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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부인의 말씀대로라면 지체 높은 양반들은 쌀 한 톨, 소금 한 줌도 입에 대지 말고 바람만 마시고 살아야 하겠군요!”민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설마 이 지체 높은 부인들이 일제히 소설아의 편을 들며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얼굴을 굳힌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소설아의 손에 들린 꽃갈피를 강제로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그러나 소설아는 한 발짝 가볍게 물러서며 민씨의 손길을 매끄럽게 피했다.“꽃이 이토록 흐드러지게 피어나기까지, 부인께서는 그저 눈앞의 화려한 풍류만 보실 뿐 정작 이 꽃 한 송이를 키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는지는 보지 못하시는군요. 정원사가 제 손으로 정직하게 꽃을 가꾸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훔치는 것도, 빼앗는 것도 아닌 정당한 대가이거늘, 어찌 장사라 하여 이리 천대하신단 말입니까? 입만 열면 '돈 냄새'를 운운하시니 부인께서는 사람이 먹고사는 데 드는 비용이 어디서 나오는지조차 잊으신 듯합니다. 위원후부에서 먹고 쓰는 그 귀한 쌀과 소금은 대체 어떤 고상한 ‘풍류’ 속에서 저절로 굴러떨어진 것입니까?”소설아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민씨의 서슬 퍼런 추궁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조곤조곤 조리 있게 받아쳤다. 그녀의 어조는 시종일관 평온하고 부드러웠으나, 그 속내에는 마치 감춰진 날카로운 장미 가시가 들어 있는 듯했다. 겉보기에는 가녀린 꽃가지 같았지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손끝이 베일 만큼 날카로웠다.그 자리에 모인 부인들은 일제히 경멸 어린 시선으로 민씨를 바라보았고, 이연주는 코웃음을 치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겉으로는 세상 고결한 척 풍류를 논하면서, 정작 뒤에서는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기른 정을 끊고 수양딸을 핍박하다니. 후작 부인의 그 이중적인 잣대가 실로 눈부실 지경입니다!”민씨는 평생 이토록 처참한 모욕과 수모를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급기야는 손에 쥐고 있던 염주 줄마저 제대로 쥐지 못해 손가락이 마비된 듯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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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민씨가 자식들을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이연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설아를 바라보았다."설아야, 이따 후부로 돌아가면 필시 곤욕을 치르겠구나."이 시대 여인들의 삶이란 본디 그러했다. 집에서는 부모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부군을 따랐다. 혼인 전의 여인에게 부모의 뜻은 곧 하늘과도 같았다. 민씨는 수양어머니라는 명분 아래 소설아를 마음대로 억누르고 핍박할 수 있었다.밖에서야 이연주가 힘을 보태 줄 수 있었지만, 일단 소씨 가문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소설아가 아무리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다 한들 민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차라리 오늘은 후부로 돌아가지 말고 나와 함께 내 처소로 가거라. 혼인 날짜가 정해질 때까지 머물러도 좋고, 아니면 장공주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니? 공주 마마께서는 겉으로만 그럴듯한 체하며 속으로 다른 속셈을 품은 자들을 몹시 싫어하시니, 네가 이곳에 머무는 한 민씨도 감히 함부로 굴지는 못할 게다.”"이리 마음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소설아가 단아하게 예를 갖추며 나직이 말했다."하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으로만 돌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에는 돌아가 매듭을 지어야겠지요."이연주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어려왔다."하지만 돌아갔다가 민씨가 또 너를 괴롭히면 어찌하려고?"소설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정 그러하시다면 언니, 혹시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공주 마마께 청하여 입심 좋고 눈치 빠른 하녀를 둘만 제 곁에 붙여 주시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장공주부의 사람이 함께 있다면, 부인께서도 함부로 억지를 부리지는 못하실 것입니다.""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이연주가 손뼉을 탁 쳤다."기다려 보아라. 내가 지금 당장 공주 마마께 말씀드리고 오마.""감사합니다, 언니."때로는 피를 나눈 친족보다 우연히 만난 지음이 더 든든한 법이었다.과거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숱한 일을 겪고 난 지금에야 소설아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람에게 정을 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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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가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고 피를 즐기는 잔혹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소설아의 시선이 오래 머문 탓일까. 추영우는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있는 쪽을 정확히 바라보았다.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설아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추영우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지만,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세가의 부인들이 저마다 딸들을 데리고 태자 앞에 나아가 문안을 올리는 사이, 소설아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 정원 한편의 매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팔월의 숲은 푸른 매화 잎으로 가득했다.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서자 한낮의 더위도 한결 누그러지는 듯했다.