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Bab 201 - Bab 210

214 Bab

제201화

정시연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제가 가서 빌게요. 전부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잖아요. 내가 못나서 굴러떨어지지만 않았어도 아빠가 화가 나서 루아를 때릴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태윤 씨도 아빠한테 화풀이 안 했을 텐데... 지금 루아 찾아갈게요. 날 용서해 주고 화만 풀 수 있다면, 루아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임혜숙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붙잡았다.“시연아, 이 일이 왜 네 탓이란 말이냐? 부모가 자기 자식 버릇 좀 고치겠다는데 뭔 대수라고. 다 구태윤이 쓸데없이 참견질해서 이 난리가 난 거지.”정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내가 사과하지 않는 이상 태윤 씨는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예요.”임혜숙이 정석주를 돌아보았다.“여보, 이제 우리 어떡해? 설마 진짜로 루아한테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내내 침묵을 지키던 정석주가 입을 열었다.“구씨 본가에 한 번 다녀올게.”본가 어른들을 움직여 구태윤의 목을 죄어오게 만든다면, 제아무리 날뛰는 놈이라도 멈출 수밖에 없을 터였다.정석주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정시연의 병실 문 앞을 지켰다.그 모습을 본 임혜숙이 다가가 물었다.“당신들 뭐야?”경호원 중 한 명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구 대표님의 지시를 받고 큰사모님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임혜숙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한편으로는 정원 그룹을 파멸로 몰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시연을 보호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정시연은 어떻게든 정루아에게 사과하러 갈 타이밍을 노렸다.마침 임혜숙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아픈 몸을 이끌고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러나 병실 문 앞에 이르자마자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다.“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정시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경호원이 말했다.“구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큰사모님의 부상이 심각하니, 완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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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2화

“구태윤, 내 말 듣고 있어?”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에 정루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이내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매섭게 쏘아보았다.잔뜩 독이 오른 그녀의 모습에도 구태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그리고 가녀린 손목을 덥석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밤새 생각해봤는데, 난 역시 이혼 못 해. 루아야, 우리 아직 끝낼 단계 아니야.”정루아는 이를 악물었다.“내가 정시연을 죽여버려도 상관없다는 거야?”“그 여자를 죽여도 이혼은 불가능해.”구태윤의 눈빛이 유난히 어두웠다.그는 정루아를 침대에 앉히고는 허리를 숙여 여전히 핏기 없는 갸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루아야, 우리 함께한 세월이 자그마치 몇 년인데, 이미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졌잖아. 이혼이라는 말,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야.”정루아는 손을 빼내며 차갑게 말했다.“난 더 이상 당신 안 사랑해.”“상관없어.”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한 번 사랑했는데, 두 번은 못 할까.”구태윤의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구태윤이 말을 이어갔다.“더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가서 사 올게.”정루아는 묵묵부답했다.“굶을 생각은 하지 마. 여기 병원이야, 알지? 의사 시켜서 링거로 영양제 맞히면 그만이니까, 단식 같은 건 안 통한다는 소리야.”구태윤이 무덤덤하게 말했다.정루아는 가슴이 답답했다.이내 그를 밀치며 쏘아붙였다.“당신 얼굴 보기 싫으니까 나가.”구태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가 뱉은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듯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바로 그때, 병실 밖에서 박정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것들이 겁도 없이 감히 내 길을 막아? 당장 해고야, 썩 꺼지지 못해?”노인의 목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짱짱하고 고압적인 기세였다.문밖을 지키던 경호원 두 명은 울상이 되었다.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구태윤이 걸어 나왔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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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화

