우다가 걸린 상황도 아닌데 말이야.’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손등이 따뜻해졌다.고개를 드니 배윤제가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뭘 본 거야? 우리 형? 그 같잖은 고백 영상을 형이 신경 쓸 것 같아? 형은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배씨 가문에서 길러낸 일하는 기계일 뿐이라고.”강하율은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배윤호가 아무리 별로라고 해도 쓰레기인 배윤제보다는 훨씬 나았다.그리고 강하율이 기억하는 배윤호의 아버지는 아주 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강하율은 비꼬듯 말했다.“고백 영상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나요?”“강하율, 그만해. 그 일은 이미 지나갔어. 나는 네 마음을 알아. 그동안 네가 배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지냈던 정을 생각해 그냥 좋게 넘어가고 싶어. 이해하겠어?”배윤제는 위로하듯, 경고하듯 강하율의 손을 주물럭댔다.그는 강하율을 여전히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는지 채찍으로 때린 뒤 당근을 쥐여주면 강하율을 예전처럼 쉽게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강하율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소용없었다.그러다 갑자기 등이 뜨거워졌다.남자의 위험한 시선이 마치 덩굴처럼 몸을 휘감는 것 같아 강하율은 숨이 턱 막혔다.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강하율은 손을 탁 빼냈다.“제가 뭘 원하는지 이제 알겠어요.”강하율이 화제를 돌렸다.“말해.”배윤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의 입체적인 이목구비에 미묘한 복잡함이 스쳤다.그는 강하율이 분수를 모르고 지나친 요구를 할까 봐, 또 객기를 부릴까 봐 걱정되었다.그러나 그는 강하율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걱정은 한 적이 없었다.강하율은 그저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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