소설아는 천천히 숲길을 따라 걸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감각에, 소설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푸른 옷자락이 언뜻 스쳤다.추영우였다.더는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그는 나무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푸른 비단 도포가 탄탄한 몸을 감싸고 있었고, 허리에는 정교하게 장식된 가죽 띠가 둘려 있었다.매화 숲에 내려앉은 선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이목구비가 빼어나게 수려했다.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가라앉아 있었다.그 상반된 분위기가 오히려 더욱 위험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게 만드는 사람이었다.소설아는 몸을 돌려 공손히 예를 올렸다."구황자 전하를 뵙습니다."추영우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가증스럽군."그는 손에 쥔 단도로 나무 비녀를 깎으며 나직하게 말했다."겉으로는 한 식구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위원후부 사람들이 모조리 망해버리기를 바라지 않느냐."담담한 목소리였다.마치 고양이가 쥐들이 서로 물어뜯는 광경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소설아는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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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입술이 맞닿은 순간, 추영우는 마치 전신의 혈도를 제압당한 인형처럼 굳어버렸다. 그 즉시 신체의 모든 통제권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그는 넋을 잃은 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눈동자에는 짙은 혼란이 넘실거렸다.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한 걸까.이 입맞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의 예상대로라면 소설아는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 앞뒤 사리도 맞지 않는 말을 내뱉으며 제발 무례를 용서해 달라고,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해야 정상이었다.눈물, 콧물로 화장은 처참하게 지워지고, 머리카락과 비녀는 사정없이 흐트러진 채, 심하면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목숨을 살려줄지 말지는 오롯이 그녀의 태도와 자신의 기분에 달린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고고하게 꼭대기에 서서 사냥감을 처참하게 유린할 장난질에 불과했다.그런데 대체 왜 상황이 이따위로 흘러간단 말인가?소설아 저 계집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찬 것인가. 대체 어느 명문가의 수양딸이 이토록 대담하고 방종하게 군단 말인가?‘아, 맞다. 위원후부는 애초에 제대로 된 명문가도 아니었지.’그저 다 쓰러져 가는 빈털터리 망나니 집안일 뿐.바스락.단도가 무력하게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에서도 서서히 힘이 풀렸다.소설아는 밀려드는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마셨다. 짓눌려 하얗게 질려 있던 목덜미에 그제야 붉은 혈색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그녀의 도박이 통했다. 추영우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소설아 자신과 마찬가지로,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존재였다.그렇기에 난생처음 마주한 이 갑작스러운 온기와 호의 앞에서, 소년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지난 생에 추영우가 아비를 죽이고 형제들을 도륙 낸 것은, 본인의 잔혹한 의지라기보다는 철저히 타인에게 이용당한 결과에 가까웠다. 그는 본래부터 미친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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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서 각로의 기준이 워낙 높은 탓이겠지.’장공주는 속으로 생각했다.귀한 아들을 굳이 각로의 자리에 견줄 만큼 엄격하게 키울 필요는 없었다. 그저 평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걸로 충분했다.“네 효심은 이 어미가 누구보다 잘 안단다. 혹여 마음에 드는 규수가 생기면 언제든 말하거라. 우리 가문은 굳이 문벌이나 집안을 따지지 않으니, 성품만 바르다면 누구든 상관없다.”서경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어머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자, 경수 너도 이만 나가 또래들과 어울려 놀아라. 나는 잠시 쉬어야겠구나.”장공주는 두통 때문에 평소 햇볕을 오래 쬐지 못했다. 매일 이맘때면 처소로 돌아가 침을 맞으며 몸을 추슬러야 했다.“어머니, 옥체가 이토록 불편하신데, 자식 된 도리로 어찌 한가롭게 놀러 다닐 수 있겠습니까. 곁에서 탕약을 들게 해 주십시오.”아들의 갸륵한 말에 장공주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볼수록 기특하고 효심 깊은 아들이었다.그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을 밖으로 내몰았고, 서경수는 마지못한 척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장공주부를 나온 서경수는 곧장 태자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태자는 오래전부터 그를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었다. 서경수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태자의 시종이 다가와 그를 태자 앞으로 안내했다.“경수야, 마침 네 이야기를 하던 참인데 마침 잘 왔구나.”태자는 경수를 빤히 바라보았다.“경수야, 이쪽은 내 아우들이란다.”서경수가 두 황자에게 예를 갖추었다.“삼황자 전하, 구황자 전하를 뵙습니다.”삼황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경수야, 사석에서는 편하게 사촌 형님이라 부르거라. 한 집안사람끼리 그리 딱딱할 것까지야 있겠느냐.”가벼운 담소가 오가던 중, 서경수의 시선이 문득 추영우에게 머물렀다.“형님, 그런데 얼굴이 왜 이리 붉으십니까? 날이 더워 그런 모양인데, 사람을 시켜 얼음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추영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높고 반듯한 콧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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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위원후부.민씨는 결국 사람들에게 들것에 실린 채 초라한 몰골로 위원후부로 돌아왔다. 