박정란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태윤아, 너도 들었지? 쟤는 작정하고 우리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 인간이야. 더 볼 것도 없다. 당장 저년이랑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정루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구태윤을 바라보았다.구태윤 역시 묵묵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속내를 단번에 꿰뚫어 본 듯했다.무덤덤한 어조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할머니, 루아랑 함께한 세월이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이혼이 가당키나 합니까? 저희 부부 관계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잠시 뜸을 들인 그가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지금 정원 그룹이 겪고 있는 위기는 그쪽 내부 문제일 뿐입니다. 전 아무것도 건드린 적 없어요. 장인어른께서는 남 탓하실 게 아니라, 본인 회사부터 내부 감사해서 터진 구멍을 메우시는 게 순서입니다.”박정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어디서 그런 뻔지르르한 말로 얼버무리려고 해? 내가 어떻게든 너희 둘 갈라놓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대답해! 이혼할 거야? 말 거야?”“안 합니다.”단호한 목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박정란은 기가 막혀 손가락을 부르르 떨었다.“이... 불효막심한 놈이 감히 내 뜻을 거역해? 당장 이사회를 소집해서 네 직무부터 정지시켜야 정신을 차리겠느냐!”구태윤은 체념한 듯 할머니를 바라보았다.“연세도 있으신데 회사 일에는 그만 손 떼세요.”박정란은 철저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게다가 늙은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했음에도, 제 뜻대로 해결된 게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결국 분노가 치밀어 구태윤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하지만 늙은이의 손에 기운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맞아도 아프기는커녕 간지러운 수준이었다.“할머니, 손까지 쓰셨으니 이제 분은 좀 풀리셨습니까? 그만 댁으로 모시다 드릴게요.”구태윤이 무덤덤하게 받아쳤다.정루아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렇게 허무하게 무산되다니.그녀가 정말 구씨 가문을 발칵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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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4화

“이 빌어먹을 년이!”박정란은 정말로 증손주가 납치당하는 끔찍한 상상이라도 했는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이내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갔다.정루아는 노인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을 보며 한층 더 덤덤해진 어조로 말했다.“구태윤이 날 24시간 내내 감시할 수는 없잖아요? 틈만 나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줄 알아요.”“정루아!”구태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끈 솟아올랐다.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깊은 곳에서 잔혹하리만치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정루아는 그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당신 할머니 상태부터 좀 살피지? 숨넘어가기 직전인데, 이대로 방치해서 할머니 죽인 살인범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구태윤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 입 안 다물어?”정루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래도 이혼 안 하겠다고 버티시겠다?비록 몸은 갇혀 있을지언정 입까지 막고 말을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박정란을 바라보았다.“구하준이 이제 겨우 세 살이었던가요?”“구태윤!”박정란은 천인공노할 망언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이내 두 눈을 부라리며 손자의 이름을 불렀다.하지만 구태윤은 냉랭한 목소리로 경호원들을 불러 박정란을 억지로 끌어냈다.“이 불효막심한 놈들!”박정란은 핏대를 세우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젊은 사내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이내 병실 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구태윤은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털어내려는 듯했다.그는 정루아의 침대 앞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미간을 살짝 찌푸린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났다.이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루아야, 이제 이런 얄팍한 잔머리는 그만 굴려. 나랑 이혼하겠다고 본인 미래까지 망쳐버리는 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스스로 잘 알 텐데.”정말 미쳐서 모든 걸 내던질 작정이 아니라면, 굳이 자신과 진흙탕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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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5화

정루아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난 남한테 폐를 끼치기 싫어. 구태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물불 안 가리는 거, 너도 잘 알잖아.”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한참 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야 허도준이 입을 열었다.“우리 그래도 동창이잖아. 친구가 어려움에 부닥쳤는데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순간, 정루아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고, 일부러 덤덤한 척 농담을 던졌다.“그럼 수임료를 꽤 톡톡히 쳐줘야겠네. 내 이혼 소송, 리스크가 보통 큰 게 아니니까.”허도준이 웃으며 맞받아쳤다.“걱정 마. 날 해외로 강제 추방하지 않는 한, 구태윤도 어쩌지 못할 테니까.”휴대폰을 쥔 정루아의 손가락에 힘이 점점 들어갔고, 눈동자에는 결의가 서렸다.“좋아. 그럼 이혼 소송 계속 진행할게.”허도준이 대답했다.“서류는 이미 다 준비해 뒀어. 네가 기소하겠다면 당장 법원에 제출할게. 그다음엔 조정 절차가 시작될 텐데, 그렇게 되면 이 일도 더는 숨길 수 없어.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 둬.”“응.”정루아는 대답한 뒤,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도준아, 정말 고마워.”구태윤에게 경고를 받았다면 다른 이들은 진작에 기겁하며 도망쳤을 것이다.하지만 허도준은 여전히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정루아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허도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제 밥 한 끼 정도는 사줄 수 있지? 무리한 부탁은 아니잖아.”정루아는 한숨을 내쉬었다.“당장은 좀 힘들어. 지금은 상황이 여의찮거든.”“알겠어.”허도준이 한발 물러섰다.“언제든 시간 날 때 사줘. 기다리고 있을게.”“응.”전화가 끊기자 정루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때, 허도준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혼 소송뿐이었다....박정란은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검사를 받았다.사실 징후가 있었던 터라 약을 먹고 나니 증상은 금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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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정석주는 여전히 정루아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박정란이 병원까지 다녀왔음에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오히려 구명 그룹의 압박만 더욱 거세졌을 뿐이다. 각 은행에서는 빚을 독촉하는 전화가 빗발쳤고, 주가는 속절없이 폭락했다.정석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곁에 서 있던 임혜숙 역시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내가 루아를 찾아갈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너무 하잖아.”그녀가 밖으로 나갈 때 경호원들은 딱히 막아서지 않았다.정작 정루아의 병실에 도착했지만,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다.결국 복도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루아야! 엄마 좀 들어가게 해줘. 할 말이 있어서 그래!”고요한 2층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유독 귀에 거슬렸다.경호원들은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대낮에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울 줄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그중 한 명이 곧바로 구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임혜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쳤다.“루아야! 무슨 일이든 가족끼리 좋게 이야기하면 되잖니? 왜 엄마랑 아빠도 안 만나주는 거야? 부모한테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떼만 쓰면 어떡해.”정루아는 휴대폰을 들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등 뒤의 상처는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진 대신 살이 차오르듯 간질거렸다.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신경이 쏠린 탓일까, 이번 판은 결국 깨지 못했다.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유리창 너머로 모녀의 시선이 마주쳤다.임혜숙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이내 한 걸음 바짝 다가섰다.“루아야, 엄마 좀 들어가면 안 될까? 할 말이 있어.”정루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임혜숙은 문득 딸이 너무 생경하고 낯설게 느껴졌다.어릴 때부터 유독 자신을 따랐던 아이였다. 작은 일 하나까지 전부 털어놓았고, 예쁜 옷을 입는 날이면 제일 먼저 달려와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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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7화

임혜숙은 안절부절못했다.“이제 어떡하면 좋아? 루아가 나를 아예 만나 주지도 않으니...”정석주는 지친 듯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입을 열었다.“구태윤이 하자는 대로 해. 우선 회사부터 살리고 봐야 할 거 아니야.”임혜숙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다. 루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구태윤이 이 지경까지 나오는데 마냥 보고만 있어? 이제 부모 따위 안중에도 없나 봐.”정석주는 아내의 푸념을 무시하고 곧바로 구태윤에게 연락했다.그의 제안을 수락함과 동시에 식사 자리를 마련해 이번 사태에 관하여 마무리 짓기로 했다.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역시나 한민혁이었다.“회장님의 뜻은 대표님께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예의 바르지만 철저히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전화를 끊은 정석주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번졌다.어느덧 눈가의 주름도 한층 더 깊어진 듯했다....한편, 정루아는 손에 쥐어진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믿기 싫은 현실이었으나, 그런데도 확인해야만 했다.정시연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녀는 집안의 애지중지하는 보물이었고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자신이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위 할 이유조차 없었다.하지만 최근 일어난 일들은 저절로 의심을 품게 했다.차라리 친딸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테니까.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친부모가 맞다면...정루아는 차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 평생 이런 부모를 모시고 살아가야 한다니.그녀는 머리카락을 잘 보관해두었다. 퇴원하자마자 유전자 검사부터 진행할 생각이었다.물론, 끝까지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만약 들켰다가 정석주 부부가 중간에서 손이라도 쓰면 큰일이었다.그날 해 질 녘.병실 문이 열리며 훤칠하고 키 큰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정루아는 그를 슬쩍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상처도 거의 다 물어서 이제 퇴원할래.”“그래, 오늘 수속하자.”구태윤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생각보다 흔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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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8화

정루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구태윤에게서 기어코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듯 거세게 반항했다.구태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너한테 정말 잘 어울리는데.”“이제 싫다고 했잖아. 사람 말귀 못 알아들어?”“응.”구태윤은 문득 정루아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예전에 이 브랜드 좋아한다고 했잖아. 신상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착용하고 싶다고... 난 다 기억하고 있어.”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고백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듯이.정루아의 말이라면 그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싫어졌다고 했다.사람 마음이 어떻게 이리 쉽게 식을 수 있단 말인가.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차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집요한 시선에 숨 막히는 압박감이 밀려왔지만, 정루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구태윤이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자 차단막이 스르륵 올라갔다.뒷좌석의 공간이 순식간에 답답하게 느껴졌다.구태윤은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리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루아야, 사람은 그렇게 금방 변하면 안 되는 거야.”정루아는 가슴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내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그 말, 당신한테 해주고 싶네. 먼저 변한 건 당신이야.”“아니, 난 변한 적 없어.”구태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정루아는 숨을 깊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만약 나랑 정시연이 납치돼서, 당신이 딱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 선택할 거야?”“그게 무슨 소리야.”구태윤은 대답을 피했다.“네가 위험해질 일은 없어.”“봐, 당신은 빈말이라도 날 선택하겠다고는 안 하잖아.”정루아는 비아냥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런 일 생기지 않을 거 알아. 내가 미쳤다고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겠어? 하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건 날 고르겠다는 그 한마디였어, 이런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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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9화