소명주는 민씨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이마를 짚어 주고 부채질을 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정작 손발만 분주할 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민씨의 눈에는 친딸인 소명주가 세상 누구보다 지극정성인 효녀로만 보였다.후부에 도착하자마자 의원이 왔다. 맥을 짚고 침을 놓고 탕약을 달여 올리느라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민씨는 겨우 가쁜 숨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간신히 눈을 뜬 민씨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의외로 소설아를 향한 욕설이 아니었다.그녀는 핏발이 선 눈으로 소명주를 바라보며 물었다.“명주야. 네가 사들인 곡식은 대체 언제 팔 생각이냐?”장공주부에서 겪은 수모가 너무도 컸던 탓에 소명주는 안성주가 돈을 받으러 오겠다고 했던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이 와중에도 어머니가 곡식과 은자 걱정부터 하는 것을 보니, 상황이 얼마나 다급한지 새삼 실감이 났다.소명주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며칠만 지나면 가격이 최고조에 이를 테니, 그때 한꺼번에 내놓을 생각입니다.”지금 팔아도 이익은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이틀만 더 버틴 뒤 시세가 정점에 올랐을 때 모두 팔아 최대한 많은 차익을 남길 생각이었다.“어머니, 곡식을 팔아 목돈이 생기면 남쪽 거리에 있는 점포 몇 채를 사 둘까 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한산하지만, 머지않아 크게 번성할 곳이니까요.”그 말에 민씨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지난 생에서 남쪽 거리의 점포들은 훗날 값이 몇 배로 뛰어올랐다.지금처럼 헐값일 때 미리 사 두기만 하면 가만히 앉아서도 큰돈을 벌 수 있었다.'과연 내 딸이구나. 보는 눈만큼은 남다르단 말이지.'예전에 향료 가게를 말아먹은 것은 간악한 자들에게 속아 잠시 실수한 것뿐이었다.자신이 곁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잃어버린 돈쯤은 금세 몇 배로 불려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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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소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 어멈이 급히 모습을 드러냈다.“아가씨, 부인께서 부르십니다.”소설아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춘경원에 들어서자 민씨와 위원후, 소명준, 소명천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문턱을 넘는 순간, 민씨의 날카로운 호통이 쏟아졌다.“이 불효막심한 년! 당장 무릎 꿇지 못하겠느냐!”말이 끝나기 무섭게 찻잔 하나가 날아왔다.쨍그랑!찻잔은 소설아의 발치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고,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소설아는 담담한 얼굴로 두 걸음 물러서며 파편을 피했다.그러자 위원후가 버럭 소리쳤다.“이 발칙한 것! 어머니께서 훈계하시는데 감히 몸을 피하느냐!”소설아는 피식 웃으며 옆에 선 월아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을 받은 월아가 앞으로 나섰다.“후작 부인, 후작님.”낭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아가씨께서 무슨 잘못을 하셨는지 사정도 묻지 않은 채 다짜고짜 벌부터 내리시려 하십니까? 설마 위원후부의 법도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그 말에 소명지가 벌떡 일어났다.“이 천한 것이 감히 어디서 입을 놀려!”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치켜들었다.“오늘 내가 네년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마!”하지만 소명지가 위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월아는 날아드는 손목을 가볍게 낚아채더니 그대로 등 뒤로 꺾어 버렸다.“아악!”비명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월아는 발끝으로 소명지의 다리를 걷어찼다.쿵!소명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하녀 따위가 자신에게 손을 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월아를 노려보았다.“이 천한 것이 감히 나를 쳐?”분노에 눈이 뒤집힌 소명지가 다시 달려들려는 순간, 청하가 번개처럼 움직여 그녀의 양팔을 붙들었다.움직이지 못하는 소명지의 앞에 선 월아는 차갑게 웃었다.짝! 짝!두 번의 따귀 소리가 방 안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소명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아악!”그녀는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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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월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부인, 저는 부인께서 어찌하여 아가씨께 자초지종도 묻지 않으신 채 다짜고짜 벌부터 내리려 하셨는지 그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민씨는 무심한 척하며 위원후를 곁눈질했다.그러나 위원후는 안색을 굳힌 채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은 철저히 공정한 입장에 서 있다는 듯했다.소명준과 소명천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소명주만이 민씨의 곁에 붙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민씨가 낮게 말했다.“어미란 사람이 병석에 누워 있는데도 곁에서 시중을 들기는커녕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이것이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월아가 즉시 받아쳤다.“하지만 부인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기운이 넘치십니다. 제 눈에는 도무지 병환이 있는 분으로 보이지 않는데요.”소명주가 즉시 끼어들었다.“방금 의원이 다녀가 진맥까지 마쳤다. 그런데 어찌 거짓이라 확신하는 게냐?”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덧붙였다.“정 믿지 못하겠다면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해 보아도 좋다.”그러나 월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설령 부인께서 편찮으셨다 하더라도 아가씨께 알린 적이 없지 않습니까? 누구도 전하지 않았는데 아가씨께서 어찌 미리 아실 수 있었겠습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소명준과 소명천, 그리고 소명주를 차례로 바라보았다.“게다가 어머니께서 노여워하고 계시는데도 자식 된 분들이 곁에서 만류하거나 달래 드리기는커녕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있으니,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다른 분들이야말로 불효를 범하고 계신 듯합니다.”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민씨는 이불자락을 움켜쥔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겨우 장공주부에서 온 하녀 둘이 감히 후작부 사람들에게 이토록 따지고 들다니.분노가 치밀었으나 차마 터뜨릴 수조차 없었다.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명준이와 명천이가 하루빨리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가기만 해 보아라. 그때가 되면 오늘의 치욕을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한참 후에야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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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소명준과 소명천 역시 더는 입을 열고 싶지 않은 듯 침묵을 지켰다.결국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소명주였다.“아버지, 공주 마마께서는 그저 언니의 겉모습에 잠시 마음을 빼앗기신 것뿐이에요.”그녀는 애써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언니는 변변한 재주도 없고, 아는 것이라곤 장사치들의 잔꾀뿐이잖아요. 지금은 외모 때문에 눈에 들었을지 몰라도, 오래 지내다 보면 공주 마마께서도 진실을 알게 되실 거예요. 그때는 오히려 속았다 여기시고 크게 노하실지도 모르지요.”민씨도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명주의 말이 옳습니다. 미색으로 사람을 섬기다는 것은 결국 젊음이 사라지면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은 결코 명문가 여인이 의지할 정당한 길이 될 수 없지요.”그러나 위원후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소설아가 장공주의 눈에 들었다는 점.그 아이가 장공주부에 발을 들일 수만 있다면 정실부인이 되든, 첩이 되든, 심지어 몸종이 되든 상관없었다.위원후부가 장공주와 인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부인의 식견은 너무도 좁소. 설아가 공주 마마의 총애를 받는 것은 우리 후작부의 복이오. 그러니 앞으로는 설아를 함부로 다그치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오. 자칫 공주 마마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두렵소.”민씨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염주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때 소명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 언니가 이미 원씨 가문과 정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위원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 아이도 본래 그 혼사를 원치 않았지 않느냐. 만약 공주 마마의 눈에 든 것이 확실하다면, 원씨 가문과의 혼사는 어떻게든 파기할 방도를 찾아야지.”그러더니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소명주를 바라보았다.“그러고 보니 명주 너도 원태준을 꽤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구나. 정 원한다면 혼처를 바꾸어 네가 원씨 가문으로 시집가는 방안도 생각해 보거라.”소명주의 입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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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소명주는 다급히 민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거기 누구 없느냐! 어서 의원을 불러 오너라!”순식간에 춘경원은 또 한 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한바탕 소동 끝에 가까스로 민씨가 눈을 떴다. 그런데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뱉은 첫마디는 뜻밖에도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민씨는 떨리는 손으로 소명주의 소매를 움켜쥐었다.“어서 가 보거라! 내 곡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당장 확인해 보란 말이다!”그것은 무려 은자 이만 냥어치에 달하는 재산이었다.만약 정말 관군에게 징발당한다면 시세대로 값을 받는다 한들 손에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이때까지 품어 왔던 계산은 모조리 물거품이 되고 만다.소명주는 더 이상 민씨를 돌볼 겨를도 없었다.그녀는 황급히 하인들을 이끌고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한편, 소설아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창 술상을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요즘 후작부에서는 날마다 삶은 채소와 맹탕만 상에 오르고 있었다.덕분에 의란거에서 풍겨 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는 담장 너머 어린 하녀들마저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였다.소설아는 술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붉은 입술이 은은하게 휘어졌다.“부인의 속이 단단히 뒤집혔겠구나.”소명주가 날려 먹은 은자가 얼마인가.모녀가 그토록 자랑하던 애틋한 정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할 지경이었다.그때 밖에 나가 소문을 알아보고 돌아온 단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큰아가씨께서는 점쟁이 노릇을 하셔도 되겠어요. 부인께서 또 기절하셔서 의원을 불렀답니다.”소설아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냈다.“어머니께서 병환으로 누우셨는데 딸 된 도리로 문안도 드리지 않으면 되겠느냐.”월아와 청하는 슬며시 눈빛을 주고받았다.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소설아는 겉보기에는 온화하고 유순해 보였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속이 깊고 영민한 사람이었다.결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기회를 기다렸다가 가장 적절한 순간,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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