지극히 냉담한 태도에 임혜숙은 불쾌함이 밀려왔지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이내 그녀는 종업원을 불렀다.“음식 준비해 주세요.”종업원이 고개를 숙였다.“네, 손님.”음식이 다 차려지자 임혜숙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루아야, 이거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그동안 음식 가리느라 제대로 못 먹었을까 봐 주방장한테 특별히 부탁했단다. 어서 먹어 보렴.”하지만 정루아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정석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정석주는 줄곧 입을 다문 채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딸과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을 건넸다.“루아야, 지난번엔 아빠가 너무 홧김에 그랬다. 너한테 손을 대는 게 아니었는데... 다친 곳은 좀 괜찮니?”정루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아 내며 물었다.“...하나만 물어봐도 돼요?”임혜숙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루아야. 말해 보렴.”정루아가 깊은숨을 내쉬었다.“두 분은 왜 그렇게 소시연한테 잘해 주는 거예요?”임혜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데려온 아이니 당연히 잘해 줘야지. 십 년 넘게 우리 곁에 있었잖아. 이미 정이 들 대로 들어서 친딸이나 다름없는걸.”그리고 잠시 멈칫하더니, 타이르듯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루아야, 시연이도 너랑 잘 지내고 싶어 해. 그 아이한테 기회 좀 주면 안 되겠니? 서로 노력하다 보면, 그동안 네가 참 많은 오해와 편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야...”정루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럴 일 없어요.”그리고 뒤돌아서는 순간, 벼락같은 호통이 울려 퍼졌다.“거기 서!”정석주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너 지금 태도가 그게 뭐야? 엄마가 좋게 달래면 좀 들은 척이라도 해야지. 맨날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 다야? 우리가 너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어?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한테 감히 이따위로 굴어? 남편 시켜서 집안 회사 압박하고, 늙은 아비한테 사과까지 하게 만들어? 아주 머리가 굵어질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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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0화

“여보!”정석주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임혜숙의 손이 정루아의 손가락을 스치고는 맥없이 툭 떨어졌다.정루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쓰러진 임혜숙을 끌어안았다.“엄마...?”목소리가 잘게 떨렸다.뒤에서 정석주의 고함이 들려왔다.“당장 구급차 불러!”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끝에 임혜숙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응급실 앞.정석주의 등이 굽어 있었고, 눈가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진 것 같았다.그가 정루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네 엄마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나니까 이제 속이 좀 시원하냐?”정루아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그때 구태윤이 입을 열었다.“두 분이 끝까지 한 발짝도 안 물러서고 루아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여 놓고, 스스로 살려고 반항한 게 왜 루아 잘못이에요?”정석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자네가 이렇게 위선적인 인간이라는 걸 이제야 똑똑히 알겠네.”이어 시선을 다시 정루아에게 돌리며 말했다.“루아야, 네가 이혼하겠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다. 구태윤은 냉혹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이기적인 놈이야. 저런 남자와 계속 같이 산다면 넌 앞으로 더 지옥 같을 뿐이다.”구태윤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이 판국에 입조심 좀 하시죠.”명백한 경고였다.정원 그룹은 지금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웠다.당장 파산하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구태윤의 손에 달린 문제였다.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사사로운 정 따위는 눈곱만큼도 봐주지 않을 남자였다.정석주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 당장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반면, 굳게 닫힌 응급실 문을 바라보는 정루아는 마음이 심란했다.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속절없이 흐르는 시각만큼이나 불안과 초조함은 거세게 번져갔다.마침내 응급실 문이 열렸다.환자 침대에 실린 임혜숙이 밖으로 나왔다.정석주가 황급히 다가갔다.“선생님, 우리 집사람 괜찮은 겁니까?”의사가 대답했다.“심장 질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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